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정훈의 말에 비서는 잠시 고민한 다음 수화기를 들었다.
매뉴얼 대로 박수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송미선 비서는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영혼 없는 어색한 웃음을 자신 앞에선 남자에게 보였다.
남자는 시계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결이 안 되네요. 어떡하죠? 허락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금방 찾아요. 잠깐만 들어 갔다 오면 됩니다. 제가 지금 많이 바빠서 그런데…… 안 될까요?”
송미선은 자신을 향해 웃는 남자의 미소에 순간 흔들렸지만 엄격한 로펌의 보안 매뉴얼을 떠올렸다.
몇 달 전 매뉴얼을 어겨 해고된 동료가 생각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 더 전화해 볼게요.”
다시 어색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대표님, 지금 아까 그분이 전화기를 두고 가셨다고 해서 찾으러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래.”
뚝 하고 끊어졌다.
순간 평소와 다른 목소리인 것 같았다.
아니다, 그녀는 분명 전화기에 저장된 대표님의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자동으로 저장되어 있다.
“허락하셨죠?”
“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을 도우려는 다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괜찮아요. 금방 찾아서 나올게요.”
“하, 네. 천천히 찾으세요. 대표님도 허락하셨는데요.”
정훈은 여유로운 발걸음과 흐뭇한 미소로 문을 열었다.
“당연히 허락하겠지. 흐흐흐”
며칠 동안 해송의 여기저기를 뒤진 차영미는 비서실 컴퓨터에서 보안 매뉴얼을 확인했다.
그래서 미리 박수길의 목소리를 준비했다.
얼마 전 유산상속에 사용된 목소리를 잘라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조금 전 전화기에 저장된 변호를 변경했다.
박수길의 비서 송미선은 자신이 박수길 대표와 통화를 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정훈은 박수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품 안에 있던 USB를 꺼내 책상 옆에 있던 컴퓨터 뒤에 꽂았다.
그리고 이어폰을 꺼내 다시 귀에 꼈다.
“연결했어요.”
“네, 이제 조심히 나오시면 됩니다.”
들뜬 목소리의 그녀.
오랜만에 경쾌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린 그녀는 신이나 있었다.
“혹시 박수길 회장 컴퓨터도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그럼 하드만 이미지로 복사해 놓을게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크흠.”
굳이 말리지 않았다.
복수를 하지 못한 그녀.
그녀의 답답한 마음을 풀 장소가 필요했고 해송의 컴퓨터들은 아주 좋은 장난감이었다.
정훈은 소파의 틈에 끼운 전화기를 꺼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자신을 향한 눈길에 전화기를 흔들어 보였다.
간단히 목례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 해송 빌딩 반대편에 주차된 작은 봉고차 안으로 들어갔다.
곽현수 아저씨가 운전석, 조수석에는 지현복이 졸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두드리는 차영미와 어색한 표정의 천진혁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조합이었다.
“다 받는데, 얼마나 걸려요?”
“2시간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양이 많아요?”
“네, 서버가 따로 있는데 그 안에 자료 많아요.”
“그럼 전 오랜만에 낮잠이나 자렵니다.”
정훈은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다음 눈을 감았다.
박수길의 해송을 밀어 버릴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자신도 내심 아주 조금은 두려웠다.
수사, 기소, 판결이 그들의 손에 있다.
몇몇 재벌이 해체되고 정치인이 감옥에 간 게 다 그들의 장난질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주먹으로 치고받는 싸움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거대한 카르텔과의 전쟁은 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저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까? 구한수 대통령 다음에도 신화는 건재할 수 있을까?’
의문과 함께 서서히 잠자리에 들었다.
***
박다혜는 서초동의 작은 공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다.
주된 변호는 인권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변호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배경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에 가장 주목받는 박다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최상위 귀족인 박다혜의 털털하고 친근한 모습을 좋아했다.
오전에 일을 마친 그녀는 일찍 퇴근했다.
볼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근처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간단히 때운 후 그곳에서 죽치고 있었다.
창밖에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해송빌딩이 마주하고 있었다.
시계를 계속 확인하던 그녀는 전화기를 꺼낸 다음 다이얼의 2번을 길게 눌렀다.
“박현철입니다.”
근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야, 내 번호 저장 안 해 놓은 거야? 아직도 캠핑장 때문에 삐진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근엄한 아버지의 위엄을 보이고 싶어서.”
“휴, 아빠 그런 건 목소리가 아니라 지갑에서 나오는 거야. 지갑!”
“왜 전화했어?”
“할아버지 오늘 사법연수원 특강 있는 거 맞아?”
“맞는데, 어제 비서실에 몰래 확인했단 말이야.”
“흠, 알겠어. 끊어.”
“야, 다혜야, 밥은 뭐 먹었어.”
“밥은 내가 사랑하는 햄버거 먹었지.”
“그런 거 몸에 안 좋은……”
아빠의 잔소리가 시작되자마자 냉정하게 전화기를 끊었다.
화해하고 가까워진 건 좋은데 선을 넘는 발언들.
박다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해송빌딩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분명 정훈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여긴 웬일이지? 혹시 이헌씨의 유산 문제 때문인가?’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가에 앉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간을 보내길 한 시간.
할아버지 박수길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탔다.
다혜는 밖으로 나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해송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박수길 대표의 친손녀라는 증명서는 편리하다.
누구도 자신을 제지하지 않았다.
인사 한 번이면 모든 문이 열렸다.
‘어? 안돼.’
엘리베이터로 가던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숨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훈이 눈에 보였다.
먼저 숨어서 다행히 자신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할아버지의 사무실 앞으로 갔다.
평소에 있던 언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직원이 자신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 계세요?”
