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2화 (2/200)

진짜 황자가 되었다

철의 제국 아이로니아.

대륙의 절반을 점령한 가장 강대하며 거대한 국가의 수도 페르마, 그중에서도 강철성(强鐵城)이라 불리는 황성 가장 구석진 곳.

제11 황자궁.

상아색 고아한 외관과 맞지 않게 평소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궁엔 최근.

“오늘도 별말 없으신가?”

“네, 오늘까지도 그저 방안에 계실 뿐이어요.”

“식사는?”

“최근 식기에 담겨 있는 음식이 줄어든 걸 보아 다시 잡수시는 듯해요.”

“이걸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불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위태로운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나 정작 궁에 머무는 시종과 시녀들을 비롯한 고용인들은 오히려 불안해하는 표정.

시종의 고뇌 어린 얼굴에 시녀 하나가 불안한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설마···고용인 청소는 아니겠지요?”

우물쭈물 꺼낸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고용인들의 어깨가 차갑게 굳었다.

“쉬잇! 이 사람아 그런 말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거 몰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는 꼴 보고 싶어?”

“엄머머, 죄송해요.”

시종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저는 두려워서 그랬어요. 11관에 들어 온 고용인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결국은 모두 죽는다길래···.”

그녀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 붉어진 얼굴로 뭐라 뭐라 주절거리자.

“틀린 말은 아니지. 이제 내가 오기 전에 있던 고용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들의 자리를 대체한 거야 우리 모두. 그러니까.”

시종이 스산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자.

모두의 긴장한 시선이 일제히 쏠렸고.

“다들 잘하자고 응? 죽기 싫으면 말이야.”

시종의 말에 일꾼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저런 대화를 굳이 들리는 곳에서 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고용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벌써 열흘이 지났다.

“내가 아르한 포르마 진 로렌조 데 어쩌구저쩌구 아이로니아가 된 지.”

진짜 황제가 된 지.

아니 굳이 따지자면 진짜 황제가 아니라 진짜 황제의 어린 시절, 황자가 되었다고 해야겠지.

그러니까 지금 평생 황제를 연기하던 내가.

이젠.

“11황자 아르한이 되었단 말이지?”

아이로니아 제국의 11 황자가 되었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 열흘간 고뇌하고 고뇌한 결과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으차.”

몸을 일으켜 자줏빛 비단 이불이 덮인 침대를 빠져나가려니.

드넓은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데도 한세월이다.

타박, 발을 딛고 일어나는 감각이 낯설다.

잠시 침대 옆에 놓여있는 금장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민 전신 거울을 바라보니.

“어릴 적···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나이인가?”

이제 막 소년티를 벗어버리고 청년에 들어서기 시작한 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흐드러진 백금발에 약간의 음울함이 담긴 자줏빛 눈동자.

길게 늘어진 눈꼬리와 끝에 매달린 눈물점이 묘한 매력을 풍겼다.

키 또한 187가량으로 성인식 직전임을 감안해도 훤칠했다.

그러나 그런 빼어난 외관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대상의 운명: 최악의 폭군]

[하위 운명들을 살핍니다]

[불운, 암살 위험, 보잘것없는 재능, 탐욕, 퇴폐, 한량, 깊은 분노, 잔혹함, 의심병, 반골, 폐륜, 독선, 오만, 냉혹···]

정말 최악 중 최악의 내면.

처음 봤을 때부터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이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놀랍네.”

존재마저 의심케 할 악인이 제국을 책임지는 황제가 되었으니 그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나.

보고 또 보고 자세히 보아도.

“참 어떻게 이런 인간이 황제가 된 거야.”

의심과 의혹만이 들어찰 뿐.

물론 지난 열흘간 존재에 대한 고민만을 이어간 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신비.

삶에 주렁주렁 매달린 운명들이 보였다.

운명에 저항할 수 없음은 이미 겪어보았으니.

아마 쓰여있는 대로 흘러가리라.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잡아먹으십시오. 그게 당신이 살아갈 방법일 겝니다.”

