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회의를 마친 AR카드 이희도 사장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업계 1위로 올라서자마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엄청난 적자가 예견되었다.
연체율이 이렇게 치솟을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창훈 회장은 굳은 얼굴을 한 이희도를 격려했다.
질책보다는 격려, 칭찬을 장려하는 AR 그룹의 문화였다.
“이봐, 이 사장.”
“네, 회장님”
이희도 사장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 대답했다.
“어깨 펴! 너무 걱정마.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잖아.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돼”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다들 그만 나가 봐.”
이희도 사장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구창훈의 곁을 지키던 구현지는 사라진 문을 향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구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게 남들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
정권과 야합해 비자금을 상납하고 정치인을 매수하는 길을 걷지 않았다.
AR 그룹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정도를 걸었다.
국민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그만큼 힘든 시기를 건뎌야 했다.
구창훈 회장의 눈에 선대 회장님들의 발자취가 눈에 그려졌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 같니?”
“최악의 경우 AR카드의 연체율이 25퍼센트까지 상승하면 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회장님.”
곁을 지키던 구현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창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한 계산이면 틀리지 않겠지. 어쩌다 연체율이 이렇게 상승했다더냐?”
“가입자 모집에만 집중한 나머지 발급해선 안 될 카드를 남발했습니다. 지금 연체자들 대부분이 신용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대학생, 주부, 실업자들입니다.”
“이희도가 모른 척 눈을 감은 것이고?”
“네”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게 아니라 의도적이면 큰일이구요.”
“의도적이다……. 그놈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거냐?”
“지금 조사 중이에요. 그런데 조사한다고 나올 것 같진 않아요. 할아버지.”
구창훈이 소파에 털섞 주저 앉았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현지야.”
곁을 지킨 손녀를 보았다.
미래전략실장 구현지.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
남자였다면 그룹을 이끌 재목이었다.
뭐, 여자라도 가능한 시대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너 선 자리는 왜 계속 미루는 거야?”
“할아버지, 저 이제 24살이에요. 결혼은 50은 넘어야 하죠.”
“뭐? 그때까지 뭐 하려고?”
“할아버지 곁에서 회사 일 해야죠.”
“그래? 열심히 해 보거라.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 말을 들은 구현지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칫, 누가 주인이 되든 상관없어요. 전 다만 우리 AR그룹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걸 보고 싶어요.”
“그 말은 네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에요. 정말 전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너 아니곤 할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구창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저녁 식사하러 가요. 오랜만에 막걸리 한잔하실래요?”
“그래. 그럼 을지로 그곳으로 가볼까. 안 간 지도 꽤 됐는데.”
“네, 그럼 그리로 준비할게요.”
***
이희도 AR카드 사장은 시끄러운 음악과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이 가득한 복도를 지났다.
가장 끝에 있는 룸의 문을 열었다.
“선배님!”
조재욱 판사가 일어서 자신을 반겼다.
“내가 좀 늦었나?”
“아닙니다. 제가 미리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선배님 뵙는데 미리 나와야죠.”
이희도는 예의를 갖춘 조재욱을 흐뭇한 미소로 보았다.
“저번 대한은행은 어떻게 된 거야?”
“한판수가 일을 그르쳤습니다.”
“그래? 한 회장이 욕심을 부렸나 보군. 어떻게 제대로 손봐 줬어?”
“네. 전하께서 조정해 주셨습니다. 건설, 유통 방산 계열사를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그룹 절반이 날아갔네. 쯧 멍청한 놈.”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거죠.”
이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업 이야기 좀 할까?”
“네.”
“다행히 AR 그룹에서 지급보증하기로 했어. 잘하면 큰 거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희도의 얼굴에 웃음으 그려졌다.
“역시 AR그룹입니다. 멍청한 짓은 제대로 하네요.”
“그렇지. 다음 달에 연체율이 20퍼센트가 넘을 거야. 적어도 1조 이상 들어가야 급한 불을 끌 수 있어. 회사 자금 사정도 넉넉하지 않은데. 거기다가 더 쏟아부으면 분명 크게 휘청한다.”
조재욱이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잘하면 카드사 하나만 아니라 계열사 몇 개 먹을 수 있겠네요.”
“물론이지.”
이희도의 눈에 욕심이 가득했다
그는 조재욱의 입을 보며 자신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했다.
