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는 협곡에 들어갔다
처음 강철성이 지어졌을 때만 해도 완벽한 조형과 낭비 없는 공간 활용을 목표로 했다.
매일매일 황제궁을 중심으로 건물들과 도로들이 이동함에도 어설프지 않았고.
공간의 불필요함이나 불편함이 없었다.
강철성 깊이 존재하는 신비와 마법, 세기의 천재들이 모여 발휘한 지성 덕이었다.
당시의 마법과 지혜가 그대로이듯, 강철성을 이룬 묵색의 진강철(眞强鐵) 또한 그대로.
천년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신비에 가까운 광물은 어떠한 풍파와 위험에도 굳건히 버텼으나.
사람은 광물, 마법과 다르게 쉽게도 변했다.
완벽하여 군더더기 하나 없던 궁에 욕심을 더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간에 자신의 업적을 덧씌웠다.
완벽한 것에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 더해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불필요한 공간, 자투리 공간.
즉 찌꺼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찌꺼기 공간들이 모인 곳을.
강철성에 존재하는 협곡(夾谷)이라 불렀다.
협곡이 생겨나는 장소는 무작위.
허나 그 양상만은 뚜렷했다.
“협곡에 도착했나이다.”
높다란 장벽과 소용이 다 한 건물들 사이 좁다랗게 나 있는 길..
협곡 중 하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음 협곡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 말했고.
운전수와 알프레드는 의아스러워하면서도 명에 따랐다.
“가고자 하는 장소가 있으신지요?”
“순찰이다. 모든 협곡을 돌 수도 아닐 수도 있지.”
황자가 왜 갑자기 순찰을? 그것도 협곡을?
이런 생각을 하겠으나.
[장소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어떠한 위험도 도사리지 않습니다. 하위 운명 그림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치 못합니다]
내 눈에는 보였다.
장소의 운명이.
솔, 추후 그림자 마녀이자 황실 최고 전투 마법사가 될 운명이 태동하고 있다면 분명 알 수 있으리라.
실제로.
[하위 운명 그림자가 다른 자의 그림자를 느끼고 꿈틀거립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솔이 그림자를 움직거리고 있는지 운명이 계속 신호를 보내왔다.
“스읍, 속도를 높여.”
“흐읍, 더 빠르게 달리겠나이다!”
운명을 포식할 생각에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려니 운전수가 엉뚱한 오해를 한 듯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높은 출력을 뿜어내는 마나 엔진의 미약한 소음만이 감도는 실내.
간혹 돌 부스러기가 부딪히는지 툭, 투툭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며 얼핏 느껴지는 고급진 가죽 냄새에 전생에 보았던 솔의 진면목을 떠올리려니.
“잠깐. 멈춰라.”
“멈추겠습니다.”
끼이이이익!
갑작스러운 명령에 운전수가 다급히 차를 멈추어 세웠고.
“뒤로, 더 뒤로. 그렇지 저곳으로 몰아라.”
“막혀있는 곳 아닙니까?”
“···막혀있는 거로 보이나? 정말? 내 눈에는 잘만 보이는데.”
“아닙니다. 길이 보입니다. 아주 제대로 보입니다.”
내 강요에 운전수가 핸들을 틀었고.
“보입니다! 협곡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위험해 보입니다만 진짜로 들어갈까요?”
“바로 뒤에 앉아있는 나보다 위험할까.”
“······.”
건물들 사이 가려진 좁은 길이 드러났다.
[하위 운명 그림자가 강하게 꿈틀거립니다!]
나 또한 지나가며 떠오른 알람 덕에 찾을 수 있었다.
운전수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도 명을 거역할 순 없어 느릿느릿 협곡으로 진입하자.
구불구불 굽이진 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미로다.”
“미로군요.”
나와 알프레드의 목소리가 같이 울렸다.
협곡 중에서도 찌꺼기들이 심하게 뒤엉킨 지형.
협소한 길이 미로처럼 엉킨 장소로 차량이 간신히 진입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윽고.
