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무슨 일입니까?”
“이헌의 유언장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정훈은 시계를 보았다.
약속에 늦을 수는 없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할 말이 뭡니까?”
“박수길 변호사가 유언장을 조작했습니다.”
“네? 지금 무슨 말 하는 겁니까? 같이 공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같이 공증했다는 사람이 조작된 유언장이 발표되도록 침묵하고 있다니.
사람을 잘못 본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사실을 밝히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그게, 이헌 어르신께서 여기까지 생각을 하셨습니다. 박수길이 유언장과 관련해 저를 협박한다면,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정훈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헌이 여기까지 생각했다니.
“회장님께 이걸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판호가 정훈에게 USB 하나를 건넸다.
“뭐가 들어 있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거리낌 없는 박수길의 범죄행각에 정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흠, 박수길 대표가 유언장으로 이판호 씨를 협박했다는 건 조작했다는 거겠죠?”
“네, 원래 유언장에 친자확인 소송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자신의 진짜 유족에게 재산을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석이 아니라 자신의 친아들 정은수에게 상속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새로운 유언이 나왔습니다.”
정훈은 분노한 이판호에게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언장 조작이야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아, 협박을 했다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법조계에 발을 못 붙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겁이 났습니까?”
“아니요. 회장님이 지시하신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수길 대표님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아마도요. 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그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네요.”
이판호의 눈에 살기가 비췄다.
자타공인 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정훈은 그의 활약이 기대되었다.
이 자료가 박수길을 치는 아주 좋은 미끼가 될 것이다.
“그럼 박수길 대표와 해송이 법조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네, 회장님.”
등 뒤에서 다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훈아.”
정훈은 고개를 돌려 다혜를 보았다.
청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은 청순한 차림의 그녀가 서 있었다.
정훈은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짧은 순간 다혜의 얼굴에 걱정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은 건가?’
정훈은 다혜가 자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지나치게 환한 그녀의 표정은 정훈을 저녁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다.
***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짧은 입맞춤을 한 다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훈은 가방에서 USB를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동영상 파일이 하나 저장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파일을 클릭했다.
조그마한 컴퓨터 화면에서 이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반갑네. 이헌이네. 자네를 죽이려던 내가 죽어서 자네에게 부탁할 줄이야. 하하하.”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영상을 자네가 본다는 건 박수길이 황족의 피가 아닌 가짜 아들 이석을 지지한다는 거겠지……”
이헌은 동영상으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천지회의 친위대는 자신의 아들 이석 때문에 붕괴되었다.
일본에서 데려온 야쿠자들도 부산에서 몰살되었다.
대마도에서 한국을 공격하려던 현양사의 최정예 부대와 야마구치 구미도 와해 되었다.
야마구치 구미가 괴멸된 도쿄의 밤거리를 한국의 화신유통과 신병규의 이나카와 카이, 두 연합세력이 순식간에 장악했다.
그들은 남아있던 야마구치 구미 세력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재건이 어려운 상황.
그의 말에 따르면 현양사의 남은 힘은 자위대에 숨어있는 세력뿐이라고 했다.
이헌은 덤덤히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지만, 실상은 남아있는 천지회와 일본의 현양사의 잔당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남아있는 힘은 보잘것없었다.
“알다시피 내가 가진 힘은 아무것도 없어. 우리 하인선 여사님의 ‘신청’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으니 제외하고…….”
신청의 세력과 규모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동영상의 목적은…… 천지회와 신청 그리고 현양사의 괴멸인가?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무엇이 그를 미몽에서 벗어나게 한 거지?’
의문을 품었다.
이헌은 정훈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은수가 잘 컸더구나. 상처가 많은 아이라 엇나가기 쉬웠을 텐데, 자네가 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잘 지켜줬더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잘 자랐어. 자네와 현여사의 도움이 큰 거 잘 알고 있네. 고맙네.”
그의 얼굴에는 은수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환멸이 동시에 보였다.
