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허허, 일국의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다니…….”
“갑자기 연락을 하셔서……, 급하게 나왔지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사실 이렇게 혼자 있는 걸 즐깁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로는 통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요.”
구한수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었다.
열린당이 압승하고 탄핵은 기각되었다.
그의 앞에 장애물은 모조리 제거된 상황이었다.
“걱정이 많아 보입니다. 대통령님”
“허허, 제대로 보셨습니다. 지금 상황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번 탄핵 사태로 천지회라는 조직이 실체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호사가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고민수 헌법재판소장님과 제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윤 회장님과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역사가 바뀌고 있었다.
고민수 판사는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살아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의 변화는 거대한 강물에 작은 모래알을 던지는 것이지만 고민수는 급이 달랐다.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가 강물에 떨어지는 격이다.
“그래서 저도 약간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믿을 만한 검사를 통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검사가 어제 사직서를 냈습니다.”
“이유는 뭐였습니까?”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족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천지회 놈들이 쓰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주변 사람의 흠을 찾아내 압박합니다.”
“난감합니다. 조사만 시작했는데도 이렇게 강하게 반격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대통령인지 천지회가 대통령인지 분간이 안갈 지경입니다.”
정훈은 구한수는 엄살을 눈치챘다.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 여론의 열열한 지지와 과반수가 넘는 국회 의석까지.
모든 것을 갖춘 그다.
하지만 이 싸움에 직접 손을 담그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합법적이고 절제된 수단밖에 없다.
‘하긴 본능적으로 안 걸까? 개싸움보다 더욱 잔인해져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인 것을’
정훈은 구한수를 보며 그저 웃었다.
그가 원하는 말을 꺼냈다.
“제 손을 원하시는군요.”
지금 구한수가 전투에 나선다면…… 이길 확률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구한수가 가진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불법적인 공격에 합법적인 공권력은 속수무책이다.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그의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
그의 뿌리는 아직 너무 얕다.
“윤 회장, 염치 없지만 부탁드립니다.”
구한수의 표정에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훈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구한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구한수와 자신, 둘 다 목적은 같았다.
천지회의 말살.
구한수가 개입하면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을 활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혼자서 한 복수였다.
앞으로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도움이 있다면 좀 더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정치인이다. 절대 믿을 수 없는.
뒤통수를 언제 칠지 모른다.
정훈은 장고를 거듭했다.
방안에는 시곗바늘 소리만 크게 들렸다.
결단을 내렸다.
“제가 가진 힘을 최대한 활용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제 부탁은 반드시 들어주십시요.”
“무슨 부탁입니까?”
“무조건적인 부탁입니다. 그게 저의 조건입니다.”
“흠, 무조건이라…… 어쩔 수 없죠. 제가 부탁하는 입장이니. 대신 너무 무리한 부탁은 안 됩니다.”
구한수는 별 고민없이 정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지 않은 징후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진 걸까?’
하지만 어차피 그와의 문제는 천지회를 쓸어버린 다음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무엇도 두렵지 않다.
‘막아서는 건 모두 쓸어버리겠다.’
정훈의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둘 사이에 서로 만족스러운 합의가 이뤄졌다.
음식이 들어오고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구한수에게 정훈이 말했다.
“천성한을 쳐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여당 내에서도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를 후원하는 한판수를 먼저 칠 계획입니다. 한호그룹을 가지겠습니다.”
“네?”
구한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국내 방위산업체 중 매출액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 회사를 가진다는 정훈의 제안에 구한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하하, 좋은 수입니다. 의도를 감추면서 군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군요.”
구한수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정훈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했다.
지금까지 인수합병으로 성장해 온 신화그룹이다.
한호그룹을 먹는다고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호그룹의 주력이 방산업체이다.
그들의 돈을 먹고사는 영관급, 장성급 군인이 한 둘이 아니다.
한호그룹을 장악하면 그들을 장악한다.
보수주의 이념?
결국은 돈이다.
자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안 지현복에게 전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천성한이 박현철을 칠 것 같습니다.”
천성한이 박현철을 친다면 박수길에 대한 대비가 마련되어 있다는 건데…….
정훈은 그들이 가진 패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직 하인선을 만나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베일 속에 꽁꽁 감춰진 하인선이었다.
그녀에게 확인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닌데…….
죽은 걸까?
그럼 다행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천지회에 최고층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흔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대원각의 사무실 안.
