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장난이라뇨? 1원이라는 금액에 자존심이 상한 겁니까? 아니면 카드사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겁니까?”
정훈이 단호하게 말하자 구현지는 당황했다.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1위의 가치가 1원일 수 없어.’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자존심 상하게 1원이라니.
업계 1위 카드사를 인수하면서 1원?
절대로 안 돼.
할아버지 체면이 있지…….
“사실 1원도 과합니다. 우리가 인수하지 않으면 카드사에 대한 지급보증 때문에 그룹 전체가 침몰하죠. AR카드를 수렁에서 건져 내는 데 막대한 자금이 소요됩니다. 우리가 계산한 것만 해도 다음 주에 7천억이 필요합니다. 틀렸습니까?”
“그걸 어떻게…….”
절대로 들켜서 안 되는 구현지의 패를 정훈은 이미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지난 생의 기사 덕분이었다.
AR카드는 7000억 때문에 침몰한다.
그리고 스타그룹 계열의 카드사로 인수된다.
단돈 1원에.
“신화그룹의 능력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물론 신화의 능력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차영미와 천진혁이 AR그룹 한번 털면 나오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신 우리의 능력으로 포장하는 게 좋다.
사람들은 상대의 능력을 생각보다 과대 포장하는 성향이 있다.
정훈은 그것이 앞으로의 계획에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1원은 절대로 안 돼요.”
“얼마를 원하는 겁니까?”
“최소 3천억은 받아야 해요. 이건 자존심 문제죠.”
“자존심? 경영학을 배우면 자존심도 배웁니까? 저는 법만 알아서 잘 모르겠네요. 단돈 1원에 자존심까지 담을 필요는 없는데요.”
정훈이 비꼬며 말했다.
그녀는 얼굴만 붉힌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경영권 프리미엄은 경영학에서는 기본적인데 경영학을 모르셔서…….’
경영학에서는 자존심을 가르치지 않았다.
받은 대로 갚는 그의 치졸함에 마음속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젠장, X XX XX 졸라 기분 나쁘네.’
하지만 부끄러웠다.
숫자에 의미 없는 감정을 담았다.
“카드를 1원에 산다면 다른 금액은 우리가 제시한 금액을 받아들이시는 거죠?”
정훈은 고개를 저었고 구현지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아니요. 절반, 그리고 플러스 알파요.”
“이건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그날 제 제안을 거절한 건 당신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날 제가 경고했죠? 조건과 상황이 바뀌면 협상도 바뀌는 겁니다.”
결국 다시 유리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구현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장난해? 우리 백기사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완전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나 하고…….”
구현지의 눈에 맺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매각 가격을 어떻게 하실래요? 받아들이실 건가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조금 전의 울분이 남아 있었다.
“보여 줘야죠.”
“뭘요? AR 금융 계열사를 헐값에 사들이는 당신의 능력요?”
구현지는 다시 분한 표정으로 정훈을 노려보았다.
“아니요. AR 그룹은 여전히 위태롭다는 걸.”
“무슨 뜻이에요? 쉽게 설명해 주세요.”
“아마 제가 제시한 금액으론 위기를 극복하기 빠듯할 겁니다. 그러면 저들은 분명 공매도를 칠 거예요. 주가 하락에 배팅하는 거죠. 그리고…….”
구현지는 정훈을 보면서 입안에 고였던 침을 삼켰다.
‘아, 짜증. 빨리 말하지.’
“발표하는 거죠. 1조 원의 대출, 뭐 원한다면 2조도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은행이 안 되면 할머니 개인 돈으로요.”
구현지는 눈만 깜빡이며 정훈을 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할머니랑 구 회장님이랑 지금 같이 막걸리 드시고 있잖아요. 거기서 할머니가 회장님께 말할 거예요.”
“여사님이요?”
구현지는 안도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훈에게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씨,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죠. 이게 뭐예요, 진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한 구현지는 짜증을 마음껏 터트렸다.
‘어휴 저 재수 없는 왕 싸가지 때문에 괜히 마음 졸였네. 그나저나 역시 할머니뿐이야. 우리를 걱정해 주시고. 저 자식은 분명 돈밖에 모르는 놈이고.’
구현지는 정훈을 향해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댔다.
그녀의 살기를 피하며 정훈은 물었다.
