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황자의 뜻대로
요새에는 요새장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다.
최고 책임자임에는 분명하나 유사시에는 부요새장과 병사장, 보급관 등 요새의 요직에 앉은 이들이 요새의 방어를 책임졌다.
동북부 공작령에서 새로운 요새장을 임명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요새의 주인.
그런데.
“뭐, 뭐어? 황자님께서 오셨다고?”
“네. 방금 뒷문에 도착하셨습니다.”
“몇 황자라더냐! 제발 1 황자께서 오셨나!”
“그게.”
말을 흐리는 부하를 보고는 부요새장 패트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제대로 대답을 못 한단 말인가.
1황자가 아니어도 좋다, 하다못해 6이나 7이라도 충분히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이렇게 대답을 못 한다는 건.
설마, 설마?
“몇 황자께서 오셨기에 대답을 못 한단 말이야!”
당장 그는 요새 성벽에서 몰려오는 적군을 헤아리느라 누가 왔는지 모르는 상황.
불안감이 커질 때.
곧.
“열한 번째 아르한 황자께서 행차하셨으니 전 요새는 예를 갖추라!”
우렁찬 목소리가 누가 요새에 왔는지 알렸다.
자리에 있던 요새 간부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누가 왔다고?
아무리 동부 전선에 박힌 무지렁이라 해도 11황자의 악명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다.
무능력함의 끝이며 탐욕과 오만의 화신과도 같다던 자.
그런데 그런 황자가 어떻게 동부 전선에, 그것도 하필 지금?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당황하는 사이.
“전하께 예의를 갖추라!”
다시 한번 안드레의 목소리가 울렸고 요새 병력들이 쭈뼛쭈뼛 무릎을 꿇었다.
속이 터질 노릇이다.
지금 앞에선 적이 몰려오고 있는데 당장 황자에게 예의를 차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병력은 이게 전부인가.”
황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마치 아무 일 없는 요새를 시찰하듯 병사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고.
“책임자는 어디 있지?”
뻔뻔하게도 수장까지 찾았다.
그제야 성벽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책임자들과 눈을 마주쳤다.
황족임을 알리는 백금발과 특유의 진득한 진홍색 눈동자가 묘한 분위기를 더했다.
전쟁터에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태평한 모습.
흐드러지는 화려함이야 둘째로 하더라도.
“위에서 쳐다보는 이들. 너희가 책임자인가?”
두려움 없이 홀로 고고히 성벽 위로 오르는 꼬락서니가 당황스러웠다.
소문대로 철없고 생각 없는 황자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황자가 왔으니 뒤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라도 딸려왔을 줄 알았는데.
“고작 세 명이라고?”
“이런 제기랄.”
그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주변을 살피곤 불만을 토했다.
지원군도 없이 나타난 황자가 야속할 만도 했다.
그런데.
황자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그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상했다.
분명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화려한 귀공자쯤으로 보였는데.
“요새장은 누구지.”
눈앞에서 묻는 황자의 크기가 유독 커 보였다.
분명 적이 몰려옴에도 그가 걷는 성벽은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했다.
압도적인 존재감.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였지?
과거 임관식 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동북부 공작.
그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방금까지 불만을 토하던 핵심 간부들이 입을 꾹 다물었고.
“요새장은 지난 밤사이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부요새장 패트릭이 목소리를 쥐어짜 상황을 알렸다.
과연 황자는 무어라 할까.
겁을 집어먹을까? 도망칠까? 아니면 자신을 질책할까?
그러나.
“안타깝군.”
황자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일생일대의 전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다니.”
고개를 든 부요새장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황자의 살짝 찌푸려진 눈가에 떠오른 건 측은지심.
죽은 자를 기린다기보단 함께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음색.
전공이라함은 승리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
지금 이 상황에서? 고작 이 정도 인원 가지고?
그런데 황자의 목소리와 태도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 의심하기 어려웠다.
황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요새 병력들을 훑어보곤 곧 밖을 쳐다보더니.
“거기 멍하니 선 이유가 무엇이냐 망국의 망령들아.”
아침 인사라도 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적들을 조롱했다.
모두가 화들짝 놀랐으나.
“망해버린 망국의 영광을 떠올리고 있는가? 아니면 세월이 하도 지나 떠올릴 수도조차 기억이 안 나는가? 미련하다. 왕의 목이 떨어진 지 수백 년인데 아직도 망국을 섬기다니.”
