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단 한 조각!
영장 담당 판사부터 검사에 이르기까지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과 강한 심증들만으론 부족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증거라면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 가능하면 물리적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신빙성이 없다고 부정했다.
결국, 증인이 나오거나 완벽한 증거가 필요했다.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물리적인 힘을 가진 완벽한 증거.
지금 가진 정훈이 증거는 이헌의 유언장 하나뿐이다.
그걸로 박수길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사문서 위조는 기껏해야 집행유예 6개월 최대다.
답답했다.
그를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의 손발을 묶어 타격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그를 감옥에 처넣는 게 가장 어렵다.
정훈은 이판호를 떠올렸다.
박수길을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맡겼지만 아직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아직 자료 검토도 다하지 못했을 시간이다.
증거나 증인을 기대할 수 없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
아쉬운 생각에 티비만 보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귀에 들렸다.
“윤정훈입니다.”
“회장님, 이판호입니다.”
“주말인데 어쩐 일입니까?”
“증인을 확보했습니다.”
“네?”
소파에 앉아 있던 정훈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사실입니까?”
“네, 이 사람의 증언이면 박수길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가슴을 막고 있던 답답함이 한 번에 뚫리며 시원하게 내려갔다.
이판호의 말이라면 신뢰할 만하다.
항상 조심스러운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가능성이 70퍼센트 이상이라는 뜻이다.
“지금 어딥니까?”
“서초동, 중앙지검 앞에 있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정훈이 전화를 끊고 일어서자 다혜가 정훈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 정훈의 차 키가 들려 있었다.
“여기 열쇠. 잘하고 와! 대신 몸조심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고마워.”
“고맙긴, 그런데 정은수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은수? 연극 연습하고 있겠지. 지 애인이랑.”
“그래, 어서 가 봐.’
정훈은 부가티를 운전해 서초동으로 갔다.
***
칼치기를 하면서 성북동에서 서초동까지 20분 만에 도착했다.
이판호가 있는 서울중앙지검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다급한 마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판호를 찾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 여깁니다.”
이판호가 자신을 불렀다.
카페 제일 구석,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덩치가 제법 큰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폭이다.
짧은 머리에 퉁퉁한 살집.
검은색 바지에 검은색 상의.
저승사자가 더 어울리려나.
하여튼.
고개를 숙인 그가 박수길을 집어넣을 수 있는 열쇠처럼 보였다.
“윤정훈입니다.”
“강득구입니다.”
역시, 이름도.
이판호가 입을 열었다.
“이분이 증언해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회장님 오시면 말하겠다고 해서, 저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정훈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보시죠.”
덩치가 좋은 남자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머뭇거렸다.
한숨만 반복하면서 쉬고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이제 말씀하시죠.”
“후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건가?
정훈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제가 스타 화학 연구원을…… 협박했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아 강원도 산속에 암매장했습니다.”
“네?”
정훈의 기억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최영훈 연구원.
스타화학의 비리를 폭로하기로 한 연구원이 기자 회견을 앞두고 실종되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사람.
생활 반응이 전혀 없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갑자기 해외로 출국했다는 기사가 났다.
사람들은 그가 스타그룹에 회유되었다고 생각했다.
“혹시 최영훈 연구원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당황했다.
지난 삶의 기억이지만 이들에겐 미래의 기억이다.
조심했어야 하는데 방심했다.
이판호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여, 제자.”
그때 등 뒤에서 정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자신에게 쏠린 이목을 돌리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강철중이었다.
정훈은 그를 보고 다급하게 손짓했다.
“형, 여기.”
강철중이 자리에 앉았다.
자백을 결심한 강득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영훈 연구원을 제가 살해했습니다.”
“흠, 예상했지만 사실이었군.”
강철중이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리고 최영훈 연구원이 제가 남긴 자료입니다.”
“스타화학의 비리 자료입니까?”
“저는 전혀 모릅니다. 이상한 화학식만 잔뜩 있었습니다. 최영훈 연구원이 죽기 전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이요.”
“형, 이건 내가 조사해서 보내 줄게.”
“어, 그래. 부탁한다. 그럼 강득구 씨는 저랑 가시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수를 결심한 이유가 있습니까? 감형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강철중이 물었다.
“그게, 윤정훈 씨 때문입니다.”
정훈은 남자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그 남자에게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제 조카가 몸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조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지 않고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비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사나운 맹수 같은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었나?
정훈도 안타까웠다.
“신화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조카의 병원비를 면제해 줬습니다. 제가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죠. 그리고…… 제 조카가 얼마 전에…… 완치되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비극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아름다운 결과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새겨졌다.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벌떡 일어나 정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신화제약에서 임상 실험 중인 신약 덕분에 제 조카가 살아났습니다.”
한동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판호 씨가 저를 찾았습니다. 조카의 병이 스타화학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최영훈 연구원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조카를 위해 한 짓이 사랑하는 제 조카를 죽일 뻔한 거죠.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누군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렇게 싸우는데…… 저도 조카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였다.
남자의 이유.
강철중이 훌쩍이는 그를 위로했다.
“내일 박수길의 구속적부심이 있어. 구속만 되면 그도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어.”
“흠, 형 내일 영장판사 누구야?”
“마동식 판사인데, 박수길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놈이야.”
