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정훈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노인을 쏘아보았다.
한 인간의 작별을 고하는 자리도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들.
‘신청.’
과연 천지회의 파트너라고 할 만한 조직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놈, 이런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다니, 허세가 대단하구나. 네 놈의 그 담력은 칭찬해 주마.”
애월의 곁을 지키던 자들이 품에서 칼을 꺼냈다.
“뭐야? 씨팔, 농담이 아니었잖아.”
은수는 차보아를 자신의 옆으로 바짝 당겼다.
잔뜩 긴장한 채 당황한 은수.
“야, 어떻게 해?”
지금껏 만난 그 누구보다 훨씬 강한 기세였다.
번쩍이는 칼이 피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이봐, 윤정훈,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건 알고 있겠지?”
“글쎄요. 저보다는 당신이 먼저 죽을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바닥이 깨질 정도로 큰 파열음이 복도를 올렸다.
“이런 고얀 놈. 세 치 혀부터 잘라 줘야겠구나.”
작은 눈이 가늘어지며 살기를 뿜어냈다.
“그럼 잘 가거라, 아 저년은 이석 회장에게 선물로 던저 줘야겠군. 저년을 던져주면 좋은 것을 줄 것 같아. 아주 미쳐 있던 거 같은데.”
“미친 할망구, 아가리를 찢어 버릴 거야.”
은수가 거친 말을 쏟아 냈다.
정훈은 노파의 살기등등한 말에도 전혀 대꾸하지 않고 시계만 확인했다.
고개를 들어 애월을 보았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청의 주인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뭐?”
정훈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삽시간에 변한 표정.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떨리는 손끝을 감추지는 못했다.
“비켜!”
위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계단을 막고 있던 ‘신청’의 조직원들이 홍해처럼 옆으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에서 박창수가 내려왔다.
한 손에 긴 칼인 ‘환도’를 들고 있었다.
“회장님!”
정훈의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밖에 있는 놈들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박창수가 정훈을 보았다. 복수를 원하는 눈빛이었다.
“수고했어요. 장례식장입니다.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죠.”
입술을 질끈 깨문 박창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신 한마디만 하고 오겠습니다.”
애월의 앞으로 다가간 그는 손에 있던 칼집에서 칼을 뺐다.
불빛에 반짝이며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스윽
박창수의 칼이 애월의 목을 겨눴다.
하지만 그녀도 눈 깜짝 하지 않았다.
‘신청’의 수장이라고 할 만한 기세였다.
“오늘은 살려 보낸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네년이 학살한 사람들의 원혼이 신천재의 주위를 여전히 맴돌고 있다. 그들이 너희들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항상 조심하거라. 천본(天本)의 수장이었던 우리 조상, 박무진의 칼이 네년의 목을 취할 것이다.”
“고얀 놈.”
박창수의 칼이 그녀의 목에 옅은 생채기를 냈다.
그녀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정훈이 턱짓했다.
신청의 조직원들이 애월을 호위하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화신 유통의 직원들이 들어와 정훈의 주변을 지키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미안합니다. 오늘 제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회장님. 저들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 모든 힘을 제거해야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몰아낼 수 있습니다.”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박창수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가자, 은수야!”
정훈이 은수에게 말했다.
은수는 차보아의 손을 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석에게로 다가갔다.
“보아야, 저 새끼한테 당한 거 다 풀어.”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신고 있던 하이힐로 그의 등을 짓밟았다.
짧은 비명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헌의 장례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다.
막대한 그의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식었다.
일반인 같으면 부인과 자식들이 나눠 가진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석에게 전 재산을 몰아줄 가능성이 컸다.
대두분의 호사가들이 그렇게 예측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유산 처리의 결과가 알려지지 않았다.
시장의 불안이 커지며 다시 스타그룹의 주가는 천천히 미끄러지고 졌다.
***
신화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 <더 드래곤>이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충무로의 비아냥을 무릅쓰고 100억을 투자한 영화.
기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만 대중은 아주 좋아했다.