“매각 대금은 어떻게 활용할 계획이에요?”
“저번에 말한 대로 화학 쪽으로 집중 투자 하려고요.”
“좋네요.”
2차전지 산업의 태동기.
몇 년 후부터 급성장한다.
성장하는 시장은 언제나 선점해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아까 말한 알파는 뭐예요?”
“AR화학 주식 20퍼센트요. 이건 시세보다 조금 더 쳐주죠. 미래가치를 위해서. 다만 이 계약은 이번 위기가 끝나고 체결하죠. 그룹으로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는 건 아직 때가 아니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AR화학에 든든한 우군이었다.
구현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흡족했다.
그래도 한 번에 덥석 무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무너진 자존심 여기서라도 제대로 세워야겠다.
콧대를 세우며 턱을 들고 말했다.
“아,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여기저기 투자 제안이 많아서요.”
“그래요? 그럼 취소 할게요. 중국 쪽으로 알아보는 게.”
화들짝 놀란 구현지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무슨 말이에요. 투자 감사해요.”
본전도 못 건진 그녀는 정훈에게 분노의 레이저를 쏘아댔다.
이에 개의치 않고 정훈은 입을 열었다.
“화학에 투자하면 자동차 전장 산업에도 관심을 가져 보세요.”
“네?”
구현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해, 스파이가 있어. 이희도를 탓할 게 아니야.’
그런데 전장사업은 그녀와 할아버지만 아는 비밀인데…….
물어본다고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스파이?’
구현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고개를 들어 정훈을 보았다.
‘분명 뭔가 있는데……. 뭘까?’
구현지는 윤정훈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정훈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반했나?’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임자 있는 몸.
구현지에게 미안해졌다.
애플의 소프트웨어 처리 기술.
AR 그룹의 자동차 전장 사업.
정훈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필요한 건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업이다.
몇 개의 자동차 회사와 함께 한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스크, 그의 테슬라가 출범했을 때였다.
***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글쎄, 몰라 우리 손자가 그렇게 해야 한대.”
“미끼를 던지는 건가?”
현정옥은 구창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괜히 회장질 하는 건 아니구만.”
“어허, 이 할망구가 내가 재계 3위 AR그룹을 키운 사람이야.”
“누가 들으면, 지가 다한 줄 알겠네. 물려받은 게 절반인 주제에.”
“흠흠,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내가 많이 키우긴 했지.”
구창훈은 잔에 담긴 막걸리를 비웠다.
현정옥은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하여튼 정훈이 생각은 자네 말처럼 미끼를 던지는 거야. 공매도를 한다고 했어.”
“누가?”
“누구긴 그놈들이지. 천지회 놈들이 AR 그룹에 공매도를 치면 주가는 더 떨어질 거야.”
느긋하게 이야기를 듣던 구창훈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주가를 올려야지. 유동성 위기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고 천지회 놈들이 공매도를 쳤잖아. 유동성 위기가 해결되면 어떻게 돼?”
“허, 주가 폭등! 그럼 나는 이번 기회에 자사주나 매입해서 지배력을 좀 높여야겠군.”
“하, 내가 돈을 빌려주지 말아야 하나?”
그는 현여사의 말에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때 정훈과 구현지가 을지로 막걸릿집으로 들어왔다.
“할머니 말씀 잘 나누셨어요?”
“응, 너희는 다 이야기했어?”
“네. 다 끝났어요.”
구창훈이 둘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화와 AR의 미래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군. 자넨 어떻게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욧!”
구현지가 할아버지의 말을 다급하게 끊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무심한 표정의 정훈.
‘뭐, 생긴 것도, 능력도 나쁘진 않고…… 원한다면 한번 고려해 줄 수 있는데……’
“아니, 내 말은 둘이 잘 지내라고.”
“네, 잘 지낼 겁니다. AR그룹과 신화그룹은 전략적 투자자니까요.”
“그래, 그래 잘 지내. 그렇게 잘 지내다 보면…….”
구창훈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낡은 가게의 출입구 쪽에서 환한 빛이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신비로운 분위기의 한 아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미인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손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구현지도 마찬가지였다.
천재적인 두뇌만큼 뛰어난 얼굴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급이 다름을 한 번에 느꼈다.
저 여자와 자신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다혜야!”
