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64화 (164/200)

#164화

서초구 법조타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빌딩.

전체를 법무법인 해송이 사용한다.

다른 회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

자타 공인 대한민국 1위.

소속된 변호사들만으로 대검찰청과 대법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전관들이 대거 들어와 있다.

해송의 수장 박수길은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 알림과 함께 문이 열렸다.

하얀 중절모를 쓴 이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그는 박수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숙인 박수길이 조심스런 자세로 이헌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긴 복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박 변호사도 무탈하시지요?”

“네, 다 천지회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드시지요.”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해송의 변호사들이 힐긋거렸다.

재벌 회장이 와도 마중 나가지 않는 그였다.

사무실 직원들은 이헌을 보며 뒤에서 소곤댔다.

“박변, 저분 누구야?”

“스타그룹 그림자 회장, 이헌. 몰라?”

“뭐? 누구?”

“이헌, 이석 회장은 바지고 저 사람이 실세라는 소문이 파다해. 개인 재산이 부동산만 수조 원이래. 현정옥이 현금왕이면 저분은 부동산왕.”

“아우, 저분 아들하고 싶네.”

“꿈 깨라, 쯧.”

이헌은 박수길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소파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박수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언장을 수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조금 정확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시작할까요?”

박수길은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잠시만요. 올 때가 됐는데, 조금만 기다리죠.”

“누구 말씀입니까?”

-똑, 똑, 똑

“대표님, 누가 찾아…….”

비서의 말을 이헌이 끊었다.

“들어와요. 이 변호사.”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하철을 반대로 탔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명함을 내밀었다.

변호사 이판호라고 적혀 있었다.

의아한 상황에 박수길은 이헌을 보았다.

대답을 원하는 눈빛이다.

“제 먼 친척의 아들인데 일이 없어서 일거리 하나 주려고 데려왔습니다. 이왕 하는 일 한 명보다는 두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변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누구라도 허락 없이 자신의 일에 끼어드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박수길의 표정을 본 이헌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어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불쾌하셨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불쾌했던 게 아니라 잠깐 당황해서 그랬습니다.

박수길은 이판호 변호사를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다.

“지금 유언장은 아드님과 여사님에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흠, 잘 되어 있군요.”

“어떻게 수정하셨습니까?

“일부 문장과 거쳐야 할 절차를 좀 추가했습니다.”

이헌은 품 안에서 봉투를 꺼내 박수길에게 건넸다.

봉투 속 종이를 꺼내 빠르게 읽었다.

‘이헌의 자식들과 그를 낳은 친모에게 절반을 상속한다. 반드시 과학적인 친자확인 검사를 거쳐 확인된 친자만이 이헌의 모든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

그의 눈에 거슬리는 문구와 절차가 들어왔다.

“과학적인 친자확인 검사라면?”

“당연히 DNA 검사 아닙니까?”

박수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시간과 비용만 낭비할 뿐입니다.”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요.”

“여기는 ‘자식들’은 이헌님의 아들 ‘이석’으로 한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하하, 그래야 하는데, 내가 젊을 때 함부로 살아서 혹시 모른 혼외자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문구를 좀 바꿨습니다. 혹시나 있다면 죽어서라도 못했던 애비 노릇이나 좀 할까 해서요.”

“네? 설마요.”

은둔하던 선비의 삶을 살아온 이헌이 혼외자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이석이 이놈이 제 재산이 다 지 껀 줄 알고 너무 안일한 거 같아서요. 그래서 긴장하라고 넣은 겁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수길은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헌, 이석 그리고 하인선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균열 속에는 언제나 기회가 있는 법.

자신의 목줄을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계집년을 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젊은 변호사가 거슬렸다.

‘저 자식만 없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애송이다.

해송의 수장인 자신이 기침 한 번만 해도 폐병에 걸려 죽을 만큼 약해 보였다.

“그럼 법에 의거해 절차대로 상속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헌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이판호를 보았다.

“이판호 자네도 곁에서 잘 보고 배워, 박수길 변호사님은 배울 게 많아.”

“네,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이판호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시작하시지요.”

“그럼 지금부터 변호사 박수길과 변호사 이판호가 이헌 씨의 유언장을 공증하는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후 두 명의 변호사가 이헌의 유언장에 대한 공증을 마쳤다.

이헌은 박수길의 배웅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판호를 보았다.