정마담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영롱한 푸른 색 네일아트를 한 손톱이 반짝였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걸려 있는 얇은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
붉은 입술만큼 뜨겁게 타올랐다.
귀에 꼿힌 이어폰을 빼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전화를 들었다.
“구한수와 윤정훈이 손을 잡았습니다. 천성한 장관이 목표입니다. 먼저 한판수를 칠 계획입니다.”
***
“찾으셨습니까?”
박현철은 부친 박수길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 왔다.
“앉거라.”
굳은 표정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오늘 거사를 치를 거야.”
“네?”
“천성한을 친다. 그를 구속해 10년 정도 처넣어야 이석의 황실 놈들이 주제를 파악할 것 같구나.”
박현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이석의 권한이 너무 커졌어. 그를 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한다. 대통령 탄핵을 그가 막았어.”
“네?”
박현철은 믿을 수 없었다.
구한수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건 천지회의 당면 목표였다.
“확실해. 그의 힘이 법조계로 뻗치고 있어. 반격을 가하지 않으면 우리 힘을 잃게 된다.”
“꼭 하셔야 합니까? 천성한이 가진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늘 일거에 치는 거야. 네가 직접 천성한의 목줄을 쥐거라. 사대부의 힘을 보여 줘야지.”
내키지 않았으나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이석 편에 선 그.
군대를 우리 쪽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
“알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좀 내 아들 같구나. 서둘러. 오늘 천성한과 그의 수족들을 동시에 체포할 거야.”
“알겠습니다.”
박현철은 법원에서 발부한 체포 영장을 들고 천성한이 있는 국방부 장관실로 향했다.
그의 앞을 부관이 막아섰다.
“회의 중입니다.”
“이 새끼도 체포해.”
검찰 수사관이 삼단봉을 그의 이마를 향해 휘둘렀다.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천성한의 기를 눌러야 한다.
바닥에 쓰러진 부관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박현철은 부관의 머리채를 쥔 다음 그를 질질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관님, 대검 박현철 차장검사입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천성한이 고개를 돌려 박현철을 보았다.
박현철을 본 그의 얼굴엔 서늘한 살기가 가득했다.
“다들 나가 봐. 현복이는 대기해.”
다급히 사람들이 밖으로 사라졌다.
“이봐, 일단 앉아. 급할 거 있나? 그리고 자네랑 독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기회를 주는 거야.”
“헛소리는 집어치우지. 체포해.”
박현철의 말에 천성한이 두 손을 내밀었다.
은색의 철제 수갑이 그의 손에 채워졌다.
“쯧, 하여튼 사대부란 새끼가 긴장하면 여유가 없어요. 이봐,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은 줘야지. 안 그래?”
박현철이 수사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하얀 연기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만 가지. 이제 곧 저녁 시간이야. 맛있는 설렁탕 한 그릇 대접하겠네.”
“후, 이거 끊으라고 했는데……. 날씨가 참, 죽기 좋은 날이다.”
천성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현철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흠칫 놀란 박현철의 어깨가 짧은 순간 움츠러 들었다.
‘뭐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어. 마치 기다린 사람 같은데.’
“연행해.”
수사관은 대답 없이 천성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채웠던 수갑을 풀었다.
“무슨 짓이야.”
박현철이 일갈했지만 그는 아무 반응 없이 방을 나섰다.
당황한 수사관들.
천성한이 일어서 품 안에서 있던 총을 꺼냈다.
박현철의 이마에 총구를 갔다 댔다.
차가운 총구의 한기가 느껴졌다.
“무, 무슨 짓이야? 머, 멈춰!”
당황한 박현철이 소리쳤다.
“이거 제발로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현복아 시작해.”
곁을 지키던 지현복은 품 안에 있던 최루탄을 꺼내서 터트렸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다.
매운 연기에 모두의 의식이 사라지고 있었다.
방독면을 쓴 천성한과 지현복만이 장관실에 우뚝 서 있었다.
***
정신을 차린 박현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거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이 체포영장을 거부하고 자신을 납치했다.
‘다른 수사관들은 어떻게 된 걸까?’
갑작스럽게 켜진 조명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때? 이런 결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천성한이었다.
“어디지 여긴?”
“굳이 알 필요 있나? 이제 곧 황천길 갈 사람이. 하하하. 하여튼 먹물들은 군인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니 이렇게 당하지.”
“감당할 수 있나? 이런 짓을 벌이고? 차관급 검사를 납치하다니…… 훗”
“이미 다 정리되었네. 기무사로 끌려간 자네 수족들은 모두 입을 닫기로 철석같이 약속했어.
