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뒷면엔 기회가 있다
각 15명의 황자와 11명의 황녀.
그중 7황녀이자 황손으로선 23번째인 세린느를 수식하는 단어는 독화.
계략과 모함, 지독한 장난질로 희열을 채우는 모진 꽃.
아직은 그리 불리지 않았으나 그 씨앗은 분명했고.
어릴 적 무르익지 않은 장난의 대부분은 11황자이자 22번째 황손.
즉, 나를 향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과하게 잘라내었다.
독을 머금은 꽃이 피어나 주변을 녹이기 전.
미리 그 위를 피로 덮어버렸다.
황녀 주위에 몰려있던 자들을 생각하니 다시금 분노가 샘솟는다.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버러지들.
어린아이에게 잔혹함을 부추기고 자기네들 입맛대로 휘두르려는 간신들.
그중에서도 방금 내 손에 명을 달리한 시종은 유독 악했다.
자신의 열등감을 발판 삼아 끝없이 세린느를 충동질하던 자.
어릴 적부터 황녀를 보필했다는 위세를 업고선 건드려선 안 되는 것들을 건드리던 간신배.
기회가 온 김에 죽였다.
외적보다 내부에 있는 적이 제국과 황성을 좀 먹을 것이기에.
또 나의 앞길에도 방해가 될 것이기에.
“우스운 일이로군.”
머릿속으로 앞으로 죽일 놈들의 명단을 작성하다가 문득 웃음이 터졌다.
차 안을 메우는 피비린내 섞인 웃음소리.
알프레드는 침묵했고 운전수는 공포를 삭였다.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이는 바로 내가 아닌가.’
근본적인 의문을 띄워 올렸다.
제국의 가장 큰 적이자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
따지고 보면 명단 가장 위에 내 이름을 적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의문도 잠시.
‘바뀔 것이니.’
괜찮다.
쉬이 결론을 내렸다.
“씻으시겠습니까?”
“아니 바로 연무장으로 가겠다.”
결정은 쉬웠으나 그 과정을 위해선 고련이 필요한 법.
어차피 씻을 몸.
피 좀 묻은 채로 움직인다고 다를 것 없다.
연무장으로 향하여 평소처럼 훈련을 시작했고.
[하위 운명 나태함, 허약 체질, 저질 체력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미약한 행운으로 개변 점수를 추가 획득합니다!]
[행운의 빈도가 조금 더 증가합니다]
흐르는 땀 구슬들 사이,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운명을 잡아먹는 입가에선 배부른 미소가 떠올랐다.
며칠간 황자궁은 잠잠했다.
처음엔 평화를 불안해하던 고용인들도 이내 평화에 익숙해져 갔고.
나 또한 최근 다른 이를 향해 광증을 쏟아내었기에 잠잠했다.
그 대상이 황녀라는 게 문제였긴 했으나 딱히 별일은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종종 찾아와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자 팽팽했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저 아침, 점심, 저녁 꾸준한 루틴으로 훈련을 병행했다.
그 결과.
[하위 운명 나태함을 크게 포식하였습니다. 새로운 운명 꾸준함이 태동합니다]
[하위 운명 허약 체질을 크게 포식하였습니다. 새로운 운명 평범 체질로 변화합니다]
[하위 운명 저질 체력을 크게 포식하였습니다. 새로운 운명 평균 체력으로 변화합니다]
지금껏 발목을 잡았던 육체 관련 운명들이 변화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하위 운명 나태함과 꾸준함이 충돌합니다. 당신의 결정에 따라 운명을 포식합니다]
성향은 나의 선택에 따라 크기를 더하거나 줄여갔고.
육체 관련 운명은 결과로서 변화하였다.
효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운명 변화로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미약한 행운 적용으로 추가 획득합니다]
[관련 운명 동시 변화 보상 및 미약한 행운 적용으로 하위 속성 신체 조율을 획득했습니다]
미약한 행운이 굴러가는 운명에 속도를 더해주었다.
거기에 더해.
[개변 점수 전체를 미약한 행운에 더합니다! 행운의 빈도와 강도가 더욱 상승합니다]
[미약한 행운의 작용으로 미약한 행운을 추가 개변합니다. 수식어 미약한이 사라집니다]
운명이 남긴 부산물을 먹은 행운은 점점 더 커 갔다.
끝없는 선순환.
불필요한 운명을 먹어치우고 행운을 키운다.
행운으로 다시 운명을 강화했고.
그러며 앞으로 있을 사건을 대비했다.
퍽 만족스러운 과정.
방금까지 이어가던 훈련을 멈추고는.
“너.”
“예!”
“아니 평민 말고. 네 부하.”
분명 그쪽을 가리키지 않았음에도 안드레가 검을 반쯤 뽑으며 나섰고.
내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워하는 안드레 쪽을 외면하며 다른 놈을 불렀다.
“예. 전하.”
“검 좀 나누어보자.”
“저와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구랑 하리.”
“저랑!”
“닥쳐. 평민.”
“넵.”
잠시 나와 안드레의 대화를 보던 녀석이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아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라 여긴 것이겠지.