“······.”
“뭐 하고 있는 거지? 천박하게 울어대며 벽을 기어오르지 않고. 보다시피 제국의 황자다. 나의 목을 가져가면 꽤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무덤도 없는 망령들에게 바칠 제물로는 제격이겠군.”
꽤 길게 놈들을 조롱한 황자가 홀로 웃어 젖혔다.
모두가 살기와 분노, 두려움을 내뿜는 가운데 그 홀로 웃었다.
스멀스멀 광기가 요새의 성벽을 잠식했다.
짙고 깊은 광기에 주변 아군마저 몸을 떨었다.
그때.
“이 미련하고 멍청한 새끼들!”
버럭, 황자가 부요새장을 비롯한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럽게 왜?
“너희 미련한 병사 나부랭이들의 환호 때문에 적들이 오지 않는다! 기껏 기다렸는데 오질 않아! 모조리 죽여야 하는데 덤비질 않아!”
황자의 호통에 비로소 부요새장이 그의 뜻을 깨달았다.
실제로 몰려들던 적들은 황자가 나타났음을 보고 진격을 멈추었다.
아니 애초에 병사들의 환호를 듣자마자 멈추었다.
지금까지도 상황을 파악하는지 자리에 머무르는 상태.
황자가 나타났으니 뒤에 기사단과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상식.
설마 황자는 적들의 의표를 찌른 걸까?
홀로 올 리 없다는 상식을 이용하여 부리는 허장성세인가?
적들은 황자의 태도가 허장성세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를 거다.
순간 자신도 진짜인 줄 알았으니까.
“당장 성벽을 기어 올라오도록. 버러지 같은 것들.”
냉엄한 질책이 떨어지고 나서야.
성벽을 찬찬히 둘러보던 적군의 수장이 손짓했고 그들이 물러났다.
눈초리에 의심이 달려있었으나 황자의 기세가 너무나 당당해 모험하기가 어려웠다.
적군들이 숲과 평야 속으로 사라진 이후에야.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간단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적군을 속였다.
허나 이 요행이 얼마나 통했을지 모르겠다.
그들이 황자를 향해 감사를 전하려 할 때.
“지금 안도했는가?”
“네?”
“싸움을 피했다고 안도를 하다니 한심하군.”
아르한의 질책이 먼저 떨어졌다.
“왜? 내가 저들을 말로만 속였다 생각했나?”
그의 입꼬리 끝이 씨익 올라갔다.
눈에 담긴 광기를 보고서야 자리에 있는 자들이 알아챘다.
진심이었구나.
그들을 모욕한 말도 싸우게 올라오라던 말도.
무얼 믿고 승리를 장담한단 말인가?
“요새의 간부들은 회의실로 모여라. 요새의 전권을 갖겠다.”
황자는 의문을 남긴 채 성벽을 떠났고.
요새에는 묘한 침묵만이 떠돌았다.
위기를 넘겼으나 누구도 환호하지 못했다.
**
요새 최상부 작전 회의실.
비록 황자궁이나 로이스 저택과 같이 화려함은 없었으나.
오직 전투를 위해 실용적으로 꾸며진 회의실 가장 상석.
[하위 운명 행운, 현혹이 적들의 눈을 흐렸습니다]
[요새의 운명 참패를 유예했습니다]
눈앞 떠오른 운명의 변화를 보며 태연히 밖을 바라보았다.
겁이 날만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적들의 살기와 적의 어린 눈들.
불리한 상황임에도 와닿지 않았다.
블러디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강자임에도 어째 두려움이란 감정이 들지 않았다.
폭군의 감정은 때로 무언가 결여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
오만함과 광기만이 가득해 상황에 흔들리지 않으니.
이젠 승리에만 집중하면 된다.
“전하. 진정 싸우려 하셨습니까?”
안드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래. 싸우려 했다.”
“제 목숨으로 보필하겠습니다.”
“평민. 목숨으로 보필하지 말고 이길 방법을 강구해야하는 법이다. 덧없는 죽음은 필요 없어.”
“네 전하. 명심하겠나이다.”
“내가 여기 온 게 죽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이나?”
“전하를 믿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입니다.”
“솔직하다.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여기 왔다. 가로등은 어찌 생각하지?”