“내 아들 은수와 보냈던 아주 짧은 순간이 나를 어리석은 미몽에서 벗어나게 했어. 그 아이를 통해서 불행한 내 인생을 깨달았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지.”
은수가 그를 변화시킨 것이었다.
“흠…… 그동안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네. 자네에게 하나만 부탁하네. 남아있는 사람들의 미몽을 뿌리 뽑아 주게. 그게 내가 자네에게 하는 부탁이야.”
이헌의 목적은 신청과 천성한의 군부, 그리고 현양사의 괴멸이었다.
그리고 유산의 제대로 된 상속이었다.
“내 모든 재산을 나의 아들 정은수에게 상속하고 싶네. 그 아이라면 헛된 곳이 아니라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부탁하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이자 그 아이의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우리는 다 김애월의 장난감일 뿐이었어.”
그 말을 끝으로 동영상은 끝이 났다.
한 인간의 뒤늦은 후회를 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아버지.
정훈은 진심으로 이헌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김애월의 장난감이란 말은 뭐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제쳐 두었다.
지금은 올바른 상속을 위해 박수길의 해송을 붕괴시켜야 할 순간.
정훈은 일송그룹 본관을 다이너마이트로 터트려 버린 날이 생각났다.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날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송은 빠르게 지워졌다.
해송에게도 같은 선물을 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 찾았다.
“찾으셨어요?”
“이제 해송을 칠 겁니다.”
“쓸어버리는 건 마음만 먹으면 하실 수 있잖아요.”
해송을 친다는 말에 차영미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무력이 아니라 법으로 그들의 괴멸시킬 겁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칼이 자신들을 찌르는 걸 봐야 즐겁죠. 그리고…… 천성한이 다음 표적이 될 겁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쓴웃음을 지으며 차영미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미뤄진 만큼 최고의 복수를 준비해야죠.”
정훈은 그녀의 어색한 웃음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자, 그럼 해송을 부술 방법을 찾아볼까요?”
“몇 번을 해송의 시스템에 들어갔는데 중요한 자료 다 내부망으로만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접근할 수가 없어요.”
“결국, 누가 가서 연결해야 한다는 거죠?”
“네, 직접 연결해야 해요. 그리고 용량이 크다면 근처에서 무선통신 차량을 운영해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해송의 비밀 서버에는 얼마나 대단한 정보가 있을까요?”
“모르긴 하지만 거기 있는 자료가 공개되면 대한민국 엘리트의 절반 이상이 날아갈 겁니다.”
“정말요?”
“저번 수금재와 대원각에서 촬영한 내용을 보면 그들은 범죄의 증거를 은폐하고 또 없는 범죄도 만들기도 했어요. 말 안 듣는 재벌 놈들 몇몇을 증가를 만들어 날려 버리더군요. 돈과 권력을 가지기 위한 일에는 수치심이 없는 놈들입니다.”
“하, 대단하네요. 대단한 만큼 제대로 보내줘야겠어요. 연결만 해주세요. 제대로 불태울게요.”
비릿한 표정을 본 정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진짜 불 지를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회장님.”
“네?”
차영미가 정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죠?”
“회장님이 직접 연결해야죠.”
“내가? 이걸?”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회장님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어요. 지금 해송의 내부망 컴퓨터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박수길 변호사 방에는 분명 있을 거예요. 거길 제일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사이는 안 좋아도 다혜 씨의 할아버지, 손녀의 사위 될 사람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훈도 자신이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등 떠밀려 하는 것 같아 살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거면 내가 한다고 할 걸이란 후회가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차영미는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회장실을 나갔다.
며칠 뒤 정훈은 차영미에게서 작은 USB를 받았다.
컴퓨터 뒤에 있는 USB 포트에 꽂으면 된다고 했다.
“무선 와이파이 기능이 있어서 이걸 통해 제가 내부망으로 접속할 수 있어요. 그거 하나면 게임 끝입니다.”
차영미는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말했다.