“만약 다른 회사까지 손에 들어오면 하나는 선배님이 가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역시 못난 선배 챙겨 주는 건 너밖이야”
“아닙니다. 선배님. 그럼 드시고 계십시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조재욱은 방을 나와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하, 저것도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니.”
방으로 들어온 조재욱이 비아냥 대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눈이 풀린 박현철이 있었다.
“야, 정신 차려!”
“어, 왔어?”
박현철의 눈에는 초점도, 항상 가득 차 있는 탐욕도 보이지 않았다.
“박 프로, 정신 차려. 은퇴할 거야? 총장, 장관하고 더 위로 올라가야지”
“가야지, 더 올라가야지.”
박현철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왜 그래? 다혜 때문이야? 윤정훈 때문이야?”
“괜찮아, 그냥 오늘만 취하고 싶어. 내일이면 괜찮을 거야.”
박현철은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래, 마셔라. 마셔서 잊어라.”
박현철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음을 직감했다.
박현철은 다혜의 말이 계속 걸렸다.
‘그날 이후로.’
자신도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날. 존재가 완벽하게 부정당한 그때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천지회의 수장임을 알게 되었다.
믿고 있던 정의가 산산히 부서졌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은 천지회의 수장으로 바뀌었다.
그날 자신은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 천지회를 위해 살았다.
후회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라 믿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은 가족과 다혜를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다혜의 마지막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날, 천지회를 선택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절대로 아니다.
윤정훈,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
모든 게 윤정훈 그 자식 때문이다.
그놈만 없었다면 다혜도 아무것도 모른 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야, 박현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죽여 버려야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윤정훈 그 자식을 죽여야 해. 그래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박현철의 말을 들은 조재욱이 말했다.
“윤정훈을 죽이든 살리든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이희도한테 뭐라도 던져 줘야 조용해져. 뭘 던져 줄까?”
“아무거나 줘.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 그만 일어나야겠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박현철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음에 봐.”
조재욱은 문을 닫고 사라진 박현철의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 보았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 친구이자 경쟁자인 그가 약해졌다.
조재욱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가득 담겼고 하이에나 같은 탐욕이 자신의 가슴을 채웠다.
***
정훈은 AR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카드사의 연체율이 미세하고 상승하고 있었다.
그런데 AR카드는 다른 카드사보다 더욱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소비 확대를 위해 벌인 일이 이번 정부에서 폭탄이 된다.
IMF 경제위기와 닷컴 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 침체를 소비로 해결하기 위한 극약처방.
카드발급 기준을 완화했다.
그 결과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신용 카드가 발급되었다.
외상이면 사돈집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한 달 뒤에 대금을 지급하는 신용 카드.
계획에 없던 소비가 급증하며 카드값 돌려 막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카드 연체율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회장님, 그런데 어떻게 예측하셨습니까?”
황석은 정훈을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누구도 카드사의 부실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용 카드 사용을 장려하면서 카드사의 실적이 급격히 상승하는 중이었다.
주가도 좋은 흐름이었다.
폭탄 터질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그냥요.”
그 말을 들은 황석의 입에서는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훈과 자신의 급이 다른 차이를 느꼈다.
무심해 보이는 단어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분석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번에 알게 되는 천재였다.
“지금 연체율이 14퍼센트인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 이상으로 높아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AR그룹이 지급보증을 한다면 더 높아질 걸 겁니다. 계속 AR카드 연체율이랑 AR 그룹 현금흐름 잘 체크해 주세요.”
“네, 회장님.”
황석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지회가 개입되어 있는 이상 정훈의 생각대로 된다.
역사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
‘좋은 기회가 생겼다. AR 그룹은 카드사의 부실을 시작으로 금융사를 전부 매각한다. 만약 할머니의 미래금융그룹이 인수한다면…….’
순식간에 스타그룹의 금융사에 필적할 만한 규모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나쁘지 않는 매력적인 회사’
찝찝한 건 AR 그룹이 대외적으로 괜찮은 평판을 가진 회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AR그룹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카드사 하나로 정리 하는 게 AR 그룹에도 최선이다.
생각을 정리한 정훈은 퇴근을 준비했다.
자신이 일찍 퇴근해야 다른 사람들도 퇴근할 수 있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방을 나섰을 때 차영미가 정훈을 보며 크게 외쳤다.
