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회의실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임원들은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추경석은 회의실에서 골프채를 가지고 퍼팅 연습을 했다.
모두들 알고 있다.
지금은 퍼팅 연습이지만 언제 풀 스윙으로 바뀔지 모른다.
“말들 좀 해 보세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KP증권을 통해서 지분 관리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국민연금 운용 본부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소액주주들에게 의결권 위임장을 받아 오겠습니다.”
자리를 지킨 이사들이 다급히 대응 방안을 쏟아 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퍼팅 연습만 했다.
슬쩍 친 골프공이 구멍을 벗어나자 고개를 좌우로 흔든 그.
“니미 …… 하여튼 되는 게 없네.”
골프채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퍼억.
“그래서 누가 그랬냐고? 그걸 모르잖아. 야, 증권. 설명해 봐.”
깜짝 놀란 증권사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예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우물쭈물댔다.
“야, 저 새끼 여기 눕혀.”
경호원이 증권사 사장을 퍼팅 연습기 위에 눕혔다.
“회장님…… 제발.”
“자, 입 다물어 이빨 깨져…….”
-툭
하고 골프채를 조금 세 개 치자 톡하고 골프공이 또르르 굴러 입술에 부딪쳤다.
다행히 큰 고통은 아니었다.
“자, 이제 드라이브 연습이나 해 볼까?”
경호원이 골프공을 세팅했다.
추 회장은 사색이 된 얼굴 앞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골프채를 휘둘렀다.
“회, 회장님, 오늘 당장 알아내겠습니다. 로버트 윤이 누군지, 소버린이 뭐 하는 회사인지 밝혀내겠습니다. 그, 그리고 전 직원을 동원해 소액주주…….”
“쉿, 이빨 깨집니다.”
추경석이 골프채를 크게 휘둘렸다.
우웅하는 소리가 적막한 회의실을 채웠다.
“자, 드라이브 갑니다!”
-으아아악
딱딱한 골프공은 일그러진 얼굴을 넘어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박혔다.
“마지막 기회야. 다음엔 저게 네 아가리에 박힐거야!”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침을 꼴깍 삼킨 그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다들 잘 들어. 일 똑바로 해! 돈 받아 처먹었으면 받은 거의 반이라도 해, 알겠어?”
“네!”
공포에 질린 임원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가!”
모두 자리를 비우자 비서실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로버트 윤이 한국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올해 스타그룹에 보낼 자금은 언제 보낼까요?”
“로버트 윤? 로버트……. 찾기도 어렵겠네. 자금은 일단 미뤄. 집이 불타게 생겼는데 미뤄야지.”
“네, 회장님.”
추경석이 골프채를 크게 휘둘렀다.
웅웅 대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퍽
티비가 부서졌다.
“로버트 이 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추경석이 조용히 말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지금 그룹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스타전자를 잃어 재계 순위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신경쓰지 마세요.”
이헌이 무심히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스타 그룹의 위상이 떨어지는 건 우리 이석 회장의 위상 하락과 같은 겁니다.”
하인선은 자신의 남편인 이헌을 표독스럽게 쏘았다.
“그래서 이제 KP그룹을 인수하자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스타그룹이 무너지면 대한민국과 황실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인선의 주장에 이석도 이헌도 반박하진 못했다.
전자를 빼앗긴 만회할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 회장님이 승인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어요.”
“소버린의 뒤에 당신이 있는거요?”
하인선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 회장님, 결정하기 어려울 땐 저에게 맡기세요. 이 어미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어머니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헌은 불쾌한 기색이었다.
“당신이 왜 이렇게 나서는 거야?”
“어미가 자식을 챙기는 게 나쁜 겁니까?”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교차했다.
그들은 이제 부부가 아니라 한 이불을 공유하는 가장 치명적인 적이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추경석 회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안녕 못했지요.”
“죄송합니다. KP그룹 경영권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자금 사정이 열악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한 달 정도는 봐드리죠. 대신 앞으로…….”
“잠깐만요. 회장님!“’
이석의 곁을 지키던 하인선이 끼어들었다.
추경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지만 재빨리 풀었다.
“자금 문제는 확실히 매듭지어야죠. 사정 봐줄 만큼 여기도 여유롭지 않아요. 내일까지 당장 입금하세요.”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께서 승인하신 문제에 이렇게 개입하시는 건 월권입니다.”
