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좀 봐야겠다
강철성의 비고.
대륙의 패권을 쥔 제국이 선정하고 선정한 가장 소중한 물건들이 잠들어 있는 곳.
무기고엔 전대 황제들부터 대륙의 영웅들이 쥐었다던 각종 신기들이 잠들어 있고.
마고엔 제국 설립 이전부터 존재했다던 고대 마법과 술식들이 잠들어 있다고들 한다.
보고에는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귀중한 보물들이 가득하다.
그중 서고는 거대한 도서관.
각종 철학, 예술, 소설 등 지식적 가치가 인정된 기록물들이 보관된다.
그것이 제국의 것이든 아니든, 제국 이전의 것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담겼다.
설령 그 지식이 제국의 뜻에 반한다 하더라도.
지식의 힘이란 위대하기에.
그중에서도 보관된 세월이 너무나 오래되어 이젠 잊힌 기록물들이 서고 안에 존재했다.
제국이, 국가가 태동하기 이전.
신비와 이적과 신화와 영웅이 가득하던 태고(太古)적.
당시엔 지식을 종이 대신 다른 곳에 적었다 한다.
때론 바람이기도 했고 물이기도 했으며 땅 전체 또는 의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운명을 뒤바꿀 거대한 힘을 마주합니다. 거대한 힘이 당신을 삼키려 합니다]
내가 마주한 이 운명 포식이라는 신비 또한 그 시절에 존재하던 것일지도.
허나 확실한 건.
‘처음은 아니야.’
처음 마주한 신비는 이 운명 포식이 아니었다.
과거 가짜 황제 행세를 하던 시절 비고를 돌아다니던 중 암살 위협을 받았고.
살기 위해 도망쳤다.
그 와중 만난 첫 신비이자 기적.
[염황심결 중 첫 번째 심장을 획득했습니다]
염황심결.
강철제국 아이로니아의 첫 황제이자 건국제.
강철염제(强鐵炎帝) 카이론 아이로니아가 품었던 첫 번째 신비.
잃어버린 제국의 근본을 얻었다.
이것이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가짜였으나 황제의 위엄을 잃지 않았고.
그리 날 죽이려 하던 정적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으니.
‘이번엔 다를 거다.’
불을 삼키면서도 확신했다.
폭군의 치세가 역병처럼 번진 이후에도 위엄을 되찾게 해준 능력이다.
아직 폭군이 되기도 전, 비록 기반도 능력도 없는 황자 상태라지만 근본을 획득한 이상 달라질 것이다.
운명을 바꿀 힘이라지 않던가.
몸을 감쌌던 불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푸화학!
분명 꺼졌을 불이 다시금 뱃속에서부터 치달았다.
[포식하기에 너무나 거대한 운명입니다. 운명 불운이 발동하여 불에 담긴 힘이 역류합니다!]
지난 생에선 겪은 적 없던 현상.
그땐 그저 작은 불을 심장에 품었을 뿐이었는데?
머릿속 의문도 잠시.
안에서부터 번진 화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고통에 몸을 굽히려다 말고.
“크흐흐. 흐흐흐흐.”
갑작스레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반골, 오만, 독선, 패악.
지기 싫다는 감정들만으로 이 몸은 안에 치닫는 모든 고통을 무시했다.
아직 의문 가득한 현상이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깠게 아파 보았자.”
광증과 폭군의 운명은 거대한 힘을 마주하고도 굽히지 않는다는 점.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미쳤다며 손가락질 했겠지.
하지만 오히려 이런 광증 덕에.
‘불이 피에 반응했다.’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전생과 현생의 가장 큰 차이점.
피.
전생의 몸은 실제 아이로니아 황가 핏줄이 아니었기에 신비가 전부 발현되지 않은 것.
그러나 지금 입은 몸은 진짜 황제의 몸이었기에 신비가 핏줄에 반응하여 모든 운명을 뿜어낸 탓.
비록 전생과 현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미 다루었던 힘.
오히려 잘 되었다.
‘더욱 날뛰어라.’
황가의 피를 만난 신비가 어떤 위대함을 품을지 기대해봄 직했다.
몸을 감싼 화마 속임에도 꼿꼿이 세운 허리와 입에 피어난 조소,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과 흐드러지는 백금발.
충혈된 눈으로 얼마간을 버텼을까.
타오르는 불을 얼마나 담고 있었을까.
차차 불에 담긴 기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광화(狂火)를 어찌 다룰지 점차 깨달아갔다.
고통은 바로 책을 읽는 과정.
전생엔 책을 펼치지도 못했다면 지금은 차차 익히고 배우고 있으니.
다만 겸허히 배우기만 하는 것은 폭군에게 맞지 않았다.
“신비는 주인의 말을 들으라. 너는 날 태울 수 없다.”
굴복시키고 포식하리라.
입에서 흘러나온 오만하며 광기가 가득한 말.