“회장님! 우리 정말 주 5일제 하는 거예요?”
차영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이에요?”
“여기요, 인터넷에 지금 난리에요. 신화그룹이 최초로 주 5일제 실시한다고 그러는데요.”
“갑자기 누가 그래요?”
“지난주 토요일 휴무했잖아요. 그걸 언론에서 확대 해석 한 것 같아요.”
‘어이가 없네’
지난주 검찰의 대대적인 압수 수색 때문에 그룹의 전 직원을 금요일에 조퇴시키고 토요일 휴무를 내렸다.
토요일, 일요일을 쉬었다는 사실 때문에 기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누군가 일부러 의도했는지도 몰랐다.
일 적게 하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널려 있다.
천지회에서 의도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중일 수도 있다.
주 5일제는 2004년 7월 1일부터 시행되는데…….
‘확 다음 주부터 해 버릴까?’
정훈은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보았다.
표정에는 기대가 가득하다.
토요일 오전에 나와서 출근한다고 얼마나 일할까?
출퇴근 길에 버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충분한 휴식이 생산성을 높인다.
정훈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 거, 미리 해 보자. 이왕 하는 거 대한민국 최초로’
“네. 이번 주부터 우리 신화 엠파이어 그룹은 주 5일제를 실시합니다.”
“꺄악.”
차영미가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다.
천진혁도 웃었다.
제법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룹 전체에 알리세요. 이번 주부터 주 5일제 시행!”
그 소식과 동시에 신화그룹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직장인들의 시기 어린 질투와 생산성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신화 그룹 망할 듯, 아니 망해라.’
‘주말에 이틀 놀다 오면 회사 없을 듯’
‘이번 주부터? 하 배 아픈데…….’
‘신화 그룹, 이건 반칙이지.’
하지만 곧 신화 그룹 윤정훈에 대한 칭찬과 찬양으로 걱정이 뒤덮였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실적으로 보여 드리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주 5일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는 2003년의 가을이었다.
***
“웬일인가? 연락도 없이”
한판수는 자신을 찾아온 박현철이 불편했다.
지난번의 모욕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자네 만나는데 연락하고 와야 하나?”
박현철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살기가 가득했다.
“크흠, 그건 아니지만…….”
한판수는 얼버무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상석을 차지한 박현철 때문에 언짢아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박현철과 자신은 다른 신분이었다.
같은 신분이란 착각은 더 이상하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싶었다.
“부탁할 게 있네.”
“말하게.”
사무적인 목소리로 한판수가 대답했다.
“아직도 천지회의 수장이 되고 싶나?”
“글세, 천한 내가 수장이 된다고 너희 놈들이 존중이나 해 줄까?”
“그게 중요한가? 자네 의지가 중요하지.”
“천지회의 수장이라, 여전히 탐이 나는 매력적인 자리야. 그 자리에 오르면 회사를 몇 배 키울 수 있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박현철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한판수를 보았다.
“아니, 시들해졌어. 그 자리에 오르면 너희 위에 있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내가 너희들이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천한 장사치라고 헐뜯는 너희들의 그 고고한 정신은 정말 대단해. 내 돈 덕분에 온갖 향락과 유흥, 그리고 사치란 사치는 다 부리는 주제에.”
“……. 그건…… 내가 사과하지.”
“사과는 무슨, 사대부께서 천한 상놈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나?”
“이제 그만하지. 앞날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나.”
“앞날은 무슨, 나는 그날 확실히 깨달았어. 불가능하다는 걸 완전히 깨달았지. 그걸 알고 나니 재미가 없어. 굳이 천지회를 이끌 이유가 없는 거지.”
“불가능하다는 게 뭔가?”
“나는 상것이고 네 놈들은 사대부라는 것. 피를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해!”
박현철은 아쉬웠다.
그를 움직여야 윤정훈을 죽일 수 있다.
그는 확실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면 안 하겠다는 건가?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지. 조재욱을 밀 수밖에.”
“조재욱 판사? 정의로워야 할 판사님이 계집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조재욱 판사님. 천지회의 수장으로 괜찮겠군.”
“자네 의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계획대로 방산 계열사를 넘겨주게.”
한판수의 눈빛이 짧은 순간 크게 흔들렸다.
박현철은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만한 것을 찾았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