“더는 가지 못할 듯싶습니다.”
“내리겠다. 대기하도록.”
운전수의 포기 선언에 나와 알프레드가 내리려는 순간.
와락.
뒷자석에서 내리던 내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운전수를 잡아끌었다.
“화, 황자님 살려주십시오! 정말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골목이라-.”
내 악명을 아는 운전수가 공포에 질려 싹싹 빌 때.
“죽기 싫으면 입 닫아.”
녀석의 뒷목을 잡아끌며 밖으로 몸을 던지자.
골목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차의 앞부분을 와득 베어 물었다.
꽈드득, 꽈득.
운전수가 앉아있던 자리가 어둠에 물린 채로 으스러졌다.
마나 엔진이 폭발했으나 그림자는 폭발에도 잠시 울렁였을 뿐, 곧 만족스럽다는 듯 입을 쭉 찢어 올렸다.
“황자 전하. 피하셔야 하옵니다.”
“으으, 차, 차가-.”
알프레드가 다급히 피신을 권유했으나.
오히려 나의 입술은 그림자를 따라 씨익 올라갔다.
도망가긴 어딜.
“제대로 찾았군.”
기껏 제대로 도착했는데.
손에 무기 하나 없이 그대로 그림자 가득한 골목을 향해 걸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알프레드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순 없어 전전긍긍하며 날 불렀으나.
“괜찮으니 그만 불러라 귀찮다.”
나는 산책하듯 그저 태평히 길을 걸었다.
“전하!”
“허업! 전하!”
어느덧 알프레드와 운전수와 떨어진 깊은 길목.
그림자가 입을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겁먹을 필요 없다.
“침범치 못할 거면 나서지나 마라.”
녀석의 그림자는 나를 공격하지 못하니.
나의 타박에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곧 일렁이던 어둠이 자취를 감추었다.
운전수의 탄성이 들려왔고 알프레드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알프레드, 여기서 함께 기다려라.”
막 명령을 내리고 솔을 찾아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우우웅.
주변 공간이 울렁이더니 미로처럼 얽혀있던 길목이 실타래 풀리듯 해체되었고.
곧 펼쳐진 공터.
높다란 장벽들 사이.
“캬아아악!”
검은색 그림자 덩어리가 날카롭게 울었다.
갑작스러운 공간 변화.
슬쩍 비친 시야 바깥쪽, 차갑게 굳은 알프레드의 표정이 보였다.
많이 놀란 모양.
이러한 변화를 이룬 자는 알프레드일 터.
황가의 수호를 책임지는 자로서 지엽적인 공간 변화 권한을 지녔으리라.
모른 척해주기로 하며 그림자 덩어리에 다가가니.
“키야아아악!”
안에 꿈틀거리는 인형과, 인형이 쓴 하얀 가면이 얼핏 보였다.
솔.
본래라면 지금으로부터 10년이 훌쩍 흘러 그림자에 대해 연구를 시작.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연히 백면귀의 가면을 얻어 그림자 중독으로 인해 폭주.
마법 전투단 수뇌부를 모두 죽인 뒤 도주를 시도.
결국 잡혀 죽을 운명이었으나.
“흥, 버러지들을 잘도 청소해 주었군.”
당시 폭군의 폭정에 불만을 표출하던 자들을 죽여주었기에 놈은 오히려 솔을 곁에 두었다.
솔은 평생 죄책감과 감사함 분노와 미움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았다.
얄궂은 운명.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 마법사로서 경지가 낮을 때 일부러 가면을 주었고.
그림자에 중독되었으나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수준이 낮았으니.
속에 품은 분노가 적었으니.
오히려 자신이 죽을까 봐 전투단을 빠져나와 깊고 깊은 협곡에 고치를 틀었다.
부족한 실력과 순진한 심성을 보고는 확신했다.
여기까지 모두 예상했던 대로.
“이봐 셜. 그리 그림자 안에 있으니 편안한가?”
내 질문에.
소오오오올!
