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은 모든 것을 삼키는 용광로였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열린당이 민주당과 보수당의 야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열린당은 탄핵을 기회로 삼아 발 빠르게 움직였다.
힘이 부족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가올 총선에 지지를 부탁하는 여론전을 시작했다.
열린당에 들어간 조영진도 자신의 세를 적극적으로 불리고 있었다.
중부시장이던 권율을 중부시 갑구에 국회의원으로 입후보시켰다.
을구에도 자신의 인물을 채워 넣었다.
그는 정훈의 자료를 적극적을 활용했다.
부정부패가 심한 의원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조영진은 상대의 정계 은퇴를 유도하고 조영진의 사람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수도권과 영호남 지역에 15곳을 채웠다.
그중에 당선권은 절반 정도였다.
“정훈입니다. 어르신”
“그래,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
“일은 잘되십니까?”
“부끄럽지만 잘되지. 내가 이리 협잡에 능한 사람인 줄 몰랐어.”
조영진은 양아치 짓이라 폄하했지만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은 쉬웠다.
활용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했어야 하는데.”
“아니야. 사실 자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체면과 명예만 차린다고 무소속으로 독야청청했는데, 지금까지 해 놓은 게 거의 없어.
하수구에 손을 담가야 하수구 청소를 할 수 있단 걸 이제야 알았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
“아닙니다. 어르신이 그만큼 맑았기 때문에 어르신을 선택한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이번에 세력을 만들면서 왜 정치를 해야 하는지 깨달았어. 이렇게 힘을 모으고 세를 불린 다음 법을 만들어야 해. 이제 이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썩어빠진 천지회 놈들을 쓸어버릴 거야.
그걸 이제 시작하니 한숨만 나는구먼. 허허허.”
“잘하고 계십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지 않습니까.”
“뭐? 도둑질? 푸하하, 하여튼 자네 어휘 선택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죠?”
“사람은 구할 수 있는데 좋은 곳을 따내는 게 쉽지 않구만. 당선 가능성이 큰 곳에 내 사람을 심어야 하는데……. 이찬희 의원의 방해가 만만치 않아.”
이찬희 의원은 구한수 지지 세력의 수장이다.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할 친親 구한수 세력의 핵심.
지금까지 두 명, 앞으로 한 명의 대통령을 더 만들어 내는 킹메이커이자 최고의 선거 기획자.
그를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의 품에 들어가야 한다.
“어르신은 이찬희 의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사람이야. 고집도 세고 욕심도 많아.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끼어들 자리가 없어.”
“흠, 가능하다면 그의 품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오랜 민주화 운동 기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들이 그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제가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이찬희 의원을 둘러싼 동지들이야 돈으로 쫓아내면 그만입니다.”
“우리나라에 자네만큼 많은 돈을 가진 사람도 없지. 그런데 돈으로 안 될 수도 있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흠, 기다리겠네.”
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이찬희를 잡아야 조영진 의원이 열린당의 실세가 될 수 있다.
정훈은 인터폰으로 비서실에 알렸다.
“이찬희 의원이랑 약속 좀 잡아 봐요.”
“네, 회장님.”
미래금융그룹 현정옥의 유일한 손자이자 신화그룹의 윤정훈이 만나자고 하면?
대부분 만난다.
몇 년 만에 재계 10위 안에 들 정도로 무섭게 성장한 신화그룹.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현금동원력을 가진 현정옥의 은행.
실패가 없는 인수 합병과 투자.
앞날을 예측하는 윤정훈의 능력.
돈 때문이 아니라도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되었다.
이찬희와의 약속은 쉽게 잡혔다.
1주일 뒤 하얏트 호텔 스위트 룸에서 이찬희 의원을 만났다.
스위트 룸 앞에 선 정훈은 심호흡을 했다.
앞날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윤정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찬희입니다.”
“약속 시간 보다 일찍 왔는데 먼저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항상 서두르는 편입니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힐긋거렸다.
이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이번 선거 때문입니다.”
