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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1화 (11/200)

황자는 지기 싫다

황제궁에 마련된 수많은 식당 중 하나.

수백 명이 동시에 앉아 식사할만한 크기의 식탁에선 단 세 명만이 식기를 움직였다.

고요한 식당,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식사.

어둠에 휩싸여 소리 없이, 흔적 없이 돌아다니는 궁인들의 형태가 자못 괴기스러웠다.

그 가운데.

“파하하하하!”

갑작스러운 박장대소가 식당의 괴괴한 침묵을 깨트리며 퍼져 나왔다.

헌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웃었을 뿐인데.

움직이던 시종들과 내시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고.

그들을 가려주던 그림자가 일제히 일렁이며 흔들렸다.

거력.

목소리에 담긴 힘의 편린마저 공간을 뒤흔들 파괴력을 담고 있다.

황제가 기거하는 곳에서 함부로 힘을 뿜는 행위는 금기.

궁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힘의 주인을 향해 눈을 부라릴 때.

상석, 황후의 하얀 손가락이 우아하게 올라가자.

마구 뿜어져 나오던 위협과 살기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웃음이 과하구나. 예법에 맞지 않다.”

허나 황후는 상대가 금기를 어겼음을 탓하기보다는 웃음소리가 너무 커다람을 지적했다.

황후의 질책을 들은.

“아,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너무 웃긴 나머지 그만.”

사내가 쿡쿡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진회색 머리카락 아래, 물빛 눈동자가 선명했다.

눈가에 난 기다란 흉터, 흉터가 흠이 아닐 정도로 드넓은 어깨와 단단한 대흉근.

1황자이자 계승서열 1위, 철사자(鐵獅子) 데카론 아이로니아.

현 제7 황실 기사단, 철사자 기사단의 수장이기도 한 지고한 기사.

평소 맹수와도 같은 기개를 내뿜던 그가 어머니 앞에서만은 개구쟁이와 같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광룡이라니요. 고자들의 말이 가벼움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만. 너무 황당하여 재미있을 정도로군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오랜만에 갖는 식사 자리의 주제는 최근 있었던 미친 황자에 관한 이야기.

물론 자리에 있는 누구도 11황자를 혈족이라 생각지 않았으나.

“백면지네와 백면귀 수십 마리라. 뭐 놀랄 만은 합니다.”

“너도 그리 생각하니?”

“하지만 그뿐이지요.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흐응, 그 대단한 철사자가 그리 생각한단 말이지?”

“평소 들었던 행실에 비하면요.”

곧 데카론이 앞에서 퉁명스레 음식을 씹고 있는 자신의 동생, 7황녀 세린느를 바라보았다.

“아직 뿔이 난 표정이로구나. 근래에 화끈하게 당했다지?”

“흥, 누가 당했다고-.”

“보니 아무 말도 못 했다던데?”

“누, 누가! 누가 그래요? 감히 누가 그런 망발을-.”

“세린느.”

대차게 떠들던 7황녀가 오빠의 냉엄한 눈을 마주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평소 벙글벙글 웃는 오라버니지만 유독 세린느에게는 엄격했다.

“평소 장난이 과했다. 오라비의 위세를 업는 건 잠깐일 뿐이야. 널 혼내고자 했던 형제들이 많았다.”

“흥 무섭지 않아요!”

“녀석보다 더욱 무섭게 치도곤을 쳤겠지. 오히려 그 정도면 조용히 넘어간 게야.”

“오라버니는 두고 보실 생각이신가요? 정녕 동생을 비참하게 두시려고요?”

“그 시종 또한 어릴 적 추억을 빌미 삼아 널 조종하려 했다. 오히려 잘되었어. 이로써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구나.”

자신의 애교 어린 부탁 따윈 소용없다.

세린느의 침울한 표정에 비로소 데카론이 싱긋 미소지었다.

“성인식을 치른 후에는 많은 게 바뀔게다. 개인적으로 복수할 기회도 얻겠지.”

“치, 어차피 오라비는 녀석을 혼내줄 생각 따위 없으시잖아요. 절 도와줄 생각도 없고요.”

“그거야 한참 낮은 아이와 불필요한 드잡이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장남의 스산한 눈이 동생을 떠나 어머니를 향했다.

모자간 똑 닮은 눈동자 속 음험한 눈빛.

“조만간 재밌는 일 하나를 맡겨볼 생각입니다.”

드높은 명예를 짊어진 기사 이전, 그는 황후의 아들이다.

철사자 데카론은 자신의 발톱을 더럽히지 않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물론 헛소문에 불과하겠으나 만일 놈이 정말 용이라면, 그것도 광룡이라면.

아니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라도 그런 가능성을 품었다면.

“그러니 잠시 지켜봄이 어떨까 싶군요. 마음껏 날뛰도록.”

풀숲에 엎드려 놈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리라.

아들의 뜻을 헤아린 어미가 입술을 사이하게 끌어올렸다.

“황자의 뜻대로 하세요.”

데카론이 생고기나 다름없는 고기덩어리를 씹으며 사납게 미소지었고.

