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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28화 (128/200)

#128화

“시향 하시겠습니다.”

“네.”

활짝 웃는 은수를 본 직원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예술 작품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반했나?’

시향을 하는 건지 은수를 뜯어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명이 하면 될 일을 지금 세 명이 나눠 하고 있다.

모든 여자가 힐긋거리며 은수를 보았다.

“하, 너무 좋네요. 이걸로 주세요.”

“네.”

“잘 쓸게 정훈아. 땡큐.”

모두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정훈과 은수를 힐긋거렸다.

우리를 한번 보고는 자기들끼리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가 봐도 의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하, 이 새끼랑 엮이면 되는 일이 없다. 다혜가 필요해!’

정훈은 주변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은수는 아니었다.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큰 거다.”

은수가 화장실로 사라진 뒤 혼자남은 정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뻔했다.

남자 하나 훔쳐 간 게이를 보는 얼굴이었다.

등 뒤에서 은수가 뿌린 향수 냄새가 짙게 났다.

‘하, 기분 더럽네. 빨리 가야지.’

정훈은 일어서 뒤를 보며 말했다.

“가자!”

은수가 아니었다.

완벽한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정훈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은수와 같은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인 줄 알았네요.”

고개를 숙여 사과한 정훈은 순간 멈춰 섰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누구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생각을 거듭했지만, 안개처럼 희미하게만 그려졌다.

아주 작은 힌트만 있으면 알 것 같은 느낌.

답답했다.

화장실에 간 은수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튼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데는 도가 튼 녀석이었다.

***

‘윤정훈인데…….’

하인선은 앞을 막아선 청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제로는 처음 봤다.

‘생각보다 잘생겼는데, 사람들 말이 맞네.’

그녀는 정훈을 피해 직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여사님.”

VIP 고객인 그녀의 얼굴을 알아챈 직원이 인사했다.

“평소에 사던 향수 가져와.”

“그게…….”

“왜?”

“그게…… 조금 전에 마지막 하나 남은 걸 저분이 사 가셨습니다.”

직원이 윤정훈을 가리켰다.

향수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잠도 잘 오지 않는데…….

하인선이 정훈을 보았다.

자신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설마, 나를 아는 건 아니겠지.’

그가 자신을 알 리 없었다.

“그럼 언제 들어와?”

“다음 달에 들어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저 향수 없이 한 달?

자신의 모든 불안과 우울을 해결해 주는 건데…….

하인선은 고민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벌어질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수면 부족, 히스테리.

잘못하다가는 다시 술에 손을 댈 수도 있다.

‘절대 안 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는 일어서 윤정훈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그 향수 제가 3배 가격에 사고 싶은데요. 부탁할게요, 제가 그게 없으면 잠을 못 자서요.”

하인선이 정훈에게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제 것이 아니라서요. 제 친구 건데 한번 물어볼게요.”

“부탁할게요.”

정훈은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누구지……. 분명히…….’

은수가 돌아오고 있었다.

“저기 오네요.”

정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희미하게 가려져 있던 이름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인선!’

은수를 보았다.

은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지만, 온몸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가, 가자 정훈아.”

“아…… 저분이 네가 산 향수가 없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정훈이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인선이 짧게 외쳤다.

“아, 아니에요. 없어도 돼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다급히 발걸음 옮겼다.

은수는 눈을 감고 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수야.”

정훈이 부르자 눈을 떴다.

“향수 이리 줘.”

정훈에게 받아든 향수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은수는 그녀의 앞에 섰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이…… 화…….”

하인선은 입술을 움직여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제 이름은 정은수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향수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구요? 저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 향수를 사용했는데…….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괴롭혔나요?”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향수를 쥐여 줬다.

“쓰세요. 저는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왜……, 왜 필요 없어진 거죠?”

두 눈만 겨우 깜빡이던 하인선이 힘겹게 물었다.

“제가 생각한 그리워하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였어요.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얼굴을 한 그녀가 제 엄마란 걸 조금 전에 깨달았거든요.”

“아…….”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은수는 발에 못이 박인 듯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하인선을 두고 정훈에게 돌아갔다.

옅은 미소를 지은 다음 일부러 크게 말했다.

“가자, 씹새야.”

은수가 정훈에게 욕을 날렸다.

감추고 싶었다.

“괜찮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담담히 말했다.

“방금 깨달았어. 향기 속에 존재하던 엄마는 꿈속에만 있었어. 내 엄마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야.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여자였을 뿐이야.”

그녀를 마주한 순간 눈앞에서 솟아오른 잔인했던 과거.