“그건 내가 처리할게, 나만 믿어.”
“정말? 그렇게 되면 그다음은 식은 죽 먹기야.”
정훈은 비서실장 차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동식 판사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차영미는 짧게 대답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
“검사님, 될까요?”
“됩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된다고 하면 되는 놈이 있어요. 그놈이 된다고 했어요. 그놈이 된다고 한 건, 안되는 게 이상한 거예요.”
“하, 거 대단한 믿음입니다.”
“자, 이럴 때가 아니라 추가 혐의 입증하도록 준비해야죠.”
그때 바깥이 웅성거렸다.
잠겨 있던 문이 부서지면서 중년의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본 수사관이 벌떡 일어섰다.
“총장님.”
“이 미친 새끼가 감히 박수길 대법원장님을 체포해?”
검찰총장이 강철중을 보며 소리쳤다.
그의 곁에 있던 중앙지검장이 강철중에게 다가와 뺨을 후려쳤다.
-짝
피하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강철중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한 대는 봐 드리겠습니다. 지검장님.”
“뭐 이 새끼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박수길과 함께 감방에 가야 할 겁니다.”
“뭐?”
이번에는 검찰총장이 그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다.
등 뒤에서 그를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크흠, 그만하지.”
법무부 장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박현철 장관……”
“이 새끼가 이제 위아래도 안 보이는 거야?”
박현철이 검찰총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배신자도 선배 대접은 받고 싶은가 보군요.”
“배신자? 쯧…… 어리석은 놈들”
박현철이 그들의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했다.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한 아귀 같은 놈들.
한때 자신의 모습.
측은했다.
“장관……님, 부모까지 팔아서 얻은 자리, 어디까지 가나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하하하, 걱정 말게, 나도 자네들과 함께할 테니. 나도 한때 자네들과 같은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받을 거야.”
“개소리 마. 해송은 무너지지 않아. 박수길 대표님이 나오시면, 내 직접 검찰총장의 명예를 걸고 처넣어 드리겠습니다. 장관님!”
“글쎄, 이제 곧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에 꽂혔다.
강철중이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침을 삼킨 다음 수화기를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사람들을 보았다.
“박수길 전 대법원장님이 구속되었습니다.”
“철중아, 수고했어.”
박현철이 흐뭇한 표정으로 강철중을 칭찬했다.
갑작스런 칭찬에 강철중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검찰총장과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방을 나섰다.
균열을 직감한 그들.
댐이 무너지기 전에 대피해야 했다.
금이 간 댐을 보수하려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모두 돌아간 사무실.
강철중은 기분이 더러웠다.
“썅, 좆 같네”
자신의 철제 캐비닛을 발로 차고 또 찼다.
그러다 검찰총장 뒤에 들어온 박현철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니미, 아버지의 원수가 반갑다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강철중은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해야 한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
강지영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마트에 들렀다.
얼마 만에 온 가족이 모여 장을 보는 건지 생각했다.
‘몇 년 만이지? 5년만인가?’
도영이가 아픈 이후로 처음이었다.
눈앞에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찾은 행복,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는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야, 박도영아, 뛰지 마!”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안심했다.
도영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정상에 가까운 상태다.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도, 괜찮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
남편이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 우리 이번에 티비 새로 사야지. 도영이랑 게임도 하고 자기랑 영화도 보고하려면 50인치는 사야 할 것 같은데.”
“나랑 영화는 무슨, 자기 게임 하려고 하는 거겠지.”
“크흠, 아니 영화, 우리 둘이 영화도 봐야지. 그래야…… 흠, 흠.”
남편의 말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 그럼, 저기 가전 매장에 구경 갈까? 게임 하려면 50인치보다는 60인치가 좋지 않을까? 호호.”
“물론.”
가전 매장으로 가자 수십 대의 티비가 있었다.
티비 속에는 박수길의 재판 결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인 교사, 증거 인멸, 사문서 위조 등등의 혐의로 박수길 전 대법관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한다.”
- 탕, 탕, 탕
***
신화제약 전 직원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는 행사를 가졌다.
극비리에 연구했던 신약이 3단계 임상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그리고 어제 미 FDA 허가와 국내 식약처에서 동시에 허가가 났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임직원들 모두에게 주식 10퍼센트를 골고루 배분했다.
기여도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했다.
올해 들어온 신입도 1억 원 정도의 스톡 옵션을 받았다.
새로 개발된 신약 ‘셀레늄’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한 직후 기자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보도자료에 적혀 있는 말도 안 되는 약효와 임상 실험 결과 때문이었다.
‘신화제약이 세계 최초 줄기세포 기반 신약 개발 성공.’
모든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뭐야? 이제 신화그룹도 사기치는 거야?’
‘이게 말이 돼?’
‘헐. 우리나라에서 이런 신약이 나왔다고?’
‘야, 일단 신화제약 주식 사. 사실이면 대박이야!’
사람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신화제약의 주가는 3연상을 달렸다.
신화그룹에 적대적인 회사들.
특히 스타그룹이 사주해 약효에 대한 의혹을 부추겼다.
스타그룹이 그 짓을 하자 열받은 정훈.
‘쓸어 주마.’
정훈은 신화제약 온정식 사장과 함께 기자 회견을 준비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