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력을 다해 그의 목을 졸랐다.
‘죽여 버린다.’
그의 더러운 얼굴과 다혜의 신성한 얼굴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를 없애 나의 다혜를 지키고 싶었다.
온몸에 힘을 주며 그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힘은 점점 빠지기만 했다.
정훈은 뒷걸음쳤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귓속에서 반복됐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박현철 검사의 입에서 계속 나오는 것 같았다.
나의 다혜가 그의 딸이라니.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비웃기만 했다.
“쯧쯧 그것도 몰랐나? 병신 같다고 해야 할지,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예쁜 내 딸은 그만 잊게.”
“……”
정훈 박현철의 비웃는 얼굴을 향해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짓뭉갤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단단한 벽으로 방향을 틀었다.
-퍽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 장인 될 사람한테 예의를 차린 건가? 그렇다면 고맙네. 흐흐흐.”
박현철이 방 밖으로 사라졌다.
정훈은 사무실에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에게서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할머니, 박현철 검사가 찾아왔어요.”
할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앉거라.”
무거운 목소리였다.
“알고 계셨어요?”
“만호가 그날 이야기해 줬어. 처음 만난 그날…… 기억하지?”
수능 시험이 끝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은 그날이었다.
“정훈아, 어떻게 할 거니?”
“어떻게라니요?”
“나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그날 눈앞이 캄캄했어. 어떻게, 하필이면 엮여도 원수 같은 집안이라……. 하루하루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너와 다혜의 문제가 아니야. 원수는 너와 천지회지, 그 아이는 그냥 다혜야. 박다혜의 딸 이전에 그냥 다혜야.
그래서 이제 살갑게 대하려고 했는데…….”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둘 사이에 침묵만이 흘렀다.
“어떻게 할 거니? 박현철의 딸 박다혜가 아니라 네 여자친구 다혜를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박현철의 딸 박다혜와 나의 다혜가 다른가?’
“아……”
정훈은 짧게 탄식을 내질렀다.
눈앞이 캄캄해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도 사람들의 편견에 빠져 있었다.
할머니가 그를 오해와 편견의 바다에서 꺼냈다.
이렇게 흥분하고 비통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오직 나의 다혜일 뿐이다.
“할머니는 다혜가 마음에 드나요?”
“그게 중요할까? 너희 둘이 중요하지. 다혜는 알고 있었을 거야. 우리와 그들이 서로 원수 같은 처지라는걸. 그런데 그 아이는 당당하고 떳떳했어. 어쩌면 다혜가 나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것 같아. 정훈아, 가 보거라 기다릴 거야.”
“네”
정훈은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가 언제가 자신을 기다리던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었다.
“나야, 박현철 검사님 만났어.”
“기다려, 나갈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달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
평소보다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섰다.
‘불안하겠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정훈은 다혜를 당겨 품에 안았다.
자신의 품 안으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혜도 온 힘을 다해 그를 안았다.
그의 박다혜가 아니라 나의 다혜였다.
정훈은 결심했다.
‘너와 나를 막는 모든 것은 고르기우스의 매듭처럼 끊어 버리……겠다.
“괜찮아?”
다혜가 물었다.
정훈은 그녀의 깊고 잔잔한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를 다시 한번 더 힘껏 안았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마음을 전했다.
“자신 있지?”
다혜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
순백의 흰색은 검은 눈동자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결심한 듯 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속삭였다.
“응”
정훈은 그녀의 볼을 잡고 키스했다.
시간이 다시 흐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근본 없는 장사치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인 줄 몰랐어.”
조재욱 부장판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지 놈이 우리랑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디 감히 하늘 같은 사대부의 뒤통수를 쳐.”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버릇은 고쳐 놓아야지.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제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 날짜 잡아. 그날 말 잘 듣는 놈으로 영장판사 배정할 테니.”
“그래.”
박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 살벌한 기운이 가득했다.
술잔을 비운 조재욱 판사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참, 자네 최근에 수금재 간 적 있나?”
“중부시 수금재?”
조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강철중이 담그러 간 게 마지막이었지.”
“그래? 문 닫았던데.”
“갑자기?”
“이상한데…….”
