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뜨겁다
하수구 구역에선 아침 햇볕 퍼지는 속도보다 소문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그런고로 어젯밤 일어났던 말도 안 되는 사건 또한 사람들 사이사이, 볕조차 들지 않는 어둑한 곳까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모두 타버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쥐들의 안식처 선술집 주변에 푸른 마나 테이프가 가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온기와 연기가 휘날리는 화재 현장.
“이거 화려하게도 해놨구만. 여길 건들다니 단단히 미친놈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온 철부지 세력일지도 모르죠. 자기가 죽을 것도 모르고요.”
“조만간 길거리에 내장 없는 시체를 보겠어.”
제국 수도 페르마 남동부 경비대 소속 조사반장 갈런이 담배를 깊이 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이 찾아왔음에도 어둑한 거리, 곳곳에서 살기 가득한 시선이 꽂혔다.
안식처를 태운 놈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막 주변 탐문을 끝낸 듯 반원 몇몇이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왔다.
하수구 구역은 그들로서도 부담스러운 장소.
탐문을 할 때도 여럿이 팀을 짜 주변을 경계하며 움직여야 했다.
“반장님! 탐문 끝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목격자는.”
“길거리부터 바로 안식처까지 직행했다 합니다. 사건 관련 목격자는 없었고 주변 주정뱅이들의 증언을 종합했습니다.”
“술에 찌든 놈들 말이 제법 모였나 보군. 읊어봐.”
그러나 곧 이어진 보고에 담배를 문 입을 살짝 벌렸다.
툭, 담배가 바닥에 떨어지며 불똥을 튀겼다.
“진짜야?”
“네 확인된 사실들만 간추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놈이 사람 죽통을 날리다 못해 안식처 분위기를 휘어잡고선 사람 팔을 자르고 가게를 불태웠다?”
“···네.”
“이 새끼들이 제대로 조사 안 할래? 어디서 약이라도 빨아 재낀 놈 말 들은 거 아냐? 그런 미친놈이 거리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정말입니다!”
“진짜입니다!”
잠시 부하들을 노려보았으나 놈들의 표정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정말이란 소리.
“모두 조사반으로 복귀. 하수구 구역에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 방화범 수배하고 전쟁 일어날 수도 있다고 타격대에 협조 공문 날려.”
“알겠습니다.”
곧 갈런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급히 하수구 구역 초입에 위치한 허름한 경비대 건물로 복귀했다.
막 자신들의 안식처이자 그나마 안전한 경비대 건물이 보였고.
정문 앞.
“읍, 으읍! 읍읍읍!”
온몸을 꽁꽁 포박당한 사람 하나를 두고 구경꾼들이 두런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봐! 비켜들! 뭐 하는 거야? 구경났어?”
갈런이 거칠게 사람들을 밀쳐내며 다가가 얼굴을 덮은 복면과 재갈을 풀어내자.
놀랍게도 묶여있는 건 쥐들의 안식처 주인장.
“이봐! 이봐! 정신 차려!”
정신을 잃은 주인장을 불러보았으나.
“으으, 으으으으, 사, 살려, 으으으!”
눈을 까뒤집고선 꿈틀거리는 게 상태가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놈의 정신은 이미 반쯤 무너진 모양새.
곧 놈의 가슴팍, 크게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글을 반원 중 하나가 읽어나갔다.
“하수구에 마약을 뿌린 놈이다. 증거를 첨부하니 구속하라. 관련된 놈들에게 경고한다. 너흰 뒈졌다···.”
거기까지 말하던 반원이 흡, 숨을 멈추며 입을 다물었고.
다른 반원이 옆에 놓인 주머니를 열자 반쯤 태운 마약이 섞인 궐련 무더기가 썩은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몇몇이 오물이 가득한 하수구 속으로 녹아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갈런이 입에 담배를 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목숨을 몇 번이고 부지하게 해준 직감이 경고했다.
“전쟁이 일어날 거다. 모두 철야 준비해.”
이번 나타난 놈은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
새로운 사건으로 인해 한창 하수구 지역에 후끈한 소문이 휘돌 때.
“조사반에서 증거품을 가져가는 것까지 확인했나이다.”
나는 로이스 가문 저택, 가장 커다란 방에 반쯤 누운 채로 알프레드의 보고를 들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조직들의 표정은 어떻던가?”
“놀라고 분노하고 다급해 보였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그럴 만도 해.”
큭큭큭, 작게 웃고는 문득.
“반장은? 그자는 별다른 행동 없었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이곳저곳 협조 공문을 보내더군요.”
“공문 대부분을 거절하라 이르라.”
“···알겠습니다.”
“이유가 궁금한가?”
