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김 프로, 뭐해, 안 나가?”
“예?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김수호는 선배 검사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넨 아닌가?”
“중앙지검 검사 절반 이상이 지금 압수 수색 나갔잖아.”
“네? 와,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제가 실적이 좋았어도 어떻게 저를 쏙 뺍니까?”
“야, 나니까 너랑 말이라도 섞지. 선배 둘 목을 친 너를 누가 좋아하냐?”
“그건 그렇지만 제가 없는 죄를 만든 것도 아닌데……. 그런데 오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신화증권, 3팀은 신화 대부, 신화저축은행…….”
김수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신화그룹 전부를 치는 겁니까?”
“대검에서 직접 내려왔어. 오늘 영장판사 완전 자판기야. 넣으면 무조건 OK야. 오늘은 윤정훈 회장 빤스도 압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들은 이야긴데, 공정거래위원회랑 국세청이 우리 다음이야.”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선배님.”
김수호는 다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강상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검사, 오늘 한 잔 빨까?”
늘 그렇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장난을 치며 전화를 받았다.
“잘 들어. 상철아, 지금 압수 수색 하러 갈 거야.”
다급한 김수호의 목소리에 강상철도 긴장했다.
“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금 당장 회장님께 연락해. 대대적인 압수 수색이 곧 시작될 거야. 이거 100퍼센트 기획 수사야.”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 봐.”
“죄를 만들어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자료를 안 뺏겨야 해.”
“아, 알았어.”
김수호는 전화를 끊고 서성였다.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있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난번 일송에서 압수 수색 한 자료들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일송과 한호그룹의 거래 내역이 쌓여 있었다.
한호그룹으로 들어간 돈을 추적한다면 실마리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다간 당한다.
약점을 쥐려는 상대를 제압하려면 그의 약점에 쥐어야 한다.
김수호는 중앙지검 지하에 있는 문서 보관소로 갔다.
쉽지 않지만 찾아야 한다.
그를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었다.
김수호는 무거운 철문을 열고 종이 냄새 가득한 문서 보관소 안으로 들어갔다.
***
전화를 끊은 강상철을 창밖을 보았다.
평소 보지 못했던 차들이 빌딩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옆 사무실로 갔다.
“차영미 씨, 지금 CCTV 확인 되죠?”
“당연하죠. 무슨 일이에요?”
유머러스했던 평소와 달래 잔뜩 긴장한 강상철의 모습에 차영미를 비롯한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외부 CCTV 좀 확인하죠.”
강상철의 말에 차영미의 모니터에 바깥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낯선 차들이 빌딩을 에워싸고 있었다.
“뭐야? 이것들은……. 기분 나쁘게 모여들고 있지? 일단 맛 좀 보여 줘야겠어요.”
차영미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제 휴대 전화는 못 쓸 겁니다. 저 사람들 우리 회사 털러 온 거예요?”
“네, 그런데 저게 시작이래요. 검찰 다음은 국세청,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도 온대요.”
“정말요? 마지막에 특수부대에서 쳐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 모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 진짜 어떻게 아무 혐의도 없는데 그렇게 할 수 있죠?”
“마음만 먹으면 그룹 하나쯤은 하루 만에 공중분해 시킬 수 있습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곽현수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랑 연락이 안 되네요. 급한데……”
“흠흠, 어쩔 수 없죠. 진혁아. 우리 도련님 위치 따!”
“넵.”
잠시 후에 천진혁이 말했다.
“지금 경복궁에 계신대요. 전화하라고 할까요?”
“물론!”
곽현수는 차영미와 천진혁을 보았다.
잔뜩 긴장한 자신과 달리 신난 표정이었다.
키보드 질 몇 번에 막혔던 문제가 척척 해결됐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도련님 위치를 알지? 그리고 무슨 수로 전화를 하게 한다는 거지?’
천진혁이 컴퓨터 마이크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복궁 관리 사무소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곽현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
정훈은 회사를 나와 경복궁으로 향해 걸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가끔 가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걸으면 어지러운 머릿속에 정리되곤 했다.
오래된 고궁이 주는 차분하고 안락한 느낌이 좋았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절제된 장소.
그래서 자주 경복궁을 찾았다.
조선 시대의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근정전을 지나 업무를 보는 편전 주변을 서성였다.
이제 곧 천지회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다.
천지회에서 한판수를 쳤다면 그다음은 자신이 분명했다.
