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연기 지도를 할 급이 전혀 아닌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80살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전설.
원로 배우 이순진이 등장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톱스타였다.
영화계의 산증인이자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전설적인 배우.
놀라운 건 지금까지 공식적인 연기 지도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처음이다.
그는 무수한 핑계를 대며 연기 학원의 제의를 거절했다.
피하기만 했던 그가 공식적인 연기 선생님으로 이 자리에 나타났다.
“여러분의 연기 선생으로 온 이순진입니다. 제가 나타나서 다들 놀랐을 겁니다. 신화그룹 회장이란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서 사정 사정 하더군요. 그래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모두가 한목소리로 크게 인사했다.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여러분들의 어려웠던 사정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과 자존심을 지켜 온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앞으로 더 힘들겠지만, 나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코끝이 찡해졌다.
원로 배우의 격려에 지금까지 받았던 모욕과 멸시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이순진 배우는 가까이가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순식간에 감정이 격해진 그들은 자연스럽게 눈물을 쏟아 냈다.
연습실을 울음바다로 만든 그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모두 시원하게 과거의 서러움을 날려 버렸을 때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시원하게 울었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다들 내 별명은 알지?”
한참을 울고 있던 얼굴들이 서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이순진 원로 배우의 감동적인 연설에 모두 넋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진면목과 무수한 소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발성이 안 되는 아이돌을 수천 번 연습시켰다.
연기를 못하는 신인 배우를 쥐잡듯 잡았다.
얼굴만 톱스타였던 남자 배우를 매일 독설로 울렸다는 전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살아남았던 연기자들은 진정한 배우로 거듭났다.
얼굴만 톱스타였던 배우는 미친 연기력으로 중국을 사로잡았고 매일 연습을 강요당했던 아이돌은 어느새 자타공인 연기돌이 되었다.
‘순진한 독설가.’
공포는 잠시.
그와 함께라면 어디 가서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된다.
이순진의 앞에 선 배우들의 눈에 욕심이 가득했다.
한편 은수의 연기 연습이 궁금했던 정훈은 연습실의 문을 조금 열어 안을 보았다
후끈 달아오른 공기가 훅하고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배우들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모두가 이순진의 얼굴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전하는 연기 강의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깰 순 없지.’
정훈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발걸음을 돌렸다.
돈이 좀 들긴 했지만 이순진 배우를 모신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동안 버텨 왔던 소속 지망생들의 꿈에 대한 보상이다.
이순진에게 주는 연봉 3억.
……아깝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았다.
***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는 중이다.
자신의 책상 위에 탑처럼 쌓여 있는 결재 파일.
전결로 처리하는 것도 많았지만 그룹 내 중요한 결정은 자신이 내려야 했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는 중요한 결정이 대부분이다.
회장실에 올라오는 서류.
자신은 한번 슥 하고 서명을 하면 끝이지만 서류를 만든 사람은 며칠 고생한다.
그걸 알기에 읽지도 않고 결재하지는 않았다.
꼼꼼히 읽고 사인을 하며, 간간이 포스트잇에 피드백도 남겨 주었다.
잘된 기안이나 결과 보고에는 그에 어울리는 금일봉도 두둑이 내렸다.
책상 위에 쌓인 수십 개의 결재 파일을 다 읽고 서명을 끝마쳤다.
“휴, 팔이 다 저릴 지경이네.”
정훈은 몽블랑 만년필 뚜껑을 닫고 자리에 놓은 다음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힘을 빼고 천만 원짜리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피곤한 몸이 파묻히며 피로가 순식간에 풀렸다.
천만 원짜리 의자는 다르긴 달랐다.
오랜만에 눈을 감은 채 잠깐의 망중한을 즐긴다.
하지만 곧 정훈의 책상 위에 있던 인터폰이 울렸다.
“네.”
“회장님, 신화엔터테인먼트 최태원 사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정훈은 신화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종합 엔테테인먼트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연예인 매니지먼트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제작과 배급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항상 그랬지만 돈은 마르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영화와 드라마의 흥행을 알고 있다.
돈만 쓸어 담으면 된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그리고 커피도 부탁해요.”
“네.”
최태원 신화엔터테인먼트 사장이 문을 연 다음 넙죽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짧은 머리 곳곳에 흰머리가 가득했다.
거기다 날카로운 인상.
한마디로 험한 얼굴이었다.
얼굴과 거친 피부 때문에 최태원 사장은 항상 폭력배로 오해받았다.
영화 제작자 중에서 그쪽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다.
하지만 그는 주먹 쪽에서 넘어온 사람이 아니다.
순수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영화학과를 나와 제작사에서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전문가였다.
영화 쪽에서는 그가 찍으면 최소 중박은 친다는 말일 있다.
작년 찍은 천만 영화 ‘중전의 여자’도 모두 그가 픽업한 작품이었다.
실력만큼은 충무로의 모두가 인정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정훈은 최태원 장에게 오른쪽 자리를 안내했다.
서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헤이즐넛 커피를 들고 비서가 들어 왔다.
“미국에서 산 커피입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최태원 사장은 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여기 말씀하신 영화 목록입니다.”
정훈은 최태원 사장에게 지금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영화들을 조사하라고 했다.
눈앞에 맛있는 먹이가 파닥이고 있었다.
“이 영화가 투자금이 부족합니까?”
“네. 계획대로 투자금을 모았지만, 감독이 욕심을 내는 바람에 투자금을 다 써 버린 상태입니다.”
정훈은 얼굴에 드러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추가 투자가 안 된 거군요.”
“네. 감독이 코미디언 출신이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히 내년 여름 8백만의 관객을 모으는 <더 드래곤>이 투자금이 부족해 영화가 엎어질 위기였다.
정훈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귀에 걸렸다.