“동부의 상황과 북부 임무가 연관이 있는지요. 그리고 전 가로등이 아닌데요.”
“작게 보면 관련이 없으나 크게 보면 있지. 거검 받침대 아직 보는 눈이 좁구나.”
“···거검 받침대가 눈이 넓어 무엇하나요.”
“반항하는 거냐?”
“···아니요.”
“가로등치고는 속이 좁구나. 평민을 봐라. 가만있잖냐.”
“···이름이라도 불러주는 척할 때가 좋았어요. 그리고 평민은 사람이기라도 하잖아요.”
“평민. 나가서 요새의 깃발을 거두도록.”
내 뜬금없는 명령에 안드레와 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깃발을 내린다는 건 철수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궁금하겠지.
내가 할 일은 철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반대.
때마침 간부들이 회의실로 입장했고 그들을 외면한 채 안드레에게 연이어 명령을 내렸다.
“요새의 깃발을 거두고 황가의 깃발을 올려라.”
“전하?”
“황가의 깃발 말씀이십니까?”
“황가의 깃발이라니요! 후퇴가 불가합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막 회의실에 들어온 자들이 놀란 눈으로 불가를 외쳤다.
황가의 깃발을 올린다는 것은 요새를 지키겠다는 공표이며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였기 때문.
황가의 깃발이 꽂힌 이상 그 어느 요새보다 이 무명 요새는 전선의 중심지가 된다.
황가의 깃발이 찢어지게 둔 자는 반역자에 준하는 불명예를 입으니.
견딜 수 없다.
모두 죽을 거다.
“평민.”
“기를 내리고 황가의 깃발을 올리겠나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나의 명령은 확고했다.
안드레 또한 의문을 표하지 않고 따랐다.
잠시 간부들을 쓸어보니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 모양.
그리하여 들어주기로 했다.
“말해봐라. 대신 안 된다. 위험하다. 적들이 몰려오니 지킬 수 없다. 그따위의 헛소리를 내뱉을 거라면-.”
회의실 상석에 놓인 검을 뽑아 상 위에 올려두었다.
“목을 내놓은 다음에 하도록.”
아 목을 자르면 말을 못 하던가? 알 바 아니다.
순식간에 회의실 안에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진심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이야기할 자들이라면 전쟁터에 없는 게 좋다.
내 손으로 생명을 먼저 끝내주겠다.
그래도 이중 버러지 같은 놈은 없었는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죽는 게 무서웠거나.
“다행이로군. 내 손으로 전력을 깎아 먹지 않아도 되어서.”
눈앞에 떠오르는 이들의 불만이 볼만했다.
간부들의 운명에 깃드는 불만과 불온한 생각들.
허나 놈들이 불만을 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황제란,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모두를 죽일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누구도 만족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게 폭군이니까.
다만 다른 점이라면.
[요새의 운명 참패를 더욱 뒤로 유예합니다. 당신의 결정으로 장소의 운명이 뒤틀립니다]
[당신을 향해 새로운 운명 암살이 다가옵니다. 주변에 머문 다른 이의 운명 혈향이 당신을 감쌉니다]
패악과 광기 사이, 올바른 결과를 찾아내려 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길 잠시.
“설. 수정을 꺼내라.”
“네. 전하.”
그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눈빛을 빛내면서 솔이 건넨 푸른빛 수정을 받아들었다.
수도에는 실시간으로 통화가 가능한 전화선이 깔려있으나 동부 전선은 아직 구형 마나 통신망을 유지하는 중.
그중에서도 황족에게만 허락된다는 황가 마나 수정을 가져왔다.
아무 생각 없이 동부 요새로 발을 들이밀었다는 건 착각이다.
황가 깃발, 주변 패잔병, 동북부 공작,암살, 블러디.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건들을 떠올리며 곧 몰아칠 변화를 떠올렸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겠다.
솔이 수정에 마나를 넣었고.
시끄러운 통신이 울렸다.
패잔병들의 생존 소식과 지원 요청들.
“여기는 황자. 동북부 전선 무명 7 요새에서 전한다.”
그 사이를 비집고 울리는 존귀한 자의 목소리.
통신이 일시에 멈추었다.
황족 전용 수정구가 울리면 일시적으로 모든 통신이 중단된다.
