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도 걱정도 없다
아침이 밝았다.
즉, 어젯밤을 무사히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를 올렸다.
몇몇은 잠을 설쳤는지 붉어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끄응. 꿈이 아니었네.”
시린 아침 햇살과 이를 받아 더욱 빛나는 황가의 깃발을 보며 어제 벌어진 일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꿈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의 황당한 일.
황자가 호위 둘만을 데리고 요새에 입성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러게 꿈이 아니었어. 황자 전하가 오셨다는 것도, 진짜 기세만으로 놈들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도.”
황자 홀로 몰려들던 적을 밀어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운이 좋았지.”
“그래, 운이 좋았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 솔직히 철이 없는 행동이야.”
“빌어먹을.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차라리 허세가 아니라 진짜 기사단이라도 데리고 왔다면 모를까.”
“혹시, 혹시라도 속임수의 속임수는 아닐까?”
“뭔 개소리야 그게.”
“그 유명한 이야기 있잖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한 얼뜨기 병사의 말에 모두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기사단이 있는데 없는 척 적들을 속이셨다고? 우리를 포함해서?”
“그래! 사실 함정인 거지. 적들이 몰려올 때 딱! 기사단과 매복 병력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아?”
“그렇긴···하네.”
“맞아 차라리 그쪽이 가능성 있어.”
몇몇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타당한 가설.
설마 진짜 황자 전하께선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등장하셨던 걸까?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
심지어 어제 보았던 당당한 태도가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하긴 깃발을 꽂으실 정도면 그럴 만하긴 해?”
“야 맞나보다. 맞나 봐!”
“저기, 기사님 지나가신다. 슬쩍 물어볼까?”
“뭐라고 기사단 대기 중이냐고?”
병사들의 호들갑에 안드레가 그쪽을 쳐다보았고.
문득 지난 밤, 고아원에서 보았던 전하의 멋짐을 따라하고 싶었는지.
검지를 입에 올리며.
“쉬잇.”
오줌싸는 소리를 냈다.
그걸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확신했다.
황자 전하께선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곧 무명 요새 곳곳에서 사실 병력을 숨겨놓았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고 저 난리를 피웠다면 미친 게 분명하다며.
나름 통찰력이 깊었다.
황자는 진짜 미쳤다.
**
아침을 맞이한 회의실.
모두가 모여 침을 꼴딱꼴딱 넘기며 나를 바라만 보았다.
물론 내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함부로 목소리를 내진 못했다.
남들의 시선 호기심 어린 시선 따위 묵살하며 그저 무신경하게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중.
침묵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옆에 거검 한 자루가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회의실 상석, 늘어지듯 앉아 거검에 기대어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몇 분을 침묵했을까.
몇몇이 더운 듯 관자놀이에서 땀을 흘릴 즈음에야.
“다행이로군.”
처음으로 꺼낸 말에 다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게 웃는 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맞습니다. 어젯밤을 무사히 보내어 다행입니다.”
어젯밤을 무사히 보낸 건 당연한 일.
그깟 걸 가지고 다행이라 할 만큼 담이 작지 않다.
내가 말한 다행과 그들이 말한 다행이 달랐나 싶었다.
그리하여 정정해주기로 했다.
“아니, 내 손으로 직접 여기 있는 자들의 목을 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 했다만.”
“헙······.”
“아-.”
“누구 하나 어제의 경고를 잊고 불만을 토했다면 시체를 치웠을 거다.”
회의실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할 때보다 더욱 많은 땀이 흘렀다.
어젯밤, 아마 나에 대해 모르던 자들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지.
그래서 그런지 어제보다 다들 눈에 띄게 긴장한 게 보였다.
맘에 들었다, 공포 분위기는 이 정도면 되었다.
“슬슬 회의를 시작해볼까. 먼저 현재 식량과 병사들 무장 상태부터 보고하도록.”
“네!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식량 비축분은 전체 넉넉히 한 달, 아껴 먹으면 두 달 보름까진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샘의 물이 넉넉하니 식수 문제는 없습니다.”
“병사 무장 상태는 현재 기본 무장 완료 상태이며 화살은 약 만 오천 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검, 창, 방패 여유분은-.”
“산악 지형에 익숙한 병사들이 따로 있나?”
“레인저 말씀이십니까?”
“이왕이면.”
“무명 요새에는 레인저들이 없습니다. 그나마 산을 탈 줄 아는 병사들이 몇 있긴 합니다만.”
“따로 모아라.”
“알겠습니다.”
이후 회의는 간단했다.
요새의 상황 점검과 예상되는 적들의 움직임 기존 파악해둔 적들의 출몰 등.
그러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과 현지의 정보를 찬찬히 조율했다.
우선 지도에 표시된 지형과 주변 지형의 차이, 길목의 유무.
주변 요새들의 상황까지.
마치 유능한 요새장이 된 것처럼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명령을 내리길 오래.
“회의는 마치도록 하지. 다들 지시한 대로 확실히 움직일 것. 부요새장은 남아라.”
일제히 대답한 간부들이 회의실을 나서려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다른 의견이 있나?”
