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09화 (109/200)

#109화

“무제한이라면?”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뜻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미래은행, 미래저축은행 그리고 현정옥 여사님의 개인 사재를 털어서라도 대출을 실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살려야 하는 재벌도 있는 법입니다. AR그룹은 한국 경제의 등불이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휘청이는지 알 수 없지만 미래금융 그룹과 신화그룹은 AR의 백기사가 될 것입니다.”

신화 그룹과 미래 금융이 백기사로 등장했다.

한국 기업 중에서 M&A로 급성장한 신화 그룹과 대한민국 최고의 현금왕이 보유한 미래 금융 그룹의 지원.

AR그룹의 부활은 확실했다.

정훈을 여전히 질문을 쏟아 내는 기자들을 피해서 그룹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를 지킨 경비원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실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구창훈 회장이 정훈을 보며 웃었다.

그 옆에 서 있던 구현지도 정훈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눈물을 흘린 건지 눈 주변이 검은 게, 꼭 판다 같은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 모른 척했다.

“마음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가 자네 때문에 30년 전에 끊은 담배를 다시 피웠어. 허허허”

“죄송합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환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었다.

“괜찮아. 생각대로 미끼를 많이 물었나?”

“생각보다 많이 물었습니다. 공매도 잔고가 3조 원입니다.”

“그럼 그놈들 피해가 얼마야? 3조 전부 날리는 거야?”

“아니요, 할아버지.”

“아차, 나도 늙었네. 공매도라는 게 손실은 확정되어 있지 않지?”

“네, 회장님.”

“심각한 타격을 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균형추가 맞춰질 것 같습니다.”

“그래, 최선을 다하게. 자네 덕분에 나라의 장래가 밝아. 허허허”

정훈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구창훈을 보다가 구현지를 보았다.

정훈은 구현지에게도 사과했다.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하, 그러게요. 미리 조금이라도 알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

구현지는 안도하며 정훈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정훈은 확신했다.

‘AR그룹이 신화 엠파이어 그룹과 미래 금융 그룹의 우군이 될 수 있겠어.’

“아마 지금쯤 어음은 다 결제했을 겁니다. 그리고 내일 당장 1조 원의 대출이 실행됩니다. 할머니께서 필요하시면 더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갑작스러운 조건 이야기에 구창훈은 이마를 찡그렸다.

“뭔가?”

“직접 전화하시랍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피우지 말고!”

“크흠……. 그리하지.”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적대적 인수…… 시나리오 진행하겠습니다.”

“좋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천지회 놈들의 뼈를 가루로 만들겠구만.”

정훈은 문을 방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쳐다본 구현지.

‘저런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듬직하게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기사님. 아깐 정말 기사처럼 빛나고 있었는데.’

구현지의 마음속에 어느새 정훈이 들어와 버렸다.

그녀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고 있다.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흐르는 마음을 막을 생각도 없다.

어차피 남모르는 짝사랑.

상관없었다.

어음이 결제되고 신규대출로 자금을 확보한 AR그룹의 주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날 오후 한강 다리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은 환한 미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장기투자와 물타기를 했던 개미들은 이제 몇 배의 수익을 꿈꾸었다.

개미의 꿈은 다음 날부터 당연히 이뤄졌다.

특히 정훈이 신화증권과 미국의 레전드 컴퍼니를 통해 매입한 물량 때문에 유통되는 주식이 극히 적었다.

그리고 구창훈이 사 놓은 주식 때문에 씨가 말랐다.

순식간에 5일 연속 상한가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 상한가가 풀리며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져 나왔다.

신화 그룹은 그것도 매수했다.

그리고.

“신화그룹 AR그룹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선언.”

모든 조간신문의 1면에 신화 그룹의 적대적 인수합병 선언이 실렸다.

이른 아침 회장실에서 신문을 본 이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웠다.

‘윤정훈 결국 너도 우리와 같은 족속이구나. 탐욕에 빠져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동료를 발견한 것 같은 흐뭇한 미소가 이석의 입을 길게 늘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시간에 절대 건들면 안 되는 거 몰라?’

이석은 고요한 아침을 방해하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허락도 없이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신화그룹이 AR그룹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선언했습니다.”

“봤소. 윤정훈이 놈 고상한 척 하더니 결국 우리와 같은 부류군.”