“그러니까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녀석들이 아닌데, 소속이 어딜까?”
“기껏해야 지방 조폭들이겠지. 우리 명함을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나.”
“그래 그럴 거야. 하, 그…… 그게 아쉬워!”
“그만 자제해. 윤정훈이 놈과 제대로 붙으려면 머리가 맑아야지.”
“그래. 이제 좀 절제 해야지. 사대부의 절제가 뭔지 제대로 보여 주지.”
“그래. 이제 좀 옛날의 조재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지막으로…… 어떤가?”
말을 던진 조재욱은 김현철의 눈치를 살폈다.
“쯧쯧, 하여튼 자넨.”
박현철은 혀를 찬 다음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들여보네”
“역시 자네뿐이네.”
반라의 짙은 향수를 풍기는 여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전투를 앞둔 군인들의 마지막 뜨거운 밤이었다.
***
“연기군 일대 개발 계획 보시겠습니다. 이번에 매입한 토지와 인근에 10만 평을 더 강제매수 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분양할 계획입니다. 토지 매입은 1년도 안 걸릴 겁니다. 분양만 70퍼센트 이상 진행되면 수익성은 확실합니다.”
한호건설 사장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30만 평이면 빡빡하게 지으면 최대 2만 호수까지 가능하다.
한 채당 1억만 남아도 2조.
그룹내에서 더 커질 자신의 위상에 웃음이 절로 났다.
“농촌에 2만 호가 분양이 되겠어, 흐흐흐.”
한판수가 웃음 지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수도, 거기다 가장 요지 아닙니까? 아파트 말고 상가 부지만 해도 수백 배의 차액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이렇게 좋은 땅을 구하시다니……”
한판수는 부하의 아부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자, 그럼 이만 회의 마치고.”
갑자기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래?”
그 말과 동시에 정장을 입은 남자 몇 명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목에는 검찰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한판수 회장님, 뇌물 제공, 횡령, 탈세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영장을 펼쳐 보인 검사가 혐의를 말한 후에 미란다 고지 원칙을 고지했다. 그리고 한판수의 손에 직접 수갑을 채우려 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 짝
한판수의 큰 손이 영장을 든 검사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
“이 새끼가 어디서. 내가 인마 대검 박현철이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하는 사이야.”
-퍽
뺨을 맞은 검사가 그대로 한판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박현철이? 차장 검사님이 니 친구야? 그리고 이 새끼가 돌았나, 어디 검사 얼굴에 손을 대.”
바닥에 쓰러진 한판수를 보며 말했다.
“홍 수사관, 사람들 다 내보고 이 새끼 수갑 채워서 자기 의자에 앉혀놔. 근본도 없는 장사치 새끼 내가 오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주지.”
모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자신의 의자에 앉혀졌다.
모두가 우러러 하는 회의실의 가장 상석.
박현철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수백만 원이 넘는 천연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무릎 꿇고 있었다.
한판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시계를 풀던 검사가 말했다.
“이봐, 내가 여기 온 게 뭘 말하는지 몰라? 쯧쯧,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게.”
손을 번쩍 들고 한판수의 뺨을 내리치려 할 때 문이 열렸다. 박현철이 들어왔다.
“그만하지!”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 그는 예의를 갖췄다.
“나오셨습니까? 제가 해도 되는데…….”
“그래도 한때 밥도 같이 먹던 사인데, 내가 해야 되지 않겠나, 나가 보게.”
“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한판수는 희망을 가졌다.
자신의 친우 박현철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
“이거 좀 풀어 줘. 도대체 검찰에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쯧, 시끄럽구만.”
시계를 풀던 박현철은 품 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에 쑤셔 박았다.
작은 한판수의 눈이 찢어질 만큼 커졌다.
아닐 거라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그의 몸에 일어났다.
차가운 명품시계를 쥔 박현철의 손은 그의 얼굴을 수 차례 강타했다.
힘없는 벌레 하나를 짓밟듯 무심히 한판수의 온몸을 구타했다.
얼마 후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상놈의 새끼가 어디서 사대부의 일에 훼방을 놓아!”
“죄, 송, 합, 니, 다.”
