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미스터 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인수전에서 당신이 빠지면…….”
“인수 가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겁니까?”
“잘 아시네요.”
쓰러져 가는 회사를 비싸게 팔아먹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를 좀 도와주시죠.”
“제가 미끼가 되어 달라는 겁니까?”
“부탁드립니다.”
“흠.”
정훈은 하얀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을 가는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신화그룹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입니다.”
“네? 명예를 더럽히다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투자에 있어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54번을 투자해서 모두 성공했죠. 인수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하는 건 무조건 가졌습니다. 그런데 야후 인수전에서 실패한다면 저와 신화그룹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겁니다.”
54번의 성공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순간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아…… 54번을 투자해서 모두 성공했다구요?”
“믿는 건 여러분 자유입니다.”
금이 가는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비장의 무기.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좋은 비책이 떠올랐다.
‘돈.’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도 거부할 수 없다.
“만약 스타그룹에 좋은 가격으로 매각한다면 사례를 하겠습니다.”
“사례라…… 얼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훈이 관심을 보이자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존심을 강조한 그의 말과 달리 금액에 따라 태도가 바뀔 여지가 있다.
“알리바바 주식 매각 금액에서 천만 달러를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풉. 이건 원,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천만 달러라니,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정훈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흠…… 그럼 원하시는 금액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 보시죠.”
정훈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다음 두 사람을 보았다.
‘기회, 지금 설득한다면 어쩌면…… 공짜로?’
목소리의 톤을 낮추며 진중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여러분은 100억 달러, 어쩌면 200억, 운이 좋으면 300억 달러까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손을 떼면 100억 달러도 받기 어렵죠.”
“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200억 달러는 받을 겁니다.”
기분 나쁘다는 듯 제임스가 반박했다.
“그럴까요? 경영 환경이란 게 시시각각 변합니다. 야후의 시장 점유율도 바닥을 향해 추락 중이죠.”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훈은 두 사람의 터질듯한 얼굴을 무시한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쩌면 파산도 순식간입니다. 점유율이 하락한 만큼 광고비도 줄어들죠. 하지만 나가는 돈은 여전히 그대로…… 잘 아시죠?”
정훈의 말에 두 사람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픈 만큼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래서, 제가 제안드리는 건 인수가의 30퍼센트를 달라는 겁니다.”
“미친……. 미친…… 사람이군요.”
제임스가 숯덩이처럼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게리는 생각이 달랐다.
“30퍼센트는 너무 과합니다. 인수전에 참여하는 것 만으로 30퍼센트라니요. 강도와 다름없죠.”
정훈은 그의 말을 비웃었다.
“훗, 제가 없어도 3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비율이 너무 그렇다는 거죠. 10퍼센트 어떤가요? 단 200억 달러가 넘을 경우에.”
“흠……. 10퍼센트라, 200억 달러면 20억, 300억 달러면 30억 달러밖에 안 되는데…… 제 명성과 그룹의 이미지를 팔기엔 적은 돈입니다.”
정훈은 거절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정훈은 일부러 300억 달러로 예를 들었다.
300억 달러.
눈이 뒤집힐 만큼 큰 금액.
그들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숫자다.
환상적인 금액을 듣는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들은 이미 300억 달러에 회사를 팔고 남태평양의 요트 위에서 헐벗은 미녀들과 함께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정훈이 그들을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300억 달러 전부를 갖고 싶은 그들.
정훈에게 떼어 줄 90억 달러는 생살을 도려 내는 것 같은 고통이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200억 달러에 매각하면 20억 달러. 300억 달러 매각하면 50억 달러. 어떻습니까? 그러면 저도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어지는데.”
“좋아요.”
정훈의 제안을 게리가 덥석 물었다. 제임스는 여전히 뒤로 물러서 있다.
“당신은요?”
“저도 찬성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임스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협상이 체결됐다.
두 사람은 어차피 300억 달러나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훈은 생각이 달랐다.
야후를 300억 달러에 야후를 매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쓰러져 가는 회사를 300억 달러에…… 산다면, 이석이 얼마나 행복해할까?
눈앞에 환하게 웃는 이석의 행복한 얼굴이 그려졌다.
정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의지를 불태웠다.
거기다가 알리바바도, 공짜로 먹을 수 있다.
일타쌍피!
***
‘신화그룹 야후 인수 추진 중’
‘윤정훈 회장의 갑작스런 미국 방문, 야후 인수를 위한 포석인가?’
세계 최대 포털 사이트.
구글에 검색 시장의 점유율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는 사이트였다.
야후는 한국 포털 사이트의 조상님이다.
그룹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윤정훈 회장의 인수 의지는 분명하다고 했다.
인수 금액도 역대 최고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룹에서 가장 취약한 IT 분야 진출을 위한 포석인가?’
기사는 신화그룹에서 가장 취약한 IT 분야 강화를 위한 포석으로 생각했다.
신문을 보던 이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도 야후, 저기도 야후.
미국에서보다 야후가 더 많이 언급되었다.
이석 회장은 절대 질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당한 수모가 생각났다.
입술을 질끈 깨물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복수를 향한 그의 굳은 의지가 드러났다.