“그룹의 수장이 국회의원 선거를 신경 씁니까? 신화그룹을 이끄는 윤 회장님은 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찬희가 공격했다.
“네, 저는 뛰어난 전문 경영인을 두는 성향이라서 직접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신화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만 제시하는 편입니다.”
정훈은 그의 공격을 가볍게 방어했다.
그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열린당이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아서 뵙자고 했습니다.”
“나아갈 방향이 안 보인다……. 허허 너무 어려서 큰 그림을 못 보는 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나이가 많으셔서 노안이 와서 큰 그림은 이제 못 그리시는가 했습니다.”
이찬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요?”
“먼저 나이를 들먹인 건 의원님이십니다.”
“끄흠, 내가 사과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서로 주고받은 것 같은데 본론을 말하세요.”
나이 먹은 꼰대치고는 생각보다 빨리 잘못을 사과했다.
“구한수 대통령님을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이찬희 의원님도 대통령님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알고 있습니다.”
정훈의 말에 이찬희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당이 집권당이 되길 원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이찬희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정훈은 의외였다.
대개 정치인은 항상 자신들의 세력을 부풀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제일 힘든 게 무엇입니까?”
“우리 열린당은 신생 정당입니다. 보수당에 조직력, 자금력, 인물까지 모두 밀리고 있습니다.”
“조직력과 자금력은 결국 돈으로 해결됩니다. 그런데 인물들은 왜 밀리고 있습니까? 보수당 내의 개혁적인 의원들과 소장파들이 열린당을 지지한다고 들었습니다.”
“귀가 밝으시네요.”
“저희가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그럼 아직 이건 모르나 보군요. 열린당을 지지하던 보수당 의원들이 모두 합류를 거부했습니다. 원래는 열린당의 이름으로 이번 선거에 출마를 계획했었는데……. 중간에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협박을 당한 겁니까?”
“그렇겠죠. 아주 예전부터 보수당의 뒤에 흑막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움직인 것 같더군요. 그런데 정말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라서요.”
정훈은 본론을 꺼냈다.
“돈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번 선거는 무조건 승리한다.
정훈은 이번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열린당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돈 말입니까?”
이찬희 의원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필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우리가 열린당을 창당한 건 돈 선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군요. 돈 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까?”
“……승리해야죠.”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승리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의원님, 선거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패배는…….”
“죽음이죠.”
이찬희도 알고 있었다.
열린당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민주당과 보수당의 의해 괴멸될 것을.
“통장이 있습니다. 이거면 무기도 사고 병사들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이길 확률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필요 없습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를 하고 싶은 게 우리 꿈입니다.”
“그런 소망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바로 세우고 꿈꾸세요.”
정훈의 당돌한 말에 이찬희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언론, 검찰, 경찰 모두 보수 세력에게 심각하게 우호적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의명분을 걸고 탈당을 해 신당을 창당한 그들.
쉽게 통장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만남은 생각보다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이찬희는 거절했다.
“흠, 금액은 확인하고 거절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기껏해야 수십억, 많으면 수백억이겠지요. 그 돈으로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수백억? 그 정도 금액엔 흔들리지 않겠죠.”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1조입니다. 군자금으론 엄청나죠.”
정훈의 말에 문을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훈은 일어서 이찬희에게 다가갔다.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묻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안 받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합니다. 보수당의 배후에 검은 흑막이 존재하든 아니든, 지금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번 선거는 돈과 시간을 아낄 기회입니다. 의원님이 가야 할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있습니다.”
정훈은 이찬희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번뇌가 가득했다.
1조.
그는 결코 거부할 수 없다.
“이렇게 큰돈을 쓰는 이유가 뭡니까? 윤 회장.”
“복수입니다.”
“복수라……. 그럼 정녕 보수당의 배후에 흑막이 있다는 겁니까?”
“보수당의 배후에만 있겠습니까? 민주당의 배후에도, 어쩌면 열린당에서 있을 겁니다.”
이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쓸어버려야 할 적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다.