녀석이 우렁찬 울음으로 답했다.
마침 타이밍도 완벽했다.
자신의 이름을 외칠 정도의 자아는 남았으니 다루기 쉬우리라.
녀석을 감싸 안듯 꿈틀거리는 그림자 덩어리를 바라보길 잠시.
“술, 정신 똑바로 차려라. 기회는 몇 번 없다.”
“소오오올!”
“다시 말하지. 그림자가 약해졌을 때. 그때 네가 직접 놈을 잡아먹어라. 알겠나 살?”
“소오오오올!”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솰.”
“소오오오오올!”
녀석의 분노가 선연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름은 솔의 자아를 일깨우는 일종의 트리거.
그림자를 잡아먹으려면 녀석의 자아가 선명해야 했기에 첫 만남부터 일부러 심어놓은 장치였다.
장치도, 장소도 마련되었다.
이제 그림자를 뽑아내고 솔을, 미래의 괴물 전투 마법사를 각성시켜야 할 때.
이후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달은 녀석이 마법 전투단 고위직으로 올라가 준다면 든든한 세력이 될 터.
“소오오올!”
이름을 잘못 부른 게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위협을 느낀 그림자가 폭주한 것인지.
지금껏 고치를 틀어 버티던 그림자가 사방으로 폭발하며 무작위로 공격성을 뽐내었고.
이에 나는 허리춤에 검 대신 달아놓은 하얀 가면을 얼굴에 덧씌웠다.
바로 귀신 얼굴이 그려진 가면, 백귀면.
백면지네의 얼굴이자 이제는 나의 능력이 된.
솔을 잡아먹은 백면의 상위계급 가면.
즉.
“허튼 반항하지 마라.”
솔의 그림자는 나를 침범치 못한다.
나의 그림자가 상격(上格)이기에.
아니 본래 백면지네는 백면귀 중 같은 백면귀 수백 마리를 잡아먹은 포식자가 진화한 것.
즉 나의 가면과 그림자는 포식자이며 솔의 가면과 그림자는 피식자.
깊이 울리는 목소리에 폭주하던 솔의 그림자가 우뚝 멈추었고.
어둠에 휘감긴 손가락을 뻗자.
슈르르릅!
솔을 감싼 그림자 고치가 내 가면 안으로 빨려들었다.
그제야 새하얀 빛이 그림자를 뭉개며 뻗쳐 나왔다.
**
알프레드는 경악했다.
“대체 당신은···.”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자신의 본분을 순간 잊을 정도로.
자신이 본 모든 과정을 믿기 어려웠다.
깊은 밤, 깊은 협곡 안.
공간의 찌꺼기가 가득한 곳, 둥글게 뭉친 그림자 앞.
자신이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건만 대체.
황자는 마치 공포라는 감정이 말소된 사람처럼 고고히 앞에 섰다.
이후 웬만한 마법 공격 따위 끄떡도 하지 않는 황실 전용 차량 절반을 씹어 삼킨 괴물 앞에서.
농담을 던지며 찬연히 미소지었다.
객기인가 만용인가.
아니면.
“확신이었나···?”
모두 당신의 예상 범위 안이었던 것인가.
알프레드는 혼란스러웠다.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협곡을 찾았고 운전수가 못 본 협곡, 미로를 보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공간을 조작하여 괴물을 만났다.
위기 앞, 황자는 태연했으니.
그의 기색에 알프레드조차도 별일 아닌 듯 안심이 되었다.
신비했다.
이전에는 모두를 불안케 만들었던 황자의 일방적인 광기와 패악이 지금은 위기를 담담히 받아낼 수 있는 정신적 주춧돌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마저 고작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황자, 더군다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요주의 인물로 찍혔던 자에게 감화되었단 사실이.
그런 알프레드의 놀라움과 혼돈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자는 태연히 지난 사냥의 전리품인 가면을 얼굴에 썼고 몸을 감싼 어둠으로 그림자 덩어리를 흡수하기 시작.
마치 모든 일이 준비되었다는 듯.