“네.”
“목숨 하나 추가로 빚졌다. 알려주지. 난 미친 황자이지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그렇습니까.”
“미쳤다는 말을 납득하는 눈빛, 예의로라도 반론하지 않은 죄. 목숨 하나 추가로 빚졌다. 알프레드. 자네는 대체 몇 번쯤 죽어야 만족스럽게 행동할지를 모르겠군.”
“송구합니다.”
내 타박에 알프레드가 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째 목숨을 빚지면 빚질수록 좋아하는 것 같다.
원래 좀 변태 끼가 있었던가?
의문도 잠시.
“사람이 몰려들면 움직이기도 조작하기도 불편하거든.”
“조작이라 하심은?”
“파고들고 파고들면 놈들 중 하나가 고자 새끼들과 연이 있을 거다. 그걸 부풀리고 부풀려라.”
“부풀려 반장을 쥐여주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 미친개라면 착실히 놈들의 사타구니를 물어 뜯어줄 거야. 아니 이미 없으니 어디라도 물어뜯겠지.”
“받들겠습니다.”
동남부 조사반장 갈런.
본래 놈은 성역 없이 수사하는 미친개로 좌천과 승진을 반복하는 경비대 내에서도 시한폭탄 같은 놈.
결국 물었던 사건 중 하나가 대박을 치며 조사반장을 넘어 특별 조사단의 수장으로도 활동한다.
물론 나중에는 간신배들의 모함과 폭군의 무신경함에 목이 잘려 죽는다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그리고 나중에 사건 배정할 때. 심판관으로 비슷한 처지인 놈 하나 붙여주면 아주 화끈하게 처리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놈의 목을 잘랐던 폭군이 바뀌었으니.
더군다나 내가 붙어 힘을 실어주면 놈의 수사도 수월해지겠지.
제국의 썩은 부위를 도려낼 수술용 칼로 적절한 인물.
안드레가 착각한 점 하나.
강철성은 때로 하수구 구역보다 더욱 음험하고 지저분했다.
나는 이를 아주 잘 알았고.
처음부터 깨끗하게 싸울 생각 따위 없었다.
다른 이들을 이용하여 쉽게 싸울 생각은 있었지만.
아무렴 황자가 어찌 환관들의 사타구니를 물겠는가.
냄새나게.
“가서 일 보도록. 실수 없게 은밀히.”
“뜻 받들겠나이다.”
알프레드가 문밖으로 나감을 확인하곤.
자리에 앉아 내부를 관조했다.
태도는 늘어진 자세 그대로.
어차피 내부를 보는 일에 그리 바른 자세는 필요 없다.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자.
화르르륵!
심장 주변을 도도하게 휘도는 거대한 불의 고리를 마주했다.
이전엔 지렁이 정도였다면 지금은 구렁이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
신비 점수를 투자했기에 힘이 대폭 늘었다.
‘어디 그럼 5000점이나 투자할 가치가 되는지 보도록 할까.’
자그마치 개변 점수를 5000점이나 들였다.
악마에 대항할 신비를 강화하기 위해.
곧 도도하게 흐르던 불꽃이 나의 인도를 따라 몸을 휘돌기 시작.
몸 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탁한 허물들을 태워냈다.
확실히.
‘통제가 쉬워졌어, 불의 크기도 훨씬 커졌고.’
5000점에 달하는 개변 점수는 허투루 들어간 게 아니었다.
이전에는 잡히지 않는 화마와 같았던 기세가 지금은 도도하게 흐르는 불의 강과 같으니.
평소 치열하게 주도권을 두고 싸우느라 소비했던 시간 전부를 심결 운용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불에 대한 통제권이 늘어난 만큼 거대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몸을 정결하게 하는데 더욱 속도를 높였고.
[하위 운명 보잘것없는 재능, 평범 체질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보잘것없는 재능 하위 속성 탁한 기운을 하위 운명 불이 불태웁니다. 몸이 조금 더 맑아집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하위 운명 불에 대한 통제권이 조금 더 상승합니다]
[염제심결에 대한 이해가 상승하였습니다. 신비 불에 담긴 기록을 적용합니다. 염제심결의 새로운 운용을 점차 깨달아갑니다]
마치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지듯 운명 변화 알림이 터진 둑처럼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점차 정순해지는 몸과 올라가는 몸의 온도.
날뛰며 모든 것을 태우려던 이전과 다르게 내 뜻대로 움직인다는 감각.
[속성 무아를 발동합니다. 무아를 통해 하위 운명 불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합니다]
[끊임없는 고련으로 하위 운명 나태, 한량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했습니다]
[하위 속성 행운을 발동하여 포식 점수를 추가 획득합니다!]