더 큰 성장을 위해 반드시 야후를 가져야 한다.
인터넷을 지배하는 스타 그룹이 되어야 했다.
이석의 두 눈은 야후에 대한 탐욕으로 반짝였다.
가지기만 한다면 성장은 분명하다.
윤정훈이 찍은 회사가 절대 실패할 리 없다.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가 10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룩한 성과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똑, 똑, 똑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윤정훈 회장이 지금 야후 측과 협상 중이라고 합니다.”
“뭐? 그럼 그것 때문에 급하게 미국으로 간 거야?”
“네.”
“그럼 인수금액은 얼마래?”
“윤정훈이 250억 달러를 제시했는데 야후에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석의 눈은 믿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한국 돈으로 30조가 넘는 돈을 쏟아붓는 큰 배포.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250억 달러? 니미……시팔, 돈이 썩어 넘치는가 봐.”
“그리고 그게…….”
“말해!”
“저쪽에서 윤 회장의 의중을 파악해서 그런지 계속 가격을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까지 올릴 것 같아?”
“300억 달러는 생각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수전에 뛰어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젠장.”
“인수전에서 성공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그룹 내 유동자금이 얼마야?”
“계열사 전체에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10조 정도입니다. 그리고 1년 내로 가능한 것이 20조 됩니다.”
“30조는 융통할 수 있군.”
“네, 하지만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위해선 최소 5조 원의 현금은 보유해야 합니다.”
25조밖에 되지 않는 자금.
부족하다.
이석은 방법을 생각했다.
언제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상속 자산.’
답이 떠올랐다.
아직 유언장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다.
아버지의 부동산 재산은 최소 50조에서 100조.
그걸 사용하면 문제없다.
상속재산은 대부분 부동산이다.
거기다 세금도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당장 현금화는 쉽지 않다.
아쉽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회장님, 여사님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며 창이 넓은 검은 모자를 쓴 어머니가 들어왔다.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은색으로 입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고개를 까딱인 그녀는 소파에 앉았다.
모자를 벗어 옆에 두고, 장갑을 벗었다.
“인수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무슨 일입니까?”
이석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이 그룹의 주인은 자신이다.
“어머니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참아 왔다.
왕이 된 지금, 참을 필요는 없다.
“뭐, 뭐라구요?”
“미국 회사 중에 괜찮은 게 매물로 나왔습니다. 적당한 가격에 인수할 예정입니다.”
“적당한 가격이 300억 달러입니까?”
이석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떤 새끼가 일러바쳤지? 반드시 잡아 낸다.’
색출을 다짐했다.
“대답하세요. 300억 달러면 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올 수도 있어요.”
“아닙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문제없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사업은 우리 돈으로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은행이 있는데 왜 우리 돈을 씁니까?”
“은행 돈? 그럼 그 돈을 대출받을 담보는 있습니까?”
이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분을 담보로 제공하는 걸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물론 늦어도 일 년 안에 상속 재산이 들어오면 문제가 해결된다.
나중에 담보를 교체하면 된다.
자신의 생각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상속 재산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어머니.”
“뭐? 뭐라구욧?”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석의 고막을 긁었다.
“흠, 아랫사람들도 있는데…… 회사에서는 제 위신도 생각해 주시죠, 어머니.”
“이석 회장, 갑자기 이리 급하게 인수를 추진하는 이유가 뭡니까?”
“윤정훈이 인수하려는 회사입니다. 야후를 가지면 인터넷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인선도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오늘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맞는 말이다.
윤정훈이 인정한 회사, 성장은 보장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룹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의 절반 넘게 사용되면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승자의 저주에 빠져 버린다면…….
만약, IMF 경제위기 같은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면…….
하인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모든 건 잘되고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 뇌종양처럼 붙어있던 이헌도 사라졌다.
천성한과의 계획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윤정훈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회복하고 있다.
시간이 되면 자신의 아들이, 이석이 왕좌를 차지할 것이다.
행복한 미래만 남았다.
상속만 완료되면 된다.
상속.
하인선은 박수길이 왜 유언장을 공개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나 딴생각을 품는 건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이석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하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깐 제가 죄송했습니다, 어머니. 표현이 거칠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심리적으로 아직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다 큰 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한 나도 미안해요. 그래도 야후 인수는 심사숙고하세요.”
“염려 마십시오. 어머니 아들입니다. 잘할 겁니다.”
하인선은 아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박수길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자료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인선이 천성한과 아주 오랜 내연관계였고 이석이 그의 아들이다?
하인선과 이헌의 아들은 정은수이고 윤정훈의 절친이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지?’
어떻게 관계가 이렇게 꼬여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그런데 한호그룹 한판수 회장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지?
박수길은 유언장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금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사태가 심각해졌다.
친자 확인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한 푼도 상속받을 수 없다.
“하, 이거 까딱하다가 정은수 놈이 다 가져가겠는데…….”
박수길은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두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두통에 효과적인 지압이었지만 오늘은 소용없었다.
비서에게 안마나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폰을 누르려 할 때였다.
“스타그룹 하인선 여사님 오셨습니다.”
“누구?”
“여사님요.”
박수길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대표님?”
박수길을 찾는 비서의 목소리만 들렸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