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와 동부로
미친 황소 베론.
제국 수도 뒷골목의 전설적인 싸움꾼이자 빈민들은 협객이라며 추켜세웠던 자.
이미 마약과 악마 숭배자의 꼭두각시들로 전락해버린 조직들 사이.
홀로 맞섰던 시대의 풍운아.
그런데 놈이 섬광이자 반역자였던 안드레와 아는 사이였다니.
이제야 좀 퍼즐이 맞춰진다.
평민인 안드레가 팔이 잘린 후 어디로 향했겠는가.
아마 자신이 가장 익숙한 하수구로 향했겠지.
그리고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구역을 보며 분노했으리라.
글쎄.
‘안드레를 만나고 미친 황소가 된 건가? 아니면 전에 이미 미쳤나?’
미친 황소와 반역자의 만남.
당시의 베론은 어떠했을까.
그가 미친 황소가 된 동기는 팔을 잃고 비탄에 빠진 형님을 보고 나서? 아니면 썩어버린 하수구 구역에 분노해서?
아마 동시겠지.
안드레는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검을 잡았을 것이며 황소는 그런 섬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으리라.
이후에는 익히 아는 대로 안드레는 반역도가 되고 황소는 그런 그를 도와 암흑가를 접수.
안드레를 구하려다 먼저 죽는다.
‘몸에 생긴 자상만 백 개가 넘었다던가.’
자그마치 몸에 백번의 상처를 입고도 자리에 버텼다 했다.
온몸에 창과 검이 가득 꽂힌 채로 서서 죽었다 그리 들었다.
우연히 만난 인연이지만 놓치기 아까운 인재.
“평민.”
“네 전하.”
“방금 보았던 녀석. 자주 찾아가고 해라.”
“자주 찾아가라 하심은?”
“딱 봐도 스튜처럼 든든한 녀석이야. 얼굴에 세월을 좀 많이 맞은 게 단점이긴 해도 종종 가서 돌봐주기도 해.”
“알겠습니다. 그럼 전 스튜에 든 건더기입니까?”
“가끔은 나보다 네가 더 미친 거 같다.”
“칭찬 감사합니다.”
안드레의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외면하며 로이스 가문으로 향했다.
어째 안드레보다 덜 미치면 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광기에서 질 수 없지.
조만간 한번 화려하게 미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떻게 하면 더 미쳤다 소문이 날까.
이러다 미치는 방법을 고민하다 미치겠다 싶을 때.
“전하 오셨습니까.”
“전하를 뵈어요.”
마침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인델과 소피아가 나를 맞이했다.
둘의 분위기가 오묘했다.
잔뜩 굳은 얼굴이 한바탕 싸우기라도 한 모양.
그래서 제대로 싸우라 일을 던져주었다.
“소피아. 네가 말했던 고아원 관련 사업을 제국 전역으로 확대할 생각이다.”
“네?”
“아인델 그리 알아두도록.”
“하지만 전하.”
아인델이 꺼내려던 말을 멈추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묵묵히 따르겠노라 말하였고.
“잘 생각했다. 다른 말을 더했다면 모든 기회를 거두었을 거야.”
담담한 협박에 아인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필요에 따라 걸리적거리는 걸 치웠으니 충분한 보답을 하도록.”
이유도 명확했다.
나는 어찌 되었든 간에 최단기간 내에 로이스 가문의 이익을 호시탐탐 노리던 내시들을 쳐냈다.
그가 연을 맺고 있는 어떤 황자 어떤 귀족도 이렇게 하진 못했겠지.
비록 딸과의 관계가 엉망이긴 하나 사리 분별을 못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 벌인 사업들도 이끌지 못했으리라.
사업이란 게 그리 쉬운 게 아니거든.
다만.
“전체 사업 계획은 소피아가 자금과 실질적 처리는 아인델이 맡도록.”
“전하?”
“제가요?”
