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인터폰으로 정훈의 지시를 들은 차영미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거길 가실려구요?”
“당연히!”
“안 돼요.”
“왜?”
“위험해요.”
낯설었다. 공포를 모르는 차영미인데.
“스타그룹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요?”
“회장님, 이런 말 꺼내 죄송하지만 부모님께서도 일송그룹 회장을 만난 날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날 뻔했다.
어떻게 그걸 잊지?
원인은 방심이었다.
부모님이 겪은 일과 같은 비슷한 위험에 닥칠 뻔했다.
정훈은 차영미를 보았다.
두 눈에 불안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화신유통 조직원들 대기시켜요. 허튼수작 못 하도록 내가 가진 힘을 보여 줘야겠어요.”
“네, 박창수 씨도 준비하라고 할게요.”
“알았어요. 그리고 은수 좀 조사해 줘요. 요즘 뭐 하는지 통 보이지 않네요.”
“네, 알겠습니다.”
정훈은 키를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 갔다.
반짝이는 부가티에 시동을 걸자 묵직한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지하 주차장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스타그룹으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 차를 대자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윤정훈 회장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정훈이 그를 따라 가려 할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정훈을 불렀다.
“회장님.”
박창수가 조직원 몇 명과 함께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후,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정말 여길 들어가실 겁니까?”
정훈은 고개를 끄덕이자 박창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정훈의 곁을 지켰다.
“저도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스타그룹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스타그룹 직원이 사라지자마자 박창수가 말했다.
“차영미 씨가 준비 다 되었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거…….”
박창수는 정훈의 바지 주머니에 무언가를 조심스레 넣으면서도 불안해 보였다.
“비서실장이 준비 다 되었다고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저를 믿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비서가 돌아와 말했다.
“박창수 사장님과 윤정훈 회장님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훈은 남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시죠.”
엘리베이터 속 침묵을 깨고 질문했다.
“회장님……, 여긴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겁 없는 새끼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스타그룹 직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정훈을 잠시 쳐다보았다.
정훈이 노려보자 금세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하, 이 새끼들 진짜 나를 담그려고 하나.’
긴 복도 양옆에 서 있는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분위기에 얼굴 여기저기 보이는 상처.
조직 폭력배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조직원들을 모았지?
분명히 다 쓸어버렸는데.
의문이 들었다.
박창수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정훈이 제지했다.
“괜찮아요.”
이런 놈들한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바닥에 깔린 짙은 레드카펫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성큼성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정훈을 보며 의미 없는 위협을 가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회장실 앞에 서자 문이 열렸다.
‘하 저 X 새끼, 버르장머리 없이 앉아 있네. 손님이 왔으면 최소한 일어서야 하거늘’
“반갑습니다. 윤정훈 회장님.”
그는 예의 없이 자기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돌려 인사했다.
“우리가 서로 반가울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도 응수했다.
이석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이렇게 직접 행차하시고?”
“경고를 하려구요.”
“경고?”
그의 이마에 검은 핏줄이 툭툭 솟았다.
“법원에 조작된 서류를 제출했더군요.”
“조작되었다니 무슨 말이죠? 금시초문입니다.”
이석이 시치미를 뚝 뗐다.
“이헌의 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친자라는 검사 결과지를 제출했더군요.”
“푸하하, 윤정훈 회장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조작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증거? 당신이 증거 아닙니까? 이헌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모르셨나 보군요. 인터넷에는 이석과 천성한이 부자지간이라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석은 버럭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 어디 감히 나를…… 그런 천한 놈과 연결시켜!”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여린 살갗이 찢어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핏줄에 천하고 고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쯧쯧.
정훈은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하여튼 두 분이 많이 닮아서 그런 소문이 떠도나 봅니다.”
“닥쳐!”
결국 이석이 고함을 지르며 화를 폭발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미친놈 같았다.
정훈은 그 틈을 타 박창수가 준 도청 장치를 소파 사이에 밀어 넣었다.
목적을 달성했다.
“이렇게 화만 내서야 대화가 되겠습니까?”
“조용히 해!”
이석은 정훈의 면전에 대고 큰 소리를 질렀다.
분노 조절 장애인가?
감정을 전혀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쳤구나. 확실해.
“그럼 다음에 뵙죠. 오늘을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군요.”
“닥쳐, 이 새끼야, 자리 앉아. 어디 감히. 천한 놈이. 앉아!”
두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정훈은 그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웃어? 야 다들 들어와!”
이석이 밖을 향해 소리치자 문이 열리며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결국 피를 보려는 건가?
제집이라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은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지.
소파에 등을 기댄 정훈은 편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이따위 덩어리들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글쎄,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져도 그렇게 차분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이석이 말하자 남자들이 품 안에서 칼을 꺼냈다.
박창수도 그들에 맞서 칼을 꺼냈다.
“하, 지금 사무실에서 칼 꺼낸 겁니까? 사과하시죠.”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그는 정훈과 달리 광분했다.
“뭐? 사과?”