감히 황족의 말과 겹쳐선 안 되니까.
말을 전하기 전 회의실 밖을 보니.
안드레가 무엇인가를 바쁘게 나누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펄럭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아이로니아 황가 깃발이 파도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 깃발 중앙, 강철을 뜻하는 백금색의 쌍두독수리가 선연하게 빛났다.
거칠게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 얼핏 백색 불꽃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아 너울거리는 깃발의 향연에 자리에 있던 자들이 방금 불만을 잊고선 감탄했다.
“7 요새에 황가의 깃발을 꽂았으니. 요새를 떠난 패잔병들은 요새로 오라. 주군 될자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간의 침묵.
첫째는 주변에 있을 제국의 패잔병들에게 전한 메시지.
이어서.
“수정구를 강탈하여 움직이는 망국의 망령들도 들으라. 7 요새에 황자가 있다. 그대들이 증오하는 황가의 깃발이 있다. 몰려오라. 다 참하여 줄 테니.”
적들을 향한 광포한 선언에 몇몇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둘째로 망국의 병사들을 불렀다.
마지막은.
“동북부의 공작, 듣고 있음을 안다. 그대의 땅에서 황자가 죽고 황가의 깃발이 찢기는 수모를 겪기 싫다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요새 안에만 숨어있는 병사들을 움직여라.”
동북부 공작과 요새에 숨어 한 발짝 나오지 않을 겁쟁이들에게.
공작이 움직여야 그들이 움직일 터.
거센 바람을 맞은 깃발처럼 내 통신을 들은 자들의 마음도 나부끼리라.
불안과 걱정을 담아.
허나 그들의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그리곤 이내 회의실에 놓인 동부 전선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보았다.
모두가 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겠지.
비록 지도 중심엔 위치하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동부 전선의 중심은 나다.
의도한 전장의 변화.
먼저 내려놓은 한 수.
이어서 찬찬히 지도를 향해 손을 뻗었고.
[대상 동부 전선 지도에 신비 점수 1점을 투자합니다! 지도가 작은 신비를 품습니다. 지도 위로 지형의 운명을 표시합니다!]
[신비 운명 포식자에 신비 점수 1점을 투자합니다! 운명을 보는 눈이 더욱 맑아집니다. 지도 위에 얹힌 말들의 운명이 읽힙니다!]
[대상과 지역을 주변으로 한정합니다]
슬슬 중앙에 앉아 말들을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이 전선은 내 뜻에 따라 움직이리라.
**
깊은 밤, 낮에 있었던 소란의 여파가 남아 일렁이는 횃불들 사이.
경계병들이 충혈된 눈으로 혹시 몰려올 적들을 경계했다.
회의실에선.
“음냐, 아니 솔, 소오올 이라구요.”
종일 몰아치는 마나 수정 통신을 분류, 마나 코드 작업을 끝마친 솔이 쓰러져 잠꼬대하는 중.
꽤 고생이 많았다.
각 요새에서 탈출한 패잔병들의 마나 코드를 설정하여 따로 연락할 방법을 구축했다.
잠시 지도를 보고 있으니 각 험로에 운명들이 떠올랐다.
어디엔 패주가, 어디엔 승리가 떠올랐다.
말들이 짊어진 운명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퍽 흥미로웠다.
그러던 중.
[하위 운명 암살, 죽음이 바투 다가옵니다!]
유독 새까만 죽음 하나가 지도 위에서 급히 움직였다.
예측되는 경로는 내가 머무는 무명 요새.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죽음을 보며.
오히려 입술을 끌어올렸다.
창백한 달빛 아래 손에 든 와인이 유독 붉었다.
이어서 손에 상처를 내어 와인 안에 피를 부었다.
혈향과 와인의 과일향이 뒤섞여 묘한 냄새를 풍겼다.
“그대를 위한 술을 준비해 두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퍼지는 혈향을 맡은 듯 죽음의 반대편에서 짙은 혈향이 붉게 몰려왔다.
그 가운데 놓인 나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모든 건 뜻대로.
“아니 제 이름은 솔이라니까요. 술이 아니라···.”
꿈에서 마저 이름을 외치는 솔의 잠꼬대가 우스워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창에 비친 창백한 백금발이 달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덩달아 달빛 가득한 지도 위,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무명 요새를 중심으로 수많은 운명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