며칠 전 한판수가 석방되었으니 이제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검찰은 기본이다.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모든 권력 기관이 신화 그룹을 무너트리기 위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편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 집무를 보는 곳.
그의 고뇌가 느껴졌다.
앞으로 걸어갔다.
눈높이에 임금이 앉는 어좌가 보였다.
올라가 자리에 앉아 보았다.
눈을 감자 무수한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나라의 운명과 백성들의 목숨이 단 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의 고민과 번뇌가 광기와 탐욕이 전해졌다.
계열사 몇 개를 가진 자신과 나라를 움직이는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정훈이 상상해 빠져 있을 때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내 방송에서 자신을 찾고 있었다.
“툭, 툭, 경복궁 관리 사무소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화 그룹의 윤정훈 씨는 지금 즉시 회사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윤정훈 씨? 저것들이 아주……. 긴급한 일인 것 같은데…….’
천진혁의 목소리임을 바로 눈치챈 그는 전화기를 걸었다.
***
“그러니까 건물 주변으로 검찰과 경찰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거죠?”
“네. 전국에 있는 모든 계열사 사무실 주변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천진혁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떨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요. 예상하고 있던 문제니까. 차영미 씨는 문자로 전 사업장 이번 주 휴가 지시하세요. 필수 직군을 제외하고 전부 문 닫아요. 그룹 전 계열사 직원들에게 보낼 수 있죠?”
“네. 지금 바로 보낼게요.”
“천진혁 씨, 모든 서버 플랜 B 모드로 변경해요.”
“네? 플랜 B면 하드가 다 타 버릴 텐데요.”
“그렇죠. 이번 기회에 새 컴퓨터 좀 얻어 보죠. 부순 사람들이 새로 사 주겠죠. 데이터 백업되어 있죠?”
“네, 모두 백업되어 있습니다.”
“그럼 내가 말한 대로 변경하세요. 이병석 씨는 지금 게임 회사에 있나요?”
“아니요, 여기 있습니다.”
이병석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에게 깃들어있던 불안은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지금 그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이었다.
이병석도 빨리 표적을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차영미가 준비한 파일 있어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론사, 방송국 기자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네.”
“우리에게 모욕을 주려는 거죠. 그들에게 제가 준비한 경고장 날리세요.”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거기 비상식량 얼마나 있어요?”
“한 달 치 식량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폐쇄한 상태에서도 한 달 정도는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곽현수가 대답했다.
“그럼 내일까지 건물 폐쇄하세요. 쥐새끼 하나 들어올 수 없도록. 그사이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 겁니다.”
옥상으로 사무실을 옮길 때 층마다 30센티 두께의 강철 문을 설치했다.
20층까지 올라오려면 최소 열흘이다.
“현수 아저씨. 모두를 지켜 주세요.”
“…….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모르죠. 그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잖아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도 조심하세요.”
“네.”
그들이 준비한 기습 공격은 실패할 것이다.
정훈의 그들의 수를 모두 읽고 있었다.
“그럼 내일까지 모두 무사하세요.”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일, 아니 어쩌면 더 빠르게 결판날 것이다.
어좌에 앉아 있던 정훈은 박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작되었습니다. 준비됐습니까?”
“네, 대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종로빌딩으로 사람들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들이 습격한다면 빌딩 안으로 몰아서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들은 나를 노릴 겁니다.”
“설마 일부러 표적이 되시는 겁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회장님!”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의 감춰진 힘을 한 번에 쓸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날쌘 아이들로 주변에서 지키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어좌에 앉아 있던 정훈은 전화를 끊고 앞을 보았다.
텅 빈 공간만이 눈에 보였다.
왕의 집무실.
나라의 제왕
국가가 왕이고 그의 의지가 나라의 미래였다.
백성을 살리고 부국강병을 힘썼던 공간.
자신이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편전을 나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윤정훈입니다.”
“날세, 우리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이제 곧 압수수색이 시작될 거야. 협상할 시간이야.”
“협상? 협박과 굴복이겠죠. 원하는 게 뭡니까?”
“전화로 하긴 그렇고 집으로 오게. 내 사위 될 사람한테 술 한잔 사야 되지 않겠나.”
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거기가 너희들이 계획한 곳인가?’
아쉬웠다.
다혜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 피로 물드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누구의 피로 가득 찰지 두고 봐야 할 문제다.