무시하던 평민한테 지고 부하 취급을 받은 게 자존심이 상하리라.
“어찌, 봐 드립니까?”
슬쩍 자존심을 긁는다.
아마 녀석이 기대한 건 최선을 다하라는 말 따위였겠지.
놈의 의도는 통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팔 가져가겠다.”
킥킥 터져 나오는 광소를 숨기지 않으며 놈에게도 연습용 검 하나를 던져주었다.
폭군의 속에 잠재된 온갖 패악스러운 운명들이 자존심 굽히는 걸 극렬히 거부했다.
손에 쥔 검을 까딱이며 놈의 공격을 도발했다.
“생각해 보니 이름도 듣지 못했군.”
“아 소신의 이름은-.”
“닥쳐라.”
“네?”
“난 가치 있는 놈의 이름만 기억한다. 내가 물어보면 답해라.”
“방금 분명 이름을 듣지 못하셨다고.”
“혼잣말이다. 질문이 아니니 개의치 말라.”
“아, 네.”
“넌 뒈졌다.”
“네?”
“혼잣말이다.”
끄응, 신음으로 격정을 다스린 놈이 연습용 검을 강하게 꼬나쥐었다.
옳지, 심리전이 먹혔다.
그런 놈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나는 한 손에 쥔 검을 더욱 느슨히 풀었다.
까딱거리는 검 끝.
싸움을 앞두었다고 생각기 어려운 방만하며 늘어진 듯한 자세.
상대의 미간이 꿈틀댄다.
빈 틈투성이겠지.
놈은 고민할 거다 정말 쉽게 이겨도 될지.
이 미친 황자가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 화를 내는 건 아닐지.
“뭐해? 자니?”
“흐읍.”
내 물음에 결국 놈이 참지 못하고는 검을 찔러왔다.
놀라게 해주겠다는 듯 가벼운 검격.
딱 내가 의도한 정도.
놈의 검 끝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묘한 빛이 일렁이길 잠시.
[당신의 가슴을 향합니다.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검의 운명이 보였다.
가슴의 정중앙을 향하는 궤적.
위협적이진 않지만 귀찮은 검격.
그럼 어디 볼까.
검을 휘둘러 상대의 검을 걷어낸 뒤 이어진 반격.
“엇!”
생각보다 날카로운 검격에 기사가 파드득 놀라 물러서서는 자세를 정비하기도 전.
검에 몸을 던지듯 달려들었다.
한번 타오른 기세를 내줄 순 없다.
아슬아슬하게 검 끝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더미가 되기 위한 과정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인 검술.
어차피 가짜 인생, 검을 나눌 때만큼은 살아있단 기분이 들었으니.
“흐읍!”
녀석이 제대로 된 검로를 파고들려 하자.
검의 운명이 나에게 경종을 울렸다.
어디를 노려 어떻게 어떤 상처를 입힐지 보였다.
물건의 운명을 읽는 능력의 활용법을 고민하다 떠올린 방법.
전투 시 유용할 듯했다.
허나 공격이 보이긴 해도 아직 피하긴 어려운 실력.
더 끌었다간 불리하다.
상대가 아직 방심하고 있을 때 끝낼 생각.
그대로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하며 전진.
찌이이익.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방금 공격의 운명은 고작 그 정도.
대신 나의 검은 녀석의 목젖 앞에서 멈추었다.
“아-.”
나와 검을 나눈 기사의 표정이 시커멓게 죽었다.
비록 마나 한 점 사용하지 않은 승부였으나.
거기다 황자라는 신분을 배려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안드레에 이어 또 패배할 줄이야.
황실 기사단으로서의 면이 서지 않는다.
솔직히.
‘놀랍다.’
아무리 봐주었다 해도 황자가 검을 쥐었단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가슴 속에선 열불이 뻗쳤지만 이성은 냉정히 방금 겪었던 황자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타오르듯 거세며 위험한 검이었어.’
사실 보통의 성정이라면 이런 검술, 자기 몸이 상할까 무서워서 엄두도 못 낸다.
허나 황자와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목숨을 도외시하듯 마구 내뻗는 듯하지만 유려하게 치명적인 곳을 향해 날아드는 검.
상대의 검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웃는 대담함.
한 번의 빈틈을 잡자 잡아먹을 듯 타오르던 결단과 폭발력.
‘재능인가.’
오해할 법했다.
전생과 신비라는 변수를 어찌 알겠는가.
실제로 황자와 기사의 다툼을 흥미롭게 보던 모두가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막 황자궁으로 복귀한 알프레드는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고 안드레는 연신 눈을 비빌 정도.
“졌습니다.”
기사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고.
“그래, 이겼군.”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검을 거두었다.
“처음이지만 쓸만해.”
“정말 처음이셨는지요.”
“처음이었다. 검을 처음 잡고 처음 싸워보았지.”
“···그렇습니까.”
“그래, 처음이었다. 처음. 처음이었느니라.”
“알겠습니다.”
“처음 쥔 검으로 이길 줄이야. 이거 놀랍군. 처음이었는데 말이야.”
“···경축드리옵니다.”
