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24화 (124/200)

#124화

“으으으”

박현철은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어제 먹은 술이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손을 뻗어 차가운 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 한 병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정신이 드네.’

역시 아침 해장엔 소주 한 병이 딱이었다.

강원도 인제군의 어디라고 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윤정훈의 말이 그를 비참하게 했다.

‘박수길 어르신이 당신을 버렸습니다. 당신이 다혜를 버린 것처럼요.’

의심스러웠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 온 거지?’

윤정훈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던 질서가 고작 이런 거였나?

다혜가 떠났을 때만큼 의욕이 없었다.

오직 술만이 그를 지탱하게 했다.

박현철은 밖으로 나갔다.

장마라서 비가 쏟아졌다.

시원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산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감기 걸립니다.”

서른 살이 조금 넘은 경찰관이 우산을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말없이 걸었다.

“박현철 검사님.”

자리에 멈춰 섰다.

‘천지회 놈인가?’

박현철이 경계하며 그를 보았다.

“저 기억 안 나시죠?”

“누구신지?”

“20년 전쯤에 통영에서 학교 폭력 사건 일망타진하셨죠?”

기억이 났다.

통영지청에 있을 때의 일었다.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악랄했던 일진 무리를 소탕했다.

통영 지역 고등학생들의 일진 연합이었다.

조폭들 잡듯이 그들을 조사해 와해했다.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박현철은 가해자들을 모조리 구속한 다음 모두 소년 교도소로 보냈다.

소년원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박현철은 의욕적으로 수사해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던 소년의 눈빛 안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었다.

박현철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그때 그 얼굴이었다.

“설마…… 도경수 학생?”

“기억하시네요.”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네가 경찰이 됐을 줄이야.”

“사실, 검사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머리가 영 그랬습니다.”

“하하하, 그래? 이거 내가 과외라도 했어야 하는데…….”

“검사님, 괜찮으신 거죠?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 파출소에서 수상한 사람이라고 조사하라는 거 제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둘러댔습니다.”

“고맙군.”

“다시 돌아가셔야죠.”

“자넨 나를 아나?”

“…… 글쎄요. 모르죠. 그런데 제가 경찰이 되도록 이끌어 준 분입니다.”

“그때의 내가 아니네. 더러워졌어.”

“그게 중요합니까? 나약한 저도 경찰이 됐습니다. 검사님도 정의로웠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박현철은 자리에서 멈춰섰다.

자신이 정의롭길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잃은 이 순간 박현철은 할 수 있다고 느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박현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고맙네. 오늘 일 잊지 않겠네. 자네 덕분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항상 검사님께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다음에 보세.”

박현철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전화를 걸었다.

“지금 좀 오게. 다혜랑 같이.”

박현철이 윤정훈을 불렀다.

***

깊은 산속에 있는 별장같은 집 앞.

정훈은 다혜를 보았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박현철의 굳은 얼굴이 그들을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 안 했지? 먹자.”

정훈은 자신들 앞에 놓인 국수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젖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정훈도, 박현철도 극도로 어색한 침묵을 반찬 삼아 국수를 먹었다.

“어릴 때 가끔 국수를 해 주면 다혜가 참 좋아했었지.”

박현철이 자신의 딸을 힐긋 보았지만 그녀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찾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 박현철이 모두에게 버림받았어, 허허허. 자유인이 된 거지. 그래서 이제 제대로 해 보려고.”

“…… 알겠습니다.”

정훈은 세세하게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제대로 한다는데 나쁜 의미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저를 부르신 건 제 힘이 필요한 겁니까?”

“그렇지. 역시 똑똑해서 말이 잘 통하네.”

“검찰로 돌아가실 겁니까?”

“내가 있을 곳이 거기 아닌가?”

“강철중과 김수호에게 말해 나를 지원하라 해 주게. 그거면 충분해. 둘 다 스마트하니 제대로 할 수 있을거야.”

“제대로 하고 싶습니까?”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검찰 내에는 천지회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 내가 그들의 우두머리였어도 이제는 아니지. 버림받은 자식 아닌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이왕 제대로 하실 거 검찰총장 하시지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박현철의 눈동자가 찢어졌다.

‘아니, 어떻게 나를 거기에 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대체 자네는 어디까지 성장하는 거야?’

