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박창수는 천신재를 감시하던 부하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곳을 지키던 조직원들이 모두 어딘가로 이동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적들의 낯선 움직임에 박창수는 조직원들을 천신재로 모았다.
기회가 있으면 김애월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직원들이 빠져나간 오늘 같은 날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잠시만요.”
부하는 전화를 걸어 그들의 이동장소를 확인했다.
“서초동으로 가는 것 같은데요.”
“거긴 신화그룹이나 우리 사무실이 없는데.”
“네, 관련 있는 건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전부 조심하고, 모든 사무실은 혹시 모를 습격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라고 해.”
“네, 형님”
태풍이 몰아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도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온몸의 긴장을 끌어 올린 채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며 경계하는 수밖에 없다.
그의 눈에 굳게 닫힌 천신재의 문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때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선인가?’
텅 빈 천신재로 들어가는 그녀.
김애월을 보좌하기 위해서인가?
박창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박창수 씨, 저예요.”
전화기 너머로 차영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지금 회장님이 해송빌딩에 사로잡혔어요.”
해송빌딩의 위치가 서초동이었다.
“해송빌딩요? ……서초동 맞죠?”
“네.”
박창수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회장님을 노리고 있다. 어떡하지.’
“제가 지금 그리로 출발하겠습니다.”
“아니요. 회장님이 천신재로 가랬어요. 그렇게 말하면 안다고 했어요.”
“천신재요?”
박창수는 눈을 감고 회장님의 의중을 생각했다.
‘천신재로 가라…….’
순간 신청의 수장 김애월과 하인선이 떠올랐다.
저들을 붙잡으면 된다.
“지금 회장님이 위급한 상황이죠?”
“네.”
“좋아요. 그러면 시간을 끌어요. 제가 김애월과 하인선을 잡을게요. 다행히 제가 지금 천신재 앞이에요.”
“정말요?”
안도하는 목소리였다.
평소에 쉽게 긴장하지 않는 차영미가 잔뜩 긴장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럼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박창수는 차 안에 있던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가자, 저곳을 접수한다.”
“네?”
깜짝 놀란 표정이다.
“자신 없나?”
“아닙니다.”
봉고차의 문이 열리고 7명의 남자가 내렸다.
서서히 걸음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최고로 높인 7명의 남자들이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박창수는 안을 보았다.
기척은 없었다.
“목표는 김애월과 하인선이야. 그 둘을 잡으면 된다. 잔챙이들은 신경 쓸 것 없다.”
“네”
모두 품 안에 있던 칼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청명하게 반짝이는 칼날이 기세를 뽐냈다.
사내들은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박창수가 앞장서 김애월이 있는 곳을 찾아 앞으로 걸었다.
***
“먼저 받으세요.”
정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박수길에게 말했다.
“자네가 먼저 받지. 먼저 갈 놈한테 내가 양보하마.”
“할아버지.”
“닥쳐.”
평소와 전혀 다른 박수길의 본모습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의 낯선 얼굴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정훈의 따뜻한 손이 긴장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차갑고 축축했다.
그녀의 긴장이 손에 느껴졌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치라니, 거슬리네요.”
“뭐? 이놈. 세 치 혀를 뽑아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전화 좀 받고요.”
정훈이 전화를 받았다.
“윤정훈입니다.”
“회장님, 박창수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김애월과 하인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올 뻔했다.
“다친 사람은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빈집이나 다름없어서 제대로 된 저항도 없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김애월을 연결해 주세요.”
정훈은 통화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잠시 후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이 교활한 놈.”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들이 더 교활합니다, 김애월 씨.”
정훈은 박수길 뒤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댄다.
“하여튼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이잇, 반드시 찢어 죽여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곁에 앉아 있던 다혜도 일어섰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걸 잡아 품에 안았다.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
“괜찮아, 이제.”
정훈은 다혜의 손을 잡은 다음 박수길을 보았다.
“곧 당신이 믿고 있는 법이 당신과 해송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겁니다.”
박수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헛소리 마라.”
정훈은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자신을 노려보는 ‘신청’의 수하들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갔다.
곽현수와 지현복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잔뜩 굳어 있던 두 사람이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아니, 어떻게……”
살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던 그들에게 정훈이 희망의 빛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저를 믿으세요. 그럼 살길이 보입니다.”
“허허허”
곽현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지현복은 넉살 좋게 두 손을 들며 외쳤다.
“허…… 믿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신청의 졸개들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해송빌딩을 나온 정훈은 다혜를 신화병원으로 보냈다.
“저 안에 있는 ‘신청’의 졸개들이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안에 가둬 두세요.”
정훈은 화신유통 직원에게 지시한 다음 천신재로 이동했다.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천신재의 거대한 나무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미 화신유통 조직원들이 천신재를 포위하고 있었다.
정훈을 본 남자들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회장님을 뵙습니다.”
가벼운 목례를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천신재의 깊숙한 곳에 김애월이 거처하는 별채로 들어간 정훈.
박창수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정훈은 낡은 한옥의 문을 옆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꼿꼿한 자세로 김애월이 앉아 있있었고 그 옆에 하인선이 있었다.
“이제 무슨 짓이냐? 서로 물러서기로 약속했으면 물러서야지.”
“약속?”
“그런 헌신짝 같은 것을 믿습니까? 원래 천신재가 하던 수법을 오늘 제가 한번 써 봤습니다.”
“이놈!”
노파의 고함이 방안을 메웠다.
“귀 안 먹었어요. 할멈.”
정훈은 부들대는 김애월을 두고 곁에 앉아 있던 하인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담이 크신 겁니까? 놀란 기색이 없네요.”
