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해송 프로젝트.
정확히 표현하자면 해송 소멸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은 해송의 내부망을 해킹해 얻은 정보를 통해 이판호가 증인과 증거를 수집하려 했었다.
하지만 더 두고 볼 수 없다.
어차피 때려 부술 회사.
몇 달 빨리 진행하면 된다.
사법 카르텔이 아무리 해송을 비호한다고 해도 여론은 못 이긴다.
지금까지 신화그룹에서 마케팅을 확보한 다수의 파워블로거.
그들은 인터넷에서 메이저 언론을 능가하는 여론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 신문 또한 신화그룹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
정훈은 수금재와 대원각 같은 ‘신청’이 운영하던 요정들에서 획득한 자료를 폭로하기로 다짐했다.
거기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와 지방 유지들의 은밀한 탐욕과 그들의 유착 관계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조금만 뿌려도 대한민국을 뒤집을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판사가 변호사와 접대를 하며 피의자에게 술을 받아먹었다.
한 사건의 검사와 판사가 어깨동무하며 술을 마신다.
물론 그 값은 피의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법과 정의의 수호자라며 위선을 떨던 그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이번 해킹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유착했는지, 돈이 어떻게 오가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카운터 펀치인데…….
아직 해송의 기세 때문에 단 한 명도 증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판호가 잘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프로젝트의 진행 사항을 생각하고 있을 때 침대 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용히 자고 있던 다혜가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흔들이며 눈을 떴다.
정훈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켰다.
“병원이야, 이제 괜찮아”
“휴……, 네가 있어 다행이야.”
다혜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아니……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말았어.”
다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난 것 같았다.
눈을 뜬 다음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겨 내야지. 내가 괜히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아 미안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조금 빨라진 거지.”
“아, 잠시만, 정훈아. 눈 좀 감고 있어 봐.”
정훈이 눈을 감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 이제 눈떠.”
다혜의 손에 작게 접힌 봉투와 USB 메모리 스틱이 있었다.
“뭐야?”
“할아버지 금고에 있던 거야.”
정훈은 봉투를 꺼내 서류를 확인했다.
“어, 이거 이헌 어르신의 유언장인데.”
“좋은 거야?”
“물론, 동영상이나 파일보다는 이헌 어르신의 도장이 찍힌 유언장이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해.”
“다행이다.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어서. 괜히 사고만 친 것 같아 내심 걱정했는데.”
“아니야, 절대.”
다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문이 열렸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혜는 다급히 손을 빼려 했다.
“크흠, 뭐 손잡는 거 가지고.”
박현철이었다.
“아빠, 언제 왔어?”
“소식 듣고 바로 왔지.”
박현철은 다혜를 보고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와 줘서 고마워.”
“고맙긴, 아빠가 당연히 와야지. 참, 네 할아버지,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라. 우리랑은 다른 사람이야.”
다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야, 나도 가 볼게, 쉬고 있어.”
“그래, 정훈아. 몸조심해야 해.”
“쉬어라. 나도 급히 나와서 바로 들어가야 돼.”
“응.”
정훈이 병실 밖으로 나가자 박현철도 따라 나왔다.
“이헌 어르신의 유언장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다행이군, 확실한 증거가 될 거야. 하지만 기를 쓰고 배척하려 하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서 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압박할 겁니다.”
“뭐? 안 돼.”
박현철이 정훈을 만류한 다음 충고했다.
“손을 함부로 더럽히면 안 돼. 내게 맡기게. 나는 어차피 더럽혀진 손이야. 구정물 좀 만진다고 더 더러워지지 않아.”
“아닙니다.”
“아니야, 빨리 나도 죗값을 받으려면 한 번에 처리해야지. 내 마지막 부탁이네. 자료를 내게 줘. 그리고 내가 굴복시키는 건 전문이야.”
지난날을 회상한 박현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정훈은 박현철의 단호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자료와 지금까지 가진 자료 모두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한 번에 끝에 주지. 믿어 봐, 내가 사위…… 흠흠, 하여튼 끈 떨어지기 전에 내가 자네에게 한번은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아닙니다.”
“먼저 가 보겠네.”
박현철을 먼저 보냈다.
