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뒤바꿀 힘을 만났다
사건이란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아래에는 사람들의 행동과 의도라는 수많은 선이 겹쳐있고.
더 깊은 곳에는 정치와 이익이라는 차가운 계산 및 감정과 관계라는 어설픈 혼돈으로 이루어진 다각적인 면이 존재했다.
이 모든 것들이 더해지고 겹쳐 수면 위로 빼꼼 부상하는 것이 사건.
운명 또한 마찬가지다.
개인의 운명은 세상과 주변의 운명과 맞물려 이루어진다.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운명은 없다.
그랬다면.
콰직!
당장 머리가 터져 죽었을 테니까.
“끼야아아악!”
옆을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참상을 목격하고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기점으로 황자궁 안에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의 경악 어린 시선 가운데.
“기다렸다는 듯 튀어들 나오는구나?”
황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황자와 옆에 떨어진 커다란 화분이 있었다.
황자가 선 곳 바로 한 발자국 옆에 떨어진 화분.
자칫 잘못했다간 그 고귀한 머리통을 직격 했겠지.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눈치를 볼 때.
“분명 안에 들여놓으라 하지 않았나?”
황자의 붉은 입술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겉으로는 고요했으나 폭풍전야와 같이 흉폭한 광기를 담고 있는 목소리.
흠칫 몸을 떤 시녀 하나가 무릎걸음으로 기어 나오며 머리를 조아렸다.
“분명 복도 안쪽으로 들여놓았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어째서인지 떨어져 내렸나이다.”
“그뿐인가?”
분명 말하지 않았으나 들렸다.
유언은? 이라는 질문이.
겁에 질린 시녀가 제대로 답도 못 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동안.
“곧 식사 시간이다. 우선 치워라. 혹시 모르니 비슷한 화분을 구해두고.”
분명 평소라면 길길이 날뛰며 여럿을 헤쳤을 황자가 그 말을 끝으로 샤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뿐이었다.
기적이었다.
황자가 들어가고 나서도 이해할 수 없는 자비에 모두가 안도와 불안감을 삼키고 있을 때.
‘통했다.’
나는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
분명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으나 안배한 수가 통했다는 즐거움이 그것보다 컸다.
광기 때문에 약간 미쳐가는 걸까.
어젯밤 잠들기 전.
며칠간 이어진 고민 끝에 개변 수치 전부를 주어진 빌어먹을 운명 중.
[개변 수치 200 전부를 하위 운명 불운에 투자합니다! 운명을 개변합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불운에 쏟아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사건이든 운명이든 여려 변수를 통제하고 이 변수들을 한꺼번에 뒤바꿀 핵심이 필요했다.
그중에서 운이란 건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가장 어렵지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
작은 맞물림이 커다란 결과를 낳기도 하고 작은 어긋남이 비극을 일으키기도 한다.
주어진 상황을 뒤바꿀 유일한 카드.
[운명 불운의 성향이 약해집니다. 최악을 면합니다. 속성 중 불행 중 다행이 추가됩니다]
[불행 중 다행 - 수많은 불운 중 극악의 확률로 행운이 발동합니다]
운.
모든 운명이 최악인 가운데 발버둥을 쳐도 당장 긍정적인 운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운에라도 맡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방금 본 게 그 결과.
[운명 암살 시도와 불행 중 다행이 충돌합니다]
[향상된 신체 능력 덕에 운명을 이르게 파악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분이 옆으로 비켜 떨어졌고.
지금껏 훈련 덕에 원래 어깨에 맞았어야 할 화분을 반발 짝 비켜 피했다.
이전 지시에 위치가 바뀐 화분을 옮기느라 안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능했다.
이렇듯 운명이란 한 가지의 요소가 아닌 여러 가지가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
물론 운이란 다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불행 중 다행이 발동하여 개변 수치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작은 인내심이 추가 발동합니다]
모든 게 최악으로 치달을 때면 불행 중 다행으로 행운이 찾아왔고.
훈련 중에도 많은 이득을 얻었다.
분명 이런 작은 행운들이 쌓여 운명을 바꾸는데 힘을 실어주겠지.
오늘 있었던 행운들을 떠올리며 금으로 도색 된 샤워기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불행 중 다행으로 단번에 최적 온도를 찾았습니다. 피로가 조금 더 빨리 회복됩니다]
딱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기분 좋은 온도의 물줄기가 몸을 때렸고.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
“지, 지금 분명?”
혹시라도 언제 광증이 발병할 줄 몰라 샤워장 앞에서 안절부절하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콧노래를 듣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왜인지 등줄기에 섬찟한 소름이 주르륵 올라왔다.