“그래, 소피아는 최대한 사업을 크게 벌여. 아인델은 그걸 현실적으로 맞추어라. 많이 싸워야 할 거야.”
“아.”
“음.”
“최대한 서로의 뜻을 내세워 치열하게 싸우도록. 괜히 속에 담아뒀다가 나중에 뒤통수치거나. 이용할 생각만 하지 말고 좀.”
그냥 평이하게 하는 말 같았으나 소피아도 아인델도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속마음을 들켜버려 어쩔 줄 모르는 모양새.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작게 끌어올리곤 마지막 충고를 건넸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을 때 싸워. 진짜 마지막이 오면 어떤 지랄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으니까.”
새삼스레 전생에 겪었던 제국의 멸망이 떠올랐다.
저들의 관계는 아직 그때와 같지 않으니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럼 신나게들 싸우라고.”
그리 말하고는 돌아섰다.
딱히 대답은 없었으나.
[당신을 둘러싼 하위 운명 계략 중 하나를 완전 포식하였습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했습니다!]
[소피아, 아인델, 로이스 가문의 운명이 뒤틀립니다. 하위 운명 피 냄새가 옅어집니다!]
[행운 속성 금전운이 새로운 방향으로 머리를 틀었습니다. 크기를 불려 나갑니다!]
[많은 이들의 운명이 점차 변해갈 결정입니다. 추후 결과에 따른 보상을 얻습니다]
운명은 옳은 말을 했노라고 이들의 삶은 변해갈 것이라 답해주었고.
오랜만에 광기가 아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복귀하려 하자.
“저 그런데 검은 계속 그리 들고 다니시렵니까?”
“응?”
문득 아인델이 최고급 대리석을 두부 가르듯 작살 낸 거검 브레이커를 가리켰다.
눈빛을 보아하니 자꾸 집안 물건이 부서지자 불안했던 모양.
“버텨. 견뎌. 참아. 돈도 많으면서.”
“···네.”
내 단호한 답에 아인델이 어쩐지 축 늘어진 어깨로 답했고 그런 아버지를 소피아가 아주 약간의 측은과 대부분의 즐거움으로 바라보았다.
“안드레. 한 판 하러 가자. 오늘은 대문 앞에서 투닥거리자.”
“네 전하.”
“알프레드. 곧 전령이 올 거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녀석을 오면 바로 안내해. 해볼 게 좀 있어.”
“알겠나이다.”
퍽 이상한 명령이었으나 알프레드는 군말 없었고 안드레는 그저 검을 나눌 생각에 신난 듯했다.
평소에는 거대 저택 뒤쪽,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갔으나.
오늘은 달랐다.
저택 앞 가장 눈에 띄는 마당.
모든 고용인들을 불러놓고 거기다 정문까지 활짝 열어놓고선 당당히 안드레와 마주 섰다.
“준비는 됐나?”
“이길 준비 됐습니다.”
호승심 넘치는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내 피도 끓는 기분.
근데 보자보자하니까 이 새끼가.
“평민, 왜 맨날 나를 그렇게 이기고 싶어서 발악이지?”
“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해야 전하를 보호하지요.”
“그래서 이겨 먹는다는 게 말이 안 되면서도 되는구나.”
“전하께서야 멋들어지고 능력 있으시고 혈통까지 귀하시지만 저는 무엇이 있습니까. 강하기라도 해야 사람 노릇 하죠.”
“합당하다. 허나-.”
지랄하지 말도록!
놈의 심리전에 휘말릴 내가 아니다.
안드레가 칭찬으로 인해 헤벌쭉 벌어지는 내 입을 보곤 공격하기 직전.
이미 거검이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막았다간 검과 함께 동강 날 기세.
안드레가 옆으로 급히 빠져나가더니 검을 빛살처럼 뻗었다.
거검의 옆면을 틀어 공격을 막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단순히 대련이라기엔 거친 싸움.
“진심을 몰라주십니다!”