둘 사이, 황녀가 두려움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

황후의 시험을 끝낸 후 며칠간.

[불운이 발동하여 그림자가 더욱 몰려듭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림자를 포식할 수 있습니다]

[하위 운명 그림자를 강화합니다! 그림자를 삼킨 불의 운명이 더욱 거세게 타오릅니다!]

[불 아래에 도사리는 그림자의 어둠이 더욱 짙어집니다!]

[하위 운명 나태함, 평균 체력, 평범 체질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행운을 발동합니다. 모든 운명을 추가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 추가 획득 및 능력이 추가 상승합니다]

[하위 운명 꾸준함, 의지력이 강화됩니다]

아침을 체력 운동으로 시작, 오후에는 기본 검술을 중심으로 각종 무기술을 훈련.

저녁이 되면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영림으로 향했다.

그림자를 잔뜩 포식하고 와서는 잠깐 잠을 자고 새벽에는 전날 삼킨 그림자를 소화하여 적염의 크기를 키우고 온도를 높였다.

염제심결을 수련하고 나서는 다시 아침 체력 훈련의 반복.

“기침하셨나이까.”

“알프레드. 내가 성실하게 산 지 얼마나 되었지?”

“지난 시험 이후 보름이 지났습니다.”

“벌써? 빠르네.”

담담히 아침 식사를 집어넣는 나를 보며 알프레드가 느끼한 미소를 짓더니.

“경하드리옵니다.”

“응? 뜬금없이 무슨 축하.”

“하루하루 성취가 다르니 매일 경하드릴 일이 아닙니까.”

“흥, 간지러운 말에 광증이 돋으려 한다. 그만.”

내 퉁명스러운 말에도 알프레드는 그저 잔잔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궁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일어나셨나이까. 전하. 시원한 물을 준비하겠나이다.”

“연무장 미리 닦아 놓았습니다.”

“혹시 간식은 필요치 않으신지요?”

연무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고용인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아직 머뭇거리는 망설임이 남아있으나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두려움이 적어졌다.

“이것들이···.”

생각해 보니 어이없었다.

왜 안 무서워하지?

근래 피도 보고 심지어 무서운 백면귀도 잡았다.

무서우면 더 무서웠지 싱글벙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다들 미쳐가는 건가?

나름 타당한 이유를 떠올리며 연무장으로 나가자.

“오셨습니까! 전하!”

“대기 중이었나이다! 전하!”

안드레를 비롯한 황자궁에 배치된 기사들이 훈련복을 입고 대기 중이었다.

놈들도 이상했다.

날 불편해하고 무시하려던 놈들이 근래 들어선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며 같이 훈련하고 싶어했다.

귀찮게.

“오늘은 하체 위주로 하시렵니까?”

안드레가 대표로 웃으며 오늘 훈련 스케줄을 물을 때.

“쪼개지 마. 내가 알아서 한다.”

“네! 명 받잡겠습니다!”

괜한 타박에도 더욱 신난다는 듯 얼른 훈련을 준비했다.

역시 황자님 바로 훈련이시구나!

본받아야 한다!

요즘 기사단에 있을 때보다 실력이 는 기분이야.

놈들이 쑥덕거리건 말건 몸을 풀고는 운동을 시작.

“다들 알아서 훈련해라. 못 따라오는 놈들은 버린다.”

“네! 전하!”

괜히 으름장을 한 번 놓고는 훈련을 시작했다.

오늘은 좀 힘든 훈련이 될 거다, 짜식들.

분명 먼저 지치는 놈은 버리기로 했는데.

“후욱, 후욱, 후욱.”

“전하! 못 따라오시면 버립니다?”

“전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전하께선 전혀 지치지 않으셨군요!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지쳐버렸다.

안드레의 환한 미소가 매우 얄밉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지금껏 방탕한 삶을 살다가 근래에 훈련을 시작한 나.

비록 막내들이라곤 하나 제국 황실 기사단이라는 명예를 위해 평생 고련을 반복해 온 안드레와 떨거지들.

체력을 수치화하면 비교도 안 되겠지.

실제로 내 체력에 붙은 수식어도 뛰어난이 아닌 평균이다.

그러나.

“아직도 따라오십니까?”

“얼굴이 좋지 않으신데 쉬시는 게 어떠실지요.”

“전혀. 다들 닥치고 뛰어라. 숨차다.”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뒤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계속 움직였다.

숨이 끊어질 것 같으나.

계속 뛰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감히 네놈들이 내 앞에 뛰어?”

“이 비천한 것들 내가 쓰러질 것 같으냐? 웃기는 소리. 나는 황자다.”

오만, 독선, 패악, 고귀한 피라는 운명이 포기를 포기하게 했다.

분명 전생의 황자를 폭군으로 만든 운명임이 틀림없다.

아마 과거의 놈이었다면 당장 안드레와 다른 기사들을 칼로 찔렀겠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 못 하고 남을 추락시켜 열등감을 채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저들보다 뒤처질 리 없다는 오만과 독선.

어떻게든 이겨 먹겠다는 패악.

부족한 체력, 하잘것없는 재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려 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표정에 알 수 없는 뿌듯함과 즐거움이 서렸다.

