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여기요, 아무도 없어요?”
완벽한 어둠 속에 울려 퍼진 다급한 목소리.
이희도는 소리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지옥인가?’
세면기에서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지금도 의식은 몽롱한 상태였다.
눈에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해 주는 건 묶여 있는 자신의 몸뚱어리였다.
‘누가 나에게 이런 짓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AR 그룹 구창훈 회장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만 그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있던 자다.
직장생활 동안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적대세력이라면?
“아.”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조재욱, 박현철 이 새끼들이……’
천지회의 법조 패밀리가 자신을 내친 게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성골이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직을 위해 지금까지 충성했다.
20년을 넘게 천지회를 위해 AR그룹 기밀을 빼돌렸는데,
이제 와서…… 그깟 계열사 하나 때문에.
“하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깟 계열사? 아니다.’
그놈들은 천 원짜리 한 장에도 탐욕을 거두지 않는 자들.
방심했었다.
좀 더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희도 사장님.”
이희도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간청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한 줄기 희망을 깨달은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누구 십니까? 살려 주세요.”
잠깐의 침묵 후에 목소리는 질문했다.
“여기 왜 있는 거라 생각합니까?”
“살려 주세요. 그깟 계열사 하나 때문에 사람을 납치해 죽이려 합니까? 제가 깨끗하게 포기하겠습니다. 조재욱이한테 제발 전해주세요. 목숨만 살려 준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는 공포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살고 싶습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
“그럼 우리 천지회를 위해서 한 일을 말해 보세요.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궁금하군요.”
이희도의 입에서 지난 20년간 했던 배신의 역사가 흘러나왔다.
그가 한 일은 웬만한 산업스파이보다 훨씬 악질이었다.
정훈은 그의 말을 다 녹음하면서 다시 말했다.
“개인적인 잘못도 다 말하세요. 괴롭히고 따돌리고 뇌물 준 것까지. 천지회의 회원 자격을 검증하는 겁니다.”
공금유용, 괴롭힘, 추행, 왕따, 뇌물공여 등 그의 입에서 더러운 악행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
정훈의 인상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 팟
노란색 조명이 켜지며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이희도 사장님. 순순히 자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 누구세요?”
깊게 묻어 놓아야 할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은 그.
황당한 얼굴에 어울리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신화 그룹 윤정훈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AR 그룹 회장님에게 잘 전달 하겠습니다.
“안돼!”
정훈은 그를 보며 비웃었다.
“안돼? 그건 내가 결정해! 그리고 구 회장님도 너희 천지회 놈들이 얼마나 글러 먹은 놈인지 똑똑히 확인해야지.”
“비겁한 새끼. 사람을 속이다니.”
정훈의 이마가 찌그러진 맥주캔처럼 일그러졌다.
“너희 놈들은 정말 사람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20년 동안 회사 기밀을 통째로 갖다 바친 사람의 입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지”
“이거 풀어, 천지회가 너를 처단 할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나는 너희들에게 용서받을 게 없거든.”
정훈은 자신을 쏘아보는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발버둥 쳤다.
문이 열렸다.
“여, 윤정후니, 우리 후배님.”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강철중이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의자에 묶인 채 바둥거리는 이희도를 보았다.
“이거 풀어 이 새끼야!”
이희도가 강철중의 보고 외치자 그의 표정이 굳었다.
머리 쪽으로 가 그의 머리통에 축구공 차듯 뻥 찼다.
-윽
“어디서, 하늘 같은 검사님한테 욕을 하고 그래. 아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늘은 미안해! 나중에 잘해 줄게.”
철중이 정훈을 보고 입을 열었다.
“큰 거 하나 잡아 주는 거야?”
“살살해, 고문받았다고 우기면 곤란하잖아. 이 정도면 실적에 엄청 도움 될 것 같은데”
“상관없어. 원래도 없었지만 이제 정말 관심 없다. 승진을 포기한 검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제대로 보여 주지.”
그의 호탕하고 미친 성격이 얼굴에 드러났다.
오랜만에 제대로 강철중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검의 출현을 알려라 나의 제자여!”
“네, 사부.”
정훈은 그를 보며 몇 년 만에 환하게 웃었다.