은수는 어린 시절의 참혹했던 기억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향기로운 꿈속에만 존재했던 엄마는 다정하고 상냥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마주한 아름다운 그녀는 처절했던 유년의 기억을 되살렸다.

정훈은 은수의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찼다.

“달려!”

“그래, 오늘은…… 뛰자.”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싶었다.

오늘은, 땀이 눈물을 감출 때까지 뛰어야 하는 날이다.

그날 정훈은 하인선을 추적하지 않았다.

두꺼운 악연의 끈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 강하게 느꼈다.

***

깊은 밤, 뒤척이던 이헌은 옆자리가 허전해 일어났다.

‘어딜 간 거지? 오늘도 못 자고 있나? 쯧, 벌써 며칠째야.’

침실을 벗어나 거실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방도 불이 꺼져 있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갈 사람은 아니었다.

‘그 새끼 만나러 간 건가?’

더러운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처음엔 의처증이라고 생각했다.

이석과 하인선 바라보는 천성한의 남다른 눈빛,

그리고 하인선의 애틋한 표정과 어색한 손짓들.

의처증을 떨쳐 내려 상담을 받았지만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과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의심을 떨치고 싶었다.

과학은 진리의 이름으로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천성한과 하인선, 그리고 그들의 아들 이석.

내 새끼는……. 살아 있을까?

그 아이가 생각났다.

하인선이 절에서 몰래 키우던 자신의 숨겨진 아이.

황실의 유일한 적통. 이환.

‘이미 죽었을 거야. 가방 속에서 살아날 수 없었겠지.’

후회 가득한 눈빛이 이헌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곧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하인선을 찾았다.

서재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안에서 하인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이환이 살아 있어요. 윤정훈과 같이 있어요. 어떡해요? 손이 떨려 잠이 안 와요. 약이라도 좀 구해 줘요.’

귀를 바짝 대고 엿듣던 이헌의 눈이 커졌다.

‘환이가 살아 있다니…….’

어지러웠다.

그는 문을 열고 진실을 마주할 수 없었다.

서재 문 앞에서 그날처럼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다시 침실로 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잠자리에 누웠다.

자신의 아들, 환이가 살아있다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더러운 비밀을 알게 된 순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의 후손을 남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석을 낳은 이후로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복수심에 불타던 어느 날, 술에 취해 강력하게 거부하던 그녀를 거칠게 제압했다.

강제로 그녀의 몸에 자신의 씨앗을 뿌렸다.

얼마 뒤 하인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5년 정도 지난 후에 그녀가 전라도 신안의 한 절에 은신해 있는 걸 알았다.

그녀를 잡으러 내려간 동네에서 할머니들과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높은 콧대 그리고…… 황실에 유전되는 어깨의 커다란 점.

직감했다.

‘내 아들이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아이를 적통으로 세우려면 모든 것을 밝혀야 한다.

아내를 빼앗긴 병신.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비밀을 밝혀야 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러면 모두 행복하다.

하지만 하인선은 생각이 달랐다.

고아원에 보내도 될 아이를 기어이 죽이려 했다.

가방에 담아 깊은 산속에 버렸다.

이헌은 방관할 수도 나서서 아이를 꺼낼 수도 없었다.

그는 아이가 담긴 가방을 고속버스 짐칸에 넣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이의 운명.

황실의 혈통이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아야 하는 인생.

가혹했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인선이 들어왔다.

“안 자고 있었어요?”

“잠깐 깼어.”

그녀에게 술 냄새가 풍겼다.

“신안에서 돌아온 이후로 술 끊은 줄 알았더니…….”

“……잠이 안 와서요.”

며칠 잠을 자지 못한 그녀는 양주 한 병을 비운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자신이 버렸던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헌은 잠들지 못한 채 눈만 반짝였다.

***

윤정훈과 이환이라니.

이환의 마지막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그때 하인선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도대체 누가 그 아이를 살린 거지?’

분명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다가 버렸다고 했는데.

이헌?

아니야, 그가 절대 알 리 없었다.

알고 있다면 병신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천성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놈 다 없애야 하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한판수부터 정리해야 한다.

한호그룹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하인선이 밀어주는 자금으로 한호 테크놀로지를 인수한 다음 육군을 장악한다.

그런 후에 눈엣가시 같은 두 놈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한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장성들과 회식 있어. 자네도 참석해야지.”

“물론이지 내 돈 먹고 사는 머슴 같은 놈들인데 가서 주인 행세 좀 해야지. 나중에 봅세.”

천성한은 전화를 끊었다.

책상 서랍 밑에 있는 대포폰을 꺼냈다.

“현복아, 오늘 밤 작전이다. 사람 하나 제거해.”

“어떻게 처리할까요?”