녀석을 조금 골려주고는 오후 훈련을 끝내려 했는데.
[하위 운명 처참한 패배를 포식했습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앞길에 하위 운명 처참한 패배, 조롱, 무시가 도사립니다]
운명은 여기서 만족하여선 안 된다며 닦달했다.
****
제국 아이로니아의 황제.
단순히 한 줄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름.
혹자는 대륙의 주인이라고도 누군가는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라 칭하는 고고하며 찬란한 자리.
제국의 모든 것을 굽어보는 어버이이자 수장.
그가 머무는 곳은 강철성에서도 가장 중앙.
황제궁 아이언.
세상은 황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라는 명제를 표현하듯.
드높은 위세를 자랑하는 황제궁은 언제나 강철성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황제가 세상을 움직인다면, 세상의 중심인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자는.
바로 황후.
황제궁의 전권을 손에 쥔 또 다른 절대자.
그녀만이 황제궁에 머무는 특권을 허락받았다.
황제궁 속 황후의 거처.
“흐으응, 그러니까 세린느의 시종을 죽였단 말이지? 그 발칙한 아이가?”
드넓은 황후좌 위.
새까만 드레스, 물빛 머리를 활짝 펼친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깊이 미소지었다.
기다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황후좌를 가득 덮은 푸른 머리가 흐르듯 물결쳤다.
“그렇사옵니다. 마마.”
“어찌? 어찌 두고만 보았다 하더냐.”
“불식 간에 일어난 일이었던 지라 막을 수 없었다. 그리 들었습니다.”
“못된 장난 덕에 미친개에게 물렸구나.”
“어찌 세린느 황녀의 마음을 헤아리시겠나이까?”
새까만 정복을 입고 얼굴이 유독 하얗게 뜬 자의 말끝에 살기가 담겼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황자는 사라지리라.
그러나.
“아니다. 그 발칙한 자는 죽어 마땅했느니라. 더러운 놈이 더러운 것을 치웠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제를 모르는 년의 자식에게 상을 주어야겠지.”
황후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상이라 하심은?”
“최근 아르한, 그 아이가 조금 바뀌었다지.”
“예. 맞습니다.”
“내 황제께 말씀을 드려 작은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려볼 참이다.”
“크나큰 자비이옵니다.”
분명 말로는 상과 자비를 언급하고 있으나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남모르게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깊은 구렁텅이에 밀어 넣어 스스로 목을 매달게 하는 것이 그녀의 즐거움.
지금껏 그래오지 않았나.
그녀의 손아귀에 걸린 먹잇감들이 기어 나오려 할 때면 다시 깊은 무저갱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엔 11황자, 아르한을 장난감으로 삼으리라.
그것이 황후의 즐거움.
“내 부군께 갈 것이니 채비하렴. 아이들아.”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던 수십 명의 시녀가 나와 그녀의 머리를 일제히 쓸어 다듬었다.
사라락, 사라락.
깊은 물결같은 황후의 악의가 11 황자궁을 침범하려 했다.
****
11황자궁, 새로 마련한 침소.
심장에 머무는 불의 고리가 의지를 따라 움직였다.
지난번 서고에서 염제심결의 첫 번째 심장을 얻은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깊은 밤과 이른 새벽마다 불꽃을 움직이려 했다.
쉽지 않았다.
나의 재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기에.
단순한 육체 개조는 꾸준한 훈련으로 가능했으나 재능이 관여하는 심결의 영역은 다른 이야기.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위 운명 보잘것없는 재능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그 운명마저 포식하는 게 나의 생존 방법이니까.
허나 고리를 이룬 불은 움직임만은 쉬이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이리저리 날뛰었다.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
그마저도 잡아먹었다.
불을 먹고 또 먹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끝없이 상승하는 개변 점수와 도저히 뜻대로 되지 않는 몸 안의 화마.
포기할 법도 했건만.
오늘은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집중하길 한참.
눈가를 찌르는 빛에 슬며시 눈을 떠보니.
‘아침.’
어느새 해가 밝았다.
번지는 붉은 빛을 보며 순간.
깨달았다.
염제심결 첫 번째 심장 – 적염을 다루는 법을.
느닷없이 찾아온 영감.
[하위 운명 행운의 결과로 강렬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속성 신체 조율의 힘을 빌려 방법을 터득합니다]
지금까지의 노력에 영감이라는 방점이 더해진 결과.
화륵.
검지에 작은 붉은 불꽃 하나를 띄워 올림과 동시에.
쿠르르릉!
11황자궁의 주변으로 어둑한 숲이 우르르 솟아올랐다.
갑작스러운 변화.
불길함이 황자궁을 스멀스멀 잠식했으나
[필요한 때 작은 행운의 결과로 다른 운명 처참한 패배에 대항할 단서를 손에 넣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신이 원하던 장소를 마주합니다]
[새로운 운명 불이 태동하였습니다!]
나는 오히려 웃었다.
손끝에 쥔 불꽃이 방안을 잠식하는 어둠을 살랐기에.
‘더욱 강해질 기회다.’
내 앞에 놓인 위기의 뒷면에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유독 심장 고동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