강철중은 의식을 잃은 이희도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정훈은 그의 목소리가 저장된 녹음기를 챙겼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현정옥 여사님께 부탁해야 해요.”
구창훈 회장은 아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AR그룹이 코너에 밀릴 수가 있지?’
재계 서열 3위의 AR그룹.
그런데…….
믿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특히 현정옥에게만은 절대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문제였다.
“내가 가진 지분을 팔아서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러면 지배력이 약해져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충분히 아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옥이에게 돈을 빌릴 수가 있어? 자존심이 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옛날에도 자주 돈 빌리셨다면서요.”
“그건……”
구창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자존심 상하게…….’
정옥이한테 돈 빌릴 때는 사실 돈이 많았다.
그냥 그 핑계로 얼굴 한 번 보고 이야기하는 재미로 빌렸는데 지금은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남자!
자존심 하나로 버텨 온 인생.
가오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돈을 빌릴 수 없다.
“일단 가진 주식으로 해결하자. 그룹의 지배력이 조금 떨어지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하, 할아버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죠. 만약 이 모든 게 저들의 계획이라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팔 주식을 저들이 가지면 어떻게 해요?”
“설마 그 정도로 악랄하진 않을 거야. 위기의 순간에도 희망을 가져. 그것이 우리 AR 그룹이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이야.”
구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그룹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 낙관적이지?’
지금 상황에서는 무조건 돈을 빌려야 한다.
‘지급보증만 서지 않았어도.’
그것만 없었어도 부도를 빌미로 채권단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부도가 나면 채권단도 막대한 손실을 잃는다.
그런데 지급보증 때문에 그룹 자금이 들어갔고 결국 그룹 전체의 유동성 위기를 불렀다.
언제나 소문은 위기를 과장한다.
여기저기서 돈을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다.
기존 대출도 다급하게 회수하고 있는 상황.
다음 주까지 7천억 이상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룹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재계 3위의 거대 그룹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할아버지, 윤정훈 회장한테 연락해 볼게요.”
“뭐? 그놈은 우리 금융회사 싸게 먹으려는 놈이잖아.”
“어차피 파실 계획이었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회장실로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난감한 표정을 한 그가 말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신화 그룹 윤정훈 회장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낼까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현지야, 절대로 현 여사와 윤 회장에게 돈을 빌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구창훈은 구현지를 쏘아 보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위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풍전등화 같은 그룹을 수렁에서 건져야 한다.
***
‘회장실이 왜 이렇게 덥지? 열띤 토론을 버렸나?’
둘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구현지는 불만 가득했고 구창훈 회장은 화가 나 있었다.
첨예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나는 길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앉지.”
구창훈이 정훈에게 물었다.
“자네가 우리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닐 테니, 인사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속내를 말하게.”
언제나 여유로웠던 그였지만 오늘은 상당히 예민해 보였다.
“이희도 사장 조사는 해 보셨습니까?”
“그런 뒷조사는 우리 AR 그룹의 정신과 맞지 않아.”
구창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구현지는 다른 입장이었다.
“네, 고등법원 조재욱 판사랑 친하더군요. 조재욱은 한호그룹 한판수 회장, 그리고 차기 검찰총장으로 유력한 박현철이랑 어울리고 있었어요.”
“현지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한 번 의심하면 끝이 없는 걸 모르는 거야?”
“할아버지, 현실을 직시하세요. 모두 의리와 가치보다는 돈을 추구하는 시대예요. 이희도도 똑같아요.”
구현지는 할아버지의 답답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럴 리 없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
구창훈은 여전히 시대의 변화에 눈을 감고 있었다.
의리와 낭만 인정이 넘쳤던 그의 시대.
여전히 과거의 미몽에 빠져 있었다.
정훈은 구창훈에게 이희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AR카드 이희도가 이번 일로 받기로 한 게 금융 계열사 중 하나입니다. 최소 백억 이상의 자산가가 되는 거죠. 회장님이 직접 확인하시죠.”
정훈은 품에서 꺼낸 녹음기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희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창훈의 표정은 담담했다.
순간순간 일그러지는 이마,
떨리는 손가락.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녹음기에서 이희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크응.”
짧은 침음을 흘린 그는 일어서 창가로 갔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나…….”