“주변에 기사단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은 어찌할까요?”
한 간부의 물음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기대를 품은 눈빛들.
헛소리임이 분명하나 굳이 정정해줄 마음이 없었다.
“다들 나가라.”
철그럭, 거검 손잡이를 거칠게 움직이자.
각자 다양한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그리곤 덩달아 웃는 안드레를 보곤.
“평민과 이동식 가로등은 산 타기에 능숙한 자들을 이끌어라. 움직일 길은 내가 알려주겠다. 우선 능성 주변에 대기하면 패잔병들이 올 거다. 여기 보이는 작은 오솔길을 이용해 이끌도록.”
“정문을 통하여 오면 되겠습니까?”
“적이 늦는다면 그리하고 아니면 조우하지 않을 곳에서 대기해라. 수정구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마.”
“네, 추가로 분부하실 게 있으십니까.”
“이동식 가로등.”
“솔을 부르셨나요.”
“평민과 함께 움직여, 이동하는 병사들뿐 아니라 나중 매복할 병사들의 기척까지 그림자로 가려라. 그 정돈 가능하겠지.”
“네 가능해요. 그런데 병력들이 오는 건 어떻게?”
그녀가 물음을 끝내기도 전.
-여기는 노을 요새 잔여 병력들입니다. 황자 전하 저희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나이다!
-여기는 무명 6 요새 잔여 병력입니다. 전하가 계신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전하! 회색바위 요새와 폭포 요새 패잔병들이 모여 명을 기다립니다!
황가 전용 통신 수정구에서 연이어 보고가 이어졌다.
솔과 안드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이미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짙게 미소지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네? 이게 끝이 아니라뇨? 정말 기사단이라도 배치해두셨습니까?”
안드레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굳이? 번거롭게 다른 이들을 끌고 올 이유가 있는가.
“해두었다면 해두었지.”
“정말요?”
“역시 전하께선 계획이 있으셨군요! 이 안드레 믿고 있었나이다!”
“기사단은 전부터 이미 배치를 끝내두었지. 오래전, 아주 오래전부터. 아마 몇백 년 전부터?”
내가 느끼기에도 달뜬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제국은 황족을 위해 존재하며 황족에 의해 돌아간다는 선민의식.
실로 말도 안 되는 오만하고 패악스러운 확신.
세상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주변 관계, 힘과 돈 그리고 계급.
이 모든 걸 고려하고 살금살금 눈치를 보기 마련.
그러나 나는, 이 폭군은 순진할 정도의 자신을 품었다.
물론 본래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겠지.
하지만.
-여기는 붉은매 요새. 여기는 붉은매 요새. 황자 전하의 명을 따라 붉은매 기사단 일부와 레인저 병력을 파견하겠습니다.
“어! 정말 기사단이?”
“전하! 붉은매에서 지원이 온다 합니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방법.
오래전부터 요새가 가득한 땅에 갇혀 자라다시피한 동부인들은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요새가 삶의 전부이며 요새 밖의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
좋은 말로 이들에게 협조를 구했다면 움직이지 않았겠지.
끝없이 불가를 외쳤을 거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제하면 된다.
“동부인들은 겁이 많고 안에 숨어있길 좋아하지만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명예를 중요히 여기지.”
“아 설마 그래서 깃발을?”
“남의 땅에서 자란 이들이다. 제국민이라는 명예마저 잃어버리면 남의 땅에 자리를 잡은 침략자와 다를 게 무어겠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라 하여 명예를 모르진 않는다.
다른 곳의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빼앗긴 요새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엿보는 습성이 그렇다.
마치 자신의 집을 지키듯 요새를 빼앗긴 게 그들에겐 치욕이며 되찾는 것이 명예다.
제국민이라는 신분과 요새라는 집이 없으면 저 레지스탕스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제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걸었다.
그들의 습성을 알기에 상황을 꾸렸고 이용했다.
솔과 안드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안 서서히 다가오는 운명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기회를 준 거다. 제국민으로서 명예를 지키고 존재할 기회를. 그러니 마땅히 움직여야지.”
당당하며 오만한 선언에 솔과 안드레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단순한 오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 동부 최전방을 중심으로 움틀거리는 운명들이 보였다.
동부 전선을 북, 남으로 양분한 두 개의 공작가 중 하나.
동북부 군단 중심, 하르델 공작가로부터 시작한 변화.
-여기는 동북부 공작가 삼남 트라이던 반 피오르 하르델입니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전하라. 무사하다고 또한 공작가의 성의를 보고 싶다고.”
“예 전하.”
솔이 통신 구술을 잡고 이야기를 나눈 후.
-주변 요새 병력을 각출하여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방어를 위해 모든 병력을 보내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곧 마법사들과 기사들도 출발시키겠나이다.
“흡족하다. 단 강자들은 은밀히 병사들은 화려히 출진하라 이르도록.”
간단히 공작가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정신없는 흐름에 솔과 안드레는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만 보다가.
“이 소식을 병사들에게도 알릴까요? 그리하면 사기가 오를 겁니다!”
“맞아요. 전하! 불만 따위 다들 꺼내지도 못할 거예요!”