그때부터였다, 11황자의 광증이 색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철성에 퍼지기 시작했다.
****
“오빠! 다음에 또 봐!”
“그래.”
“꼭 꼭 또 봐!”
“그래.”
“정말 또 온다? 또 오고 말 거야?”
“···그래.”
“약속!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알았다.”
어린 동생과 약속을 나누는 모습을 어머니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들어가세요.”
어머니를 향해 인사하면서도 거북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그런 아들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던 어머니가.
“···또 보아요. 황자.”
조심스레 다음을 기약했고.
“네.”
간단한 대답에도 다시금 활짝 웃으며 동생을 데리고 떠났다.
어머니의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동생의 은하수 같은 은빛 머리가 같이 나풀거리며 멀어졌다.
얼핏얼핏 보이는 옆모습 사이, 오밀조밀 오가는 웃음과 대화가 퍽 행복해 보였다.
속 가득한 거부감 사이 피어나는 작은 만족감 위로.
[하위 운명 패륜을 포식합니다. 개변 수치를 추가 획득합니다]
[불행 중 다행의 효과로 새로운 운명이 싹을 틔웁니다]
[하위 운명 가족애가 태동합니다]
[가족애- 혈연 앞에선 광기 제어력이 올라갑니다]
[운명 폐륜과 가족애가 충돌합니다]
상반된 운명이 눈앞에 놓였다.
[운명을 선택하여 포식할 수 있습니다]
두 선택지 가운데 내가 먹을 운명을 선택하면 될 일.
오히려 좋았다.
패륜과 가족애 양쪽을 오가며 개변 수치를 얻으면 된다.
“알프레드.”
“예 전하.”
“화분을 떨어뜨린 자는 찾았나?”
“송구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찾으면 알려줘. 재밌을 거 같아.”
“···알겠습니다.”
가족이라고 다 같은 가족은 아니니까.
내가 막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
“전하. 주제 넘는 걸 알지만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나이까?”
시종장 알프레드가 어쩐지 만족감 짙은 얼굴로 나를 불러세웠다.
침묵이 긍정이라 판단한 걸까.
“당분간은 황비마마와 황녀전하를 초대하지 않는 게 어떨지요.”
“주제 넘는다.”
“죄송합니다.”
“방금 목숨 하나 빚졌으니 할 일이나 제대로 해.”
“명심하겠나이다.”
일부러 스산하게 광기를 바라며 알프레드를 쏘아보았다.
죽일만한 일이었으나 죽이지 않았다는 뜻.
이를 이해한 그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를 지나쳐 가며.
“열흘간 초대를 금한다. 광증이 도졌다 하면 이해할 거다.”
남긴 말에 알프레드가
불쑥 고개를 들며 놀랐고.
뜨뜻한 시선이 뒷통수를 간지럽혔다.
사실 지금도 반골 기질과 오만, 독선 등과 같은 역천의 운명이 나를 괴롭혔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치고 욕을 뱉으며 상대를 공격하고 싶다.
그러나.
‘그랬다간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지.’
알프레드의 진짜 얼굴을 아는 나로서는 감히 행하지 못했다.
결심한 그의 앞에선 황자라는 허울 좋은 명분도 소용없을 테니까.
다만 황자의 성깔을 연기하기 위해 허세를 좀 부렸을 뿐.
자존심은 좀 구겼을지라도.
[하위 운명 반골, 독선, 오만, 잔혹함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했습니다]
[작은 인내심이 강화되었습니다]
[패륜과 가족애 사이, 이후 행동에 따라 변화합니다]
나름 얻은 게 있으니 되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행위의 결과로 운명 암살 시도가 주변인을 빗겨나갔습니다]
[앞선 선택의 결과로 패륜을 크게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관련 인물들의 운명이 조금 더 변화합니다]
방금의 인내와 선택으로 다시금 운명이 변했다.
그중에서도 암살시도가 주변인을 빗겨 갔다는 말에 급히 뒤를 돌아보자.
이미 알프레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가득했던 풀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사라진 저녁.
소름 돋은 피부를 쓰다듬으며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오후.
아침부터 이어진 훈련.
[하위 운명 나태함, 허약 체질, 저질 체력을 포식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내심이 발휘되어 추가로 포식합니다. 개변 수치를 추가 획득합니다]
[총 개변 수치 250]
지금껏 모은 수치가 꽤 되기에.
[개변 수치 전부를 불운에 투자합니다. 불운을 약화합니다. 불행 중 다행 발동 확률이 올라갑니다]
다시금 모조리 불운에 투자했다.