구창훈이 뒤돌아 정훈을 보았다.
“윤 회장, 고맙네. 자네가 미몽에서 나를 꺼냈군.”
“아닙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회장님의 낭만을 없애 버렸네요.”
“아니야, 잘했어. 꿈에서 깰 때도 됐어. 이제 그룹을 정상화해야지. 인수 문제는 현지랑 이야기하게. 내 그 아이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네.”
“알겠습니다.”
“현지야!”
“네, 할아버지”
“그룹 계열사의 부장 이상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해.”
“네.”
잠에서 깨어난 거인은 청소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지저분할지도 모르지만 미뤄 둘 수 없는 일.
의리와 낭만으로 함께 했던 자들은 사라지고 돈에 충성하는 세태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구창훈 회장은 깨끗이 청소를 한 다음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물건을 제시하시죠.”
“뭘 원하시죠?”
구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냉소적이며 차갑던 그녀의 표정은 협상을 시작하자 표독스러운 기운을 내뿜었다.
비록 상황은 이렇지만 만만하게 보이진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훈도 마냥 호의를 베풀 수 없다.
우선 기세를 제압해야 한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인도인들이 천 원짜리를 물건을 만 원으로 부르는 게 이유가 있다.
만 원짜리를 5000원, 3000원 1500원까지 깎으면.
혹해서 실제로 산다.
그게 인도인의 상술이다.
기준을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뭘 팔 수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카드사만 필요합니다. 이미 증권사도 있고 은행, 저축은행도 있습니다.”
“그럼, 화재보험과 생명보험도 같이 협상 테이블에 올려 두죠. 그리고 크지 않은 증권사도 매각하고 싶어요.”
“흠,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저번에 인수 제안했을 때는 지금보다 연체율이 낮았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구현지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이 급격히 불리해졌다.
부실이 너무 커졌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단번에 업계 1위 카드사를 품게 되는 거예요.”
사실이다.
이번에 부실 회원을 정리해도 AR 카드는 업계 1위.
그리고 지금 부실도 신화와 미래 금융 그룹의 자금력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비싸게 살 수는 없다.
‘슬슬 약을 올려 볼까?’
냉철하고 차가운 그녀.
혼란스럽게 해야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가격을 이야기하시죠.”
“카드 5천억, 생명보험과 화재보험 합해서 1조, 그리고 증권사까지 해서 1조 6천억 원으로 계산했어요.”
정훈은 구현지를 보았다.
‘포커페이스가 좋군. 표정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시작할까?’
정훈은 그녀의 새초롬한 표정을 보며 슬쩍 웃었다.
“조금 과하게 계산하셨네요. 우리 기획조정실에서 올라온 가격이랑은 많이 다릅니다.”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회사를 매각하는 가격은 정해진 법칙이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경영권 프리미엄이 조금 지나친 것 같습니다.”
구현지는 정훈을 보았다.
‘저 자식. 쉽게 봤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잖아.’
“20퍼센트의 경영권 프리미엄은 경영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거죠. 아 법대라 잘 모르나 보군요.”
구현지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생각을 못 하게 해야 했다.
다시 몰아쳤다.
“그런데 저희는 10프로의 경영권 프리미엄만 책정했어요. 카드사도 그렇구요. 그렇게 보면 절대 나쁜 가격은 아니란 거죠.”
“네, 그럴 수도 있네요. 제가 법대라서 잘 모릅니다.”
“괜찮아요. 이제 배우면 되죠.”
구현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짜식, 소문보다 별거 아니잖아.’
윤정훈보다 우위에 선 기분에 만족을 느꼈다.
“네, 그래서 열심히 배우고 있죠. 그런데 경영학에서 중요한 게 내재가치와 시장 상황이라더군요.”
“그건 그렇죠.”
갑자기 치고 들어오자 당황한 구현지.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우리는 AR 카드의 내재가치를 1원으로 책정했습니다.”
그 현지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1원……. 저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다시 한번 그의 말을 확인해야 했다.
“1원?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맞아요. 욕심 때문에 생각은 비정상인데, 귀는 정상이네요. 맞아요. 1원.”
차갑던 구현지의 얼굴이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랑 장난해?”
찢어지도록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정훈은 그녀를 보며 웃기만 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