추경석은 밀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룹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
스타그룹에 보내야할 천 억을 미뤄야 숨통이 트인다.
“월권?”
하인선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싸늘한 웃음을 보였다.
“이석 회장님, 지금 애미가 우리 회장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을 행사하는 겁니까?”
유리를 긁는 목소리에 이석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닙니다. 어머님. 추 회장, 무슨 짓입니까? 당장 사죄하세요.”
추경석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장성한 아들을 제치고 나서는 어미도 우습지만 치마폭에 휘둘리는 아들놈도 한심했다.
최소한 이랬다저랬다 하지는 않아야 하는데…….
‘니미 나이도 어린 새끼가 이랬다저랬다 줏대도 없이’
저런 놈 밑에 있는 게 제일 골 아프다.
천지회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아직 공석인 천지회 수장을 누가 맡을지 궁금했다.
저 천방지축 애송이를 잘 보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하지만 자금 사정을 고려해 주십시오.”
“불가합니다. 내일까지 보내세요. 그래야 우리도 일황 폐하께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추경석은 하인선을 힐긋 보았다.
지가 아무리 설쳐도 회장은 아니다.
이석에게 다시 한번 간청했다.
“회장님, 아까 말씀하셨듯이 한 달만이라도 시간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옆의 힐긋 본 이석이 주저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내일…… 당장 하세요.”
“회장님!”
“어허, 추 회장. 지금 내 명을 거역하는 거요?”
“아, 아닙니다.”
“나가세요.”
“네.”
추경석이 뒷걸음으로 회장실을 나갔다.
“감히 제까짓 게 어디 우리 회장님 말에 토를 달고……”
“네, 맞습니다. 어머니.”
이석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이제 어머니도 아버지도 들어가시지요.”
“그래요. 먼저 들어갑니다. 일찍 들어오세요.”
“오늘은 늦을 것 같습니다. 모임이 있습니다.”
두 분이 방을 나가자 이석은 재빨리 자신의 책상으로 가 서랍 깊숙한 곳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얀색 약통에서 약을 꺼내 삼켰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몸에 활력이 돋기 시작했다.
“휴우……. 몇 시간만 늦게 먹어도 몸이 쳐진다니까.”
어머니가 싫어하셔서 버렸다고는 했지만 효과가 좋은 약이다.
흔치 않은 아버지 선물이다.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오늘은 누구랑 시간을 보낼까?
최근에 드라마 주인공으로 주가가 높아진 차혜주가 생각났다.
책상 밑에서 대포폰을 꺼낸 번호를 눌렀다.
“어, 난데 오늘은 혜주로 준비해.”
전화를 끊은 이석.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비린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
회사로 돌아온 추경석은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다시 골프채를 쥐었다.
공을 노려보며 한심한 이석의 표정을 떠올렸다.
크게 휘두르며 공을 정확히 때렸다.
벽이 퍽하며 박힌다.
이번엔 퍼팅 연습.
입꼬리가 올라간 하인선의 얼굴을 생각하며 잘 조준했다.
얼굴은 반반한 게 점점 기어오르는 게 제대로 손봐주고 싶었다.
공에 툭 갔다 대자 또르륵…….
구멍으로 한 번에 들어갔다.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니미, 이런다고 될 게 아닌데’
거칠게 골프채를 벽으로 집어 던졌다.
“회장님, 이헌 님 오셨습니다.”
“뭐? 잠시만!”
들어오라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인사했다.
이석의 부친 이헌이 자신의 회사에 나타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이헌을 상석에 앉힌 다음 다기 세트를 가져와 직접 차를 우렸다.
고소한 향이 회장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말차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힘없는 노인을 대접해 주고.”
“아닙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이헌은 눈을 감고 음미했다.
차에 조예가 깊은 그의 입에도 최상급의 말차였다.
“아깐 일부러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스타그룹에서 있었던 일을 이헌이 꺼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KP그룹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뜻입니다.”
추경석은 이헌을 보았다.
강남에 가진 그의 땅값만 공시지가로 수조 원이다.
시가로는 수십조 원이고 전국에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라면 KP그룹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 이석 회장과 여사님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궁금증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알고 싶습니까?”
이헌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아닙니다.”
‘얼마가 필요합니까?”
“비자금 천억과 적대적 M&A를 방어할 자금이 필요합니다.”