[하위 속성 꾸준함, 의지력이 강화됩니다]
끝없이 들리는 운명이 변화하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점차 불과 하나가 되어갔다.
곧 있을 싸움, 중요 운명이라 불리는 악을 상대하기 위해.
**
또각, 또각, 또각.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가 일정했다.
소피아는 일부러 불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고자 비싸디비싼 대리석 복도를 지르밟듯 걸었다.
아버지에겐 괜찮다 당당히 말했지만, 황자를 이용하여 자신을 구속한 철장을 부수겠다 결심했지만.
사실 어젯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웠다.
솔직히.
‘정말 맞을까?’
불안했고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본 게 맞을지, 정말 황자를 믿어도 될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것, 소피아의 고질병이었다.
평생을 가문을 위한 부품 취급받아왔고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를 받아왔기에.
억누르고 억눌렀던 분노가 점액질로 응축되어 쌓였기에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어 움직였다.
본래라면 황자에게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떨었으리라.
사실 지금도 당장 주저앉을 듯 무섭고 떨렸다.
똑똑똑.
“전하, 소피아. 준비를 마치고 전하를 찾아왔어요.”
“······.”
“전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황자가 머무는 방 앞.
그의 명으로 어떤 고용인도 없는 커다란 문 앞에 선 소피아가 몇 번 망설이다.
“들어가겠어요.”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었다.
사실 치도곤을 당해도 할 말 없는 무례이나.
이제 시녀장이 되면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할 거다.
자신이 아는 시녀장은 본래 불쑥불쑥 방에 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놓는 존재였으니.
다만 아직 겁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하여 아주 천천히 살금살금 빼꼼 문을 열어놓고선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아-.”
저도 모르게 작은 입술을 벌려 감탄사를 흘렸다.
황자는 드넓은 소파 위에 방만하게 기대어 있었다.
반쯤은 누워있는 듯, 반쯤은 앉아있는 듯.
흐트러진 백금발 사이, 지그시 감은 눈.
자는 듯 깊은숨을 내쉬는 모습이 권태롭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옷이 약간은 흐르듯 늘어져 황자의 분위기와 퍽 어울렸다.
이리 보면 그저 조각과 같건만 어제는 어찌 그런 패악을 뿌려댄 것일까.
그때.
화아악.
좁은 틈 사이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꺄악!”
소피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곤 자신의 눈과 얼굴을 더듬거렸다.
분명 방금 몰아치는 불을 보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방문을 열자.
방금과 같이 기묘한 열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처음보다는 견딜 만하여 그녀가 안으로 한 발 짝 들어섰다.
왜일까.
그냥 도망가서 다른 사람을 부르면 되는데 왜일까.
그녀의 직감이 꿈틀거렸기 때문일까.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두었던 의문.
‘어쩌면 황자는 힘을 숨긴 게 아니었을까?’
자신처럼, 황성이라는 철장 속에서 부러 힘을 숨겨 남들의 눈을 속인 것 아니었을까.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다.
미쳤으나 미치지 아니하였음을, 잔혹하게 미소지으나 정작 자신을 해하지 아니하였음을.
그녀가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에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다가섰다.
황자의 몸 주변으로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더불어 이지러지는 노을빛이 번져 마치 타오르는 듯한 풍경.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자신 앞에 있는 황자가 허상인 듯도 싶었다.
번지는 시야 속 황자가 사라질까.
“전···하?”
그녀가 폐 속 가득한 뜨거운 공기를 내쉬며 황자의 향해 손을 뻗었고.
옷자락에 그녀의 햐안 손가락이 닿기 직전.
“누구냐.”
뜨거웠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지더니 황자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백색 속눈썹과 대비되는 반개한 진홍색 눈동자.
잠에 취한 듯 또는 열기에 취한 듯 몽롱한 눈이 소피아를 향한 순간.
그녀가 황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확신했다.
11황자 아르한은 알 수 없는 신비를 품은 사람이라고.
“소파이에요. 전하가 주무시는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차마 황자의 눈을 볼 수 없어 내리깔았다.
두려웠다.
정말 황자를 이용해 자신의 구속을 풀 수 있을까? 이런 자를 이용할 수 있나? 내가 감히?
어쩌면 분노에 사로잡혀 죽을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잠깐의 마주침 동안 속에 품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고 무서웠다.
정수리를 찌르는 시선이 따갑다.
그때.
“첫 시험이다.”
황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피아. 자결하라.”
“!”
너무나도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니.
아직 반개한 눈, 몽롱한 눈동자와 느슨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에 달린 광기와 잔혹이 선명히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조차 아름답고 두려워 그녀가 가녀린 어깨를 파들파들 떨었다.