특히 특수 효과와 명쾌한 줄거리가 시사회에 온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개봉 첫날부터 일주일 동안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수는 무려 600만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한 달 뒤에는 천만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원래 <더 드래곤>의 총 관객 수는 8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훈은 수억 원의 홍보비를 추가로 배정해 홍보를 늘렸다.
그래서 200만의 관객이 늘었다.
그는 성공한 것에 집중하면 보다 더 큰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팟의 성공이 그것을 증명했었다.
시간은 벌써 2007년 8월의 끝에 서 있었다.
아직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었다.
정훈은 회장실에 서서 창밖에 펼쳐진 빌딩 숲을 보고 있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회장님, 30분 뒤에 식이 시작합니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정훈은 책상 위에 있는 자동차 키를 집었다가 다시 놓았다.
품격을 지켜야 할 자리다.
“롤스로이스 준비해 주세요.”
“네.”
1층으로 내려가자 건물 입구에 정훈의 두 번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롤스로이스 팬텀에 올라타자 부드러운 엔진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
2003년 구한수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는 그 순간 일송그룹의 본관을 폭파했다.
대한민국 중심, 종로 한가운데 만평이 넘는 넓은 땅이 생겼다.
일송그룹이 사라진 빈터에 신화 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들어갈 수 있는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제 5년째.
정훈은 오늘 드디어 그 결실을 마주했다.
‘신화 타운.’
총 4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200미터 높이의 50층 건물 4개가 동서남북에 우뚝 솟아 있었다.
지하부터 지상 2층까지는 전체였지만 5층부터 4개의 건물로 분리되어 올라갔다.
거대한 신전의 탑과 같은 느낌.
사람들은 4개의 건물을 신화그룹의 지키는 4대 천왕으로 불었다.
백색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받는 미국 건축사 로버트 마이어.
세계적인 건축가인 그는 설계에만 1년을 보냈다.
그리고 완성된 설계도를 받은 날.
신화건설 직원들은 긴급 회의를 해야만 했다.
회의 결과는 시공 불가능.
자신들의 수준으로는 무리였다.
이수홍 신화건설 사장이 총대를 메고 정훈에게 달려왔다.
불가능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다른 업체와의 컨소시험을 제안했다.
“이 사장님, 말이 컨소시엄이지 구경만 하게 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하세요.”
“회장님, 우리 수준에 무리입니다.”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지 마세요.”
처음으로 정훈이 이수홍 사장을 다그쳤다.
“정 그러시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만 알아 주십시오.”
“실패하면서 배우며 기술력을 쌓는 겁니다. 그렇게 성장하는 겁니다. 두고 보세요. 이 건물을 완공하는 순간 세계 10위 안의 건설사로 발돋움할 겁니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습니까? 세계 1위도 아니고 10위라니요. 신화중공업과 신화조선이 세계 1위인 건 알고 계시죠?”
이수홍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정훈은 그의 자존심을 헤집었다.
독기를 품은 그는 예상대로 전력을 다해 신화타운 조성에 매진했다.
시공에만 4년이 걸렸다.
4년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기술력을 쌓았다.
이 공사를 진행하며 발명한 특허공법만 해도 수백가지였다.
그럼에도 부족한 기술력 때문에 수많은 난관에 봉창했다.
결국 기술력이 뛰어난 건설사를 인수 해야만 했다.
‘드래곤 건설.’
뛰어난 기술력으로 해외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진 회사였다.
신화건설의 부족한 기술력과 해외에서의 인지도를 보완해 줄 최고의 회사였다.
예상대로 인수 합병한 결과 두 회사는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했다.
신화건설은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하고 드래곤은 건설은 만성적인 자금력을 해소했다.
순식간에 국내 1위 영산건설을 위협했다.
거기다 자금 부족으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해외 건설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앞으로 대규모 적자가 나게 될 해외 플랜트 사업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다.
정훈은 신화타운에 도착했다.
차창 밖에는 백 명이 넘는 그룹 계열사의 임직원들이 길게 도열해 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있는 그들을 보았다.
이것도 숫자를 줄이고 줄인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스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지만 실제로는 레전드 컴퍼니가 보유한 자산과 기업,
그리고 미래금융지주와 신화유통까지 고려하면 스타그룹을 한참 능가한다.
