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저 여자가 하인선이라구요?”
“네, 확실합니다.”
“어 진짜 하인선이네요. 저 여자가 왜 저기 있지…….”
스크린에 비친 여인을 본 차영미가 덧붙였다.
정훈은 지현복을 보았다.
“나도 몰라. 그런데 분명 저 여자 때문에 살해당한 거야. 이제 곧 더러운 장면이 나오거든.
지현복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훈은 차영미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미 씨 밖에 있을래요? 그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훈이 그 말을 했을 때 문밖에서 기척이 있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은은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이거 최근에 은수한테서 맡았던 냄샌데…….’
어디까지 들었을까?
아니 어디까지 은수에게 말해야 할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정훈은 방에 있는 사람들과 영상을 확인했다.
마지막 차영훈이 살해되는 순간 눈을 감고 싶었지만, 오히려 부릅떴다.
자신이 그를 처단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현복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슨 말이죠?”
정훈은 그를 보았다.
풀이 죽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회기 전 그는 건들거렸지만 매우 유쾌한 성격이었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었다.
정훈은 자신이 지현복을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다.
지금 어떤 위치에 있던 그건 그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그를 연민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를 한 번은 돕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도왔듯이.
정훈도 그가 필요했다.
하인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그녀가 은수의 생모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지현복 씨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겁니까? 이제 무엇할 겁니까? 어긋난 인연을 바로 잡고 싶지 않습니까?”
지현복은 자신을 다그치는 정훈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네?”
지현복의 눈은 찢어질 만큼 커졌다.
‘도와 달라고? 지금 죽여도 모자랄 나한테 도와 달라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있을까? 속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무슨 말입니까? 저 같은 살인자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정훈은 지현복을 물끄러미 내려본 다음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여기에 잠입한 건 저를 암살 하려는 거죠?”
“네”
“그리고 부산에서 저격한 것도 당신이었죠?”
“네. 그랬습니다.”
“천성한은 정체가 들통난 당신을 절대로 살려 두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의 임무가 실패한 걸 여기 있는 우리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설마”
지현복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 스파이를 하세요. 차영훈, 아니 포프에게 받았던 은혜를 갚아야죠. 가서 하인선과 천성한의 뒤를 캐세요. 그리고 특히 천성한이 움직이는 블랙 요원들에 관해서도 샅샅이 밝혀내세요.”
지현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지현복은 갈등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하얀 스크린을 보았다.
포프의 창백한 얼굴이 생각났다.
‘늦었을까?’
아니. 한번 해 보지.
여기서든 저기든 이제 죽은 목숨이잖아.
죽기 전에 빚은 갚고 가야지.
지현복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일어섰다.
“……후, 해 보겠습니다. 아니 해야죠. 오늘 한 번 죽은 목숨입니다.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은 하고 죽어야죠.”
“죽다니요. 살아야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살자고 하는 일이라, 고맙습니다.”
지혁복의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정훈은 그를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 총을 돌려주려 했지만 거절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총입니다. 목숨을 구해 준 보답입니다. 저보다는 회장님이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정훈과 대화를 마친 지현복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차영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자를 처단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후에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네, 우리 영훈이 혼자 있어서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그 살인마를 반드시 영훈이 곁으로 보낼 거예요. 저도 도울게요.”
차영미는 담담한 목소리를 말을 마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훈을 보았다.
“오늘, 선전포고 정도는 해도 괜찮겠죠?”
“괜찮습니다.”
차영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느릿느릿 걸어 자신의 컴퓨터에 앞에 앉았다.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반드시 처참하게 죽여 버릴 거야.’
차영미의 눈에 광기의 불꽃이고 있었다.
그날 국방부 서버실의 컴퓨터가 과열로 불탔다.
인터넷이 연결된 국방부의 전체 컴퓨터가 해킹되었다.
홈페이지 메인화면엔 웃고 있는 할리퀸의 사진과 함께 섬뜩한 글귀가 반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I WILL KILL YOU. I WILL KILL YOU. I WILL KILL YOU.)’