협곡 가득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이 사그라들고 난 뒤.
알프레드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듯 토해내는 목소리에 광폭한 힘이 서려 있다.
자신 또한 몸을 긴장시킬 정도.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 선 황자의 태가 빛났다.
귀신이 그려진 하얀 가면과 흩날리는 백금발은 빛을 머금은 듯 더욱 찬란했고.
몸을 감싼 어둠은 마치 대비되듯 짙었다.
이제 보니 위기도 아니었다.
대체 황자는 어디서 저런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과 심지어 자신도 없는 강철성의 공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얻었단 말인가?
그 자줏빛 눈동자를 마주한.
“황자···전하?”
솔은 어리둥절할 뿐.
어째서 자신이 여기 있으며 왜 황자는 가면을 쓰고 저러고 있단 말인가?
아직 숲에 있는 것일까?
분명 자신은 영림에서 나와 황자가 선물해준 가면을 연구하고 있었건만-.
“아, 아아!”
거기까지 떠올린 솔이 지난 과정을 떠올리곤 경악했다.
빛과 그림자의 차이를 알아보라는 말에 백면에 고인 그림자를 연구하던 중.
그 짙은 어둠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저, 전하. 설마 제가 사람을 다치게 했나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자신의 동료를 다치게 했다면 그렇다면.
솔이 눈물 가득한 표정으로 비극을 걱정할 때.
“그럴 능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남을 다치게 하겠냐.”
“네?”
“오히려 단원들에게 잡혀 죽을까 봐 여기까지 도망쳤겠지.”
“네에?”
“고작 3써클 그것도 보조, 걸어다니는 가로등 주제에 남을 해치긴. 기대하는 게 너무 큰 것 아니냐 셜?”
“악! 아악! 우와아아악!”
“비련의 여주인공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임을 모르냐? 속?”
“끼야아아악! 그만! 폭력 그마안!”
황자의 냉철한 현실 주입에 솔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아프다.
뼛속까지 아프다!
그림자에 먹혔을 때보다 지금 황자의 말이 더욱 아팠다!
그런 솔을 보던 황자가 문득.
“그래도 다행이지 않으냐. 깊은 죄를 짊어지지 않은 것이.”
“끼야아아아···아?”
“그런 멍청한 표정 지을 필요 없다. 비극은 없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찾았으니. 운명 또한 변하겠지. 기뻐할 일이다.”
능력이야 이제부터 키우면 되는 것이고.
황자의 말에 순간 솔의 표정이 멍해졌다.
방금까진 그렇게 두들겨 패다가 갑자기 위로라니?
자신을 구해준 황자를 향한 감동과 충심이 막 차오르려다.
“대답이 없구나. 쉘.”
“솔인데요.”
“그래, 슐.”
“이익! 굳이 그렇게 어렵기 부르시기 있어요?”
끝까지 심술 궂은 부름에 솔이 볼을 부풀리길 잠시.
자신의 머리에 얹어진 가면을 쓰다듬고는.
“감사···하옵니다. 전하.”
감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하옵니다.
고개를 떨구며 끝없이 감사를 되뇌었다.
왜인지 자신을 보는 가면 속 유일하게 드러난 눈동자가 한없이 자애로워서.
분명 미치고 심술궂은 황자임을 알지만 지금 만은 찰나의 순간만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준 것 같아서.
그녀가 울먹거리며 감사를 되뇌는 동안.
“알프레드, 데려가도록.”
“네. 전하.”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은 아르한의 명에 시종장이 다가와 솔의 어깨를 감싸며 물러나려 할 때.
**
“공간을 변용시키다니 무리한 거 아냐? 정체를 들키면 어쩌려고.”
내가 지나가듯 농을 던졌고.
“제가 한 일이 아니옵니다. 황자 전하의 능력 아니었는지요.”
알프레드가 능숙하게 발뺌했다.
그래 넘어가 주자 할 때.
문득 이상한 감각이 그림자에 걸렸다.
