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스파르타쿠스 결사대> 300명이 모두 전사하며 영화가 끝났다.
재미없을 거라며 기대하지 않았던 다혜는 눈물을 훌쩍였다.
“우와 너무 재밌었어. 정말”
“야, 너 아까 스토리 없는 무식하게 치고받는 영화는 보지 않는다면서.”
“헤헷, 몰라 기대 안 했는데 너무 재밌었어. 야, 너 그 짐승들 초콜릿 복근 봤지? 눈을 뗄 수 없더라.”
“다혜야, 나는 관대하다.”
정훈의 말을 들은 다혜는 남자들의 복근에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닌지 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조심스럽게 정훈의 귀에 대고 유혹하는 듯한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아무리 초콜릿 복근이 멋져도…… 나한텐 정훈이 네가 제일 좋아. 후”
귀에 바람을 후 분다.
흠, 이러면.
다혜가 팔짱의 꽉 끼며…… 붙었다.
“아니야. 초콜릿 복근 좀 보는 거 상관 안 해. 나는 관대하니까. 크크크.”
“오늘 고마워, 둘만의 영화, 잊지 못할 거야.”
다혜가 고개를 기울여 정훈의 어깨에 기댔다.
“우리 배고픈데 밖에 나가서 국수 먹을까?”
“좋아, 난 오뎅도 먹을래!”
오랜만에 시간을 낸 데이트였다.
다혜는 사법연수원 때문에 바빴고 정훈도 일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집에서 잠깐 보는 게 다였다.
정훈은 다혜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
4월 초였지만 아직도 밤은 제법 쌀쌀했다.
“으, 아직 좀 쌀쌀하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얇게 입었는데.”
정훈은 추위 때문에 떨고 있는 다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몸의 온기가 전해지자 좀 나아진 듯 떨기를 멈췄다.
고개를 돌리며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았다.
멀리 3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주황색 포장마차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체온과 바람을 막은 비닐 덕분에 제법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자리에 앉은 다혜가 소리쳤다.
“사장님, 여기 따뜻한 국수 두 그릇이랑 오뎅 좀 주세요. 소주 한 병도요!”
정훈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술을 시키는 그녀.
“너 술도 잘 못 하면서.”
“너 마시라고. 그리고 나 오늘 취하고 싶어.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신이 난 다혜는 야릇한 장난도 서슴없이 쳤다.
“뭐? 야 우리 같은 집에 살고 있잖아. 비록 방은 따로 쓰지만.”
“아, 맞다. 같은 집에 살지, 헤헷.”
영하의 온도보다 차가워진 소주와 단무지, 안주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다혜가 병을 흔든 다음 뚜껑을 땄다.
“받으세요. 서방님.”
“고맙소, 낭자.”
“낭자도 한 잔 받으시오.”
“감사하옵니다. 서방님.”
잔을 들고 짠하고 부딪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술잔이 담긴 술이 출렁거렸다.
서로 행복한 미소를 교환한 다음 한 번에 비웠다.
다혜와 정훈은 각자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상대의 입에 넣어줬다.
주변 사람들의 분노에 찬 살기가 둘을 죽일 듯이 쏘아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이어 메인 요리가 나왔다.
멸치 향이 두 사람의 비어 있는 위장을 격하게 자극했다.
-후루룩
정훈과 다혜는 국수를 먹으면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행복한 순간의 연속.
“니미럴, 애인 없는 것들을 다 뒤져야 해”
남자의 혼잣말이 정훈의 귀에 거슬렸다.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자신을 아는 사람 중에 저렇게 말할 만한 사람은 은수 말곤 없다.
그런데 은수도 애인이 생겼으니…… 아닌 게 분명하다.
정훈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테이블에 닿을 듯이 처박고 있었다.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만큼 취한 상태였다.
‘모처럼 다혜와 보내는 행복한 날이다. 오늘은 참자.’
하지만 왠지 그의 머리통이 익숙했다.
“니미럴 스파르타쿠스 망해라 좀 망해!”
다시 돌아보았다.
새치가 많은 짧은 머리와 거친 피부, 그리고 험상궂은 얼굴이 보였다.
조폭……같이 생긴 신화엔터 사장 최태원이었다.
‘혼자서 왜 저러고 있지?’
불현듯 최태원 사장의 술주정이 이해가 갔다.
자신과 <스파르타쿠스 결사대>의 관객 수를 두고 내기를 했다.
300만이 기준이었다.
정훈은 넘는다, 최태원 사장은 ‘절대 아니다’에 걸었다.
얼마 전 300만 관객을 넘었다.
지더라도 별것 없었다.