“할아버지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 저분이 저희 할아버지거든요. 오늘 오라고 하셨는데.”
다혜의 말에 경계를 하던 비서는 보안팀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손녀임을 확인한 그녀는 경계를 풀었다.
“오늘 사법연수원에 특강이 있어서 거기 가셨는데요. 아무래도 약속을 깜빡하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오늘 만나야 하는데, 그럼 안에서 기다릴게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녀.
“잠시만요. 대표님께 허락을 받아야 돼서요. 얼마 전에 보안이 강화되었어요.”
“네? 아, 하하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전에도 몇 번 할아버지의 방에서 기다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별문제 없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다혜는 대기석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평소와 다름없다고 스스로를 대뇌였지만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비서에게 자신의 불안을 들킬 것 같아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야?”
“박다혜 양이 찾아왔습니다. 방에서 기다리라고 할까요?”
박수길은 갑자기 찾아온 손녀 때문에 의아했다.
‘무슨 일이지?’
얼마 전에 몇몇 사람들과 사무실을 개업했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인사하러 온 건가?
하지만 그전에 찾은 윤정훈 생각이 나면서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 별일 없었지?”
때마침 그를 태운 차가 사법연수원 본관 앞에 멈춰 섰다.
대기하고 있던 연수원 원장이 차 문을 열었다.
“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아까 오신 손녀 사위분이 휴대폰을 찾아서 바로 돌아갔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건성으로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박수길이 내리자마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90도가 넘는 폴더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법원장님.”
중년남성들의 합창.
남들이 보면 무식한 조폭이라고 생각했을 법했지만 박수길은 흡족했다.
대한민국 법조계를 쥐락펴락하는 자신의 위상을 느끼는 순간이자 자신이 살아있는 권력자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흐뭇한 웃음을 짓던 박수길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허, 사람들이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한 다음 앞장서 걸었다.
그의 뒤를 십여 명의 사람들이 졸개처럼 졸졸 쫓아갔다.
대한민국 파워 엘리트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복도를 지나 사법연수원생들이 모인 강당에 들어가기 직전 박수길의 귀에 거슬렸던 비서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손녀사위가 휴대폰을 찾아? 윤정훈인데.’
멈칫한 그는 전화기를 꺼냈다.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질문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
“네? 무슨 말씀 말입니까?”
당황한 송미선 비서.
“다혜 오기 전에 누가 뭐 했다고?”
“아, 손녀 사위분이 사무실에 전화기를 두고 나왔다고 해서요. 아까 대표님이 허락하셨는데요.”
“뭐?”
박수길은 통화기록을 확인했다.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깊은 주름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을 보던 시선을 생각했다.
자리에 멈춰선 그는 눈을 감고 몸을 살짝 휘청였다.
“대법원장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어떡하나? 내가 갑자기 두통이 심해져서 강연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네?…… 괜찮습니다. 특강이야 다음에 하시면 됩니다.”
“기다린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네, 이 친구들이 많이 아쉽겠습니다. 언제 대법원장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뵙겠습니까?”
박수길은 남자의 아부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차를 향해 걸었다.
자신의 핑계가 현실이 되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대기하던 차에 올라탄 그가 돌아갔다.
“최대한 빨리 복귀해.”
“네.”
박수길이 탄 최고급 세단이 굉음을 울리며 사법연수원을 벗어났다.
***
할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온 그녀는 차분히 소파에 앉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잡지를 넘기며 밖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밖이 조용해졌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대표변호사 박수길’
투명한 명패가 반짝이며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신의 우상.
대법원장 할아버지.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이었는데, 그 정의는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었다.
사욕일 뿐이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던 과거를 재빨리 떨쳐냈다.
자신을 향해 인자하게 웃던 할아버지도 기억 속에서 지웠다.
대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무섭게 화를 낸 그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몇 년 전 할아버지의 사무실에 놀러 왔을 때 본 광경.
비밀금고에 서류를 집어넣고 있던 그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금고의 문을 닫았다.
처음으로 그녀를 호되게 질책했다.
잊을 수 없는 그 날.
평화로운 정원의 한가로운 연못을 그린 모네의 ‘수련’이 벽면 한가운데 걸려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그 자리에.
할아버지, 아니 박수길의 비밀금고가 있다.
***
“보스, 일어나 봐요.”
“으으응.”
피곤했던 정훈의 몸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좁은 공간에서 팔을 구부려 기지개를 켠 다음 목으로 까딱인 다음 길게 하품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다혜 씨가 박수길의 사무실에 나타났어요.”
“네?”
정훈은 다혜가 왜 거기 있는지 집히는 게 하나 있었다.
이판호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날 자신의 뒤에서 나타난 그녀.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한데. 뭘 하려는 거지?’
정훈은 차영미에게 물었다.
“작업은 얼마나 남았죠?”
“다 받으려면 1시간은 남았어요.”
불안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겠지.
하지만 해송의 박수길은 박다혜의 친근한 할아버지가 아니다.
법과 양심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냉혈한일 뿐이었다.
불안은 점점 자신의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다혜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비서 앞에 있는 것 같은데요. 비서가 박대표에게 전화했어요.”
차영미의 말을 들은 정훈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어폰을 낀 차영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박수길 사무실 내부를 볼 순 없어요? CCTV 없어요?”
“대표 사무실에는 없어요. 대신에…… 컴퓨터에 카메라가 달려 있는지 볼게요. 그게 있다면 어떻게든 확인할 순 있어요.”
다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린 그녀.
“찾았다. 여기요.”
모니터에 다혜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분주하게 책상을 뒤지는 그녀.
카메라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답답했다.
“크흠.”
앞자리를 지키던 곽현수가 마른기침하며 주의를 끌었다.
“박수길이 돌아왔습니다.”
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