차에서 내린 정훈은 임직원들과 인사를 하며 가벼운 덕담을 나눴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신화건설 이수홍 사장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밤잠을 새워 가며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었다.
“이수홍 사장님은요?”
정훈의 질문에 사람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덩치가 아주 큰 온정식 신화제약 사장이 대답했다.
“주차장으로 뛰어가던데요.”
신화증권과 사장과 신화미포조선 사장이 동시에 말했다.
얼마 후 서류 가방을 든 이수홍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훈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수홍 사장님.”
“정말 회장님 말대로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니 정말 회장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공사장에 납치되어 난간에 매달려 있던 그.
그를 설득해 함께한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그는 대한민국 대표 건설사의 사장이 되었다.
신화와 함께한 모든 임직원이 그랬다.
수천억의 자산가가 된 신화개발, 신화중공업, 신화조선 사장들.
정훈과 함께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
“과찬입니다. 저는 그제 나아야 할 방향만 보여 줬습니다. 그 길의 끝까지 완주한 건 사장님과 임직원들의 노력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동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스스로가 대견했던 이수홍 사장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감동적인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정훈을 향해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정훈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딱 질색이다.
정훈에게 엉겨 붙어 눈물을 쏟으려는 그를 보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눈치를 챈 이수홍은 재빨리 눈물을 거뒀다.
“아, 회장님. 세종시 프로젝트 1단계 공사도 이제 완공됩니다. 정부와 함께 진행해서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회장님 제안대로 최첨단 스마트 시티로 조성 중입니다. 부지 조정이 완료되면 건물만 올리면 됩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수홍 사장이 가방에서 사진과 자료가 담긴 서류를 정훈에게 전달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건물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정원을 울렸다.
“내 외빈 여러분 건물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잠시 후 준공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곧이어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자마자 식순에 따라 준공식이 진행되었다.
모두가 기다리던 테이프 커팅식.
하얀 장갑에 황금색 가위를 들고 사람들 한가운데 섰다.
“테이프 커팅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복을 상징하는 오방색 리본 테이프를 잘랐다.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지며 드디어 신화타운이 준공되었다.
정훈은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10년도 되지 않아 이룩한 제국이었다.
임직원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정훈도 잘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신화가 없었다는 것을.
감격에 겨워 있을 때 다혜가 다가와 조용히 곁에 섰다.
자신의 손을 쥔 그녀가 조용히 귓속말했다
“수고했어 정훈아.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그날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정훈은 다혜의 손을 쥐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어휴, 말이라고요. 윤정훈 회장 아니면 누가 종로에 이런 건물을 올렸겠어요?”
“그러게요. 그것도 그렇고 신화그룹은 어떻게 실패를 모르죠?”
“그러게요. 그래서 다들 언제 실패하나 궁금해하던데요.”
“올해 신화그룹 전체 매출이 200조라는 게 사실이에요?”
“네, 그런데 놀라운 건 30조가 순익이에요. 15퍼센트, 제조업에서 15퍼센트는 경영이 신이 와도 불가능한 수치인데.”
“그럼 뭐 우리 윤 회장님이 신이라도 되는 겁니까?”
“신보다 더 대단하지요. 하하하.”
준공식에 초청된 신화그룹의 임직원과 각계각층의 내외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들의 대부분의 대화 주제는 신화그룹의 경이로운 성장과 윤정훈 회장이 이룩한 업적이었다.
정훈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임철수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면서 눈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눈에 찾고 있던 문화일보 박성훈 기자가 모습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등 뒤에 섰다.
“네, 아저씨, 이번에 인수하기로 한 후보 야후 맞죠?”
“야, 비밀이라며 그렇게 떠벌려도 돼? 너 준공식 파티하는 연회장 아니야?”
“네, 맞아요. 야후 인수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등 뒤에 들린 정훈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박성훈 기자.
조심스럽게 품에서 전화를 꺼내 문자를 찍었다.
‘신화그룹, 야후 인수 준비’
특종을 잡은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