전설적인 코미디언 심영수는 항상 영화에 진심이었다.
정훈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영화가 제작비 문제로 좌초되길 원하지 않았다.
정훈은 이 일을 통해 돈도 벌고 업계에서 신화엔터테인먼트의 존재감을 남길 계획이었다.
“더 드래곤, 우리가 투자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감독이 영화 쪽 출신도 아니고 특수 효과를 많이 사용한 영화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특수 효과가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부족한 영역이니까요.”
“스토리는 어떤가요?”
“스토리는 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도 안 돼 있을 게 뻔합니다.”
“보지 않았군요.”
“안 봐도 뻔합니다. 제 자리를 걸 수 있습니다. 확신합니다.”
인상이 좋지 않은 최태원 사장이 진지하게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대답했다.
‘실망인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을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스카우트했다.
그런데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화 콘텐츠 업계에서 편견은 독이다.
정훈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흥행하지 못하는 게 확실합니까?”
“네, 분명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확신하면 미아리에 자리 깔고 점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정훈의 지적에 최태원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감은 이 영화가 흥행한다고 하네요.”
“네? 회장님 감이요?”
최태원은 비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감?
진영 단감? 청도 홍시?
풉, 무슨 감을 말한 거지?
30년 동안 영화 제작일을 한 자신의 직감을 믿지 못하다니.
더군다나 업계에 처음 발을 담근 사람이 자신의 헛된 감을 확신하다니.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리 애송이 회장님이 실패를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신화그룹 같은 든든한 배경이 있다면 몇 작품 실패해도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얻는 것도 있다.
지금과 같은 비전문가의 개입이 실패를 통해 사라진다.
최태원 사장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회장님 감이 정 그러시다면 투자를 한번 해 보시지요. 하지만 저라면 절대로 투자하지 않습니다.”
“영화 제작자로서의 감입니까?”
“감이 아니라 30년의 경험입니다, 회장님.”
“그럼 한번 지켜보죠. 우리가 처음 투자하는 영화가 초대박이 나는지 아니면 쪽박을 차는지.”
“……말리진 않겠습니다. 어차피 돈이 넘치는 그룹 아닙니까. 하하하!”
살짝 기분이 상했다.
‘이 양반 말하는 게 아슬아슬한데.’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결과를 통해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네, 그렇죠. 이번 일로 돈이 더 넘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정훈도 최태원 사장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크게 웃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약속은 바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저기 투자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네, 그럼 들어가 보세요.”
최태원 사장은 인사를 한 다음 문을 열고 나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돈을 버린다는 걸 직접적으로 말했지만 고집을 피운다.
‘몇 번 실패하면 정신 차리겠지.’
쓸데없는 걱정이다.
오히려 자신에겐 유리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최태원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쓴웃음 지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곧 닫혔다.
지금은 그냥,
시키는 대로 지켜보는 게 최선이다.
***
심영수는 우울한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화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황에서 제작비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수 효과에 욕심을 내다보니 예산을 초과했다.
조금 전에 강남에 천억짜리 빌딩을 소유한 유명 자산가와의 미팅이 있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은 투자가.
어제 대통령 꿈을 꿔서 잘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영화 투자보다는 유명 개그맨인 자신과의 식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을 잔뜩 불러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제대로 된 투자가 논의될 리 없었다.
그의 본심을 확인한 심영수를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저런 부류들은 주머니가 딱딱하다. 웬만해선 돈이 나오지 않는다.
창밖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제 아이가 팬입니다. 죄송하지만 사진 한 번만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탄 창백한 표정의 아이와 안쓰러운 얼굴을 한 아이 엄마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물론이죠.”
침울했던 심영수는 활짝 웃으며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인도 해 드릴게요.”
가방에서 자기 사진을 꺼내 사인을 했다.
“이름이?”
“도영이요. 박도영! 저도 아저씨처럼 코미디언이 될 거예요. 사람들을 신나게 웃길 거예요.”
“그래? 도영이도 꼭 꿈을 이루렴.”
사진의 뒤편에 이름과 ‘도영이의 꿈을 아저씨가 응원해!’라는 글자를 적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 소원이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의 슬픈 표정에 사연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의 코에 산소 줄이 달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짧고 가쁜 호흡을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제가 손금을 좀 봅니다.”
심영수는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의 손을 보았다.
부드럽고 여린 아이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이가 아픈 게 제일 마음이 쓰인다.
먼저 하늘에서 놀고 있는 둘째 영우가 생각났다.
순간 울컥했지만 감정을 잘 다스렸다.
“손금을 보니 올해가 가기 전에 다 낳고 무병장수한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도영이도 엄마 말 잘 들어.”
“네.”
심영수는 일부러 아이의 상태를 묻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격려가 최선이었다.
아이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해맑은 아이의 표정을 보니 코미디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영우가 참 좋아했는데…….’
병마와 싸우던 영우를 웃겨 주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빠 최고야!’라고 항상 외쳤던 영우가 더욱 그리워졌다.
모두가 비웃고 멸시했지만 웃음과 함께 행복을 선물하는 자신의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번 영화는 꼭 완성해서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래! 다시 힘을 내 보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테이블에 있던 다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투자자를 만나러 가야겠다.
100명을 만나면 된다.
그래도 모자라면 200명.
언젠가는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가졌다.
그때 품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제작자였다.
“영수야, 투자자가 나타났어.”
“네 어딘데요?”
“신화그룹!”
“정말요?”
“그래, 지금 바로 사무실로 들어와. 그쪽에서도 지금 바로 온다네.”
“알겠습니다.”
심영수는 허겁지겁 가방을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했다.
‘들뜨지 말자. 안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최선을 다해 설득할 생각이다.
어제 꾼 대통령 꿈이 생각났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할 수 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