흥건한 피바다 속에서 꿈틀대던 한판수가 힘겹게 꺼낸 마지막 말이었다.
한호그룹에 대한 검찰의 동시 압수 수색은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부패한 그룹 총수를 단죄한 검찰의 수사력에 모두 찬사를 보냈다.
수사를 주도한 박현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지만 조금 더 빨리 검찰총장에 다가갔다.
구속 수사를 받던 한판수는 휠체어를 타고 병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구속은 1면을 장식했지만 병 보석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병실에서 몸을 회복한 그는 다시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섰다.
병 보석의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을 상납해야 했다.
한판수는 광화문 옆에 있는 거대한 건물 앞에서 섰다.
스타그룹.
대한민국의 1위 이자 세계 3위안에 드는 아시아 제일의 그룹.
대부분의 산업에서 국내 및 글로벌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그룹이다.
한국을 이끌고 있는 기업이나 다름없는 막강한 자본이었다.
한판수는 침을 삼킨 다음 천천히 그룹의 본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구에서 신원을 확인한 다음, 안내를 따라 회장실로 올라갔다.
***
스타그룹의 총수 이석.
3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회장에 올랐다.
전임 회장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경영권을 승계했다.
우려와 달리 준비된 인재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가 그룹을 이끌자마자 매년 10퍼센트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한 나라의 GDP를 넘는 기업이 10퍼센트의 성장을 이룬다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두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젊은 감각의 세련된 가구로 채워진 회장실은 다른 재벌 회장들의 분위기와 크게 달랐다.
단순하고 잘 정돈된 것.
질서 있게 배치된 것이 최고라는 그의 철학이 사무실에도 배어 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 톤으로 꾸며진 사무실로 한판수가 들어왔다.
한쪽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이석이 그를 쏘아보았다.
이미 앉아 있던 박현철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앉으세요.”
“네, 전…… .”
이석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쯧쯧, 눈치는 없고 욕심은 많으니 이리 미련한 짓을 하지.”
박현철이 그를 보며 혀를 차자 이석이 박현철을 쏘아보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박현철이 일어서서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사이 한판수는 이석이 앉은 자리의 반대편으로 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회장님. 통촉하여 주십시오.”
이석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웃음을 지은 다음 손을 움직여 그를 일어서게 했다.
“허허허. 일어서세요. 이미 용서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 보세요.”
자비로운 목소리였다.
“네, 제가 가진 한호건설을 스타그룹에 넘기겠습니다.”
“그게 끝입니까?”
“아닙니다. 유통도 넘기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여식까지 모든 걸 넘기겠습니다.”
“풉, 얼굴도 박색인 여식이 필요하겠습니까? 건설, 유통회사들 박현철 영감 계열로 넘기세요. 그리고 방산도 넘겨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한판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한호그룹의 방산 계열사는 그룹매출의 30프로를 차지한다.
결국 그룹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많이 아쉬울 겁니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좋게 넘어가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이석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박현철도 한판수도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다시 한번 배신자 짓을 한다면 삼족을 멸할 것이오. 한판수.”
그 모습을 본 박현철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석이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박 영감. 아무리 아래 것이라도 직접 손대는 건 삼가세요. 손을 더럽혀서야, 쯧 사대부의 체통이 있지.”
당황한 박현철이 벌떡 일어나 머리 조아렸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앞으로 절제하겠습니다.”
“박 영감, 계획은 시작했습니까? 윤정훈이 그놈을 어떻게 가지고 놀 생각입니까?”
“이제 곧 전국의 모든 검찰청이 움직일 겁니다. 그걸 신호로 조만간 숨통을 끊을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놈 숨통이 끊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 ‘친국’을 준비하세요.”
“‘친국’을 말씀입니까?”
대답하기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이석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밖을 보았다.
“이제 곧 피비린내가 한번 나겠네요. 오랜만에 볼 피 맛을 생각하니 심장이 뜨거워집니다.”
“실수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그럼 나가 보세요”
모두 밖으로 나간 뒤 창밖을 보던 이석은 생각했다.
‘윤정훈’
20대 초반에 거대 재벌을 만든 남자.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재능이 아깝다.
자신의 제국을 위해서 그를 회유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한 그의 얼굴.
왼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