같이 밀폐된 공간에 있는 건 아직도 부담스러웠다.
다음 엘리베이터를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어, 회장님.”
“심영수 감독님.”
<더 드래곤>으로 최고의 흥행 감독이 된 심영수가 신화병원에 있었다.
***
심영수를 만난 정훈은 간단한 인사만 하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심영수 감독이 다짜고짜 커피라도 한잔해야 한다며 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갔다.
그의 옆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봉사활동 나왔습니다.”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거라서 언론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 하시는군요.”
“도영아, 인사드려. 여기 윤정훈 회장님.”
“네? 정말요?”
“응, 정말이야.”
심영수의 흐뭇한 미소를 본 아이가 정훈에게 덥석 안겼다.
깜짝 놀랐다.
‘이건 뭐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다.
원래 정훈은 누군가 자신에게 안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포옹은 포근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좋아했던 거지?’
“회장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제가 안 죽고 오래 살아서 <더 드래곤>을 볼 수 있었어요.”
안 죽고 오래?
꼬맹이의 입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긴 자신이 아니었으면 <더 드래곤>은 죽었을 거다.
“흠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심영수는 정훈의 다리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도영이에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 들었다. 신화제약 덕분에 제가 살아났다고 그랬어요.”
뭐?
영화가 아니라 내가 아이를 살렸다고?
정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룹 회의에서 온정식 신하제약 사장에게 줄기세포 기반의 신약에 집중투자 하라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것이 성과를 보였던 것 같다.
“사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걷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신약으로 거의 완치되었습니다.”
뭐?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아이가 이렇게 멀쩡하게 뛰어다니다니.
정훈은 신약의 효과가 대단한 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머리를 살짝 뒤로 밀었다.
“우리 도영이도 건강하게 자라렴.”
달라붙어 있는 게 좋지는 않았다.
“네!”
복도가 떠나갈 듯 크게 소리쳤다.
“하하, 녀석. 회장님이 아동 치료비도 거의 안 받는다고 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소문이 자자 하더군요.”
“아, 그래요? 그건 극비인데.”
이것들이, 절대 비밀이라고 했는데. 보안이 개판이다.
한번 보안 감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정훈의 머릿속에 신화병원의 적자가 대폭 상승한 게 생각났다.
‘설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병원보다 유독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참았다.
‘후우, 남는 게 돈이다. 나는 관대하다. 나는 가슴이 넓다.’
입술을 피가 날 만큼 꽉 깨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도영인 아들입니까?”
“아, 아니요. 제 팬인데 격려차 왔습니다.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하던 아이가 저렇게 뛰어다니니까.”
심영수가 울컥했다.
고개를 들어 정훈을 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불어졌다.
“회, 회장님. 저,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정훈도 얼굴이 굳었다.
뒷걸음질 쳤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몸을 돌려 비상계단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귓가에 자신을 부르는 심영수의 외침은, 애써 무시했다.
***
해송 제거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 중이었다.
“자료는 다 받았어요.”
“네, 놈들이 눈치채지 못해서 쉽게 받을 수 있었어요.”
“쓸 만한 건 있어요?”
“아주 많이요.”
“사건을 수임하면서 각 기업의 비리를 전부 빼냈어요. 뭐 전문가니까 척 보면 알잖아요. 그걸로 의뢰인을 상습적으로 협박했던 것 같아요. ”
“하, 대단하네요.”
“그리고 이놈들이 상습적으로 피해자들을 협박했어요. 합의를 강요했어요. 그렇게 해서 취하된 소송이 수십 개예요.”
“무슨 소송들이에요?”
“스타 화학 소송이랑, 영산 자동차 급발진 사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내용은 안 나오나요?”
“그게 스타화학이랑, 유통이 연관된 것 같아요. 정확하진 않은데 아이들과 노인들과 합의를 많이 봤어요.”
“알겠어요. 계속 추적해 주세요.”
“네.”
정훈은 병원에서 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신화제약에서 개발하는 신약 중에 임상 실험 중인 거 있어요?”
“네, 얼마 전에 임상 3단계 끝나서 곧 결과가 나온다고 하던데요. 온정식 사장 표정을 보니 대박 같던데요.”