단지 자존심이 조금? 조금 많이 상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회장의 무식한 감에 밀렸으니.
초대박을 축하하는 회식이 있었을 것이다.
어제 금일봉을 보냈으니.
정훈은 상상만 해도 웃겼다.
모두 신이나 즐거운 회식 자리에서 혼자 울고 싶었을 것이다.
20억으로 100억을 벌었다.
다섯 배의 투자 수익률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충무로에서 신화엔터를 보는 달라졌다.
신화 엔터의 선택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짓이겨 주었다.
“아는 사람이야?”
술주정하는 중년 남자를 한참 쳐다보자 다헤가 물었다.
“어, 우리 신화엔터 사장님”
“술을 왜 저렇게 먹으셨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
“아니 영화 대박 나서 회식했을 거야. 어제 금일봉 보냈거든.”
“그래? 뭔가 자존심이 팍 상한 것 같은데.”
“음, 그건 맞아. 자존심 상했을 거야.”
정훈은 다혜에게 그와 있었던 일을 전해 줬다.
“풋, 어떡해, 가서 위로 좀 해 드려.”
“그럴까?”
정훈은 일어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최태원 앞에 앉았다.
“접니다. 최 사장님”
“누구지? 어 윤 회장? 뭐야? 돈이 넘치는 놈이 서민들이 즐겨 찾는 포장마차에서 뭐 해?”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술에 취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꿈이구나, 끅. 꿈, 그러면 이해가 되지. 우와 꿈이다. 반갑다 윤정훈!”
술주정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오늘은 참는다.
“반갑습니다. 최태원 사장님.”
“어허, 이 자식이 내기 이겼다고 목에 힘주지 말고……”
그 모습을 본 다혜는 입을 막고 꺽꺽대며 웃었다.
내일 최태원 사장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정훈아, 우리 윤 회장아, 내가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앞으로 잘할게. 그리고 지금 꿈속이니까 속 시원히 말한다…… 실제로는, 안 되지. 아암 절대 안 되지. 내 자존심 상해서 회사 때려치운다. 아 사나이 최태원의 가슴에 사표를 달고 다닌다, 정훈아, 우리 윤정훈 회장아!”
최태원의 목소리가 커지자 사람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흠, 최태원 사장님 수고하신다고 힘내라고 전해 달랍니다.”
“누가?”
“윤정훈 회장님이요.”
“정말? 나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윤정훈 회장 사랑합니다. ”
술에 취한 생각나는 대로 씨불이던 최태원이 손을 머리 위에 대며 하트를 만들었다.
하트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젠장, 술을 깨게 해야 하나?’
점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이렇게 두면 사고 날 것 같아 걱정되었다.
정훈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예요?”
동시에 포장마차 입구가 부스럭거리며 지현복이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정훈은 토끼 눈을 하며 그를 보았다.
“여기 있습니다.”
“최태원 사장님 좀 집에 데려다주세요.”
“안 됩니다. 근처에 저 말고는 회장님을 경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제 몸 하나는 충분히 경호할 수 있습니다. 데려다주고 퇴근하세요.”
“퇴근요? 알겠습니다.”
퇴근이라는 말에 지현복은 바로 정훈의 말을 따랐다.
최태원 회장을 업어 밖으로 데려갔다.
“우리도 나갈까?”
정훈과 다혜는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밤길을 다정히 손을 잡고 걸었다.
정훈이 다혜에게 말했다.
“다혜야, 누가 따라오는 거 같은데. 이쪽으로 피해야겠어.”
정훈은 다혜의 손을 잡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숨었다.
골목 안으로 인적이 드문 곳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어두운 곳에 선 두 사람.
정훈이 다혜를 보았다.
“흠, 사실……. 그게……”
“풉, 하여튼 연기 정말 못 해. 은수한테 좀 배워!”
“뭐?”
다혜가 까치발을 세워 정훈의 입술을 찾았다.
감미로운 체온이 쌀쌀한 봄밤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다음 날.
신화엔터 최태원 사장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직장 생활 처음으로 지각할 것 같았다.
“나 10분 늦을 거 같아. 미안해요.”
“네, 사장님.”
“아, 그리고 어제 별일 없었지?”
“네. 회식 때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한잔 더 하신다면서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가신 뒤로는 모르겠어요.”
“뭐? 내가? ……알겠어.”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최태원 사장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냉장고에 있는 2리터짜리 삼다수를 한 번에 다 비웠다.
‘어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지?’
“휴, 이제 좀 살겠다. 포장마차에서 있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뭐 아무 일 없었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안심시켰다.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일 없었던 게 분명하다.