“그따위 진심 무엄하다! 난 모든 게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야!”
“전하가 나태해지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 소신의 책무!”
그러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지금 보니 저 자식 폭군에게 팔이 잘릴 만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주둥이를 나불거리지 않았을까?
“평민, 검 받아라!”
잠시간의 격돌이 끝난 후 다시 내가 거검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거검 브레이커의 무게는 실로 웅장해서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발가락으로 땅을 쥐어뜯듯 쥐고 하체에 무게를 싣고.
허리와 상체는 탄력과 힘을 유지한 채 어깨와 손목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근력 운동을 검술로 대체했다.
이것만 휘둘러도 근육이 붙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안드레는 이 무식한 검을 받아치지 않았다.
못 받아치는 건 아니나 받아치면 저 기괴한 검날에 무기가 상할 게 분명하기 때문.
“헌데 대체 거검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녀석을 표정을 보곤 입술을 끌어올렸다.
물론 전생에 알프레드에게 혹독하게 배웠던 검술.
거칠고 패도적이며 적을 찢어발기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한 검이었다.
내가 쥔 브레이커에 딱 어울리는 검술.
황제가 살아가는 동안 매일 같이 혹시 모를 날을 위해 훈련했던 검을 지금 펼치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가짜가 아닌 진짜의 몸이기에.
물론 마나를 사용하는 대련은 아니기에 안드레는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
그래도 좋다.
오랜만에 광기가 아닌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탄력이 붙은 거검술에 안드레가 이리저리 피하며 합을 맞춰주었다.
“전하, 힘을 그리 한꺼번에 쏟으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한 번 한 번 크게 휘두르는 맛이 있어.”
“그 검은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런데 크기가 너무 큽니다. 본래 거한들이나 쓰는 검 같습니다만.”
맞다. 이 검은 본래 내 것이 아니다.
전생에선 1황자가 쥐었던 검.
북부에서 참패하고 나서 이 검 덕분에 살았다던가.
허나 참으로 신비하게 그리 승승장구하던 1황자는 브레이커라는 거검을 손에 쥔 순간 패장의 운명을 짊어졌다.
매번 패배하여 혼자 살아남았고 1황자는 그리 무너져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브레이커를 패장의 검이라 불렀다.
그가 죽은 후에 폭군이 이를 쥐었고 폭군마저 쓰러진 후에는 내 손에 들어왔었지.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브레이커의 진정한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안드레 눈동자 자꾸 돌리지 마라. 집중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꾸중에 안드레가 다시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마침.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 전하께서는 계십니까!”
내가 기다렸던 자들이 로이스 가문 정문으로 들이닥쳤다.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그런지 퍽 거만해 보이는 걸음걸이.
로이스 자작가를 우습게 보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인지.
“황제궁에서 임무를 가져 왔습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신경을 긁는 소리에 좋았던 기분이 뭉그러졌다.
황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오라 소리를 치다니.
눈앞이 약간 흐려지듯 광기가 불쑥 솟아올랐고.
“지금.”
내 한 마디에 안드레가 공격을 피하려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 막 들어온 거만한 놈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피해라! 걸리적거리면 죽는다!”
내가 도망치는 안드레를 쫓아 펄쩍 뛰어올랐고.
그대로 땅을 찍어 내릴 듯 거검을 바짝 치켜들었다.
불쑥 하늘을 가리는 흉포한 거검의 자태에.
“어어어. 어어어!”
“자, 잠깐 전하!”
“으아악!”
무게를 잡던 녀석들이 일제히 개처럼 구르며 자리를 피했다.
거검이 바닥에 꽂히자 땅이 울리며 먼지가 피어올랐고.
“콜록, 콜록. 으윽.”
“저, 전하! 이게 대체 무슨!”
녀석들이 바닥에 누운 채 몸을 바들바들 떨며 항의하려 했으나.
“뭐, 대련 중에 사고가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죽은 사람 있어? 없잖아?”