***
정훈은 박수길을 만나기 위해 서초동으로 갔다.
서초동으로 갈 때마다 자신이 되돌아오기 전 폭발이 생각나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해송빌딩 앞에서 선 정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약속되어 있어 특별한 절차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서실 직원이 마중 나와 정훈을 박수길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박수길의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그는 정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소파에 앉게.”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서류를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준비서면을 검토해야 해서.”
“네.”
소파에 앉은 정훈은 박수길의 눈을 피해 컴퓨터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정훈을 힐긋거리며 감시하고 있었다.
박수길의 자리에 있는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박수길의 오른편에 모니터가 하나 보였다.
‘저거군’
잘 쓰지 않는 컴퓨터의 위치를 파악한 정훈은 품 안에 있는 USB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있던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 소파 사이에 밀어 넣었다.
박수길은 할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훈도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얼굴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어색해 보였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계단에서 굴렀네. 우리가 서로 안색을 묻는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
정훈의 대꾸에 박수길의 눈썹이 치솟았다.
“예의를 갖추지. 적이라고 해도 내가 다혜의 할애비야.”
“원하신다면요.”
정훈의 비아냥에 박수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약 올리러 온 건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게.”
“이헌 어르신의 상속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네.”
“유언장을 조작하셨더군요. 이헌 어르신이 남긴 유언에 따라 상속하셔야죠.”
“이미 하인선 여사와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 이석 회장에 상속되었네.”
“친자확인절차도 유언에 들어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 유언을 만드셨더군요. 이헌의 유언인지 박수길 대표님의 희망인지 모르겠습니다.”
정훈의 말에 박수길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내가 정하면 그게 법이야. 이헌의 유언장이 법적인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 박수길의 허락을 받아야지.”
박수길의 눈에 서릿발 같은 노기가 가득했다.
“나, 박수길은 친자확인 같은 유언장은 허락할 수 없어. 그래서 이헌의 유언장을 내가 새로 만들었어. 천지회와 우리 사대부를 위해.”
그는 진심이었다.
그의 의지가 법이었다.
“역시, 제대로 미쳤군요. 이헌 어르신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제게 부탁하더군요. 해송을 괴멸시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유산을 하나뿐인 아들 정은수, 아니 이환에게 상속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박수길이 파안대소했다.
“이봐, 내가 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할 수 있으면 해보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경찰, 검찰, 법원까지 장악한 해송.
아직 정훈은 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조폭들을 데려와 쓸어버리는 건 가능하지만, 반드시 법으로 이 해송과 법조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수길이 말을 이었다.
“구한수만 믿고 지금까지 열심히 설쳐댔어. 이제 구한수의 시간이 끝나네. 그럼 신화라는 거대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겠네. 배가 아주 부르겠어, 하하하!”
박수길이 섬뜩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도 이헌 어르신께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어이 명을 재촉한다면 내가 거둬주지.”
-똑, 똑, 똑.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대표님, 출발하셔야 합니다.”
“뭐?”
“오늘 사법연수원 특강이 있습니다.”
“아차, 내가 그걸 깜빡했군.”
박수길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만 나가게. 앞으로 볼일은 없을 거야.”
박수길은 자신의 옷걸이에서 상의를 챙긴 다음 불편한 발걸음으로 느릿느릿하게 방을 나갔다.
정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앞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비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품 안에서 소형 이어폰을 꺼냈다.
“이제 시작합니다. 준비하세요.”
“네.”
정훈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긴장되었다.
다시 박수길의 방 쪽을 향해 걸었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던 비서에게 다가갔다.
“제가 대표님 방에 휴대폰을 놔두고 온 것 같아서요.”
“네? 휴대폰요? 잠시만요. 대표님 방에 들어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상냥한 웃음으로 양해를 구한 다음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젠장, 쉽게 되는 게 없네. 그냥 쓸어버리면 몇 시간이면 끝나는데.’
긴장된 순간.
정훈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감추며 전화를 거는 비서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대표님.”
정훈의 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