역시 실수였을까.
그런데.
“그리고 거절해라.”
다시금 알 수 없는 말이 귓가를 울렸다.
따라잡지 못할 말들에 머리가 웅웅 울려 정신이 없다.
와중 선명한 뜻.
“난 네게 거절을 가르치고 자아를 주입하려 한다. 그러니 멋대로 해보라.”
소피아의 눈에 알 수 없는 물기가 어렸다.
**
염제심결 수련을 마무리하고 눈을 뜨는 순간.
마주한 연노란색 눈동자.
둥그렇게 뜬 눈과 반쯤 벌린 입술.
그 위로.
[당신을 향한 하위 운명 계략 중 하나를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글자를 보자 불쑥 분노와 심술, 광기가 삐져나왔다.
분명했다.
내가 아인델과 소피아를 이용할 계략을 세웠듯.
소피아 또한 나를 이용해 무언갈 할 계략이었던 것.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계략을 수정한 모양.
감히? 난 괜찮지만 넌 안 된다.
이런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불의 영향일까.
불은 본래 광기와도 연이 닿아있으니 머리에 치미는 열기가 뜨거웠다.
그래서 그대로 뱉어냈다.
자결하라는 말을.
이후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내가 짐작한 소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가장 필요할 말을 뱉어냈다.
“난 네게 거절을 가르치고 자아를 주입하려 한다. 그러니 멋대로 해보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물론 당연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표독스레 거절하거나 같은 반응을 기대했건만.
“끄읍-흑, 흐윽-우읍-.”
그녀는 그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뿐.
마치 겁먹은 강아지처럼 억눌린 신음으로 괴로움을 호소할 뿐이었다.
번지는 노을빛에 비친 눈물이 아롱졌다.
허나 철회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광기에 젖은 폭군은 그런 걸 할 녀석이 아니었거니와.
[하위 운명 행운이 당신을 감쌉니다. 당신의 말이 다른 운명의 중요한 지점을 건드렸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가팔라집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하위 운명 현혹이 생성되었습니다. 퇴폐와 강력한 합을 이룹니다]
[현혹과 퇴폐의 효과로 상대의 정신이 흐릿해지며 당신의 말이 깊이 스며듭니다]
[하위 운명 계략 중 하나를 크게 포식하였습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글자들이 내 말과 짐작이 맞았음을 알려주었다.
소피아는 철장을 부숴줄 사람이 필요했겠으나.
나는 그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견디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는 선택지도 없다.
그녀가 겪을 괴로움이 크겠으나.
[하위 운명 미련, 잔혹, 거짓, 이기심, 살인, 패악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하위 운명 광기와 가학성이 상승했습니다]
거기까진 내가 알 일이 아니었다.
눈물과 노을이 저물어가는 시각.
“죽음을 거절해라. 매일같이 그리하면 서서히 거절하는 법을 배우겠지. 황자의 명을 거절하면 남의 말 따위 쉬이 거절하겠지. 그것으로 족하다. 우선은.”
“······.”
“대답은 갔다 와서 들으마.”
아직도 울고 있는 소피아를 무심히 바라보던 눈을 거두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낮에는 염제심결 수련과 신체 개조를.
밤에는.
“평민, 찾으러 갈 시간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는 다시 오물이 가득한 거리로 나섰다.
**
“이 근처이옵니다.”
어젯밤 알프레드의 노고로 주인장에게 얻어낸 정보를 따라 도착한 장소.
같은 모양의 무채색 건물들이 늘어선 어두운 거리.
비척거리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의 몸에서 달큰한 냄새가 유독 강했다.
“괜찮으십니까?”
안드레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달이 밝아서인지 아니면 소피아의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염제심결의 화기 때문인지.
머리에 자꾸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뛴다.
억눌렀던 광기가 거칠게 튀어 오르며 날뛰었다.
피, 피를 보고 싶었다.
길가는 모두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무고하며 약한 자들의 피는 관심 없다.
“놈이 알려준 장소는 총 11곳입니다. 몇 곳이나 도시겠나이까.”
안드레의 물음에 후드 속 입꼬리가 쭈욱 찢어져 올라갔다.
검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에 담기는 광기가 선명했다.
오늘 내 광기와 허기짐을 만족시켜줄 놈들은 바로.
“전부.”
악마숭배자를 도와 거리에 마약을 뿌리는 자 전부.
[하위 운명 광기가 크게 꿈틀거립니다. 하위 운명 불이 혀를 날름거립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검을 뽑자 불길이 단번에 검신을 휘감았고.
자리에서 바로 입구를 부수며 뛰어들었다.
오물이 가득한 거리, 미친 불꽃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