분명, 이 신비를 전해준 서기관은 그리 말했다.

운명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라고.

이젠 꿈결과 같이 어렴풋한,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글자들.

“운명을 포식하는 자라 했지?”

가짜 인생이라는 운명을 포식하자 진짜 황자가 되었다.

지난 열흘간 이 운명 포식이라는 신비를 어찌 사용할지 궁구했다.

어쨌든 나는 최악의 폭군이 되었고.

‘놈과 똑같이 살아갈 생각 따위는 없어.’

같은 인생을 반복할 생각 따위 없었다.

알고 있다.

원래 이몸의 주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기를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더미가 놈을 이젠 나를 대신해 죽어갈지 알았다.

운명은 억지로라도 내 머리채를 잡고 원래 방향으로 이끌려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 거대한 힘에 어떻게 항거해야 하는가.

세상을 움직이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바퀴 앞에서 팔을 펼친 작은 사마귀와 같은 존재인 나는.

그래서 필요했다.

“운명 포식.”

이 빌어먹게 지저분하며 끔찍한 운명을 잡아먹을 신비가.

운명이 내 멱살을 잡고 원래의 길로 인도하려 해도, 거대한 흐름이 나를 휩쓸지라도.

항거하고 잡아먹으리라.

지난 열흘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치 검을 벼리듯 마음과 정신을 벼렸다.

흘러가는 대로 두지 않겠다고.

다만 아쉽게도.

[대상의 운명: 최악의 폭군을 포식합니다. 삼키기엔 너무나 커다란 운명입니다. 포식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꿀 순 없었다.

그렇다면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꾸어 나가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이 널따란 방에서 나가야 했다.

잠시 작게 한숨을 내쉬곤 밖으로 나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에서 서성이는 작은 발걸음 소리.

벌컥, 문을 열고 나가자.

“히, 히이이익!”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녀 하나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나를 보곤 기겁했다.

이윽고.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교양 없이 감히 황자를 보고 기겁한 죄.

죽어 마땅하다.

실제로 운명의 작용일까.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분노가 명멸하고 손을 뻗어 저 가는 목을 쥐어짜고 싶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오히려 요란스러웠다.

곧 닥칠 비극을 얼핏 감지한 고용인들이 바들바들 몸을 떨 때.

나는 분노를 덧없는 폭력으로 쏟아내기보다는.

“후우.”

작은 한숨으로 털어냈다.

“이번뿐이다. 조심하도록.”

이후 시녀를 지나쳐 걸었다.

그게 끝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도 모르고 눈을 꾹 감은 채 찾아올 폭력 또는 죽음을 기다렸다.

한참 같은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일어나, 얼른!”

다른 시녀들이 몰려와 그녀를 피신시키고 나서야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변한 황자의 성미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생명을 해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위 운명 잔혹함 일부를 포식합니다]

[하위 운명 분노조절장애 일부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운명을 소화하여 운명 개변 수치로 전환합니다. 개변 수치를 투자하여 새로운 운명을 싹 틔울 수 있습니다]

[쌓인 개변 수치: 15]

내가 느끼기엔 크나큰 변화였다.

방금 작지만 커다란 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응원하듯.

[첫 운명 포식의 효과로 운명을 느끼는 범위가 조금 증가하였습니다]

[대상이 자기 자신에서 주변 작은 사물로 확대됩니다]

운명 포식자라는 신비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황자궁 뒤켠으로 발을 옮기자.

“전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무엇을 준비할까요?”

방금 일어난 소란을 수습한 시종이 급히 나의 뒤에 따라붙었다.

아마 주색잡기 따위를 예상하고 있겠지.

원래 이놈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그걸 요구했을 테고.

그러나 나는 놈이 아니다.

아니 놈이어선 안 된다.

“필요 없다. 이쪽이 연무장 맞지?”

“그럼 술과 안주를 당장. 네에?”

“연무장 맞냐고.”

“맞습니다만···.”

“훈련 도구가 필요하다. 연무장으로 가져오도록.”