냄새가 어찌나 고약하던지. 조금만 털었는데 비리가 쏟아져 나왔어.
그리고 자네를 어떻게 할지도 지금 논의 중이야.”
약점을 쥐고 상대의 입을 막는 수법.
검찰에서, 천지회에서 항상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법의 힘은 자신들의 힘이었는데…….
대한민국 법원에서 발부한 체포 영장이 이렇게 맥을 못 추다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검찰 서열 3위인 나를 죽일 건가?”
“글쎄. 그건 내가 결정할 게 아니지.”
“그럼? 누가…….”
“자네 아버지, 박수길 영감이 결정할 거야.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
“박현철이 왜 천성한 장관을 체포하려 한 거죠?”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하인선은 고개를 숙인 박수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면, 박현철이 감히 영감의 허락도 없이 일을 벌렸단 말이군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박현철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박수길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인선의 말은 아들의 죽음을 뜻한다.
“박 영감. 어떻게 할 겁니까?”
하인선이 눈을 부라리며 박영감을 재촉했다.
박수길은 위기를 느꼈다.
하인선의 얼굴 뒤에는 분명 날카로운 칼이 숨어 있다.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 자신의 목을 노리는 살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힘으론 이들을 제압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종이로 그를 겁박하는 것인데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저 여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신도 불귀의 객이 된다.
“내 아들이지만, 제멋대로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박수길의 항복을 받아 낸 하인선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은 머리도 아플 테니 회포나 푸십시오. 깨끗한 아이들로 준비했습니다.”
그말을 들은 박수길의 눈이 반짝였다.
솟아나는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잊혀진다.
내일은 어제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일 것이다.
아들은 보이지 않겠지만, 자신의 삶은 분명히 바뀌지 않는다.
하인선이 문을 열자 반라의 여인들이 박수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욕망에 허우적대는 박수길을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 보았다.
하인선은 박현철이 감금되어 있는 대원각의 지하 창고로 갔다.
의자에 묶인 박현철이 자신을 보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제거해 줄 텐데.”
그녀는 박현철을 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천성한을 보았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길 만큼 큰 산,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포기했어요. 아비가 자식을 버리는 게 특별한 건 아니지요.”
“수고했어.”
천성한이 하인선을 끌어당기며 품에 앉았다.
그것을 본 박현철의 눈이 찢어질 만큼 커졌다.
“너희들이…….”
두 사람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죽을 박현철의 입 따위는 상관없었다.
“이제 곧 우리 세상이야.”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
지현복은 차 트렁크에 박현철을 넣은 다음 차를 몰고 강원도로 향했다.
거기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숲이 가득했다.
“접니다. 천성한이 박현철을 제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지금 제 트렁크에 있습니다.”
정훈은 지현복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하지?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가 가진 힘이 필요했다.
“강원도 인제로 향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뺏어 가셔야 합니다.”
“그쪽으로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죠.”
정훈은 박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납치되어 끌려가고 있는 박현철을 구하라고 했다.
-꽝
박창수가 탄 갤로퍼가 승용차 옆구리를 세게 박았다.
한 바퀴 구른 차.
안에서 지현복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다급하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트렁크에 있습니다.”
트렁크에서 박현철을 확인했다.
의식은 없었지만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그를 자신의 차로 옮겼다.
“가 보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잠시만요.”
지현복은 품에서 칼을 꺼내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 박창수와 시선을 교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윽”
날카로운 칼이 지현복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이왕 속이려면 제대로 속여야 한다.
지현복은 자신의 옆구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았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의식이 희미해 졌다.
‘하, 새끼 너무 깊이 찔렀네.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운명이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스, 습격입니다. 박현철이 도망쳤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천성한의 천둥 같은 고함이 수화기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지현복은 희미한 웃음을 띈 채 의식을 잃었다.
‘후, 이렇게 죽는 건가?’
***
정훈은 박현철을 인제에 있는 산골 마을로 보냈다.
은밀한 곳이라 노출될 위험이 적었다.
박현철이 자신의 힘이 될지 다시 천지회로 돌아갈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를 구하기로 결심한 건 그가 초임 검사 시절 맡았던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도 정의로운 검사였다.
조폭을 소탕하고
비리 정치인과 기업을 구속시켰다.
그 또한 한때는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였다.
‘박현철의 가슴에 정의란 게 남아 있을까?’
정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비릿한 웃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