박현철은 정훈이 한 말을 믿어야 했지만 정말 믿기지 않았다.

정훈은 전화를 꺼냈다.

“접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박현철 검사를 검찰총장에 내정해 주십시오.”

“천지회의 핵심 인물 아닌가?”

구한수가 걱정했다.

“그가 검찰 안에 숨은 천지회 세력을 궤멸할 겁니다.”

“알겠네.”

전화를 끊은 정훈은 박현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아버님이라…… 고맙네. 내가 지은 죄는 천지회를 쓸어버린 다음 꼭 받겠네. 그때까지만 참아 주게.”

“……네. 숙소는 호텔로 하시죠. 거긴 놈들도 쉽게 손쓸 수 없을 겁니다.”

박현철과 다혜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도로에서 휴게소에 들렀을 때 박현철이 핫도그에 케찹을 가득 발라서 다혜에게 줬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박현철을 호텔에 내려 주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다혜는 정훈을 꼭 안았다..

“고마워”

그녀가 정훈에게 짧게 입맞춤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조금씩 바로잡아 가고 있었다.

정훈은 강철중과 김수호 검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철중은 불쾌해했지만 대의를 위해 따르겠다고 했다.

김수호 검사는 군말 없이 정훈의 지시를 따랐다.

박현철이 대검에 모습을 드러내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말없이 사라진 그.

다시는 검찰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실로 들어가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차분히 할 일을 정리했다.

얼마 후 강철중과 김수호가 인사를 하러 왔다.

“앉지.”

그는 담담히 말했다.

“검찰청 개망나니들이군! 앞으로 망나니짓 제대로 해야 할 거야. 그리고 강 프로.”

박현철이 강철중을 보았다.

“네.”

“내가 저지른 죗값은 꼭 나중에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잠시만 참아 주게. 부탁하네.”

박현철의 담담한 어투에 강철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지금…… 차기 검찰총장에 지명 되셨습니다.”

박현철은 대한민국의 모든 검사를 지휘하는 검찰의 수장에 지명되었다.

보수당과 민주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배신자가 된 그는 천지회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인사 청문회를 넘어서기 어려워 보였다.

정훈은 이찬희 의원, 조영진 의원과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 전체와 약속을 잡았다.

열린당 의원의 절반이 모였다.

“윤 회장님, 덕분에 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찬희 의원이 정훈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숟가락만 얹었습니다.”

“보수당에서 발목 잡힌 사람들을 윤 회장이 보내 주지 않았다면 과반수는 어려웠습니다.”

이찬희 의원이 지나가면서 했던 부탁.

열린당에서 보수당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의원들을 정훈이 데려왔다.

보수당 당대표 이창훈을 차영미가 털자 보물 창고처럼 그의 비리가 쏟아졌다.

그런 자가 사소한 비리를 꼬투리 잡고 보수당 당내에 열린당 지지 의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우스웠다.

정훈은 이창훈과의 담판을 통해 열린당 지지 의원들이 보수당을 탈당할 수 있게 만들었다.

강한 채찍과 함께 후원이라는 당근도 그에게 제시했다.

그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찬희 의원, 조영진 의원, 권율 의원 등등.

정훈은 자신을 보고 있는 의원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여러분들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박현철 검사의 인사청문회 때문입니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특히 조영진 의원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흠, 자네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하겠네. 하지만 영 내키진 않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현철을 내칠 수 없다.

그는 검찰 내에 있는 천지회를 알고 있다.

그라면, 모두를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

“검찰을 정상화할 겁니다. 박현철이 천지회를 쓸어버릴 겁니다.”

“믿을 수 있나?”

“믿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잘 알지 않습니까? 행동으로 보여 줄 겁니다.”

“두고 보지.”

인사청문회가 개시되자 격렬한 반대가 터져 나왔다.

그의 사생활부터 모든 의혹이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사실도 근거없는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박현철은 꿋꿋히 버티며 사퇴설을 일축했다.

그리고 조영진 의원, 이찬희 의원을 중심으로 열린당의 의원총회가 열렸다.

당론으로 박현철 후보자를 승인했다.