“여자들을 부르겠나이···네, 네에?”

연속된 시종의 얼빵한 물음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두 번 말하게 할 테냐? 목숨이 두 개인가?”

일부러 입꼬리만 살며시 끌어올렸다.

얼핏 보면 매혹적이라 하겠으나.

나는 알고 있다.

원래 이 황자 놈이 사람을 죽일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라는 걸.

평생 녀석의 몸짓, 표정, 행동 양식을 배웠고 따라했다.

이 정도 연기야 어렵지 않지.

아니 사실 조금의 진심도 섞여 있으니.

“죄, 죄송합니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시종이 창백해진 얼굴로 도망치듯 명을 수행하러 달렸다.

솔직히.

“나쁘지 않네.”

자신의 한 마디에 벌벌 떨며 달리는 모습에 조금 유쾌해졌다.

그래 굳이 호구가 되지는 말자.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불필요한 살생은 자제하되 공포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될 일이다.

[하위 운명 잔혹함, 분노조절장애를 포식하였습니다]

[운명을 소화하여 개변 수치 10을 추가합니다]

[총 수치: 25]

문득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에 놓인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어 보고 있으려니.

[사물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화분: 암살 도구로 사용될 운명]

그중 하나에서 떠오른 불길한 문구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올랐다.

화분에 맞아 죽을 생각 따위 없다.

설령 언젠가 운명을 막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화분은 안 된다.

아니 죽을 생각 없다.

“우선 저 거슬리는 화분들 싹 치워라.”

하인들에게 명령하자.

당장 따를 줄 알았던 하인들이 우물쭈물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죽는 게 두려울 텐데.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화, 황비 전하께서 직접 세워두신 화분입니다만 정말로 치울까요?”

그나마 가장 높아 보이는 하인 하나가 목소리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되물었고.

황비라는 말에 자연스레 내 미간이 모였다.

황비 엘리자베스를 이르는 것일 테니.

녀석의 역린이자 콤플렉스이며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어머니.

허나 놈은 그런 어머니를 황제가 되자마자 내쫓아버렸다.

직접.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표면적인 정보이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시녀의 말을 듣고선 다시 화분 위에 핀 하얀 꽃송이를 보자 묘한 감상이 속에서 일렁였다.

“그렇다면 좀 더 안쪽에 두어라. 위태로워 보인다.”

“알겠습니다.”

차마 치우라는 말은 못 한 채 뒤돌아 연무장으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 가져왔습니다!”

와르르르!

시종이 마치 창고 전체를 옮길 기세로 수레까지 동원하여 훈련 도구들을 실어왔고.

곧 고풍스러운 모양새를 자랑하는 훈련에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

“이건 최고급 단향목으로 만든 목검으로 장인이 직접 문양을 새겨 넣어 황자 전하의 마음에 딱 들 물건입니다. 아! 여기 있는 방패 또한 안을 비워 무게는 낮추고 겉에는 금도금을 하여···.”

대체 방어를 위해 존재하는 방패의 속을 비우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대로는 계속 이어질 듯한 설명에.

“그만.”

집사의 말을 끊고는 직접 잡동사니를 헤집었다.

“명령만 하시면 직접 대령하겠나이다. 옥체를 보존하소서!”

“내 옥체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만. 말 좀 그만.”

“알겠습니다···.”

어딘가 풀이 죽은 시종을 외면하고 골라낸 건.

가장 수수한 팔찌 모양 금속 네 개와 먼지가 가득한 운동기구들.

마나 술식을 짜 넣어 무게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기물들이었다.

물론 사용방법부터 어떻게 강해질지 또한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전투능력 함양은 더미의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 중 하나였으니까.

곧 평생 들어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나태한 황자의 기합이 연무장을 울리기 시작.

[하위 운명 나태함, 허약 체질, 저질 체력을 포식합니다]

[개변 수치를 추가 획득합니다]

[새로운 행위로 인한 하위 운명 아주 작은 인내심이 태동하였습니다!]

최악의 폭군이 될 황자의 운명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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