***
정훈은 지현복에게 그룹의 중요한 일과 정보를 천성한에게 보고 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현복이 제공하는 정보의 신뢰도를 높였다.
딱 한 번만 어긋난 정보를 제공하면 된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믿게 해야 했다.
지현복도 틈틈이 천성한의 동정을 정훈에게 보고했다.
특이한 동향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대원각에 들러 술을 마셨고 한판수를 부쩍 자주 만나고 있었다.
정훈은 틈틈이 은수를 유심히 살폈다.
그날 이후 항상 신경이 쓰였다.
은수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집에서는 로맨스 소설과 시집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척할 순 없었다.
정훈은 고민 끝에 은수와 하인선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로 간의 신뢰의 문제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은수에게 말해야 한다.
정훈은 은수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정훈과 은수는 편의점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얼굴을 보면서 하지 못했던 속내를 창밖을 보면서 털어 놓곤 했다.
간단히 먹을거리를 산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둘은 다 익은 라면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작은 컵라면 하나를 깔끔하게 비운 정훈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시작했다.
“은수야, 하인선이란 여자 알아?”
“……알아.”
“사람들이 너랑 닮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 찾고 있는데 흔적이 없어. 연예인 생활을 짧게 했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신기해.”
“하인선이란 이름 아마 가명일 거야.”
정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하, 너무 멍청했어.’
가명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하여튼 그 사람이 너희 엄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인선의 사진을 어렵게 구해서 봤는데 천사 같은 얼굴이었어. 그 여자는 내 엄마가 아니야.”
“그래. 아닐 거야.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아니야.”
은수는 그의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도 표독스러운 얼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분명 같은 얼굴이지만 사진 속 그녀는 천사였고 자신의 기억에선 악마였다.
절대 자신의 엄마가 아닐 거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정훈의 코에 그날 맡았던 향수 냄새가 났다.
-킁킁
“야, 너 요새 향수 쓰냐? 남자 새끼가 향수를 쓰고 지랄이야, 재수 없게!”
“새끼야 이거 명품 중에서도 명품 향수야, 에르메스! 30만 원도 넘게 주고 샀다.”
“뭐? 미쳤냐? 그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너 이 새끼 요새 카드 존나 헤프게 쓰는 거 같은데 카드 내놔!”
“……. 이 향수, 엄마가 쓰던 거야. 엄마 냄새가. 웃기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향수는 기억하는 거.”
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곽현수의 말이 떠올랐다.
‘잠꼬대로 엄마에게 살라 달라고 하더군요. 학대를 받았던 거 같습니다.’
그따위 인간이 그리워서, 지금까지 그 냄새를 기억하는 은수가 가여웠다.
울컥하는 기분을 감추고 싶었다.
“개새끼야 어디서 구라야. 좆 까. 하여튼 이 새끼 명품 사랑은 알아 줘야 해. 카드 내놔!”
정훈의 눈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본 은수는 당황했다.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치다 냅다 도망쳤다.
-후우, 후우
-후우, 후우
가쁜 호흡을 몰아쉰 은수가 힘겹게 말했다.
“정훈아, 하인선 씨 그만 찾아도 돼. 내 엄마도 아닌데.”
“알겠어. 그런데 하인선이란 사람이 천성한 장군이랑 관계가 깊어. 천지회와 관련 있는 게 분명해.”
“그래? 좋은 사람은 아니구나.”
“아마도……”
“그런데 너 완전히 기억난 거야?”
“완전히는 아니고 아주 조금.”
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은수는 하늘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눈이 펑펑 내려 자신의 상처를 가려 주길 기도했다.
은수는 정훈을 힐긋 보고는 입술을 옴짝달싹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절반이 하인선에게서 나온 걸.
자신의 나머지 절반은 분명 더러운 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려진 것이리라.
티 없이 깨끗한 눈과 더러운 피를 가진 자신이 한없이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새해가 되었다.
명절 동안 정훈은 다혜와 은수랑 음식을 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 다 같이 할머니와 함께 들렀다.
할머니는 더 이상 명절 때 아프지 않았다.
