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한국으로 돌아온 정훈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산적한 서류를 다 처리한 그는 신문을 보며 휴식을 취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게 바로 신문이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면 틈틈이 신문을 보았다.
경제면에 엔디비아의 주가 폭락과 부도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정훈은 혀를 차며 한숨 쉬었다.
이래서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된다.
다시 책상에 앉은 그는 자신의 만년필 잉크를 충전하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있던 오래된 열쇠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주신 비밀 창고 열쇠였다.
“오늘 내려가 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 온 정훈은 구석구석을 살폈다.
만호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지하 주차장 구석에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정말 주차장 끝 오래된 짐이 쌓여 있는 곳에 셔터가 보였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 여긴가?”
정훈은 플래시로 주변을 살폈다.
셔터가 내려오는 곳 옆에 열쇠 구멍이 보였다.
열쇠를 집어넣은 다음 옆으로 살짝 돌리자 열쇠가 돌아갔다.
정훈은 힘껏 돌렸다.
-끼이익
-드르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셔터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벽에 있던 전등에 주황색 불이 들어오면서 내려가는 곡선의 길이 드러났다.
차 한 대는 충분히 내려갈 수 있을 만한 넓이였다.
원래 있던 지하 2층을 필요에 의해 막은 것이 분명했다.
지하 한 층을 막을 만큼 중요한 게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확신했다.
‘무엇이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아래에서 불어왔다.
‘돈 냄새가 분명해.’
정훈의 얼굴에 미소가 저절로 그려졌다.
지하 2층은 텅 비어 있었다.
색이 다른 하얀 형광등만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텅 빈 공간의 끝에 커다란 회색 철문이 보였다.
정훈은 천천히 다가갔다.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정훈의 얼굴을 덮쳐 왔다.
어두운 실내, 정훈은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윽
손으로 눈을 가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강렬한 황금빛에 눈이 머는 줄 알았다.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두 눈을 감았던 정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실눈을 뜨자 희미하게 눈앞에 있는 차가운 물건의 형태와 색깔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었다.
손을 뻗어 하나를 잡았다.
도도한 황금 기운이 손에서 느껴졌다.
“하, 이게 도대체 얼마치야…….”
최소한 수십 톤은 되어 보였다.
두 눈을 깜빡이며 다시 확인했다.
수십 킬로가 아니라 수십 톤.
톤당 금값이 200억 정도, 금액으로 따지면 최소 조 단위의 황금이었다.
정훈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이걸 다 언제 사셨어요?”
“지금 확인한 거야? 취미로 조금씩 산거야. 아, 옛날에 금 모으기로 모은 금을 천지회 놈들이 외국에 판다고 하길래 내가 싹 다 사서 다시 한국으로 가져왔지. 그때 산 20톤이랑 그 전에 들고 있던 거, 그리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해서 산거.”
“그럼 이게 다해서 몇 킬로, 아니 몇 톤이에요?”
“200톤이야.”
깜짝 놀라 되물었다.
“200톤요?”
“그래. 얼마 안 되지만 유용한 데 써. 나 지금 잡초 뽑아야 하니 이만 끊으마.”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정훈은 홀로 황금의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즐거운 상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하에 있는 200톤의 황금.
4조.
어마어마한 거금은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돈도 이미 100조가 넘는다.
그럼에도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돈 앞에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흥분된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정훈은 앞에 놓인 결재 서류를 펼쳤다.
‘모빌아이 인수합병.’
얼마 전에 신화전자를 통해 진행한 모빌아이 인수를 승인하는 결재가 올라왔다.
‘모빌아이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네.’
벤처기업은 아니지만 성장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모빌아이.
걱정했지만 쉽게 인수 협상에 성공했다.
정훈은 금액을 확인했다.
1조 3600억.
‘흠, 나쁘지 않군.’
자율주행의 핵심 기술을 가진 기업.
이 돈으로 미래를 선점할 수 있다면 결코 비싸지 않다.
더욱이 오늘 4조가 손에 들어온 날 아닌가.
정훈은 자신의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서류의 정중앙에 있는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거대한 미래가 자신에게 들어온 순간이었다.
흐뭇한 기분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 다음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자신의 눈에 회장실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수천만이 넘는 소파와 테이블.
간단한 회의를 위한 빈티지 원탁 테이블과 의자.
벽에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엔디비아는 손에 넣지 못했지만 무시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했다.
정훈은 머스크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신화모터스 사장인 피터에게도 알려야 했다.
인터폰이 울렷다.
“회장님, 엔디비아의 미스터 황이 찾아오셨습니다.”
“흠, 바쁘다고 하세요.”
“……기다리겠다는데요.”
정훈은 고민했다.
그날 당한 모욕이 다시 생각났다.
똑같이 갚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결국 같은 수준의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은 그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다.
“후, 들어오라고 하세요.”
미스터 황이 들어오자 정훈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정훈의 손을 잡지 않고 바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미스터 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날 자신감 강했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네요.”
“제가 속았습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다.”
“우리 회사 임원중에 한국인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말만 듣고 제가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정훈은 의문이 들었다.
한국이면 신화그룹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사람은 지금…….”
“당연히 해고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의 기술을 몰래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산업스파이로 고소했지만 이미 한국으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스타그룹 계열사에 취직한 다음 종적을 감췄습니다.”
스타그룹?
그렇다면 천지회 녀석들이 분명하다.
정훈은 엔디비아에 있던 임원은 분명 천지회의 스파이라고 확신했다.