신체 능력을 올릴까도 생각해 봤는데.
우선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기도 했고.
[불행 중 다행을 발동합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불더니.
철퍽.
“아···?”
“음.”
분명 나를 향해 날아오던 새똥이 시종의 반쯤 벗겨진 이마에 뚝 떨어졌다.
놈의 성격 중 그나마 맘에 드는 것 하나.
웃음을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차피 미친놈이니 미친놈처럼 웃어도 다들 아무 말 못 했다.
내가 배를 잡고 웃는 동안, 집사가 붉어진 얼굴로 손수건을 들어 이마를 닦고는.
“비고의 사용 허가를 받았나이다.”
지난번 명했던 보고 출입 허가를 알렸다.
“씻고 점심 먹고 가겠다.”
“차량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이로니아의 수도 페르마 그 중심에 존재하는 황성 강철성.
수백만이 응집한 도시 중앙, 성의 크기가 작은 도시만 하니.
발로 움직일 만한 거리가 아니었고.
“타시죠. 황자 전하.”
황족 전용으로 마련된 차량이 11황자궁 앞에서 매끄럽게 출발했다.
유려한 곡선과 마나 엔진으로 돌아가는 바퀴.
상아와 은 등 각종 최고급 재료로 마감된 내부.
진회색 도로가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침묵했다.
힐끔힐끔.
운전수가 계속 백미러로 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도착했나이다.”
알프레드가 도착을 알리며 문을 열어주었고 내리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제국 모든 지식과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는 비고.
과거에도 와봤던 곳이지만.
“놀랍군.”
다시 보아도 감탄스러웠다.
널따란 부지 위에 떠돌아다니는 네모반듯한 건물들.
마치 커다란 철괴들이 이리저리 뒤죽박죽된 듯한 모습.
이를 잠시 보고 있으려니.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비고를 담당하는 황실 마법사 중 하나가 다가와서는.
“비고 중 서재의 출입만 허락되셨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꿈틀, 내 입꼬리가 올라가자 긴장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폐하의 명이셨습니다.”
그거 하나면 끝.
당장 눈앞에 닿을 듯 쌓여있는 보화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고 넘어가야 한다니.
“이유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묻자.
“지난 무기고에서는 무기를 밀반출하려 하셨고, 다른 비고에선 보석을 탈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고의 지식을 유출하려 하셨던 경력도···.”
“그만. 멈춰.”
대답은 엉뚱하게도 알프레드를 통해 돌아왔다.
“자네는 왜 왔어? 황자궁이나 지키지.”
“시종장으로서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고 치는 거 감시하러 온 건 아니고?”
“···그럴리가요.”
“대답이 한 템포 늦군. 목숨 하나 또 빚졌어.”
“갚겠나이다.”
나와 알프레드의 물 흐르는 듯한 대화에 마법사가 놀라길 잠시.
“그럼 서고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가 비고의 마법을 발동하자.
쿵, 쿠쿵, 쿠쿠쿵!
따로따로 부유하던 공간들이 블록이 쌓이듯 서로 겹치기 시작.
거대한 성벽과 같이 굳건한 위용을 자랑했다.
서고를 이루는 공간만 스무 개가 넘는다.
“보좌할까요?”
“아니, 안에서까지 감시당하고 싶진 않아.”
알프레드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황성의 신비 중 하나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별다른 확인 절차는 필요 없었다.
들어감과 동시에 확인이 이루어졌으니까.
안으로 들어선 내가 주변을 둘러보길 잠시.
“마침 서고만 허락되어서 다행이로군. 다른 곳에 있는 것들은 아직 사용하질 못하니.”
확신을 갖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기억이 이끄는 대로, 그 시절 보았던 서적을 찾아 눈을 굴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몇 시간 동안 서고를 돌아다니길 한참.
드디어.
“찾았다.”
원하던 책을 찾았다.
하지만 그건 책이었으나 책의 모양이 아니었다.
형태는 타오르는 불꽃이며 담긴 건 강렬한 염원.
내가 홀린 듯 살랑살랑 유혹하는 불을 향해 손을 뻗어 쥐어 잡자.
거대한 불이 번지며 나의 몸을 탐욕스럽게 삼키려 했으나.
[당신의 운명을 뒤바꿀 거대한 힘을 마주합니다. 거대한 힘이 당신을 삼키려 합니다]
[이미 다룬 적 있는 신비입니다. 잊히고 버려진 신비의 운명을 포식합니다]
오히려 내가 놈을 삼켜 버렸다.
그렇게 과거 얻었던 운명이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운명을.
허나 이번만큼은 다를 신비를 포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