이어진 안드레와 솔의 호들갑에 찬찬히 손가락을 흔들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병사들에게 방금 이상의 기대감을 심어줄 필요 없다.
“그들이 알아야 할 건 진실이 아닌 상황의 일부분. 너희는 그저 몰려오는 패잔병을 잘 규합하여 대기시켜라.”
**
지금껏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던 부요새장이 물었다.
“적들이 요새로 진격할까요?”
“지금 병력을 모으지 않으면 다시는 없을 기회니까. 움직일 수밖에 없지.”
“흩어져 습격만을 일삼던 그들이 모일까요?”
“망령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내 목숨과 깃발을 얻는 순간. 독립을 이룰 수도 있으니.”
“!”
황자의 담담한 말에 부요새장이 고개를 떨궜다.
손을 덜덜 떠는 꼴이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
그런 그를 안드레와 솔이 이해한다는 듯 보았다.
“왜 저에게 이런 사실을?”
“부요새장이니 알아야지. 요새장은 죽었으니까.”
“그뿐입니까?”
“나중에 이 승리를 묻는 자들이 많아지겠지. 존귀한 나는 대답할 시간이 없으니 자네가 해. 그뿐이야.”
승리를 확신하는 말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쨍한 햇빛을 등진 그의 백금발이 은은히 빛을 더했고 그림자 진 얼굴 핏빛으로 번지는 눈동자와 새빨간 미소가 섬찟했다.
죽음과 피, 승리를 함빡 머금은 맹수와도 같은 얼굴.
숨이 벅찼다.
요새를 함락하려는 군세 앞에서도 이리 겁을 먹은 적은 없었다.
황족이란 본디 이리 고귀한 존재란 말인가?
의문과 두려움, 기쁨, 확신 등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윽고.
“다들 나가도록. 맡은 일들이 중하니 알아서들 잘해.”
“받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나가보겠습니다.”
안드레, 솔, 부요새장이 각자의 놀람을 간직한 채 밖으로 나가기 직전.
“내일 아침까지 깨우지 말도록. 오늘 밤은 좀 깊이 자야겠으니.”
의자에 방만하게 기대어 누운 황자가 고요히 눈을 감았다.
광기를 거둔 모습이 마치 조각과 같아 셋 모두가 잠시 감탄하다 문을 닫았다.
홀로 남은 황자와 지도 가득한 운명의 변화만이 회의실에 남았다.
죽음과 혈향이 지도 위 진득히 달라붙어 황자의 주변을 떠돌았다.
금세 밤이 찾아왔다.
들떴던 태양은 지고 차가운 달빛이 창가에 내려앉았다.
수정구에선 솔과 안드레, 패잔병들의 통신이 고즈넉이 울렸다.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목소리.
깊은 밤 듣기 좋은 소리다.
곧 황자 또한 이러한 소리를 내리라.
달그락.
창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가득한 흉터.
그러나 그것보다 주변을 내리누르는 흉악한 살기가 더욱 위협적이었다.
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쭈욱 찢어 올렸다.
찾았다.
참으로 방만하게도 의자에 앉아 호위 한 명 없이 잠들어 있는 모습.
‘이리 허무하게 죽을진 몰랐겠지.’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착각했을 거다.
동부 전선 요새 곳곳에서 일어난 암살 건들.
수장을 잃은 요새의 함락.
그때 나타난 황자와 기적적인 책략.
거기까지 좋았다.
거기까지만.
이제 황자의 멱을 따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아니 더욱 커다란 혼란이 찾아오리라.
좋은 복수다.
놈이 발소리 없이 황자의 앞에 섰고.
아직 곱게 감긴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짙은 살기 앞에서도 잠을 잔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죽기 싫어서? 기어라. 빌어라. 그리하면 살려줄지도 모르지.”
“······.”
황자는 답이 없었다.
놈이 곧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팔다리는 모두 잘라야겠다. 그래야 화가 풀릴 테니.”
자신을 상대로 감히 허장성세를 부리다니 오만한 황자에게 충분한 벌을 내려야겠다.
저 길쭉한 팔다리를 잘라 평생 바닥을 기게 만들어야겠다.
놈의 손에 무형의 기가 어렸고.
황자를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뚝, 뚝.
그의 손위로 시뻘건 피가 떨어졌다.
피어나는 짙은 혈향.
곧 나무줄기가 열리더니 피가 쏟아졌다.
환상? 현실?
짙은 피가 달빛을 머금은 채 주변 가득 흘렀다.
위험하다.
그리고 그제야.
감겨있던 황자의 눈이 떠졌고 주변 가득한 피와 같은 그의 진홍색 눈동자가 암살자를 향했다.
두려움, 걱정, 불안함 따위는 없다.
“왔느냐. 네놈이 죽을 장소에.”
여전히 태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암살자를 조롱하는 그 입술엔 고혹적인 미소하나가 떠올랐을 뿐.
격정을 못 이긴 암살자가 무형의 기운으로 황자를 공격하는 순간.
철벅.
쏟아진 피와 이를 머금은 혈목이 회의실 전체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