“늘 하던 대로 강원도로 보내.”

“알겠습니다. 타깃은 누구입니까?”

“타깃? 질문이 많아졌는데.”

“죄송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실패하면 은퇴하는 거야, 현복아.”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장군님.”

전화를 끊은 천성한은 법무법인 해송의 박수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의 피날레를 장식할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박 영감님, 천성한입니다. 계약서는 준비됐습니까?”

“강요에 의한 계약은 무효야.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자발적이었다고 말하면 됩니다. 강요인지 아닌지는 영감님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크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천지회가 재미있어졌어. 균형과 견제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질서가 무너져 버렸구만.

마음대로 해 봐.

자네들의 천지회가 얼마나 갈지 궁금하구만.”

“신라의 천년 역사를 뛰어넘을 생각입니다. 하하하.”

“웃음소리 한번 호탕하구먼. 내 지켜보지. 천년을 갈지 1년을 갈지.”

전화를 끊은 천성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차피 네 놈이랑 박현철도 곧 한판수를 따라갈 것이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

한남동에 있는 국방부 장관 공간에 대한민국 별들이 모였다.

“참모총장님 폭탄주 한번 시원하게 말아 보세요.”

천성한의 제안.

육군 참모총장이 잔을 길게 세운 다음 양주와 맥주를 1:1로 부었다.

“크하하, 역시 1:1이 진리지.”

“맞습니다. 장관님.”

“모두 잔 들어!”

“네.”

장군들이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성한은 한 명 한 명 장군들 모두와 눈을 맞췄다.

“이제 우리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건다. 알겠나?”

“네.”

크게 대답한 다음 모두 잔을 비웠다.

“거사는 언제 진행할 예정입니까?”

수도경비사령관이 질문하자 천성한이 그를 노려 보았다.

“사령관, 거사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장군님”

머리를 조아렸다.

“다들 입 조심해, 알겠나?”

“넵.”

얼마 뒤 한판수가 들어오자 모두 일어나 그를 환대했다.

“한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한판수는 오랜만에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숙인 얼굴 때문에 그들의 비웃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잔이 오가고 빈 병이 빠르게 쌓였다.

천성한이 한판수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봐, 내 부탁이 있네”

“이번엔 얼마야?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그래, 나도 잘 알지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나한테 회사를 팔게.”

“뭐? 무슨 소리야?”

한판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거였나? 이제 회사마저 빼앗으려 하나? 한 수를 준비해 두길 잘했어.’

침착해야 한다.

“한호 테크놀로지의 주식 전부를 나한테 양도해 주게.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주지.”

“얼마에 살 생각인가? 가격만 맞으면 나도 팔겠네. 나보다는 자네가 어울리지.”

“그래? 허허 알아주니 고맙군.”

“백 원 어떤가?”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어이쿠 미안하네, 천만 원으로 하지. 아니야 내가 통 크게 하겠네. 일억 어떤가?”

“장난하나?”

한판수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장난? 그건 이제부터 시작이지.”

문이 열렸다.

복면을 쓴 남자는 일어서려는 한판수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주삿바늘을 찔렀다.

한판수는 천선한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푸하하, 이런다고 내 회사를 빼앗을 수 있을 것 같나?”

인상을 찌푸린 천성한이 복면을 쓴 사내에게 물었다.

“벌써 약효가 도는 거야?”

“아직 아닙니다.”

“저 새끼 표정이 왜 저래?”

천성한이 한판수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무슨 짓을 꾸민 거야?”

“글쎄, 있지도 않은 거 잘 뺏어 봐.”

천성한은 한판수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준비한 계약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약물에 취한 그는 천성한의 지시대로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계약은 완벽하게 이뤄졌다.

촬영을 해 강요가 아니라는 점도 명확하게 남겼다.

하지만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처리해!”

“알겠습니다.”

지현복은 한판수를 차에 싣고 출발했다.

윤정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간 멈칫했다.

천성한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 실패하면 은퇴하는 거야.’

블랙요원의 은퇴는 죽음뿐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트렁크에 있는 한판수의 품에서 전화를 꺼냈다.

‘내 사랑 우리 딸.’

딸이 있었군.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는 전화기를 바닥에 두고 돌로 찍었다.

- 꽈직.

차로 돌아가 한동안 말없이 앞만 보았다.

‘가장 좆 같은 사이들이라서 가족인데……’

짙은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멍하니 응시했다.

굳어진 그의 얼굴이 퍼지며 웃음이 깃들었다.

지현복은 담담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꺼냈다.

“어쩔 수 없지. 내 목숨 주인은 내가 아니잖아.”

감출 수 없는 죽음의 공포.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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