패배 선언이 싫어 목숨을 잃더라고 굽히지 않을 미친 황자이자 폭군의 명령.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이자 운명임에 분명하나.
[하위 운명 반골, 오만, 독선, 패악으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불행 중 다행의 효과로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하위 운명 고귀한 피 중 신비를 잡아먹는 혈통을 깨닫습니다]
[감당키 어려운 힘을 억지로 포식합니다!]
폭군의 운명은 거대한 신비마저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달군 쇠꼬챙이로 온몸을 휘젓는 것 같은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고.
몸 안 가득했던 불이 심장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지막, 심장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
“윽-.”
이건 패악한 폭군의 몸도 참기 힘들었는지 악다문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으나.
그뿐이었다.
놈의 광기와 나의 의지는 그만큼 커다랬다.
결국 신비도 포기한 듯 심장 주위에 하나의 원이 되어 머물렀다.
두근, 두근, 두근.
정신이 아득한 고통 속, 귓가를 울리는 고동 소리.
심장을 휘도는 강대한 불의 고리.
동시에 이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고통을 견딘 만큼 선명하게.
힘을 담은 불이기도 했으나 기록을 보관하는 책이기도 했기에.
전생과 다르게 불에 기록된 힘과 지식을 모두 삼킨 순간.
[하위 운명 불운,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운명을 대거 포식합니다]
[하위 운명 반골, 오만, 독선, 패악으로 고결한 정신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운명을 대거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 500 획득]
[총 개변 점수 600]
[고통을 넘어 불을 삼켰기에 첫 번째 심장의 모든 효능을 몸에 담았습니다!]
[하위 운명 고귀한 피를 개화할 요소, 염제심결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놀라운 힘의 획득으로 운명 전체가 머리를 틀었습니다]
또 한 번 운명이 방향을 틀었다.
아직 어디로 향할지 결과를 알 순 없으나.
분명한 건.
“조만간 폭풍처럼 몰아치겠지 운명이든 위기든.”
곧 닥쳐올 폭풍우들이 많으나.
불을 품은 만큼 많은 게 변할 것이란 사실.
우선 불을 뿜어내는 방법을 터득하면 불을 키울 장소로 향해야겠지.
강철성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비 속으로.
막 발걸음을 옮겨 서고를 나서려 할 때.
[운명의 충돌로 새로운 운명을 품습니다. 하위 운명 미약한 행운이 깃들었습니다]
반가운 소식에 저도 모르게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막 서고 밖으로 나가자.
쨍쨍했던 오후의 해가 가라앉았는지 연보랏빛이 하늘 가득했다.
오후 훈련을 못 했다는 아쉬움도 잠시.
더욱 큰 걸 얻었으니 되었다는 마음으로 막 알프레드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일은 모두 끝나셨나이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알프레드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옆에는 아까와는 다른 비고 담당자.
녀석의 의심 어린 눈을 보자 울컥 화가 솟았다.
“불손한 눈 깔아라. 뽑아버리기 전에.”
“죄송합니다.”
사실 찔렸다.
불을 몸 안에 삼켰으니 가져나가는 게 맞지 않는가.
연보라 저녁노을을 그대로 반사하는 깨끗한 백금발 사이 붉은 입꼬리가 씨익 올라감을 본 담당자가 몸을 떨었다.
광증이다.
눈 한 번 잘못 놀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 때.
“하늘이 좋아 살았다.”
황자가 여상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귀한 황자라는 혈통과 다르게 어딘가 늘어진 듯한 발걸음.
그러나 흠이 되지 않았다.
흐트러졌으나 아름다웠고 늘어졌으나 위엄있다.
그가 차에 타고 나서야 담당자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늘 덕에 목숨을 건졌다.
참으로 우스운 이유였으나 11황자 라면 납득할 만한 이유.
“후우.”
차창 밖으로 안도하는 담당자를 보며 나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진 못한 모양.
푹신하며 안락한 뒷좌석에 몸을 묻을 때.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고.
백미러로 보이는 알프레드와 눈을 마주쳤다.
심장은 철렁했으나 겉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방만한 자세를 유지했다.
“목숨 하나 빚졌다. 벌써 세 번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눈이 불손해.”
“송구합니다.”
“그래 송구해야지.”
다시 저녁에 먹혀 가는 강철성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위어가는 하늘과 어둠을 덮어 먹색으로 짙어지는 건물들.
몰려오는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하얗게 빛나는 마나등.
붉고, 어둡고, 빛난다.
문득.
“혹 무명 서기관에 아는 것이 있나?”
본 적 있는 빛깔에 운명 포식이라는 신비를 전해 준 이를 떠올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저랬지.
회귀한 지금, 서기관 일을 하고.
“무명 서기관 말씀이십니까? 무명···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처음 들어본다?”
순간 구겨지는 미간.
혹시 접촉을 금하기 위해 의뭉을 떠는 건 아닌가 싶었으나.