다음 날 보수당도 회의를 통해 박현철 후보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하루만에 보수당의 입장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자 사람들은 의아했지만 곳 기억 속에서 지웠다.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박현철은 검찰총장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묘서동처(猫鼠同處), 도둑잡을 사람과 도둑이 한패가 됐다며 강력한 검찰정화 의지를 내세웠다.

그는 검찰 고위직 중 절반의 사표를 받아 내며 검찰 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정훈은 보수당 이창원 의원에게 감사의 전화를 걸었다.

“의원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자네 말을 어떻게 거역하나.”

“제가 목줄만 쥐고 있습니까? 후원도 하지 않습니까?”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네.”

정훈은 상당한 금액을 신화그룹 계열사를 통해 보수당에 후원하고 있었다.

조건은 하나.

이념을 떠나 천지회 사람들의 배제였다.

박수길 라인인 그는 정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모든 권력을 쥔 박수길은 죽기 전에 그의 권력을 내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보수당 내의 천지회의 세력을 축출했다.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정훈은 고민수 헌법 재판관의 연락을 받았다.

을지로의 한 족발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날씨가 벌써 가을이야. 여기 족발과 순대국밥이 별미야. 자네도 들게.”

밥 먹자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그는 묵묵히 식사만 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흠…… 법관의 양심에 찔리는 구먼.”

고민수 판사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행정 수도 이전 특별법이 위헌 판결이 날거야.”

“네?”

“그게 말도 안되는 경국대전을 들먹이는데…… 니미 좆같아서……”

고민수가 정훈을 힐긋 보고 말을 이었다.

“원래 내가 입이 좀 거칠어 미안하네. 흠흠. 하여튼 개새끼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내리려고 해. 박수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지.”

“그렇습니까?”

정훈이 담담히 되물었다.

“괜찮나?”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모든 일에 개입할 순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훈도 깨달았다.

박수길의 법무법인 해송을 정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박수길이 있다.

일송 그룹처럼 빌딩을 폭파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위헌 판결을 지켜볼 수밖에.”

“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그렇긴 하지. 많이 먹어 이집 국밥이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네가 사는 건데, 하하하”

구두쇠 영감.

누가 이 사람을 헌법재판소장이라고 생각할까?

남루한 정장에 낡은 구두, 그리고 40년은 함께한 것 같은 가죽 가방.

그는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가 사망하면서 남몰래 했던 선행이 알려졌다.

기부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재산인 육신도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기부했다.

진정한 거인의 위대한 흔적을 남긴 그는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정훈은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가방이 너무 낡아 보여서 준비했습니다. 명품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인사동 가죽 장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나, 에르메스 좋아해. 선물해 주면 그거 팔아서 보낼 때가 있는데……아쉽군. 그래도 선물 고맙네.”

그는 선물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인사동 장인이란 말에 만족한 듯 입술을 길게 늘어트렸다.

“내가 원래 이런 건 안 받는데 이거는 자네 성의를 봐서 받지. 으음, 새 가죽 냄새가 좋군 흠. 아 갈 때 족발 200인분만 계산해 놓고 가. 보낼 데가 있어.”

“알겠습니다.”

“궁금하지 않나?”

“별로요.”

“재미없는 놈이군.”

정훈과 그의 얼굴에 기분좋은 미소가 그려졌다.

***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판결이었다.

경국대전을 들먹인 그들의 해괴한 논리에 정훈의 입에서도 고민수 판사와 같은 욕이 튀어나왔다.

“니미 좆 같아서.”

차를 운전하던 은수가 백미러로 힐긋 정훈을 보았다.

“야, 욕이 찰진데.”

“나라 꼴이 우스워서 그러지.”

은수가 모는 차는 조용히 한호그룹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에 내리자마자 자신의 몸에 향수를 뿌렸다.

“그만 뿌려 새끼야, 그게 돈이 얼만데. 너 카드 빨리 반납해라.”

“네 카드 안 써 이 새끼야, 쪼잔한 새끼. 할머니가 주셨어. 마음껏 쓰라고 하시던데. 흐흐흐.”

“무슨 향수를 이렇게 많이 뿌리냐?”

“왜 좋잖아.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뿌렸다. 이 새끼야!”

은수의 엄마 드립에 살짝 울컥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닥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밀폐된 공간은 곧 은수가 뿌린 향수 냄새로 가득찼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비서실장이 정훈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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