지금까지의 저자세와 달리 해송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자네 출신은 어딘가? ”

“중부시에 있는 중서대학교 나왔습니다.”

“뭐? 중서? 우리나라에 그런 대학교도 있어?”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새겨졌다.

이헌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먼 친척의 일 없는 변호사.

이름 없는 대학을 나오면, 사시를 패스해도 밥 굶기 좋은 시대다.

***

이판호는 박수길과의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왔다.

굳은 표정의 그는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중부시에 있는 신화고등학교요.”

“네? 장거리 20만 원인데, 괜찮겠습니까?”

“네, 빨리 가 주세요.”

기분 좋은 미소가 기사의 얼굴에 그려졌다.

택시는 2시간 후 신화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학교 안 이사장실 앞에선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어르신 판호입니다.”

“어, 들어와.”

현정옥의 목소리였다.

이사장실의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의 상석에 현금왕 현정옥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서는 그의 남자, 구창훈 회장.

그리고 맞은편에 부동산왕 이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아.”

“네.”

이판호는 현정옥이 권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렸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공증에서 빠지라고 했습니다.”

“흠, 역시.”

이헌의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말씀하신 대로 알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박수길은 이제 변호사이길 포기한 것 같습니다. 허허.”

이헌이 황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현정옥이 그를 보며 물었다.

“이것 때문이었소? 굳이 나에게 와서 변호사를 구해 달라는 이유가?”

“허허,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습니까?”

적의 적? 그럼 이헌의 적이 박수길이란 말인가?

혹시 그의 적이 아들 이석과 부인까지?

현정옥은 심상치 않은 균열을 감지했다.

“저 변호사 실력은 믿을 만합니까?”

“사법시험 1, 2차 모두 수석, 연수원까지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네? 저런 인재가 아깝게 여기 있습니까?”

“그게, 여자에 미쳐서……. 지금 부인이 중부시를 죽어도 못 떠난다고 해서요.”

“하하하, 대단한 로맨티스트군요.”

현정옥이 이판호를 보았다.

“차므 이번에 신화그룹 법무팀으로 가기로 한 건 어떻게 된 거야? 부인이 허락한 거야?”

“네, 작년에 장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이제 여기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 손자의 큰 힘이 되어 줘.”

“네, 여사님.”

이헌이 자신의 하얀색 중절모를 집어 들었다.

“그럼 나도 일어나 봐야겠군요. 믿어도 되겠습니까? 현 여사님?”

“글쎄요. 여기 말고는 믿을 만한 곳이 없을 텐데요.”

“허허허, 어쩔 수 없죠. 이제 운명에 맡겨야죠.”

이헌이 일어서 나갈 때 창밖에서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신성한 학교에서 소음이 들리자 현정옥의 주름진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경비는 뭐 하는 거야!”

소파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친 현정옥이 불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

멀리서 걸어오던 은수기 뛰어와 덥석 안겼다.

그의 뒤에 청순한 여인이 서 있었다.

“보아야, 우리 할머니,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차보아예요.”

“할머니한테 소개해 드리려구요.”

“녀석, 복도 많네. 저렇게 예쁜 아이를 데려오다니.”

“헤헷.”

강아지처럼 현정옥에서 찰싹 붙어서 아양을 떨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의 현정옥이었지만 그의 뒤에 있던 이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환이를 볼 수 있다니…….’

이환이 윤정훈의 친구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볼 줄이야.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은수야, 여기 인사드려. 천하의 나쁜 스타그룹 이석 회장의 부친 이헌이다. 이석보다 더 나쁜 놈이다.”

“네?”

현정옥의 소개에 당황했다.

적의 수장이 왜 할머니랑 같이 있는 거지?

웃고 있던 은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정은수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은수의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남자의 손을 보았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물리치지 않았다.

“반갑네. 이헌이네.”

“네,”

이헌은 오랜만에 잡아 본 아들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은수가 힘을 주며 뺐다.

주저하던 표정의 이헌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현 여사, 내가 차가 없어. 이 친구 터미널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합시다.”

“차가 왜 없어요, 천하의 이헌이?”

현정옥이 반문했다.

“알리고 싶지 않은 방문이니 혼자 움직일 수밖에요.”

“아…….”

그제야 현정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차 타고 가시오.”

“아니요. 터미널까지만 가는 게 좋아요.”

“할머니 제가 태워다 드리고 올게요. 금방인데요.”

