#097화
“하이 미스터 윤, 시간 되면 만날까요?”
“물론이죠. 내일 어떻습니까?
인수전에 승리한 정훈이 들뜬 목소리로 제안했다.
“내일은 제가 중부시에 가야 해서요. 약속이 있어요. 저번에 갔던 보육원에 들리기로 했거든요?”
“아, 어쩌죠, 오늘은 저녁에 만찬이 있어서요. 오늘 큰 회사를 인수했거든요.”
“만찬요? 그럼 저도 가도 되지 않아요? 축하해 드리고 싶은데요.”
“그렇게 하시죠. 저녁에 신라호텔 대연회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 나중에 봐요.”
전화를 끊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최고급으로 준비했습니다. 신라호텔 대연회장 다들 아시죠?”
정훈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귀가 떨어질 듯이 외쳤다.
“네!”
“파티입니다. 친구들도 많이 데리고 오세요.”
“물론이죠.”
정훈은 솔직히 의심했다.
‘저 사람들이 친구가 있을까?’
데리고 온다니 뭐.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축하드립니다. 대한은행 행장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미래은행 행장으로 할까요?”
“하하하, 정훈이 네가 더 신난 목소리구나. 고생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요, 운이 좋았어요. 한호그룹의 한판수와 박현철의 법조 카르텔의 알력을 잘 이용했어요. 한판수 회장이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거예요.”
“네 놈이 그들 사이를 잘 벌려 놓았어. 그건 정말 큰일 한 거야.”
할머니의 칭찬에 정훈은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에 만찬장에 오실 거죠?”
“그럼 가야지. 다혜도 불렀니?”
“물론이죠.”
“흐흠. 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할머니가 한숨을 쉬셨다.
“당연히 오죠. 오늘같이 기쁜 날 오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그리고 다혜 보면 좀 살갑게 대해 주세요 할머니.”
“그래, 녀석아. 오면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 그런데 정훈아, 좋은 곳이 있으면 안 좋은 곳이 있는 법인데…….”
“그건 무슨 말이에요?”
“천지회 놈들이 기분이 아주 안 좋을 것 같다는 말이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해.”
“네, 할머니. 너무 들뜨지 않도록 할게요. 나중에 봬요.”
정훈은 전화를 끊었고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공부한다고 바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뛰어나올 것이다.
두 손을 흔들며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짓는 그녀를 상상했다.
상상 속의 그녀는 이미 빛나고 있었다.
정훈의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다.
도서관 앞에 도착한 정훈은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떄 드디어 그녀와 연결되었다.
“다혜야!”
“정훈아 미안해. 오늘 나갈 수 없어. 오늘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아…….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내일 연락할게.”
“정훈아, 정말 축하해. 나도 소식 들었어. 할머니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 줘!”
“응, 고마워. 그리고 혹시라도 시간 되면 와. 신라호텔이야!”
“그래.”
다혜가 전화를 끊었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녀의 집에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걱정되었다.
큰일이 아니길 바랐다.
***
현악 4중주단의 연주가 은은하게 감도는 대연회장.
할머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한민국의 현금왕이자 대한은행을 인수한 여걸.
그리고 앞으로 미래 금융 그룹의 총수가 될 그녀.
정훈은 할머니를 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그녀의 얼굴에 빛이 나고 있었다.
순간 천지회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졌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오늘도 분명 집에서 소일거리나 하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자신과 할머니를 가로막고 있었던 그들.
반드시 쓸어버려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입술을 꽉 깨문 정훈은 다시 복수를 향해 힘껏 달리기로 다짐했다.
“미스터 윤!”
“하이 스티브 첸. 한국 생활은 어땠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잠깐 여유롭게 지내는 중이죠. 안 그래도 미국에서 들어오라고 난리예요. 내일 희망보육원 갔다 곧 들어 가려구요.”
“아, 미안해요. 제가 너무 바빠서 오래 기다리게 했죠?”
“아니요.”
정훈은 스티브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그는 맥주를 선호했다.
“저는 고급스러운 샴페인보다는 대중적인 맥주가 좋아요.”
정훈은 그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작게 말했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이거보다는 소주가 더 좋아요.”
“우린 대중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군요. 아, 삼겹살이랑 소주! 정말 최고더군요. 미국에서 삼겹살 바비큐 사업을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어요.”
