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신화엔터테인먼트 지하 주차장.
은수는 검은색 부가티를 광이 나도록 열심히 닦았다.
비록 밖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그녀가 내려올 시간.
오늘, 드디어!
그녀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황.
하얏트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후”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은수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다시 열심히 차를 닦았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블랙이었다.
오늘을 기념하기에 딱 어울린다.
은수는 상상했다.
호텔 입구에 도착해 차에 내리는 순간, 자신을 향할 수많은 시선.
그리고 초절정 미녀 차보아가 옆자리에 내리면, 자신을 얼마나 부러워할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생각만 해도 어깨가 올라가고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은수야!”
보아의 청량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이 차 뭐야?”
“이제 내 차.”
“뭐? 이게 니 차라고?”
“응”
“이걸 그냥 줬어.”
“물론, 우린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닌 것 같던데. 사실대로 말해 봐.”
“아,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
“무슨 부탁?”
“그건 비밀, 헷.”
은수는 마음이 급했다.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고 있었다.
빨리 호텔로 가고 싶었다.
보조석 문을 열고 장미꽃 다발을 꺼내 그녀의 품에 안겼다.
“고마.워”
초승달을 그리는 보아의 눈 때문에 은수의 심장이 녹아내렸다.
“흐윽, 심장이…….”
“헤헷.”
“이제 출발할까?”
“잠시만.”
입꼬리를 올린 보아가 은수에게 바짝 다가왔다.
뒤꿈치를 들어 까치발을 한 그녀는 은수의 붉은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흡, 보아야, 숨을 쉴 수가…….”
“헷, 가자.”
발그레한 볼을 감추고 차에 타려고 할 때였다.
봉고차 한 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차 안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위기를 직감한 은수는 보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뭐야?”
“같이 가지.”
“이 새끼들이…….”
은수는 품 안에 있던 호신용 칼을 꺼냈다.
“보아야, 엘리베이터로!”
보아를 보호하며 뒷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갔다.
저걸 타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곧 구원의 종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비명.
-꺅,
남자들을 칼로 위협하며 접근을 막던 은수.
집중력을 잃고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보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지찍
“으윽”
살을 찢는 통증이 목에 전해졌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줬지만,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보아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보아를 들쳐 메는 놈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짓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천이 얼굴을 가렸다.
‘하, 씨팔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윤정훈 개새끼.’
***
정훈은 이석의 비밀 은신처를 찾고 있었다.
지난번 스타그룹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사내들.
이석이 은밀히 힘을 기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곳을 찾아 부숴야 했다.
정면 대결 대신 하나씩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끼가 필요했는데, 은수가 나섰다.
겁이 많은 그가 나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회의실에 앉아 작전을 점검했다.
“100명 정도는 항상 대기 시키세요.”
“네, 회장님.”
박창수가 대답했다.
“비서실장님도 은수 위치 계속 확인하고요.”
“네.”
왠지 모를 불안감.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퍼붓는군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앉아 있는 그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훈도 긴장되고 신경이 쓰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겠죠? 너무 위험한 건 아니겠죠?”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할 거니 저만 믿으세요.”
“네.”
정훈의 단호한 말에 박창수와 차영미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곽현수였다.
“놈들이 은수를 데려갔습니다.”
“네? 벌써요?”
며칠 뒤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당황스러웠다.
일단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지금 쫓아가고 있죠?”
“네.”
“위치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나요?”
“……네,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이번엔 전기 충격이라서 다친 것 같진 않았습니다.”
“나중에 봐요.”
“네.”
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잠시 그대로 있었다.
가장 소중한 친구가 납치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잘못되는 건 아닐까?
실수한 걸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린 피 맛이 느껴진다.
정신 차려야 한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은수도,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다.
정훈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오늘 놈들의 은신처를 박살 냅니다.”
“네. 바로 준비해서 출발하겠습니다.”
“실시간으로 위치 보낼게요.”
모두 일어나 할 일을 시작했다.
정훈도 곽현수와 합류하기 위해 출발했다.
“회장님, 조심하세요.”
“저만 믿으세요. 모든 게 다 잘될 겁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쏘아져 내렸다.
정훈은 억수 같은 비를 뚫고 고속 도로를 달렸다.
은수를 납치한 놈들이 이천으로 갔다고 했다.
이천?
양평에 이석의 개인 별장이 있다.
양평 근처라고 예상했는데, 왜 이천이지?
이천에 뭐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스타그룹 계열사도 거의 없는 도시.
이천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비 때문에 거의 세 시간 만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곽현수가 서 있었다.
그가 손으로 은수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낡고 오래된 저택이었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오래된 목조 주택.
“저 안에 있습니다. 지금 들어갈까요?”
“아니요. 이석이 올 겁니다. 그를 기다리죠.”
“네. 회장님.”
은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이제 곧 기회가 온다.
***
하인선은 호텔 바에 앉아 있었다.
퍼붓는 비를 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갈 곳이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 앉아 잠깐이라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아이를 응원하며 옛날 꿈과 추억도 생각했었다.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지은 죄도 용서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순진 선생님의 말이 맞다.
욕심이다.
다시 찾지 않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가다가 되돌아오길 몇 번.
허전한 빈자리만 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마음을 채운 것은 결국 자신을 좀먹는 술뿐이었다.
양주 한 병이 비어 갈 때쯤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접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취한 걸 들키긴 싫으니.
“어머, 우리 회장님이 어쩐 일입니까?”