“그래, 그러렴.”

“보아야 금방 갔다 올게.”

“응.”

은수의 S5가 학교를 빠져나갔다.

“아까 그 친구 여자친구인가?”

“네.”

이헌은 데려온 여자를 본 순간 은수가 자신의 아이인 걸 직감했다.

‘부자가 보는 눈이 똑같구만’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하인선이란 배우 아냐? 그 배우랑 참 닮았군. 엄청난 미인이었지. 자네 여자친구보다 더.”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여자보다 제 여자친구가 훨씬 더 이쁩니다.”

“아니야, 자네가 하인선의 미모를 몰라서 그래.”

“아닙니다. 제 차보아가 백 배는 이뻐요. 마음 씀씀이도 훨씬 더 낫죠. 그런 여자랑 비교하지 마세요.”

은수의 목소리에 화가 가득했다.

‘이미…… 알고 있구나.’

기억하고 있었구나.

불쌍한 것.

자신은 기억 못 하겠지.

못난 아비는 모르는 게 나아.

“자넨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을 가져서.”

“네?”

다행이다.

자신은 실패했지만 자신의 아들은 원하는 사람과 행복해 보였다.

은수와 차보아라는 아이가 서로를 보는 눈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은수를 힐긋거리던 이헌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메밀꽃이 참 예쁘구만. 자넨 모르겠지만 이효석이란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단편 소설이 있어. 한번 읽어 봐. 아주 재미있어.”

“이미 읽었습니다.”

“의외군.”

“이효석 작가의 ‘도시와 유령’도 재미있습니다. 모르시죠?”

“알고 있네. 이미 몇 번을 읽은 책이야.”

“의외네요. 돈밖에 모르실 줄 알았는데. 김훈, 황석영 작품은요?”

“다 읽었네.”

이헌은 은수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보기와 달리 대화가 통했다.

간단하지만 수준 높은 비평까지 곁들인 그의 대답에 은수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두 사람이 문학 이야기를 하는 동안 터미널에 가까워졌다.

“다음에는 시에 대해 이야기 하죠. 제 전문 분야입니다.”

“뭐? 나도 시를 더 좋아해.”

차 문을 열기 전 이헌이 은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는데 잘 컸구나. 은수군 고생했네. 마지막 가는 길에 큰 즐거움을 주는구만.”

“네? 무슨 말입니까?”

“고맙다는 말이네. 시간이 있었으면…… 보아라는 친구에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네만…… 아쉽지만 이게 내 업보지.”

“다음에 만나면 시에 대해서 좀 더 논해 보시죠, 재벌 어르신.”

“그래.”

희미한 웃음과 함께 이헌이 차에서 내렸다.

창문을 내려 인사했다.

“조심히 올라가세요.”

‘예전에 한번 본 사람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늙어서 그런가.’

은수는 혼잣말했다.

경계심만큼의 친근함이 생긴 그는 이헌에게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신화고등학교로 돌아갔다.

이헌의 곁으로 날카로운 기운을 품은 남자가 다가왔다.

“여사님이 천신재에 들렀다고 합니다. 천성한 장관이 준비하던 작업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애월이 년이 뭔가를 준비했나 보군.”

“끝까지 보필하겠습니다.”

이헌은 품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10억이다. 내 곁에서 인생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 적지. 어디 한적한 시골에서 가서 장사나 하면서 숨어 살아. ‘신청’에 걸려 개죽음당하지 말고.”

“아닙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가거라. 이미 내 손에는 쓸모없는 돈밖에 없다. 그것을 지킬 아무런 힘도 없다.”

한동안 먼 산을 응시했다.

“나는 다 이루었다. 아들의 손도 잡고,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도 봤어. 너는 아직 젊어. 새로운 인생을 살거라.”

“어르신!”

이헌의 눈에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의지가 서려 있었다.

남자는 이헌의 앞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몸을 구부리며 천천히 절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았다.

엎드려 있는 그를 뒤로하고 이헌은 버스에 올라탔다.

눈을 감았다.

‘이제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죽는 것만 남은 건가?’

사랑했지만 끝내 마음을 얻지 못한 그녀.

어울리지 않는 인생이었다.

문학과 시를 이야기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잊을 수 없는 행복을 준 자신의 아들에게 감사했다.

‘행복하거라, 이환…… 아니 은수야!’

이헌의 눈가에 작은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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