이석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비서실장은 이석 회장이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회장님.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분 경쟁이 시작되면 AR그룹의 주가가 더 폭등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걸었던 공매도 주식을 갚으려면 수조 원, 아니 수십조 원의 피해가 불가피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회장님.”

“뭐야?”

숏커버링.

공매도한 주식을 갚아야 한다.

물량이 없고 상승 중인 상황에 기름이 끼얹어졌다.

적대적 인수 합병.

AR그룹의 주가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우주로 치솟았다.

천지회는 쏟아부은 돈의 수십 배를 들여 주식을 사서 갚아야 한다.

수익은 한정적이지만 손실은 무제한인 공매도의 위험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상황을 이해한 이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

이석은 창가에 서서 경복궁을 보았다.

자신의 자리.

‘석아, 빼앗긴 너의 자리를 찾아라’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아직도 귀에 남았다.

순종의 장남이었으나 역사에 철저히 배제되었던 자신의 할아버지 이현.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천지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독립자금으로 사용될 황실의 비밀 금괴를 통해 이 땅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되지도 않는 독립에 쓰느니 자신이 쓰는 게 더 이득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왕조가 사라진 자리.

그는 자신의 혈통으로 황실을 건설하려 했던 야망가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대한민국의 재계와 정치, 언론, 그리고 군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파워 엘리트의 30퍼센트는 천지회 소속이다.

비록 군부는 이전 대통령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재건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스타 그룹을 발판으로 황실을 재건하려 했는데…….

이번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계획의 10년 후퇴를 의미했다.

40조

이번 손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증가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데려왔습니다.”

해외로 도주하려는 조재욱 판사를 잡아 회장실로 끌고 왔다.

가족을 데리고 황급히 공항으로 이동하는 그를 잡았다.

“어딜 가십니까? 조 영감!”

“그게…… 태국 대법원과의 회의가 있어서 급히 가야 했습니다.”

“흠, 회의 때문에 가는데 가족을 데려갑니까?”

“아. 예 겸사겸사…… 관광도 할 겸 해서 그랬습니다.”

이석이 그를 노려보았다.

“입이 참 간사합니다. 우리 판사님.”

“죄송합니다. 전하……”

이석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눈짓했다.

그는 무심히 조재욱의 머리채를 강하게 쥐었다.

벌려진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계처럼 감정 없는 손으로 조재욱의 혀를 뽑았다.

-으아악!

쓰러진 조재욱 판사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의 몸이 고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손실이 얼마인 줄 압니까? 4조가 아니라 40조입니다. 40조!”

“사려만 주십시오. 무신 짓이든 다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이석이 두 손을 빌며 그를 향해 기어갔다.

살려 둘 필요는 없었다.

이석은 의자를 들고 회장실의 유리창을 부쉈다.

-쨍그랑.

고층 건물의 두꺼운 유리가 사정없이 깨지며 강한 바람이 들이쳤다.

“사려 주세요…….제바. 으아아.”

조재욱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다.

“자 새가 되어 날아 보세요.”

건장한 체격을 한 경호원들은 이석을 향해 기어가던 조재욱을 들어 그대로 창밖으로 던졌다.

“훨훨 날아 보세요. 그럼 살 수 있습니다.”

이석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조재욱을 보며 혼잣말했다.

“박현철은 어디 있어?”

“밖에 대기 중입니다.”

“들어오라고 해.”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한 박현철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뺨을 날렸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따귀를 맞은 박현철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이 새끼가 돌았나…….’

표정으로는 순종하는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는 사대부인 자신과 격이 다른 황족이다.

자신은 핏줄의 가치를 알고 그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다.

“신화 그룹이 계속 저렇게 날뛰게 놔둘 겁니까?

“죄송합니다.”

박현철은 무턱대고 몰아붙이는 이석에게 짜증 났다.

“이번 손실을 만회할 방법이 아예 없습니까?

“지금으론 손쓸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신화 그룹을 압수 수색하면 더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저번에도 그랬지만 컴퓨터에 접근이 안 됩니다. 해킹도 안 됩니다. 오히려 무리하게 해킹을 시도하다 천지회 해커들의 컴퓨터에 불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놈 하나 못 잡아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놈들을 처리하세요. 이희도 인가 하는 놈도 그렇고 관련된 모든 자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손실이 40조에 육박한다던데…… 괜찮으십니까?”