혼자 한잔 더하고 집으로 돌아온 게 끝이다.
분명, 그 외에는 절대로 없었다.
다만, 어젯밤 기이한 꿈을 꾸긴 했다.
재벌 회장이 꿈에 나왔다.
꿈에서 웃긴 말을 한 기억이 났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최태원 사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속마음이 드러나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영화 두 개를 배급했는데 먼저 개봉한 영화가 초대박이 났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인 <트랜스 로봇>도 흥행 대기 중이다.
직접 투자한 영화 <더 드래곤>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올여름 가장 기대되는 신작으로 꼽히고 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남자.
아들과 비슷한 또래지만, 망나니 아들 새끼와 달리 제 몫을 해내는 청년이다.
자신의 아들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물론 제 아들도 사랑합니다.’
그 말은 참았어야 했다.
하지만 뭐 꿈이니 상관없다.
유명인이 꿈에 나오면 로또를 사라는 말이 생각났다.
신화그룹 윤정훈 회장도 재벌 회장에 유명인인데……
왠지 오늘 복권 사면 당첨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최태원 사장은 출근하면서 복권을 10만 원어치 샀다.
하지만 모두 꽝이었다.
500원짜리 5개, 만 원짜리 1개만 당첨되었다.
자신이 복권을 산 날 중에 최악이었다.
꾸지도 않은 꿈을 근거로 복권을 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
무더운 여름.
지루한 장마가 끝이 나고 이제 곧 8월이었다.
신화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 영화 <더 드래곤>이 곧 개봉한다.
기자 시사회와 관객 시사회 모두 평이 좋았다.
대한민국의 특수 효과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극찬했다.
정훈은 신화엔터테인먼트 직원들과 함께 영화 개봉 전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홍보팀장님.”
“네, 신문 광고와 티비 광고는 배정된 예산에 맞춰 진행하고 있습니다. 회장 말씀대로 지난주부터 파워블로거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블로거들의 신뢰도가 높아서 효과가 좋을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그리고 최 사장님.”
“네, 회장님.”
“이번 <더 드래곤> 프로젝트가 끝나면 저는 손을 뗄 생각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신화엔터를 이끌어 주십시오.”
갑작스런 정훈의 선언에 최태원 사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 됩니다. 사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태원 사장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넣어 두세요. 사표 받으려고 했던 내기가 아닙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지난번에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죠. 정확히는 ‘내가 가슴에 사표를 넣고 다닌다, 정훈아’라고”
“제가 진짜 그랬습니까?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사장님 기억엔 없을 겁니다.”
정훈은 그날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고 최태원 사장은 이해할 수 없는 회장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여튼, 그때 내기를 한 건 최 사장님이 너무 편견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편견을 버리면 돈을 법니다. 유연하게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
최태원 사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 자신이 소리쳤던 말이 떠올랐다.
‘사장님은 너무 고지식하고 편협합니다.’
20년도 전에 자신이 처음 입사했던 영화사 대표에게 대들면서 했던 말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의 의견을 귀담아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20년의 경험이 편견과 아집을 키웠다.
자기 옆에 있던 부하 직원, 아니 동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래 동료였어. 아랫사람들이 아니야.’
최태원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서도 아주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단추 구멍 같은 눈이 촉촉해져 있었다.
“제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안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번 기회에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많이 경솔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열린 자세로 여러분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최태원의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그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최태원은 윤정훈을 보고 머리를 숙였다.
“회장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많이 경솔했습니다.”
“이곳을 잘 부탁드립니다. 세계 제일의 회사로 키워 주십시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최태원 사장을 격려했다.
모두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갈 신화엔터테인먼트를 꿈꾸었다.
정훈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했다.
어느새 굳어진 얼굴.
그의 시선은 티비 쪽을 향해 있었다.
무음으로 화면만 켜 놓았던 티비에 정신을 빼앗겨 넋을 놓고 있다.
화면 밑으로 자막이 길게 흐르고 있었다.
‘신화그룹 이석 회장의 부친 이헌 씨 사망’
다급히 리모컨을 찾아 소리를 높였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림자 회장 이헌이 죽었다.
심장마비?
자연사인가?
타살인가?
누가 죽였지?
정훈의 머릿속에 무수한 상념이 몰아쳤다.
그 상념들을 모두 몰아내고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질문만 남겼다.
이헌이 소유한 막대한 부동산.
공시지가만 수조 원에 이르는 그 부동산의 새 주인은 누가 될까?
정훈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만을 생각했다.
이석?
하인선?
……
설마 은수?
무더위의 끝에 큰 가을 태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