“하하, 그래요? 만약 한다면 거기도 투자하고 싶네요.”
“하하하.”
스티브 첸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꿨다.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인수 제안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사실 그 말 듣고 조금 당황했어요. 실리콘밸리에 있는 사람들의 꿈은 매각이죠. 비싼 값에 파는 거요.”
“그럼 당황할 일이 아닌데요.”
“그렇죠. 그런데 아직 제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남아있어요.”
“하고 싶은 게 뭐죠?”
정훈이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제가 묻고 싶어요. 왜 인수를 제안하신 거죠? 미스터 윤 안목이면 제 서비스가 향후 10년, 어쩌면 그 이상 돈이 안 되는 걸 분명히 알 텐데.”
‘그걸 모를 리가?’
정말 계속 거의 10년 동안 적자를 낸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흑자를 낸다.
그리고 돈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그럴 수 있겠죠. 동영상이라는 게 엄청난 트래픽을 유발하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책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잖아요. 그거 때문이에요. 이미지가 가진 강력한 힘!”
스티브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매각 결정에 그게 제일 중요해요. 사실 돈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미 페이팔에 있으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죠.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정훈은 유투브를 보면서 좋았던 경험을 생각했다.
‘핵심적인 게 무엇일까?’
수많은 정보? 아니다 인터넷에 이미 정보는 넘쳐난다.
재미? 어쩌면.
하지만 그것으로만 한정할 수 없었다.
순간 떠오른 생각.
자신이 옛날 공부할 때 유투브의 무료 동영상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떠올랐다.
지식 편의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을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꿨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글자로 읽은 것은 쉽게 잊어도 영상으로 본건 잘 잊지 않아요. 이미지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지식을 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스티브, 상상해 봐요. 전 세계 명문대학의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요. 그걸 세계인이 보는 거죠. 어려운 지식을 그림으로 영상으로 바꿔 설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와, 상상만으로 짜릿한데요.”
스티브 첸이 눈동자가 커졌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유투브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닐 거예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지겠죠. 그래서 인수하고 싶은 거예요.”
말을 끝낸 정훈은 스티브 첸을 보았다.
입사 면접 같은 인수 면접이 끝났다.
스티브 첸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이런. 혹시 우리 서비스를 보신 건가요? 아니면 우리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건가요?”
“전혀”
“우리의 모토. 개발자들과 공유했던 핵심 가치가 당신의 입에서 그대로 줄줄 나왔네요.”
“흠, 칭찬인가요?”
“물론이죠!”
스티브 첸은 손에 든 맥주를 정훈에게 내밀었다.
정훈도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어 짠하며 부딪혔다.
그리고 그는 한 번에 맥주를 다 비웠다.
“캬! 전 이 느낌이 너무 좋아요. 목을 타고 올라오는 탄산의 시원한 느낌요.”
스티브는 정훈을 보고 웃었다.
“인수 제안 받아들이죠. 금액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요. 천만 달러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순간 정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천만 달러? 한국 돈 100억? 이 사람이 장난하나?’
“흠, 자신의 가치를 스스르가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게 사업하는 사람의 조건이죠. 아무래도 스티브 첸은 사업가보다는 엔지니어가 어울릴 것 같네요. 1000만 달러라니요.”
정훈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런가요? 상관없어요. 500만 달러도 괜찮아요. 적자는 확실하지만, 흑자를 기약할 수 없는 회사. 그걸 사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어쨌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잖아요.”
“하하하, 그럼 꿈을 위해서 달리세요. 제가 뒤에서 지원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 인수 금액은…….”
스티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꿈을 좇더라도 숫자가 궁금한 게 인간의 본성.
“인수 금액은 10억 달러로 하겠습니다.”
-퍽
손에 쥐고 있던 맥주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그의 발에 맥주가 튀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처럼 그대로 선 채 정훈을 보았다.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10억 달러? 10억 달러?”
“그리고 보육원 갈 때 제가 선물 좀 보낼게요. 얼마 전에 인수한 일송전자에서 새 노트북이 나왔거든요.”
스티브는 정훈의 호의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10억 달러에서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
정훈은 학교 도서관 앞으로 가 다혜를 만났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걸까?
피곤해 보였다.
“괜찮아? 피곤해 보여”
“이제 좋아질 거야. 너 보고 있으면 힘이 나거든.”