“이천으로 지금 오셔야 합니다.”
“이천요. 지금요? 오늘은 비도 내리고 몸도 좀 불편하네요.”
“그러세요? 여기 어머니가 그렇게 아끼는 동생이 있는데…….”
아들의 말에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도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도 오시죠.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라 커졌다.
하지만 상대는 침묵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동생이랑 이천 별장에 있겠습니다.”
“아, 안돼.”
전화가 끊겼다.
당황한 하인선이 다급히 일어서다 휘청거렸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자가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천으로 가야 해.”
“……위험합니다. 이석 회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가야 해. 은수가, 위험해.”
“안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여사님의 안전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게 제 사명입니다.”
“그 아이가 다치면 나도 다쳐, 다시 상처를 줄 수 없어.”
남자는 자신을 뿌리치고
앞을 걸어가는 그녀를 보았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인생이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품 안에 있는 날카로운 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녀를 차에 태웠다.
핸들을 꽉 쥔 그는 장대비를 뚫고 이천을 향해 달렸다.
***
정신을 차렸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렇지?
전기 충격 때문인가?
“으으으.”
입에서 신음이 절로 나왔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실루엣으로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보아야? 거기 있어?”
“어,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응, 너는?”
“나도 괜찮아.”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의자에 묶인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보아에게 다가갔다.
겨우 그녀의 근처에 다가갔을 때였다.
‘젠장.’
문이 열렸다.
“이석 회장. 어디 있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하인선의 목소리에 은수는 깜짝 놀랐다.
‘여기 왜 온 거지?’
이석 회장이 부른 것 같은데.
‘이 새끼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순간 어두웠던 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빛에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거실이었다.
창문은 모두 커튼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눈앞에 놀란 눈을 한 그녀가 서 있었다.
“이환!”
“환아, 무슨 일이야?”
“정은수입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고쳐 부르게 했다.
“그, 그래 은수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를 지키는 남자가 다가와 줄을 끊었다.
“괜찮아?”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당신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석 회장이 불렀습니다.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함정이 분명합니다.”
남자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환, 아니 은수야, 어서 돌아가. 여긴 엄…… 내가 정리할게, 보아 데리고 빨리 나가.”
“……네.”
은수는 보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췄다.
“당신도 같이 가야죠. 이석 회장이 함정을 팠다면 저만 노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남자가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으아악
기합 소리와 비명이 뒤섞였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둔탁한 비명이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뒷걸음쳐 들어오는 그.
정장속 하얀 와이셔츠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피하셔야 합니다. 여사님.”
손에 든 칼로 자세를 취하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결국 몇 발자국 뒤로 주춤거리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돼!”
달려 나가는 하인선을 은수가 붙잡았다.
그녀를 자신의 뒤에 두었다.
하인선과 보아를 보호하며 앞을 경계했다.
발소리가 들리며 그가 들어왔다.
“이석, 이 개새끼야.”
“쯧, 형이라고 해야지. 아무리 아버지가 달라도 한 여자 안에서 나왔는데.”
“닥쳐!”
주저앉아 있지만, 여전히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한 남자.
비틀거리는 남자의 머리를 발로 찬 이석이 비린 웃음 가득 지었다.
“어머니, 그렇게 보고 싶던 동생, 마음껏 봤습니까?”
“무슨 소리야?”
“왜 매일 매일 숨어서 훔쳐보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닥쳐.”
이석의 말에 은수가 그녀를 보았다.
눈을 피한다.
“환이라고 불러야 하나? 너도 몰래 숨어서 보던 엄마를 가까지 보니 어때? 좋지 않아?”
“닥쳐.”
“뭐 모자 상봉은 잘 이뤄진 것 같군요. 은수랑 차보아 살리고 싶으면 상속 포기 각서에 도장 찍으세요.”
“뭐? 그걸 쓴다고 니가 스타그룹을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입니다. 그분도 저랑 함께할 겁니다.”
열린 문으로 천성한이 들어왔다.
천성한이 하인선을 보았다.
“이환이 죽으면 우리 셋이 행복하게 살기로 했지 않소?”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요? 당신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었소.”
천성한이 하인선을 책망했다.
“모를 줄 알았습니까? ……내가 제자리로 돌려놓는 겁니다.”
하인선이 천성한을 노려보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김애월의 자식인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김애월이 당신과 이석을 통해 천지회와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더군요. 나는 그저 당신의 장난감이자 씨받이일 뿐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장난감이라니, 씨받이라니.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데…… 크크크, 얼마나 소중한 몸뚱이인데, 크크크.”
저열한 웃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더러운 새끼. 네 놈에게 속은 내가 너무 어리석고 분할 뿐이야.”
하인선은 천성한을 보며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어머니, 어머니 서러운 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어서 여기 지장이나 찍으세요. 그래야 두 사람도, 어머니도 살죠.”
이석의 말에 잠깐 고민한 그녀.
순순히 이석에게 다가가 지장을 찍었다.
“약속을 지켜, 아들아. 부탁할게.”
애원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풉, 글쎄요. 생각 좀 해 보고요.”
“어떻게 그런 염치없는 짓을…….”
“당신이 가르쳐 준 것 아닙니까?”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후환을 없애 볼까요?”
이석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했다.
문 앞에 있던 남자가 칼을 꺼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은수에게 다가갔다.
그때!
“은수야”
“개새끼야, 여기야!”
너무 반가워 은수의 입에서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정훈이 왔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