“주변에 있는 놈은? 자네가 부른 것 아니었어?”
“주변에 있는 놈 말입니까? 부리시는 그림자 속 신비가 아니었는지요?”
알프레드의 모르쇠에 슬며시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정체를 숨기는 것도 좋지만 너무 모르는 척이다.
그런데.
“전하 진심입니다. 공간도 사람도 부리지 않았나이다.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아직은.”
알프레드가 진지하게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잠시간의 침묵.
나도 알프레드도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알프레드의 긴장한 표정과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는 눈동자는 거짓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알프레드는 아직 암철단의 수장이 아니었다.
즉, 공간을 움직일 권한이 지금은 없다는 뜻.
그럼 누가?
“들켰다. 제거하겠다.”
불길함이 현실이 되듯, 지금껏 깊은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놈이 스스로를 드러냈다.
곧 협곡을 가득 메우는 짙은 살기.
모습을 드러낸 건 단 한 명.
“홀로 인가?”
혼자인 놈을 보며 한마디를 던질 때.
“아니 우리 전부가.”
하나에 불과했던 적이 수백으로 번졌다.
이해하기 힘든 조화.
아니 들었다.
과거 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최고위 등급 어쌔신 중 하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홀로 수백이 된다던 능력.
놈이 궁에 침입했던 게 오늘이었던가.
서쪽 불모지, 사막 부족 홍련이 보낸 암살자.
“하필.”
여기서 저 괴물을 만날 줄이야.
이제야 이해했다.
공간에 도사린다던 죽음의 위기.
솔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운명이 경고한 위협은 바로 저 어쌔신.
그 짐작이 맞다는 듯.
[하위 운명 불운의 작용으로 최악의 적을 인지했습니다. 적이 당신의 목숨을 노립니다]
[하위 운명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당신의 지금 운명들로는 상대 불가한 적입니다]
[하위 운명 죽음이 몰살로 강화되었습니다]
불운과 죽음이 성큼 눈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불길한 운명이 발아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친 황자의 몸과 정신은 겁먹지 않았다.
물론 이를 연기해 오고 지금 이 몸을 입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
오만한 성품과 머리 가득한 광기는 상대가 누구든.
“감히, 날 제거하겠다?”
할 말은 하고야 말았다.
의문에 답하듯 놈이 무기를 꺼내 우리 모두를 죽이려 하기 전.
“날 해하였다간 장담하지. 홍련은 멸망한다. 그리 만들겠다.”
“······.”
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어떻게 자신을 보낸 자들을 아느냐는 듯한 망설임.
“다시 말하지. 홍련, 아니 사막 전부를 피로 물들이겠다. 모래가 피에 젖어 진흙이 될 때까지.”
잔혹한 협박.
진심이 담긴 광기 어린 눈동자.
그러나.
“죽여 입을 막으면 그뿐.”
놈의 살기가 이젠 피부를 벨 듯 더욱 짙어졌다.
자충수를 둔 셈.
허나 이마저도 노림수,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으니.
반드시 죽이기로 결심한 수백의 놈이 뛰어오를 때.
기다렸던 글자가 떠올랐다.
[포식한 하위 운명 그림자를 모두 소화하였습니다! 그림자의 어둠이 짙어지고 크기가 넓어졌습니다!]
[새로운 속성 암막을 획득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공간을 분리합니다]
[그림자 속에 뒤섞여 있던 새로운 운명 미약한 빛이 태동합니다!]
내가 뿜어낸 그림자가 사방을 메우며 놈과 나를 감쌌고.
공간을 분리했다.
그 찰나의 시간, 어둠 속에서.
[쌓인 개변 수치 전부를 행운에 투자합니다! 하위 운명 행운의 빈도와 크기가 상승합니다!]
[기존 속성 필요한 때 작은 행운의 빈도와 크기가 상승합니다]
[새로운 속성 구사일생을 획득했습니다]
생존을 준비했고.
떠오르는 글자 사이.
푸욱, 차가운 칼날이 머리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