박창수에게 다시 전화를 건 정훈은 짧게 말했다.
“저는 출발합니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
박현철은 기분이 좋았다.
전국의 검찰을 움직여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실시했다.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줄 기회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그가 범죄자라면…….
윤정훈을 향했던 모든 관심은 그를 제압한 자신을 향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야 제왕의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안돼. 정훈이가 올 거야. 너희들 문제, 결정을 내야지.”
“갑자기 왜 그래?”
박현철이 환하게 웃었다.
“우리 다혜, 너무 걱정하지 마.”
“아, 알았어.”
다혜는 아빠의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갑자기 생긴 저 웃음과 함께 우리 집은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당당했던 아빠는 잔인해졌고
엄마는 더욱 조용해졌다.
항상 저 웃음이 시작이었다.
벨이 울렸다.
“나가 봐, 가서 데려와야지. 그래도 우리 딸이 데리고 오는 게 좋지 않겠니?”
다혜는 아빠의 서늘한 말에 담긴 의미를 직감했다.
정훈이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밖으로 나간 다혜는 정훈에게 안겼다.
“안돼, 정훈아. 위험해 어서 여기서 나가야 돼!”
***
문이 열리며 그녀가 안겼다.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괜찮아. 오늘, 모든 게 정리될 거야. 날 믿어.”
그녀를 안심시킨 정훈은 다혜의 손을 꼭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다혜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앉게. 다혜는 그만 방으로 들어가!”
정훈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서 기다려.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그, 그래.”
그녀도 눈치챘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빈손으로 왔군. 선물이라도 하나 사 와야지, 이거 서운한데 하하하”
“우리가 그런 장난을 할 사이는 아닌 것 같군요.”
“그런가?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서로 쌓인 원한은 풀어야지. 안 그런가?”
“원한이라뇨? 당신이 내게 원한이 있습니까? 원한은 제게 있죠.”
정훈은 품 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뭐야? 그따위 걸로 협박하려고 했나?”
하지만 녹음기를 재생하자 그의 호기롭던 인상은 일그러졌다.
강도현 반장의 목소리와 윤정훈을 살해하라는 박현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시작입니다. 압수 수색이 성공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지. 지금 전국에 있는 신화그룹 사무실을 털고 있어. 몇 개만 엮어서 시나리오 짜면 최소 5년이야. 그리고 감옥이란 곳이 우리가 핸들링할 수 있는 곳이지. 크하하!”
확신에 찬 박현철이 크게 웃었다.
“확인 한번 해 보시죠.”
당당한 정훈의 표정에서 불안을 느낀 박현철이 전화를 걸었다.
“얼마나 진행 중이야?”
“뭐? 컴퓨터가 폭발한다고? 그래서…… 하나도 못 해? 야 이 병신 새끼들아!”
“기자들도 이미 다 철수했을 겁니다.”
전화를 집어 던진 박현철은 정훈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당신들이 하는 짓을 좀 따라 했죠. 언론사 고위직 놈들…… 구린 놈들이 많아서 증거 몇 개만 보내니 바로 꼬리를 내리던데요. 그리고 양손에 1억씩 쥐여 주니 충성을 맹세할 기세던데요. 천지회가 요새 자금 사정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더러운 자식!”
“당신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닙니다. 이제 압수 수색 물리세요. 그러면 이 녹음 파일은 공개하지 않을게요.”
“내가 결정할 게 아니야. 그분이 오실 것이다. 기다려. 그분의 처분이 너의 목숨을 결정할 거야.”
“그분?”
정훈은 궁금한 척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지회의 주인이 너를 친국 할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그분이 친히 나오는 건 몰랐겠지.”
현관문이 열리며 개량 한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지체없이 품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차가운 칼날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정훈은 서늘한 공기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친국? 친히 조사한다는 건가? 이제 드디어 얼굴 좀 볼 수 있겠네. 당신들의 주인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는구나.”
“뭐? 설마, 그걸 알고 여기에 온 거란 말이냐?”
“그것도 모르고 여기 왔을까? 그리고 내가 아무 준비 없이 여기 왔을까?”
당황한 박현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로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던 정훈.
그의 눈에 천지회의 주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으로 가르마를 넘긴 단정한 얼굴.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그가 천지회의 주인이었어.’
정훈은 일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도 정훈을 쏘아보았다.
윤정훈과 이석.
최초로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