“대박요?”
“네, 그 곰 같은 사람이 히죽대며 웃는 걸 보니 확실해요. 그 양반 잘 웃지도 않잖아요.”
“그건, 그렇죠.”
온정식이 웃으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복수를 앞둔 남자의 비장한 웃음 같다고 할까?
뭐 본인은 항상 억울해하지만 보는 사람은 안다.
그가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결과 나오면 알려 줘요.”
“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파워블로거들에게 자료 보내서 여론 조성하고 우리 깨톡도 활용하세요.”
“아,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죠.”
“거기에 풀어요. 그리고 공유 이벤트 하세요. 한 번 공유할 때마다 천 원씩 적립. 서로 주고받으려면 깨똑도 깔아야 하잖아요. 우리도 좋고 나쁜 놈들 정보도 알고, 둘 다 좋은 것 같은데요. 그리고 친구가 알려 주면 얼마나 믿음이 가요?”
“맞아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보다는 친구가 전해 주는 정보가 신뢰가 가죠. 뭐 그렇게 사기도 많이 당하고.”
차영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네? 갑자기 왜…….”
“아, 아니에요.”
상대의 뼈를 똑 부러트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왔던 악독한 그녀도 사기에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네, 회장님.”
해송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1주일 만에 난리가 났다.
해송이 그동안 했던 온갖 비리가 언론에 넘쳐났다.
하지만 박수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흑색선전입니다. 증거는 하나 없는 모략입니다.’
해송은 압도적인 여론에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일단 검찰청 조사까지만 어떻게 부탁드립니다. 그럼 나머지는 백 프로 무죄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놈이! 내가 조사실에 앉는 순간 네 놈들의 모두 치부도 다 까발려 줄 테니 그리 알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어서!”
박수길의 격앙된 목소리에 상대가 움찔했다.
“네? 아, 알겠습니다.”
박수길은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자신들의 내부망 자료를 탈탈 털어 갔다.
그리고……. 남은 게 없었다.
모든 게 삭제되었다.
일단 말로만 협박하고 있지만 언제 들통이 날까 긴장되었다.
비서가 문을 벌컥 열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표님”
그녀의 뒤에 건장한 남자들이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중앙지검 강철중 검사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박수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하찮은 평검사 나부랭이가. 가서 총장 오라고 그래.”
“그만하시죠. 다 끝났습니다.”
문에서 난 목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어, 장관님.”
“미안하지만, 다들 나가 있어 주게.”
박현철이 사람들을 물렸다.
수사관이 손에 들고 있던 수갑을 달라고 했다.]
“주시게. 내 손으로 해야지.”
박현철은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다 꿈이었습니다. 어서 꿈에서 깨어나세요.”
“네 이놈! 네 놈이…… 내가 네놈에게 천지회를 물려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아버지 욕심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닥쳐. 사대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있는 법”
“사대부 가문의 장자가 아니라 박현철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
박수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한번 책상을 내려쳤다.
꽝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아들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측은해했다.
그는,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오래 꿈속에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지금부터가 꿈일지도 모를 일이다.
박수길의 쭈글쭈글한 손목에 은색 팔찌가 채워졌다.
***
박수길이 체포되자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사무소 대표가 증거조작, 분식회계, 증인매수, 협박 등으로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해송이 이룬 성과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최고 엘리트들이 밤잠이 설쳐 가며 이룬 성과가 아니었다.
그들이 해송의 울타리 안에서 한 일은 증인을 매수하고 증거를 조작하고, 그도 안되면 증인 협박과 피해자와의 합의 종용하는 것. 그것이 다였다.
조폭들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다, 조폭들도 더러워서 하지 않는 양아치 짓이었다.
정훈은 다혜와 함께 티비를 보았다. 웃음을 띠면서 대검찰청으로 들어가는 박수길이 나오고 있었다.
무수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의 자신감은 틀리지 않았다.
결정적 증거는 없고 심증만이 가득했다.
심증만으론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
지금 그를 처벌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이헌의 유언장 위조다.
길어야 집행유예 6개월.
하지만 정훈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만 있으면 박수길과 그의 카르텔을 송두리째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 한 조각이면 된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