그게 더욱 나를 자극했다.

“허억, 허억, 우욱.”

“어어?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결국 한계는 찾아오기 마련.

연이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직전.

[하위 운명 광기가 나머지 운명을 보조합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습니다]

[계속된 극한의 상황으로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하위 운명 광기 속 새로운 속성 무아를 형성합니다]

[무아에 빠집니다. 고통을 잊습니다!]

갑자기 하체가 사라진 듯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시원하면서도 무딘 감각, 확 트이는 시야와 숨결.

“하하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며 달리자 뒤에선 기사들이 같이 웃으며 달렸다.

그런 황자 전하와 기사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보는 고용인들.

어딘가 광기에 잠식되어버린 11황자궁의 새로운 일상.

**

“황자님 아 하셔요.”

“스스로 먹을 수 있다니까.”

역시나 과한 훈련 덕에 탈이 났다.

점심을 먹는 자리, 무아의 효과가 다했는지 숟가락이 마구 떨렸고 스프를 세 그릇 정도 엎었을까.

보다 못한 시녀가 직접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여주겠다 나섰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해 먹지 않으려 했으나.

“빵. 스프 찍어서.”

“네, 아 하셔요.”

슬슬 익숙해지자 나쁘지 않았다.

식사하면서도.

“오늘 오후 훈련은 못 하겠군.”

“좀 쉬셔야 할 듯싶습니다. 최근 무리하셨으니까요.”

“폐하께서는 별말씀 없으신가. 영림 출입과 백면들만 던져주고 입 싹 닦으시려나.”

“요청하신다면 황궁 비고 중 하나 또는 신비로운 장소 한 곳 방문을 허락하신다지 않았습니까.”

“비고야 그렇다 쳐도 신비로운 장소들까지 허락받아야 했다니. 하도 징계를 받다 보니 까먹었어. 그러면 저번 정령 화원은 어떻게 간 거야?”

“정령 화원은 신비롭지만 귀중한 게 있지는 않으니까요.”

지난번 시험 이후 황제가 준 보상을 점검하며 앞으로 계획을 짜나갔다.

내가 얻은 건 약간의 신임과 평판, 그리고 영림 자유 출입 권한 및 지난 사냥의 결과인 하얀 가면 무더기.

영림은 훈련 장소로 요긴하게 써먹는 중이며.

가면은 다른 활용법을 생각해 두었다.

그 외에 주어진 건 다른 비고 또는 신비로운 장소에 들어갈 권리.

본래 황자가 부린 패악 때문에 대부분 비고와 밀지에 들어가는 게 제한된 상황.

결국 계속 능력을 증명하여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가는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증명으론 변화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것 또한 황후의 입김인가.

“정령 화원에 귀중한 게 없다?”

“정령이 귀중하긴 하나 그뿐이니까요. 소용이 있지는 않지요.”

알프레드의 말에 문득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

정령 화원은 나중에, 준비가 필요하거니와 이미 출입이 허락된 이상 언제든 찾을 수 있으리라.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것 또한 추후 폐하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거 짜증이 불쑥 솟네. 몰래 나가면?”

“······.”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 또 떨어지겠지.”

“맞습니다.”

“근데 내가 떨어질 평판이 있나?”

“네?”

내 당당한 물음에 알프레드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그런 알프레드를 보며.

“농이다. 기껏 얻은 출입권도 박탈당하고 근신까지 당하긴 싫으니.”

슬슬 밖에서 만날 녀석도 있으니 출입권을 바깥나들이에 쓸까도 싶었다.

허나 참았다.

운명의 변화가 없다.

나갔다가 허탕 칠 가능성이 컸다.

어딜 찔러볼까 고민하다.

“솔은? 백면을 준 지 며칠 지났다만 아직 소식은 없는가?”

“네. 홀로 연구 중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지난 영림에 데리고 갔던 마법사 솔의 이름을 언급하자.

[하위 운명 그림자가 꿈틀거립니다]

떠오른 글씨에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오호라, 원래라면 한참 뒤에 일어날 사건이겠으나 뿌려 놓은 운명이 발 빠르게 발아한 모양.

이후 행방은 쉬이 결정되었다.

“알프레드 오늘은 밤 순찰이다.”

“밤 순찰 말씀이십니까?”

“그래, 깊은 밤, 차를 대기시켜라. 협곡을 좀 둘러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알프레드가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허나 어차피 내 맘대로 할 걸 알기에 의문을 삼켰다.

미친 황자라는 포지션은 이런 게 편했다.

밤은 금세 찾아왔다.

오후 내내 염제심결을 운용하며 체력을 회복한 내가 준비된 차량에 올라타자.

[물건의 운명을 읽습니다. 오늘 물건의 생이 다할 운명입니다]

사건을 암시하듯 떠오르는 운명에 짙은 미소를 물었다.

불안에 떠는 운전사에게 산뜻하게 명하니.

“가자, 협곡으로.”

나와 알프레드를 태운 차량이 깊은 밤 강철성을 매끄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가자, 그림자 마녀가 탄생할 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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