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곽 팀장님, 곽 팀장님…… 안 죽은 거 알아요. 이제 일어나세요.”
“니미.”
“그 정도 상처로는 안 죽어요. 괜히 잡혀서 고문당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곽현수의 이어셋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곽현수는 포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오늘은 동료들 곁으로 갈 수 있었는데.”
곽현수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포프? 이제 그만 내버려 둬.”
곽현수의 긴 한숨에는 삶의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쉬세요.”
“그만하고 싶군.”
“복수해야지요. 단서를 찾았어요.”
“거짓말하지 마.”
“이번엔 진짜예요. 그날 작전 정보를 흘린 사람을 찾았어요.”
“누구지?”
“부대 앞 장미다방에서 커피 한잔 사 주면 가르쳐 주죠. 거기 천 양이 커피를 참 잘 타요.”
-피식
그의 어이없는 말에 곽현수는 실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늘을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갈 곳을 잃은 자신 같은 기분이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무수하게 쏟아졌다.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복수는 하고 가야죠.”
“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엔 절대 안 속아.”
“넵.”
“어디로 가야 하지.”
곽현수는 몰핀을 허벅지에 꼽은 다음 지혈을 했다.
얼굴에는 습한 아프리카의 바람이 느껴졌다.
‘다시 살아 보자. 그놈은 죽이고 가야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들었던 시가 생각났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포프가 답했다.
***
-풋
차영훈은 우스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그의 입에서 폴 발레리의 시가 나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살아야겠다.’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은밀한 작전을 팔아넘겨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몰살되었다.
전우를 팔아넘긴 자, 무고한 생명을 돈에 판 그를 처단해야 한다.
지난 번 곽현수 팀장만 살아 돌아온 작전.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둘이 아니었다.
영훈은 자신의 능력으로 은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믿기 힘든 결론을 얻었다.
천성한 장군이 그날 작전 내용을 흘린 게 분명했다.
‘믿어야 한다.’
차영훈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천성한의 비리 자료를 USB에 담았다.
곽 팀장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다.
장미다방 천 양이라고 힌트를 줬는데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영훈은 목소리만 들어왔던 곽현수에게 첫인사를 남기려고 웹캠을 켰다.
“안녕하세요. 곽 팀장님. 당신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포프입니다.”
그때 전산실 문이 열렸다.
“들어와.”
“여기가 당신이 일하는 곳이에요?”
“응.”
‘낯선 여자와…… 천성한?’
차영훈은 몸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돌아갈거라 생각한 그는 모니터를 끄고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
차영훈의 책상 앞까지 온 그들.
“하아, 여기서?”
“안돼?”
“아니……. 부끄러워서요.”
하필이면 자신의 책상 위에서 해선 안될 짓을 시작했다.
‘니미. 모쏠 주제에 별 경험을 다 하네……. 젠장 책상 무너지겠네.’
책상 밑에 숨어 있는 차영훈은 귀를 막은 채 그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한참 후 그들이 방을 나갔고 차영훈은 난장판이 된 책상을 보았다.
저절로 한숨이 욕이 튀어 나왔다.
“하, 니미럴.”
빨리 정리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목소리로만 듣던 지 팀장이 나오라고 닥달을 했다.
지난번 작전에서 그의 목숨을 구한 데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한우 갈비살을 산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자신의 정체를 공개할 이유로 충분했다.
오늘 정보사 전설, 포프의 잘생긴 얼굴이 공개된다.
책상을 정리하려 할때 등골이 오싹했다.
“언제부터 있었지?”
천성한이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본 게 맞구나……. 영훈아 미안하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천성한의 두 손이 차영훈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거친 손이 발버둥 치는 그를 허공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
지현복은 부대 앞 장미 다방에 앉아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나온다고 했었는데.
약속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지난 작전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포프에게 보답하는 날이다.
드디어 그 재수 없는 새끼의 얼굴을 본다.
같은 부사관이면서 졸라 갈군다.
장교라도 갈군다.
목숨을 구해 주긴 했지만 어찌나 잘난 척을 하던지…….
‘짜식, 두고 보자. 늦은 것까지 생각해서 제대로 갈궈 주지.’
지현복이 희미하게 웃었다.
컴퓨터만 하는 놈, 제대로 굴려 줄 생각이었다.
수차례 자신과 부대원의 목숨을 구한 그를 만날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설렜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 장군님.”
지현복은 천성한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전산실로 달려갔다.
낯익은 장교가 차가운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몇 번 얼굴을 보였던 남자, 분명히 천성한이 아끼는 부하 장교였다.
“이 친구 자살로 처리해.”
“네?”
천성한은 두 번 말하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지현복은 시체를 군용 더블백에 넣은 다음 바닥을 정리했다.
컴퓨터에는 USB가 꼽힌 채 작동 중이었다.
그런데 모니터가 꺼져 있었다.
모니터를 켜자 웹캠이 자신을 비췄다.
녹화 중이었다.
‘뭐야? 전부 다 녹화되어 있었잖아?’