내 뻔뻔한 태도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땅에 꽂힌 브레이커가 무서워 일수도 있겠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자가 한결 공손해진 태도로 명령서를 전달했다.
“전하, 황제궁에서 내려온 임무 명령서입니다.”
“성지가 아니라?”
“네. 최근 제국 내부에 문제가 되는 사건들을 처리해주십사 명령을 내렸나이다.”
“성지도 아닌데 그런 거만한 대도를 보이다니. 그냥 죽였어야 했나?”
내 협박에 거만한 태도를 보였던 놈들이 찔끔했다.
성지와 명령은 다르다.
성지는 황제의 직접적인 말, 이를 업신여기면 황제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며 권위에 반하는 것.
흔한 말로 반역의 뜻을 품은 자가 되는 것.
반면 명령서는 황제궁을 드나드는 신하들이 합의하여 황제에게 허락받은 지시.
명령서는 성지보다는 아래, 요청보다는 위로 강제력은 있으나 황제의 권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즉, 여기 온 놈들은 황제 폐하의 입으로써 온 게 아니라 전령으로 왔을 뿐.
그런데 그딴 거만한 태도를 보여?
“거기서 다 대가리 조아리고 대기하도록. 어디서 빳빳하게 허리를 높여?”
내가 눈을 부라리며 성을 내자 그제야 놈들이 부랴부랴 허리를 바짝 깔았다.
원래 성지가 올 줄 알고 기세에서 안 밀리려 안드레와 수작을 부렸건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니 괜히 멋쩍어 열이 뻗쳤다.
놈들을 노려보다 받아든 명령서를 펼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전하!”
마침 로이스 자작도 굉음에 놀라 나왔다 내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도 조금은 놀란 표정.
아니 걱정하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럴 만도 했다.
명령서엔 3가지 현 제국의 문제가 쓰여있었는데.
1. 동부 전선, 국지전에 나타난 수배자 처리 건.
2. 서부 불모지 사막 거대 괴수 사냥 및 홍련 부족 관련 조사 건
3. 북부 모닥불 관리자 암살에 관한 건.
제국을 어지럽히는 세 가지의 문제 중 하나를 처리하소서. 그리하면 폐하께서 전하에게 가해진 금제를 풀어주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추가로 보상을 내릴 것도 약속하셨나이다.
모두가 기억에 있는 사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3번은 더더욱 눈에 들어왔다.
“때가 마침 그리되었나.”
문득 손에 든 브레이커를 바라보며 운명이라는 게 무섭다 싶었다.
원래라면 이 거검을 든 1황자가 북부로 향하고 패퇴하여 돌아오니까.
허나 운명은 꼬여 거검의 운명이 내 손에 들어왔고.
1황자가 가야 할 혹한의 땅에.
“3번, 북부로 향하겠다. 관련 서류 전체는 알프레드에게 넘기도록.”
내가 가기로 하였다.
나의 답에 명령서를 전달하러 온 자들뿐 아니라 안드레와 아인델, 소피아까지 놀라는 눈치.
아직 겨울이 오진 않았지만 왜인지 싸늘한 냉기가 휘도는 기분.
[새로운 운명 혹한, 가난, 암살, 죽음, 군세, 패배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운명 불이 더욱 거세게 타오릅니다]
[거검을 덧씌운 녹을 제거한 자리에서 거검의 운명 일부를 엿봅니다. 중요 운명 대첩(大捷)을 엿보았습니다!]
“알프레드, 안드레 여정을 준비해라. 솔에게도 전하여 짐을 꾸리라고 해. 좀 멀리까지 갈 거니까.”
파스슥, 부서지는 거검의 붉은 녹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포식할 시간이 돌아왔다.
그리고 욕심 많은 황자인 나는.
“첫 번째도 겸사겸사 처리하도록 하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사실 두 개로 보이지만 하나의 사건이니까.
물론 나만이 이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