그러고는 이죽대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소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이블에 발을 올린 다음 몸을 뒤로 느긋하게 기댔다.
정훈은 그 꼴을 보고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봐, 그렇게 있다가 다리를 못 쓸 수도 있을 건데.”
그의 말에 이석의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이내 밀리기 싫은 표정으로 다시 어깨를 활짝 폈다.
그는 다리를 살짝 띄운 다음 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병신!”
“뭐?”
정말 병신 같았다.
미친놈처럼 광분하다 이죽대다 겁먹었다가 또 겁먹지 않은 표정을 짓는 병신 새끼.
그의 존재만큼 불안한 상태였다.
조금만 흔들어도 가루처럼 흩날릴 정신상태였다.
스타그룹의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경고하러 온 겁니다. 함부로 날뛰지 마세요. 천성한의 자식인 주제에. 주인이 곧 자신의 자리를 찾으러 올 겁니다.”
정훈의 말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이석이 고함을 지르자 남자들이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며 입구를 막았다.
“귀 안 먹어요. 그리고 길 여세요. 아니면 대가리 날아갑니다. 창밖을 한번 보세요.”
정훈의 말을 헛소리라 생각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반짝이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회, 회장님”
그의 이마에 붉은색 레이저 포인트가 보였다.
-퍽.
묵직한 소음과 함께 소파에 총알이 박혔다.
깜짝 놀란 그는 놀란 벌레처럼 몸을 바짝 구겼다.
“경고했잖아요. 남의 말을 귀담아들어야지, 쯧쯧.”
정훈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들을 옆으로 밀치며 밖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로비를 화신유통 조직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훈을 보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회장님!”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정훈은 박창수에게 말했다.
“지현복씨 철수하라고 하세요.”
“네?”
“건너편 옥상에 있잖아요. 철수해야죠.”
“아하, 알겠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표정이었다.
정훈은 자신을 기다리는 차로 다가갔다.
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돌려 거대한 스타그룹을 보며 생각했다.
‘미끼를 던졌으니 어서 물어라, 이석!’
***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장마는 쉬지 않고 비를 퍼부었다.
하인선은 신화엔터테이먼트 건물 맞은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유리창을 어지럽히며 시야를 가리는 빗방울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꿈이었겠지?’
행복한 꿈이었다.
자신을 업어 준 아들이 잠들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감미로운 자장가를 불러 줬다.
아들의 볼을 만진 촉감이 아직도 느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창밖에서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올 시간이 되지 않았다.
십여 명의 여학생들이 우산을 쓴 채 모여 있다.
은수를 기다리는 무리.
아직 무명이지만 벌써 팬을 몰고 다닌다.
자신을 닮아서인가?
타고난 연예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주목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창밖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흠, 흠 혹시 하인선 씨 맞습니까?”
그녀를 찾는 노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
깜짝 놀라 눈만 깜빡였다.
자신을 향해 엄한 눈빛을 한 그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호랑이 같은 그의 기운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서, 선생님.”
눈앞에 이순진 선생님이 있었다.
한참 자신을 내려보던 그가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지냈니? 좋은 집에 시집가서 잘 먹고 잘산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살고 있어요.”
“좋아 보이진 않는구나. 들리는 소문도 시끄러운 이야기뿐이고.”
“괜찮아요. 행복해요.”
하인선은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고개 숙인 채 대답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던 선배이자 스승.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애월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재벌을 능가하는 남자의 부인이 되었다.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꿈은 이루었다.
“꿈을 이뤄서, 행복하냐?”
“네.”
“그 꿈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니?”
“전혀요.”
여자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이를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다. 천재적이야, 그때의 너처럼. 그리고…… 너랑 놀랍도록 닮았어.”
이순진의 말에 아이를 보던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아는 아이냐?”
“…… 아, 아니요.”
침묵이 흘렀다.
“너랑 놀랍도록 닮았는데…… 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구나.”
하인선은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엄마도,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존재다.
“현주야, 은수 가까이 가지 마라. 네 어리석은 욕심에 물들게 하지 마. 지난번에는 너를 잃었지만 은수는 그렇게 잃을 수 없다. 찬란히 빛나게 할 것이다.”
“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이선의 눈가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명임에도 팬을 몰고 다니는 아이.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손을 들어 화답하려다 멈췄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 네가 선택한 곳이 지옥인지 극락인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네가 선택했다. 네가 선택한 길이 올바르도록 최선을 다하거라.”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보며 순간 생각했다.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
부질없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곧 검은색 승용차가 다가와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비를 퍼붓는 검은 하늘을 보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 올바르도록?
무엇이 바른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혀 모르겠다.
차에 올라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정해진 길뿐이다.
그냥 걷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었다.
***
“정은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됐군. 안 그래도 손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데려와.”
“둘 다 데려갈까요?”
“물론이지. 크크크.”
비린 웃음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준비해, 작업 들어간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인 다음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하고 내뱉은 그.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혼자 읊조렸다.
‘작업하기 좋은 날이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