파일을 저장하고 중간부터 보았다.
남자와 여자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더러운 움직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행위가 끝나고 얼마 후 천성한이 직접 처리한 안타까운 죽음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
컴퓨터에 꼽혀 있던 USB를 자신의 주머니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정훈은 회귀 전 신용정보 회사에서 일했던 시간을 생각했다.
항상 까칠하기만 했던 지현복 부장이 자신에게 곁을 내주었다.
“정훈아, 지난번 가져온 부실 채권 중에서 네가 선택한 것들 가지고 와 봐.”
“여기 있습니다.”
한참을 서류를 보던 그는 정훈을 보며 씨익 웃었다.
“광어 한 접시 사 주면…… 좋은 정보 준다.”
“흐음…… 반 접시로 하시죠.”
“짜식이 얼마 전까지는 바로 사주더니. 너가 가져온 것 중에 회수 불가능한 게 하나 있어. 뭔지 알아?”
정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그에게 대답했다.
“극동건설…… 맞습니까?”
“정답! 이유는?”
“진짜 부도난 것 같던데요. 따로 빼돌린 회사 자금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 그 회사는 평이 좋았어. 사장도 평판이 좋았고. 뭐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니까.”
정훈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골랐어?”
“모르는 용어들이 많아서요. 지 부장님한테 물어보면 다 가르쳐 줄거 아닙니다. 그러면서 술도 얻어먹구요, 흐흐흐.”
지현복은 윤정훈을 대견한 듯 보았다.
불과 6개월 만에 채권추심과 관련된 법률 지식을 자신만큼 쌓았다.
‘천재다.’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지현복은 무섭게 성장하는 정훈과 그를 질투하는 동료들 때문에 걱정이었다.
“짜식이, 천천히 해. 아직 젊어.”
속도를 좀 늦추라고 했다.
“넵. 그래도 저도 부장님처럼 빨리 3억 벌고 싶은데요.”
“그래? 그럼 광어 한 접시 사. 그럼 오늘 비법을 알려 준다.”
“넵.”
정훈은 지현복을 보았다.
회사의 에이스.
처음에 무섭도록 자신을 채찍질한 그였다.
그런 그와 이렇게 친하게 지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정훈은 그날도 그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물론 비법 공개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술값은 연봉 3억의 지 부장이 계산했다.
둘다 집에 들어가도 아무도 없다.
천천히 들어가도 된다.
정훈과 지현복 부장은 항상 밤 늦게까지 어울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 정훈은 지난 날의 추억에서 벗어났다.
이제 해결해야 한다.
항상 건들거리면서도 자신을 끌어준 지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사 같은 눈으로 자신의 빈틈을 노려보는 눈빛만이 존재할 뿐이다.
정훈은 전화기를 들었다.
“지현복 씨? 윤정훈입니다.”
전화를 끊은 정훈은 곽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영미에게도.
우리는 서로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
“지금요? 알겠습니다.”
늦은 저녁 윤정훈 회장이 자신을 불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룹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해 부르는데 이유를 물을 비정규직은 없다.
회사로 오라고 했는데 시끄러운 음악이 들렸다.
‘회사에서 파티 중인가?’
그럼 오늘 할 일은 대리운전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한 그는 황급히 옷을 입고, …… 총을 챙겼다.
신화 그룹 비서실로 출근하며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늦은 밤은 언제나 위험이 가득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에 도착한 그는 회장실이 있는 20층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재벌들은 회사에서도 파티를 하는 구나.’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주변을 살펴본 후 자신의 허리 뒤로 손을 옮겼다.
차가운 권총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텅 빈 공간.
윤정훈 회장은 창가에 서 있었다.
소파에는 차영미와 이병석이 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앉으세요.”
그때 곽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는 지현복의 뒤에 섰다.
‘뭐지? 왜 현수가 뒤에 있는 거지? 이건…….’
그는 온몸의 신경을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차영미 씨 시작하시죠.”
자리에 앉자마자 정훈이 말했다.
음악이 꺼지고 소파 테이블에 놓인 빔프로젝터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날 이후로 잊지 못했던 얼굴이 나왔다.
“제 동생 영훈이에요. 혹시 아시나요?”
차영미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아니요.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아쉽네요. 제 동생이 정보사에서 근무했거든요.”
“현복아, 너 장미다방에서 포프 만나기로 했지?”
곽현수가 질문했다.
“어, 그 새끼 쫄아서 안 나왔지. 내가 맛있는 한우 사주려고 했는데…….”
긴장을 감추기 위해 지현복은 평소보다 더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포프 이야기가 왜 나와?’
자신을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하고 끝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그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영훈 씨는 4월 26일 오후 3~7시경 사이에 사망했어.”
“그래? 그런데 저 사람 사망 시각을 왜 이야기하는 거야?”
지현복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나는 26일 3시를 마지막으로 그와 통신을 했어. 그리고 4월 27일 아프리카에서 미군기지로 복귀했을 때부터 포프는 사라졌어.”