이석의 어깨가 움찔했다.

박현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나를 동정하는 것이요? 이따위 손실에 넘어갈 스타그룹이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나가 보세요.”

박현철을 방을 나서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나이도 어린놈이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숨을 고르며 화를 달랬다.

자신은 질서를 지키는 사대부.

황족의 명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의무였다.

***

인터넷에서 신화그룹을 칭찬했던 사람들은 신화그룹에 대한 비난 여론으로 들끓었다.

‘와 신화적으로 개 쓰레기다.’

‘백기사인 척 하는 흑기사라니…….’

‘세상에 믿을 놈 없구나. 신화적으로 뒤통수를 날린 신화, 대단!’

사람들은 기대했던 만큼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

“회장님,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강상철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정훈을 보았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걸 좋아하는 그는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과 욕설에 불편해했다.

“어쩔 수 없죠. 내가 욕먹는 만큼 천지회 놈들은 타격이 크니까요.”

그리고 정말 며칠 만에 AR그룹의 주가는 하늘로 치솟은 다음 우주까지 올라갈 기세였다.

그리고 막대한 자금의 공매도 수량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언론은 AR그룹 공매도에 대한 우려를 쏟아 냈다.

그리고 기존의 공매도 계약을 무효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돈 앞에서는 자본주의의 질도, 시장의 질서도 중요하지 않았다.

천지회로선 무리수를 남발해서라도 계약의 무효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손실은 이제 40조를 넘어 100조에 이르렀다.

1조, 10조가 아니라 100조에 육박하는 손실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공매도를 걱정하는 뉴스를 보고 있을 때 강철중의 전화가 왔다.

“정훈아. 이희도 이 새끼 진짜 내보내?”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여기서 좀 더 조사해 보면 나올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거기 있으면 죽을 거야.”

“뭐? 죽다니? 설마”

“법무부 교정시설, 거기 천지회 놈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아무리 보호하고 조심해도 놈들에게 살해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래서 내가 보호해야겠어. 그놈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료도 좀 빼내야지.”

정훈은 20년 동안 스타 그룹과 천지회를 위해 일한 이희도의 노하우가 아까웠다.

사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비참하게 죽어도 괜찮을 만큼 냄새나는 사람이었다.

나쁜 짓을 한 만큼 그의 머릿속에는 천지회와 스타그룹의 더러운 정보가 가득할 것이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

“하, 녀석 나보다 네가 더 검사 같네. 일단 내보낼게.”

“고마워, 내가 픽업해서 잘 데리고 있을게. 그리고 좋은 정보 나오면 보내줄게”

“그거 기대되는데, 그리고 사실 내가 조사하다 죽으면 골치 아프다. 잘 관리해.”

“응”

강철중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의자에 기댔다.

‘아쉬운데, 그런데 정훈이 녀석은 어떻게 귀신같은 촉이 있는 거지?’

강철중이 정훈의 능력을 생각하자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좋은 먹잇감이 사라져 아쉽지만 더 큰 놈이 곧 나타날 것 같았다.

더 크고 잔인한 놈을 잡을 생각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강 프로 있나?”

강철중의 눈에 불이 붙었다.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박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훈의 말로는 서로 터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차장 검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곳 온 것도 아니잖아, 내 직속 후배 얼굴 보러 왔는데…… 반갑지 않은가 보네, 얼굴 풀어. 강 프로!”

철중의 굳은 얼굴을 보며 박현철이 지적했다.

그의 비릿한 웃음이 얼굴에 가득했다.

“하하하, 서로 반가운 얼굴도 아닌데. 알겠습니다. 차장검사님.”

철중이 호탕하게 웃었다.

당장 주먹을 뻗어 그를 제압하고 싶을 만큼 싫었지만 참았다.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아온 건지 궁금했다.

“이희도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게 수사 기밀이라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심각한 범죄자니 정의로운 자네가 기소 안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풀어 주는 건 아니겠지?”

‘이희도를 기소하라고? 풀어 주라는 게 아니라? 정말 정훈의 말대로 감옥 안에서 처리하려는 건가?’

철중은 이희도를 다급히 정리하려는 박현철의 의도가 궁금했다.

이희도의 머릿속에 천지회와 스타그룹에 치명적인 보물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철중은 정훈에게 서둘러 보물선을 인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