“이제라도 스파이 문제를 해결해서 다행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스터 황은 정훈의 눈치를 보며 주저했다.
“신화전자를 통해서 공급받았던 메모리 반도체 이제 공급 재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한국과 신화그룹을 무시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윤 회장님.”
“지금 반도체가 공급부족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데 들어갈 것을 빼서 그쪽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사정이 안타깝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윤 회장님, 그럼 우리 회사를 사 주십시오.”
비장한 말이지만 사실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제안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엔디비아는 곧 부도가 날 것입니다. 파산할 회사를 제가 살 이유가 있을까요? 차라리 파산한 다음 제가 그냥 주워 담으면 공짜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제발 부탁입니다.”
미스터 황이 다시 한번 애원했다.
정훈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강하게 부여잡았다.
“글쎄요. 제가 그 회사를 지금 인수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우리 회사에 3000명의 우수한 직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사장을 만나 길바닥에 나앉는 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두고 볼 수 없다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정훈의 말에 미스터 황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제 주식 전부를 무상 양도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의 회사가 됩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윤 회장님의 회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흠, 그건 맞긴 합니다만…….”
정훈은 난감했다.
솔직히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제 주식을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저는 거기서 연구만 할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그거 말고는 바라는 거 없습니다. 보수도…… 최저임금만 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당신에게 남는 건 뭐가 있습니까?”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저는 그냥…… 연구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대책 없는 분이네요. 후…… 사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날과 오늘은 너무 다른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속아서 그런 겁니다. 그 자식이 회장님과 신화그룹을 악마처럼 말했습니다. 제가 귀가 좀 얇은 편이라서…….”
결국은 그거였나?
저 사람의 문제는 귀가 얇은 것이었다.
그는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도 크고 연구 개발에 대한 열정도 높았다.
그를 더욱 몰아붙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죠.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준비한 계약서를 정훈에게 내밀었다.
계약서를 받은 정훈은 계약의 내용을 읽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마지막이 눈에 띄었다.
주식 양도 금액이 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훈은 자신의 책상에 있는 몽블랑 만년필을 꺼냈다.
0원이라고 적힌 부분에 두 줄을 그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가격을 적은 다음 사인을 남겼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합니다. 미스터 황”
“감사합니다”
서로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서류를 챙긴 그가 밖으로 나가기 전 정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는 계속 일을 해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급여와 조건에 대해서는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훈은 그의 연봉을 확인했다.
5억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 기업치고는 매우 낮은 수준, 거기다 스톡옵션도 없었다.
뛰어난 기업을 일군 그에겐 부족해 보였다.
그가 일군 사업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연봉을 얼마로 책정할지 생각하던 때였다.
회장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미스터 황이 서 있었다.
“미스터 윤, 이 금액이 사실입니까?”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계약서를 든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40억 달러가 확실합니까?”
우리 돈으로 약 5조 원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멀쩡한 회사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렇게 사면 안 된다.
나중에 탈이 날 가능성이 크다.
항상 물건을 살 때는 적당한 가격을 주고 사야 한다.
엔디비아의 제값은 10조 정도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말실수로 인해 5조가 날아갔다.
그날 협상이 잘 됐으면 10조에 매각했겠지만 지금은 5조.
그것이 정훈이 줄 수 있는 적절한 금액이었다.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당신과 신화그룹을 무시했는데 이 가격을 제안한 게 믿어지지 않아서요.”
“흠, 그 정도면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아, 그리고 연봉은 20억 원으로 하죠. 신화그룹의 계열사가 된 이상 자신의 가치에 어울리는 연봉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스톡옵션은 따로 책정될 겁니다.”
실감 나지 않은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럼 제가 약속이 있어서”
문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정훈은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거기에 더 있다가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가 자신을 향해 돌진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미국 가면 보죠.”
무심한 말을 남긴 정훈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미스터 황을 지나쳐 갈 때 자신을 잡으려는 그의 두 손을 번개 같은 순발력으로 피했다.
***
엔디비아와 신화전자와의 극적인 화해.
엔디비아의 인수를 통해 신화그룹의 위상은 더욱 강해졌다.
공급을 압박했다고 일부 언론에서 지적했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엔디비아는 공장을 가진 회사가 아니라 설계만 하는 회사였다.
그래서 메모리 공급을 차단해도 그것이 실제로 엔디비아를 목표로 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머스크의 전화를 받았다.
“유후, 당신 정말 대단한데. 모빌아이랑 엔디비아에서 바로 연락 왔어. 자율주행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제공하겠다던데.”
이제 같은 계열사이니 당연했다.
“네, 그 기술 활용해서 3년 안에 제대로 된 자율주행 기술 부탁드립니다.”
“흠, 거듭 말하지만 10년도 겨우 될까 말까 한데 3년은 너무 촉박한데.”
“그럼 어쩔 수 없죠.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테슬라를 청산하든지 아니면 신화모터스에 합병해 버리죠. 물론 당신은……. 흠흠”
“크흠, 무슨 그런 살벌한 말은. 농담이에요, 윤 회장. 열심히 할게요.”
엄살을 부리던 그가 전화를 끊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자신의 처지가 딱 그 짝이었다.
하나를 해결하니 새로운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이병석 신화게임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지하로 파고 들어갈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출시한 게임이 망했습니다.”
“거 그러니까 안 된다고 했는데…… 사람 참……”
짜증이 치솟으며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난국을 타개할 플랜을 생각해야 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