“산전수전 다 겪은 년이라고 생각해.”
“휴,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훈은 그녀의 기세에 고개를 저었다.
“이헌 어르신이 당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헌이?”
하인선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웃음 속에 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장난감보다 못하게 대우하며 나를 가지고 놀던 놈이 이헌이었어.”
서늘한 웃음이었다.
이헌은 하인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정훈은 이 비뚤어진 관계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사랑하는 아내라고 했다.
하지만 하인선의 얼굴은 그녀가 가장 저주하는 게 이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은수도 버려야만 했다.
그녀에게 은수는 저주의 씨앗일 뿐이었었다.
정훈은 꼿꼿이 앉아 있는 김애월을 보며 생각했다.
‘김애월, 네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헌 어르신이 당신들 모두 김애월의 장난감이라고 했어요.”
“뭐?”
정훈은 김애월을 보았다.
그녀는 정훈의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박창수에게 눈짓했다.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허벅지를 얕게 찔렀다.
-으윽
“이 정도 고통은 시작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장난감이라는 뜻이야. 그냥 좀 가지고 놀았어. 그게 다야.”
단검이 아까보다 조금 더 깊게 그녀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크아악
“이헌에게 약을 선물했어.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지.”
하인선이 놀란 표정으로 끼어들며 말했다.
“뭐? 기분이 좋아지는 약? 설마, 메틸아프로티오?”
정훈은 그녀를 보며 설명을 해 달라고 했다.
“정신을 파괴해 공격적으로 만들어. 성적 쾌락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폭력적으로 변하지. 한번 중독되면 끊을 수 없어.”
“크크크, 아니야 끊을 수 있어. 이헌이 그걸 끊더군. 흐흐흐 독한 놈. 아니면 네년 몸뚱이가 그 정도로 좋았던지.”
“뭐?”
하인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 이헌이 그걸 끊다니.”
“뭐야? 몰랐단 말이냐?”
“그 약을 왜? 그 사람한테 준 겁니까?”
“당연히 너희 둘 사이를 갈라놓아야 하니까. 그래야 내가 너희를 손아귀에 두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지 않겠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앞에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처음에는 말없이 자상했던 그.
손도 대지 않았다.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아직은 아니겠지만 기다리겠다고 했다.
안심하며 자신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며 호감을 쌓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미친놈이 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낮에는 술에 취했고 밤이 되면 미쳐 자신의 침실로 들어와 괴롭혔다.
고통의 순간을 감싸 준 게 듬직한 천성한이었다.
순간 ‘천성한도 김애월이 보낸 걸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설마, 천성한도?”
“크크크,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네년은 모두 내 손 위에 놀아난 거야.”
당황하던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정훈은 세 사람의 비극의 원인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이헌 어르신은 사랑하는 아내라고 하셨습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약속은 지켜 드리죠, 나는 당신과 다르니까요. 그리고 두 분은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요.”
밖으로 나왔다.
세 사람의 비극은 결국 김애월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다.
남자는 죽었고.
여자는 자신의 자리를 버릴 수 없다.
아이는 이걸 받아들이기엔 너무 마음이 여리다.
정훈은 하늘을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인간의 비극 따윈 상관하지 않는 붉은 하늘은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
“어머니.”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선이 고개를 들었다.
결심한 표정이다.
“어서 사람들을 불러, 날 병원으로 옮겨.”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애월을 내려 보았다.
저 작은 년이 내 모든 걸 뒤틀어 버렸어.
어쩌면 행복할 수 있었는데, 저년이 나를 지옥에 빠트렸어.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어머니 장례식을 치러야 하니까요.”
“뭐?”
“제 소중한 청춘이 당신의 장난으로 날아갔습니다. 모든 걸 뒤틀어 버린 당신에게 저도 하나는 선물해야죠.”
“네 이년. 내 덕에 호의호식하며 스타그룹까지 손에 넣지 않았느냐?”
“아니요, 당신의 노력이 아니라 제 몸을 팔아 가며 얻는 대가입니다. 말은 바로 해야죠. 당신이야말로 제 덕분에 다 쓰러져 가는 조직을 재건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헛소리냐.”
하인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피로 물들어 있는 그녀의 치마를 보았다.
‘작고 초라한 노인’, 이제…… 가라.’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가방에서 짧은 칼을 꺼냈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아, 안 돼!”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기엔 그녀의 방은 너무 작았다.
***
다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신화병원 VIP룸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정훈의 표정을 본 곽현수가 다혜의 상태를 알려 줬다.
몸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다친 게 안쓰러웠다.
할아버지의 추악한 얼굴을 마주한 그녀.
고통스러울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적이 된 걸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문이 벌컥 열리며 박현철 검찰총장, 아니 이제 법무부 장관이 된 그가 들어왔다.
“다혜야!”
재벌과 부패한 정치인을 때려잡은 그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정훈이 추천했고 구한수가 받아들였다.
박현철은 정훈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해송에 갔다가 이렇게 되다니.”
“다혜가 박수길 대법원장의 본모습을 보았습니다.”
“뭐?”
박현철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강한 아이니까 이겨 낼 거야.”
“안정을 취하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다행이네. 그나마 자네가 곁에 있어서 내가 안심이 돼.”
“아닙니다.”
정훈은 그를 만난 김에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해송을 칠 겁니다.”
“뭐?”
박현철이 흠칫 놀랐다.
정훈은 한동안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 있나 보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야지. 철두철미한 자네 성격상 실패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나도 돕겠네.”
“감사합니다.”
“자네가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나도 죗값을 받지. 어서 속도를 내게.”
“……네.”
정훈은 차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수길 프로젝트, 시작하세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차영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 다음 키보드를 두드렸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