“5천억 빌려드리죠. 회사를 잘 지키세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은혜는 무슨 담보나 제대로 설정해 주세요.”
“뭐로 해 드릴까요?”
“KP정유 지분 30퍼센트를 담보로 잡죠.”
짧은 순간 추경석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30퍼센트면 1조 원의 가치가 넘는데…….
“하하하, 걱정 마세요. 담보일 뿐입니다. 천하의 KP그룹이 제 돈 못 갚을 것 같습니까?”
“네? 아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담보 설정하겠습니다.”
“우리 추 회장님은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다음에 술이나 한잔합시다.”
이헌은 그 말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입금될 겁니다. 그럼.”
갑작스럽게 이헌이 나타나 자금 문제가 해결되었다.
좋은 일은 분명한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부인과 아들이 반대한 일.
두 사람 몰래 자신을 은밀히 지원하는 상황.
모양새가 우스운 게 뭔가 큰 균일이 생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추경석은 스타그룹이 위기의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어쩌면 KP그룹이 스타그룹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
박창수가 회장실로 찾아왔다.
“준비됐습니까?”
“네, 오늘 밤 늦게 칠 예정입니다.”
오늘 밤 강남에 있는 요정 선운각을 칠 계획이다.
정훈이 밀어 버린 대원각이 장소와 이름을 바꿔 새롭게 만든 곳이다.
대원각의 손님들이 대부분 그쪽으로 가 있었다.
‘거기 하인선이 있을까?’
정훈은 은수의 모친 하인선과 천지회의 관계를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상대는 어떤 수준이었습니까?”
“강합니다. 조직원을 풀어 테스트했는데 고수라고 했습니다. 피해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힘을 보태죠.”
정훈은 곽현수와 지현복, 그리고 은수까지 데려갈 생각이었다.
힘을 모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인선이 거기 있는지.
그리고 박창수의 배후를 이제는 알아내야 한다.
***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윤동훈 본부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기분 좋은 접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티비에서나 볼 법한 아가씨들이 자신에게 술과 안주를 먹여 준다.
춤을 추고 몸을 흔들며 눈을 즐겁게 했다.
노래를 부른 아이가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본부짱니임, 오늘 재밌었어용?”
혀짧은 소리에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어 허허허, 덕분에 재밌게 놀고 있지.”
“그럼 이 잔도 한잔 받으세용.”
한동훈이 입을 열자 입에서 입으로 뜨거운 위스키가 전해졌다.
짙은 분내와 위스키의 과일향이 잘 섞여진 게 일품이었다.
천국의 신선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를 때였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난 다음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꺅, 꺅
헐벗은 그녀들은 낯선 남자들의 시선에 몸을 가리기 바빴다.
“경찰입니다. 미성년자 성매매와 마약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미성년자라니요. 마약은 또 무슨 말입니까?”
“경찰서로 잠깐 가시죠.”
그때 중년의 여인이 들어왔다.
“여긴 제가 정리할게요. 좀 있다가 오세요.”
그녀의 말에 경찰들과 접대를 하던 사람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자리를 떴다.
윤동훈 본부장이 그녀를 보았다.
“누구십니까?”
“이석 회장의 모친인 하인선입니다.”
베일에 가려진 절세 미모의 모친.
스타그룹 회장 이석을 휘두른다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함정에 빠진 건가?’
“무슨 짓입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요. 제가 수를 좀 썼습니다.”
“이런 협박이 통할 것 같습니까?”
“안 통할까요?”
비릿한 하인선의 웃음에 윤동훈의 고개가 힘을 잃고 숙여졌다.
미성년자 성매매에 마약이라니…….
마약?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건가?
입술이 짓이겨지도록 깨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KP그룹 의결권은 제 지시대로 행사하세요.”
“네?”
“두 번 말해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윤동훈 본부장님의 앞길이 활짝 열릴 겁니다.”
윤동훈은 고민했다.
이 상황에서 저항해 봤자 자신의 평판만 더렵혀질 뿐이다.
어쩔 수 없다.
양심을 팔 거라면 비싸게 팔아야 한다.
“10억 주십시오. 그럼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인선이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요사스러운 웃음이 방안 가득 채웠다.
“우리가 꽤 친해질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이 비릿한 웃음을 나눌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외쳤다.
“습격입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