“참인가?”
“참입니다. 서기관들 중 무명은 없습니다. 신원확인이 철저하기 마련이니까요.”
알프레드의 표정은 진실이었다.
황당했다.
나에게 신비를 전해준, 강철성 괴담 중 한 축을 맡고 있던 무명 서기관이 존재치 않다니.
알프레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모른다면 이 다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연했다.
그가 모르는 강철성의 고용인은 없을 터이니.
“찾아볼까요? 황실실록관에 문의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책이라도 발견하셨는지요.”
“관심이 많아. 또 빚지고 싶어?”
“다물겠습니다.”
내 퉁명스러운 답에 만족감 어린 미소를 지은 알프레드가 문득.
“서고에 계신 사이 7 황녀께서 다녀가셨습니다.”
“···7 황녀가? 뭐라던가?”
“기분이 좋아 보이시더군요. 황자님 만큼이나 말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던 내가 한 가지 떠오른 사실에 미간을 구겼다.
왜 미친년의 기분이 좋을까?
알프레드는 힌트를 주었고 나는 이를 이해했다.
이미 알고 있으니 유추는 쉬웠다.
결론은 간단했다.
“오늘 저녁 모든 고용인을 참여시키도록.”
“알겠습니다.”
검게 물들어가는 어둑한 밤하늘에 비치는 자주색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
갑작스러운 명에 모두가 의문과 불안을 품고선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고용인 모두가 앉아 식사를 함께해도 될만한 기다란 식탁의 가장 상석.
모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수군거릴 때.
당사자 황자가 등장했다.
풀어헤친 셔츠와 흩날리는 백금발 쭉쭉 뻗는 다리가 유독 나풀거린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에 앉아 고용인들을 향해 단 한 번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곧 음식이 배달되었고 황자는 당연하다는 듯 이를 삼켰다.
여상스럽다.
힘을 뺀 움직임에 묘한 기품이 어려있다.
한 입 한 입 탐욕스럽게 물지만 게걸스럽지 않다.
홀로 빛나는 황자가 주인공이요 고용인들은 그를 바라보는 배경과 같으니.
마치 연극의 한 장면같이 묘한 풍경 속.
“술을 가져오라.”
술이라는 말에 모두의 어깨가 뻣뻣이 굳었다.
황자의 괴팍한 주벽은 유명한바.
오늘 사단이 나도 제대로 나리라 모두가 비극을 예견했고.
“여기 있습니다.”
시종장 알프레드가 어둑한 눈으로 갈색 액체가 찰랑대는 유리병을 내왔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다른 거로.”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후에도.
“아니다. 다른 거로.”
“아니다.”
“다른 것.”
알프레드가 가져오는 병들을 모두 거절했다.
점차 팽팽해지는 분위기에 모두가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몇몇 시녀들은 아직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참았다.
이윽고.
짙은 색 와인이 담긴 병을 가져왔을 때.
비로소.
“맞다. 한 잔 따라봐라.”
고개를 끄덕였고 짙은 색 와인이 잔 안에 떨어져 내렸고.
잔을 들어 올린 황자가 이를 흔들자 유리잔에 옅게 흔적이 남았다.
마치 곧 흩어질 핏방울을 암시하듯이.
그가 깊이 냄새를 맡고는.
고용인들을 향해 처음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마치 스테이크에 쓰일 고기를 고르듯 찬찬히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길 한참.
그중 유독 몸을 떠는 시녀 하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너, 나와.”
다음으로 주먹을 꽉 쥔 시종을 가리키며.
“나와.”
이후로도 몇몇을 더 불러낸 황자가.
“잔을 인원수에 맞게 가져와라.”
불러낸 수대로 잔을 세워두곤 와인을 따랐다.
그다음.
“잔을 집어라.”
그들이 잔을 집어 올리자.
“마셔라.”
본인도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씨익 광기 어린 미소를 띄웠고.
고용인들의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서 액체가 요동쳤다.
“마시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가족들까지. 미친 황자의 명을 어긴 죄로 말이지.”
“······.”
황자의 광기와 고용인들의 공포, 와인의 진득한 냄새가 떠돌아다니는 식당.
“허나 마시면 살려주마. 나머지는.”
“···그, 그것이.”
“아니면 할 말이 있는가?”
은근한 물음에 결국.
“송구합니다! 저, 저는 그저 가져다 두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 옵니다!”
“준 약이 정력에 좋으니 타라는 말을, 그 말을 들었을 뿐이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그들이 우르르 엎드려 죄를 고했다.
그때.
황자가 갑작스레 독이 든게 확실한, 잔에 담긴 와인을 목으로 넘겼고.
꿀꺽, 꿀꺽,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만이 식당에 가득했다.
모두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때.
“말하라, 누구의 지시였는지. 피를 좀 봐야겠으니.”
황자가 피를 머금은 듯 붉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