명절날 그녀는 바쁘게 마실을 나갔다.
증권가 찌라시에 미래금융그룹 회장과 AR그룹 회장의 은밀한 회동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다.
찌라시는 두 사람의 회동을 사업상의 만남으로 치부했다.
그사이 여당은 분당을 해 열린당과 민주당으로 쪼개졌다.
총선을 앞둔 시기에 대통령은 선거 중립 시비에 휘말렸고 정치권에서는 선거 중립을 위반한 그를 탄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당과 야당은 합세해서 그를 사지로 몰았다.
그에게 굴욕적인 사과를 강요했지만 구한수 대통령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탄핵을 할 테면 하라고 맞불을 놓았다.
정훈은 조영진을 회장실로 불러 차를 대접했다.
“매번 횟집에서 보다가 회장실에서 보니 내가 기가 좀 죽는 것 같은데.”
“거기 가면 제가 기가 죽어서 오늘은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어르신도…… 그런 거 신경 쓰십니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와 보니 그렇지 않군. 자네……너무 커, 키도 이미 많이 큰데, 재벌 회장이 되어 버렸으니 너무 부담스러워졌어. 나한테 뒷방 늙은이라고 버럭하던 고등학생이 편했는데, 허허허.”
“하하하.”
정훈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끝나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구한수 대통령이 사면초가입니다. 어르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사실 잘 모르겠어. 이제 민주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도 구한수를 지켜야겠지.”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정훈은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다.
“이유가 있나?”
“탄핵을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나도 들었지만 설마 그렇게 하겠나?”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릅니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온몸으로 탄핵을 저지하십시오. 그리고 열린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의원님의 세력을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하긴 민주당에서 세를 불리는 것보다는 열린당이 수월할 거야.”
“네, 세를 불려 더 높은 곳으로 오르셔야죠.”
“이 사람이 또 말장난하기는, 이봐, 난 내 그릇을 알아. 장관 어쩌면 총리 그게 딱이야.”
“…… 사람 일은 모릅니다.”
“그래, 국민의 속은 알 수 없으니.”
조영진 의원이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비웠다.
“이봐, 윤 회장. 나에 대한 관심과 걱정은 고마워. 근데 나를 자네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면 잘못 생각한 거야.”
“……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르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 정치를 하는 목적이야 천지회 놈들을 쓸어버리는 거지”
“저도 같습니다. 어르신이 좀 더 쉽게 쓸어버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돕겠습니다.”
정훈은 조영진 의원 앞에 서류 파일을 놓았다.
“신화그룹에서 수집한 정보입니다. 요긴하게 쓰십시오.”
조영진은 인상을 구긴 다음 서류를 훑어보았다.
“크흠, 이런 자료는 필요 없네. 이런 걸로 협박하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야.”
“살다 보면 양아치가 되어야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아닐세, 원칙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지회입니다. 그런 놈들에게 정정당당하게 맞서면……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깁니다.”
“그건 그렇지만…….”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흠, 자넨 사람을 참 곤란하게 해. 칼춤도 내가 춰야 재밌지. 내가 휘둘려야 나한테 충성하겠지.”
“감사합니다.”
조영진이 서류를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이것 때문에 날 불렀나?”
“네.”
“자네 얼굴을 보니 자네는 소문을 믿는가 보군. 자네가 소문을 믿으면…… 그건 더 이상 소문이 아닌 게지. 곧 나라에 큰 위기가 오겠구만.”
“위기는 기회입니다. 어르신.”
“그래, 한번 살아남아 보자고. 나는 가 보겠네.”
“들어가십시오.”
회장실 문을 나서는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정훈은 닥쳐올 위기를 기회로 바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03년 말 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적인 의원들이 열린당을 세웠다.
민주당 소속이던 구한수는 열린당에 큰 호감을 보였다.
한 번의 실언을 핑계로 민주당과 보수당은 야합해 폭거를 저질렀다.
2004년 3월 12일 11시 55분.
재적 271명 중 183명의 찬성으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여의도에 메가톤급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날부터 서울의 밤은 수만 개의 촛불로 타올랐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