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96화 (196/200)

#196화

차에서 내린 하인선은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다.

이전 같으면 표독스러운 눈빛을 그에게 쏘았겠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고종의 친위대, 천본의 후예.

김애월에 의해 학살당한 천본의 계승자다.

오래전 김애월이 깊은 산속에 숨어 살던 그들을 도륙했다.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 박창수.

그는 친위대 대장 박대용의 후손이다.

철천지원수.

“당신이 여기 웬일이지?”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어. 당신은 그만 돌아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네 손으로 저들의 숨통을 끊어야 해!”

하인선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축 늘어진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다.

‘저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은수와 정훈의 곁을 지켜 줄 사람이다.’

“이 료칸에서 연회를 준비했을 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거예요. 저 안에 있는 현양사 놈들은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폭탄이 설치되어 있죠.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요.”

“그걸 터트린다고? 그러면 당신은?”

“나?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그건, 그렇지만. 이건 나의 일이다. 현양사를 괴멸시키는 것은 선조들이 내게 명한 사명이자, 내 삶의 목적이었다.”

“그럼 이젠 다른 목적을 찾아봐요. 현양사는 제가 정리할게요. 하나밖에 없는 목숨, 아껴야죠.”

하인선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방심한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어댔다.

동그랗게 커진 눈.

‘자세히 보니 눈매가 익숙하다.’

피식 웃음 지어졌다.

이 순간에 남자의 눈매라니.

“자 차에 타. 아니면 총알에 머리에 박힐 거야.”

“안 돼!”

하인선은 총을 밀며 그를 차로 몰았다.

차 안으로 그를 집어넣으려 할 때였다.

“형님!”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화신유통의 조직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두 사람이 걸어왔다. 윤정훈과 일본을 제패한 이나카와 카이 회장, 신병규였다.

***

‘한국에 있어야 하는데.’

정훈은 하인선이 있는 게 의외였다.

연회를 준비한 그녀는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뭘까?

“폭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자신만이 터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정훈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은수는요?”

“…… 내가 가까이 가면 불행해져. 나란 년은 그 아이에게 없는 게 나은 존재야.”

“돌아가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야, 지금이 저놈들 모두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수 있어. 내가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윤현주 씨,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그녀의 본명을 말하자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떻게, 내 본명을 알았지? 너 누구야?”

“신화그룹의 정보력을 너무 얕본 것 같군요. 당신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부모가 천본의 일원이었던 걸?”

하인선, 아니 윤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그러니 더욱. 내가 해결해야 돼. 가족과 친지를 배신한 여자야.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배신이라니요?”

“깊은 산속에 숨어 있던 살았던 우리였어. 천본의 은신처를 가르쳐 준 게 바로 나야. 달콤한 사탕 하나에 빠져 근거지를 알려 준 멍청하고 어리석은 년이지.”

그녀의 얼굴에 깊은 회한이 그려졌다.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다.

김애월의 기록과 다르다.

“아니요. 그들은 이미 은신처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김애월에 의해 기억이 조작된 겁니다.”

어린아이의 기억쯤이야 강요와 협박으로 쉽게 조작할 수 있다.

김애월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이헌 어르신 말에 따르면 학살의 현장에서 당신을 구한 게, 그분이었어요. 도망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숨어 있던 당신을.”

“뭐?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헌이 나를? 아니야. 그가 나에게 사탕을 주며 위치를 물었어. 나는 어리석게도 은식처를 알려 준 거고.”

사시나무 떨던 그녀가 바닥에 텉썩 주저앉았다.

“아닙니다.”

박창수가 대답했다.

“천본의 은신처는 이미 노출되었습니다. 적들에게 그걸 팔아 넘긴 게 저의 작은 아버지, 박기춘입니다.”

박창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그녀를 측은히 보았다.

“당신, 지금까지 거짓된 죄책감 때문에 지옥에서 살고 있었군요.”

진실을 마주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아니야, 절대로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은 나를 구했는데, 나는…… 그 사람을 내 손으로 보내 버렸어, 호호호.”

바닥을 보던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온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바닥을 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굵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흠, 그런 사랑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자 그럼 다들 떠나게.”

지켜보고 있던 신병규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정훈은 그를 보았다.

인자한 얼굴,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이미 초탈한 표정이었다.

“회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신병규의 조직원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래, 너희들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왔어. 다들 못난 두목 따른다고 고생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신병규의 말에도 머뭇거리는 그들.

“이놈들이, 어서.”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머뭇거리는 그들이 사라지자 정훈과 박창수를 보고 말했다.

“윤 회장, 자네도 알다시피 폐암 4기야.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지. 나한테 큰 영광을 줘서 너무 고맙네.”

“아닙니다. 회장님.”

“주먹만 쓸 줄 아는 내게 현양사를 괴멸시킬 기회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

정훈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적들을 괴멸시키려는 그의 계획 때문이었다.

“고마워, 자네 덕분에 일본을 평정했어. 그동안 핍박받던 한국인들의 명예를 드높였어.”

“어르신 덕분입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허허허, 자네와 신화그룹이 힘을 쓰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자네 덕분에 일본에 살면서 처음으로 가슴을 폈어. 고맙네.”

그는 정훈을 두 손을 잡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정훈의 눈에 그의 양복 안이 보였다.

그의 몸을 칭칭 동여맨 폭탄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끝까지 참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는 무슨, 아 그리고 창수야.”