그녀가 품에 안겼다. 그리고 두 팔로 정훈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정말.”
“나도.”
고개를 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뒤꿈치를 세웠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정훈에게 닿았다.
짧은 순간 그녀의 향기에 취했다.
다혜를 데리고 중부시로 내려갔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중부시에 도착할 때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정훈은 그녀와 함께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은수와 철중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형!”
정훈이 살갑게 부르자 은수가 두 눈을 치켜세웠다.
“어떻게 된 거야?”
은수가 정훈에게 물었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하여튼 철중이 형이 나쁜 짓을 한 건 맞는데, 그냥 용서해 주자.”
“뭐? 말이 돼? 어떻게 용서해? 우리한테 비수 같은 말을 내뱉었는데.”
여린 은수는 그날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은수야, 내가 미안해. 형이 잘못했다.”
철중이 은수에게 다가가 은수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금세 마음이 풀린 표정이었다.
울먹이는 은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은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버렸다.
“휴, 다행이다. 너희들이 사이가 좋아져서. 그리고 이제 진짜 철중이 같아. 그날은 너무 이상했어. 정말 나도 주먹이 울더라.”
그날 많이 놀랐던 다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이제 나도 마음이 편해졌어. 지금까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나 봐. 천지회 놈들이랑 우리 박현철 검사님이 크게 도와주셨지.”
“흠흠 ”
정훈은 마른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 박현철 검사님이 도와줘? 어떻게 도와준 거야?”
슬쩍 미소 지은 다혜가 물었다.
정훈은 다혜를 보았다.
웃는 모습이 제대로 오해한 게 분명했다.
“도와줬다는 게 좋은 게 아니야. 그 검사가 형을 죽이려 했거든”
“…… 아”
짧게 한숨 쉰 다혜는 손에 있던 물 잔을 놓치며 물을 쏟았다.
움직임이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다혜는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미안. 갑자기 손에 힘이 빠져서. 운동 부족인가 봐.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하하.”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어렵게 웃음 지었다.
‘왜 이러지? 박현철 이름을 듣고 그러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인가?’
설마?‘
아니겠지.
정훈은 자신의 생각을 어이없는 망상으로 치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음식이 나왔다.
기름진 중국 음식 특유의 향기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배를 자극했다.
모두 음식에 집중하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정훈도 은수도 그리고 철중도 모두 옛날처럼 배가 터지기 전까지 꾸역꾸역 넣었다.
정훈은 다혜를 보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나?’
다음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한우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
정훈은 신화제약과 같은 건물에 있는 셀토 바이오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황석과 강상철이 보고서를 올렸다.
셀토 바이오는 의약품 CMO, 즉 위탁생산 회사다.
보고서에 따르면 여기서 번 돈으로 바이오 시밀러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바이오 시밀러는 결국 특허가 만료된 바이오 의약품을 복제, 생산하는 사업이다.
일반의약품은 성분만 알면 쉽게 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오 의약품은 원료가 핵심이다.
유사한 원료를 확보해 동일한 약효를 내는 게 핵심이다.
이 회사는 여기에 강점이 있었다.
바이오 의약품 복제를 이 회사가 세계 최초로 성공한다.
정훈의 기억으로 이 회사는 나중에 대박 난다.
돈 때문이라도 가져야 하고 미래를 헬스 케어와 바이오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싸게 먹을 수 있는데, 이걸 누가 노리고 있다.
절대로 뺏길 수 없었다.
은수와 곽현수가 셀토 바이오를 며칠 동안 감시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사람들이 왔다 갔다.
차영미가 추적한 결과 조폭인데 강남에서 활동하는 세력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강남 진출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곽현수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들어갔습니다. 은수랑 제가 처리할까요? 아니면……”
“사장을 직접 만나 봐야죠. 지금 근처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카페에 있던 정훈은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차를 둘러싼 사람들을 헤치고 차에 올라탔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차.
부가티 시롱.
반짝이는 블랙 부가티에 거울처럼 얼굴이 반사되었다.
‘흠, 잘 생겼군’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자 특유의 배기음을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엑셀을 아주 살짝 눌렀다.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주변을 감싼 사람들이 홍해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주변의 시선은 덤이었다.
사람들은 손에 들린 전화기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