곽현수는 지현복을 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저 남자가 포프일 리가 없어. 저 사람은 그냥 천성한이 아끼는 장교였을 뿐이야. 그래서 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라고.”
“모르는 얼굴이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미안해요.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저 남자가 자살한 게 마음에 걸려서…….”
차영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살이라니요? 무슨 말이죠? 모두들 사고사로 알고 있는데…….”
벌떡 일어난 차영미가 지현복을 보고 소리쳤다.
“누가 내 동생이 자살했다고 그랬어? 나와 우리 가족만 알고 있는 비밀인데!”
지현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쏘아보는 차영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포프였던 차영훈이 스크린 위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 팀장님, 내일 확실하죠?’
‘지 팀장님, 내일 확실하죠?’
그의 마지막 말이 귀에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자신을 수차례 죽음에서 구한 그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죽음을 위장한 채 산속 차 안에 혼자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때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이었는데.
얼굴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후, 내가 포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감상에 젖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야.”
지현복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등에서 총을 꺼내 차영미를 인질로 삼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죽인 거야?”
“아니, 내가 아니야.”
“그럼 도대체 누구야? 누가 내 동생을 죽인 거야?”
차영미는 울먹이고 있었다.
“…….”
“지현복 씨.”
정훈이 그를 보며 말했다.
“날 인질로 삼아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누나를 죽이는 건 좀 그렇잖아요.”
“닥쳐!”
지현복은 정훈을 잡고 그의 목에 총을 겨눴다.
“왜 죽인 겁니까?”
“내가 아니야 정말 내가 아니야. 나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울먹이고 있었다.
“현복아, 총 내려놔. 다 끝났어?”
“끝나긴 아직 끝나지 않았어. 포프를 죽인 사람?”
지현복은 자신의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여기 안에 있어.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뒤에는 거대한 권력이 있어.”
“도대체 누구야?”
“천성한.”
곽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중 스파이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른 그.
“으아아아, 천성한 개새끼 죽여 버릴거야.”
곽현수가 짐승처럼 포효하자 깜짝 놀란 지현복에게 순간적으로 틈이 생겼다.
정훈은 놓치지 않았다.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가격하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당황한 그가 뒷걸음질 치며 정훈을 겨낭했다.
“오지 마, 나도 몰랐어. 정말…… 나도 몰랐어.”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지현복의 눈에 차영미의 서늘한 눈빛이 보였다.
뒷걸음질 치던 그는 뒤돌아 창문을 향해 총을 쏘았다.
-탕. 탕. 탕
-퍽
유리창이 깨지며 날카로운 조각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하, 나도 몰랐다. 씨발, 차영미 씨 미안해요. 정말…… 나는…….”
지현복은 울먹이며 자신이 한 짓을 고백하길 주저했다.
큰 결심한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다만 그가 거기서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차영미가 그를 노려보았다.
곽현수도, 정훈도 모두 그를 보았다.
뒷걸음질 치던 지현복의 등으로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후, 젠장 더럽게 기분 좋더라. 친구가 될 것 같았는데……. 미안해요.”
깨진 유리창을 향해 그는 몸을 던졌다.
“안 돼!”
정훈도 몸을 날렸다.
‘최소한 그는 한 번은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
지난 생 자신을 구원했던 자다.
그가 아니었다면 더욱더 쓸쓸했을 과거.
강철중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구했던 사람이었다.
정훈은 그를 잡으려고 몸을 날렸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발목을 겨우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중력의 힘 때문에 두 사람은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꼭 잡아요!”
곽현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은 상태로 정훈의 발을 꽉 쥐고 있었다.
20층 빌딩 벽에 두 남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괴력을 가진 곽현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둘은 빠른 속도로 바닥에 도착했을 것이다.
“꽉 잡아요. 올립니다.”
곽현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도련님, 왜 갑자기……. 아니 어떻게 거기서……. 죽을 뻔 했잖아요.”
곽현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지현복은 고개를 들어 정훈을 보았다.
“왜죠? 죽게 내버려 둬도 되는데…….”
“당신도 복수하고 싶은 것 같아서요.”
“무슨 말입니까?”
“포프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더군요. 당신도 후회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일을 만든 놈부터 처단해야죠. 그 다음에는 법의 심판을 받든 건물에서 뛰어내리든 상관 안 할게요.”
“제가 복수를 원했다구요?”
정훈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에 지현복이 술에 만취했던 날 그가 한 짐승 같은 외침이 생각났다.
‘성한이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으아아아 그 새끼가 시킨 그 일만 안 했어도.”
지현복은 정훈을 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었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 USB 지금 볼까요.”
차영미가 USB를 들며 말했다.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빔프로젝트에 영훈의 얼굴이 보였다.
“영훈아!”
차영미가 조용히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곧이어 천성한과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낯 뜨거운 장면이 시작될 때 곽현수가 외쳤다.
“잠시만요.”
곽현수는 정훈을 보았다.
“하인선…… 하인선이 분명해요.”
흔적 하나 없이 자취를 감췄던 하인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그녀가 하얀 스크린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