갑자기 나타난 다혜를 본 정훈은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조신하게 인사를 한 그녀는 정훈의 옆에 섰다.
“어때, 정훈이 여자 친구……?”
할머니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허, 저런 아이가 옆에 있으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녀를 본 구창훈은 잔뜩 인상을 쓰며 술잔을 비웠다.
‘에이, 오랜만에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젠장. 어휴 재수 없어.’
구현지도 마찬가지로 술잔을 한 번에 비워 버렸다.
정훈은 할머니를 보았다.
‘자랑하고 싶었던 건가?’
할머니가 다혜를 좋게 생각해서 다행이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흰 가 볼게요.”
다혜는 정훈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오랜만에 거리를 걸으며 여유로운 데이트를 즐겼다.
***
AR 그룹의 위기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구창훈 회장은 어디를 가도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언론은 구창훈의 그 모습을 강조했고 위기는 더욱더 확대되었다.
구현지 미래전략실장과 윤정훈 회장 사이에서 이뤄진 협상을 아는 사람은 네 사람뿐이었다.
이번 주에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필요한 자금만 해도 수천억이었다.
재계 3위의 AR이 쓰러진다면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다.
정부가 나서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구한수 대통령을 제외하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철저하게 방치했다.
취임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상황.
핸들링 되지 않는 국정 운영과 거대 기업의 부도 위기가 맞물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답답하군. 윤 회장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구한수는 전화기를 들었다.
윤정훈 회장의 생각이 궁금했다.
“구한수입니다, 윤회장. 갑자기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통령님. 어쩐 일이 십니까?”
“AR카드 사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정훈은 입술이 근질거렸다.
사실 지금도 언론 발표문을 작성하는 중이다.
구현지가 채근했지만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천지회 계열인 스타증권에서 공매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일을 진행해야 크게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AR 그룹이 큰 위기입니다. 잘 헤쳐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만약 쓰러지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좀 나설까 생각하는 데 어떻습니까?”
정훈은 그이 입장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부의 개입은 자칫 시장의 질서를 교란할 수 있었다.
물론 천지회에 큰 타격을 줄 자신의 계획도 어그러질 위험이 있었다.
“대통령님, AR그룹은 대한민국과 함께 성장한 거대한 기업입니다. 이렇게 쉽게 쓰러질 리 없습니다. 믿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부도가 나면 큰 위기가 생길 겁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대통령님. 제가 절대 그렇게 흐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번 기회에 AR그룹이 체질을 개선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내심 서운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믿으라는 그의 말이 신기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그가 무슨 일을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모두 대답을 꺼리고 회피했다.
하지만 그는 믿으라고 했다.
‘역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득 품고 있군. 이게 젊음인가? 구체적인 건 없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좋군.’
“오늘 통화 즐거웠습니다. 기분이 울적했는데 힘이 나는군요. AR그룹이 잘 해결할 거라 저도 믿어 보겠습니다.”
“네, 대통령님.”
정훈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뉴스 속보도 한번 지켜봐 주십시오. 기다리는 소식일 수 있습니다.’
“네? 무슨 말입니까?”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구한수는 궁금해졌다.
오후가 오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았는데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구한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일단을 기다려 보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깊숙하게 빨아 당긴 다음 긴 한숨과 함께 내뿜었다.
하얀 연기에 답답함도 같이 내뱉을 수 있었다.
윤정훈 회장 덕분이었다.
한편 전화를 끊은 정훈은 황석 기조실장에게 현재 상황을 확인했다.
“AR그룹에 공매도 얼마나 들어왔어요?”
“지금까지 100억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카드, 전자, 건설 쪽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겠네요.”
“네, 회장님”
“한 시에 언론사에 AR카드 및 나머지 금융사에 대한 인수 계약 발표하세요. 발표문은 보냈으니 확인하고요.”
“알겠습니다.”
한 시가 되었다.
신화그룹의 인수 발표로 AR 그룹의 주가가 치솟았다.
AR그룹을 공매도했던 스타 증권은 당황했다.
자칫하다가는 큰 손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치솟았던 주가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매각 대금이 시장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매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위기.
AR그룹의 주식은 전 종목이 하락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AR그룹의 위기가 이제 곧 눈앞에서 실현될 것 같았다.
모두의 다른 셈법을 가진 채 앞으로의 일을 기다렸다.
정훈도 천지회도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