박창수를 보면서 말했다

“담배 하나 다오.”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깊게 빨아들인 후 길게 내 뿜었다.

“휴, 좋구나. 아무리 좋아도, 창수 너도 담배 끊어라. 알겠나?”

“네, 어르신.”

박창수도 그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자, 그럼 출발하게. 자네들이 출발해야 내가 일을 하지. 놈들에게 오사카 원펀치, 신병규의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지. 출발해. 어서.”

그의 성화에 정훈과 박창수, 그리고 하인선은 차에 올랐다.

료칸의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거인을 뒤로한 채 차는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훈의 일행을 태운 차는 하네다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격납고 안에 있는 황금색 전용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다가왔다.

굳은 얼굴, 눈가에 물기가 배 나오고 있다.

“성, 성공하셨습니다.”

정훈은 그의 말에 자리에 멈춰 섰다.

그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인가?”

“저쪽입니다.”

사내는 손을 들어 그가 불꽃으로 산화한 방향을 가리켰다.

정훈은 몸을 돌려 그곳을 물끄러미 보았다.

천천히 몸을 숙여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정훈은 두 주먹으로 슬픔을 부여잡았다.

아직 끝이 아니다.

무심한 얼굴,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으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비밀 안가.

“각하, 윤 회장이 보낸 명단에 있던 자들 전부 체포하거나 사살했습니다.”

“피해는?”

“경미합니다. 아군 5명이 사망했습니다. 저들의 절반 정도가 격렬히 저항해서 현장에서 사살했습니다.”

“곽동식 합창의장이 일을 꽤 잘하는군. 다음 국방부 장관으로 기용해야겠어.”

박명득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일부라, 아쉽군. 전부 머리에 총알을 박았어야 하는데.”

그는 섬뜩한 웃음을 입꼬리에 올렸다.

손 안 대고 코 풀었다.

군부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하나회를 깨끗하게 숙청했다.

엘리펀트였던 윤정훈 회장의 명단이 아니었다면 엄두를 낼 수 없던 작전이었다.

사실 박명득은 취임 전 구한수 대통령과 단둘이 독대했을 때 그로부터 언질을 받았다.

‘천성한 장군이 군부를 꽉 쥐고 있습니다. 그의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큰 위기가 닥칠 겁니다.’

구한수의 말을 흘려들었는데 실재할 줄이야.

정말 어제 일본에서 해양 순시선이 출동하고 해군이 함정이 은밀히 출동했다.

그 배를 나포하지 않았다면 저들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었을 것이다.

누가 먼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게 한국과 일본이다.

끝장을 봐야 할 뻔했다.

그런데, 일본의 최고급 료칸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20여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아직도 피해자 명단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 국정원과 정보사를 통해 들어온 정보는 믿기 힘들었다.

일왕과 총리대신, 몇몇 장관과 사법부와 정당의 수장들이 사망했다는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정보.

“각하, 도착했습니다.”

“그래?”

자리에 앉은 그는 긴장되었다.

새삼 그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전쟁을 막고, 하나회를 축출한 그.

그리고 국정원 보고가 사실이라면 일본의 정재계와 군부의 거물들이 모인 현양사를 괴멸시킨 것도 그자다.

비서실장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거하셔야 합니다.’

흠,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날렸다.

괜한 짓으로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할 필요, 없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박명득.

악수를 청하며 감사를 표했다.

“윤 회장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전 그냥 군대 내에 있는 불순한 세력을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윤 회장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윤정훈이 테이블에 봉투를 올렸다.

“빈자리를 채울 명단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일단 읽어 보시죠.”

서류에는 이번에 숙청된 자리를 채울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며 분노가 치솟았다.

결국 이자도 같은 자인가?

박명득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만 띠고 있다.

“정신 차리세요. 대통령님.”

‘뭐? 이 건방진 놈이.’

“그 자리를 당신의 사람들로 채워 장기 집권할 생각 따위는 집이 치우세요.”

어떻게 안 거지?

그는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네. 그런데 불쾌하군. 감히 나를 뭐로 보고.”

“흠, 아무래도 상관 안 합니다. 제가 준 정치 자금의 9할을 스위스 비밀 계좌로 보내든, 대통령 자리에서 사리사욕만 채우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5년만 하고는 내려오셔야죠.”

-꽝

박명득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자네 감당할 수 있겠나? 자신의 힘에 취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박명득은 그에게 자신의 권능을 제대로 각인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서실장, 들어와 봐.”

대답하지 않았다.

“비서실장!”

다시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안 올 겁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경고입니다. 쓸데없이 저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지 마세요. 주변 사람들의 속삭임에도 절대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명득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서늘한 웃음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에게 덤비는 죽는다.

“오,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아직 천성한을 잡지 못했는데.”

“제가 잡고 있습니다. 곧 돌려보내겠습니다. 살아 보낼지 죽여 보낼지는 모르지만.”

“그래? 뭐 자네 편한 대로 하게.”

박명득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오늘 즐거웠네.”

박명득은 일어나 사라지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뻔했다.

‘이런 젠장.’

화나고 부끄러웠지만 참았다.

그도 잘 알고 있다.

윤정훈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당장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적당히만 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그의 말.

“후, 그래 적당히만 먹자.”

자신의 불어날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웠다.

***

대통령을 독대하며 그에게 경고를 날린 정훈.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준비 다 됐습니다. 인천에 있는 우리 창고, 거기서 보죠. 비서실장님.”

“감사합니다. 바로 출발할게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차영미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