정훈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 부탁은 하나입니다. 조영진 의원의 세력들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의원님의 좋은 지지 세력이 될 겁니다. 조영진 의원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 생각해 보겠소.”
‘됐다. 생각한다는 건 어쨌든 선거 자금으로 받겠다는 의사 표시다.’
“의원님, 보수당에서 넘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 주십시오. 돈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정훈은 적막한 호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때 이찬희 의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윤 회장님…… 고맙습니다.”
정훈은 복도의 카펫을 밟으며 엘리베이터로 갔다.
자신 또한 1조라는 거금을 내기 쉽지 않았다.
할머니의 비밀 자금이 아니었다면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회사를 살 수 있는가?
하지만 이번엔 여기에 투자한다.
이번 선거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음 선거, 그다음 선거를 위해서다.
천지회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때까지 그들을 몰아붙여야 한다.
그것이 오늘 이찬희에게 1조를 베팅한 이유다.
전화기를 꺼냈다.
“차영미 씨 보수당 당 대표 좀 털어 봐요.”
“네, 보스.”
‘보스? 괜찮은데.’
“왜요? 호칭이 맘에 안 들어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전화를 끊었다.
차영미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
“회장님, 이번 기회에 대통령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박수길이 어린 이석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석 옆에 앉아있는 하인선이 입을 열었다.
“박 영감님, 괜히 혼란만 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구한수는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를 쳐내고 천지회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앉혀야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석이 입을 열었다.
“천지회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박영감을 지지하는 사람 말하는 겁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창원 후보가 판사 출신이기는 하나 대쪽 같은 사대부입니다. 그 또한 전하를 충심으로 모실 겁니다.”
“글쎄요. 가재는 게 편이라는데, 이거 믿을 수가 있어야죠. 하하하”
이석은 박수길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대통령까지 사대부가 장악하면 큰일인데…….’
이석은 그들의 힘이 더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일단 탄핵을 부결시키세요. 이미 정해진 대통령입니다. 그와 할 일이 많습니다. 천지회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스타그룹엔 우호적입니다.”
“전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다. 이번 위기에서 구한수가 살아나면 그가 훨씬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커져 봤자 얼마나 커지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때 조용히 있던 하인선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이번엔 박 영감의 뜻대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 어머니!”
“구한수와 같은 불충한 싹들은 미리미리 제거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박 영감님.”
“맞습니다. 여사님.”
하인선은 이석 회장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이석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주름이 가득 생겼다.
꽉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박 영감 뜻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나가 보세요.”
불쾌한 목소리였다.
박수길이 회장실을 나가자 이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인선을 보았다.
“어머님! 방금 그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절 모욕하는 겁니다.”
“불쾌했어요? 우리 회장님. 내가 미안해요. 그런데 저 사대부 놈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요.”
“그들이 대통령까지 차지하면 이 황실의 권력을 능가할 겁니다.”
이석이 크게 소리쳤다.
큰 소리에 놀라 이마를 찡그린 하인선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대통령을 차지하기 전에 쓸어버려야죠. 불충한 버러지들을 이번 기회에 쓸어버릴 겁니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가만히 놔두세요. 숨어 있던 사대부 놈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올 겁니다. 이제 곧 그들의 세상이 올 거라 착각하는 거죠. 그때 한 번에 쓸어버리면 됩니다. 그게 우리 황실이 해왔던 전통 아니겠습니까.”
“설마…… 저들 모두를 쓸어버린다는 겁니까?”
“저들 모두와 가족들까지 싹 쓸어 버릴 겁니다. 누구도 우리 회장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인선의 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불타고 있었다.
한편 회장실을 나온 박수길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제 이창원이 대통령이 되면 사대부의 시대가 열린다.
그는 전화기 꺼냈다.
“어 고 판사 계획대로 탄핵해.”
“네? 그게…….”
“잘 안 들려? 구한수 탄핵으로 판결 때려.”
“……. 알겠습니다. 끊습니다.”
고민수 헌법재판관은 다급하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윤 회장.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고민수 헌법재판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양쪽에서 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