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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30화 (30/200)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레지스탕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정복 전쟁 동안.

제국과 소국들은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어떨 땐 제국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연합한 중소규모 국가들을 무너뜨렸고.

때론 걸출한 인물이 모래알 같이 흩어진 망국의 병사들을 모아 새로운 국가를 일으켰다.

허나 영광은 길지 않았다.

제국은 지독하리만치 동부를 지켰고 망국 병사들의 의지를 흩으려 했다.

“정신이 죽으면 모두 잃는 거다.”

땅을 차지한 제국은 레지스탕스들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지었고.

이를 빼앗은 레지스탕스들은 제국이 세운 요새를 역이용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반복되는 뺏고 빼앗기는 싸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자신들의 나라를 무너뜨린 제국에 대한 원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과 분노.

어쩌면 모든 게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항상 마음을 괴롭게 했다.

어쩌면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싸움마저 제국의 의도가 아닐까.

동부 전선 너머 합종연횡한 국가들이 그들을 지원해주었으나.

그들의 피로 국가의 안전을 지키려 할 뿐이었다.

이처럼 피 말리는 싸움만이 계속되는 동부 전선 어느 협곡에서.

“황자! 황자가 무명 요새에 나타났어!”

“무명 요새에 제국 황가의 깃발이 꽂혔다!”

“한 요새에 황자가 나타나 황가 깃발을 내걸었다!”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거대 요새도 아닌 숫자로 표기되는 작은 요새에 황자와 황가의 깃발이 나타났다는 소식.

당시 그의 등장을 바라보았던 수백 레지스탕스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제국군만 수정 구슬을 쓰는 건 아니었다.

주변 요새들을 점거해나가던 레지스탕스들이 소식을 듣고선 뜻을 모았다.

둘도 없는 기회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 여겼다.

누구 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주변 요새장들을 비롯하여 요새 간부들이 연이어 암살을 당했다.

덕분에 여러 요새들을 쉽게 점거, 무장 상태를 재정비.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

요새를 되찾는 데 혈안이 된 놈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점령한 요새를 버리고 황자가 있는 요새로 진격할 셈.

그렇게만 된다면.

“고작 그 작은 요새에 붙어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당장 황자의 목숨과 황가의 깃발을 인질 삼으면 자치 구역쯤은 얻어낼 수 있을 거야.”

“독립을 보장받을 수도 있겠지.”

레지스탕스들의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졌다.

황자와 깃발을 인질 삼아 협상 도구로 사용할 생각.

큰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커다란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거다.

그때, 무리 중 유독 덩치가 큰 자가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웃기는 소리들 마라.”

얼굴 전체에 걸쳐 기다랗게 흉이 진 그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황자의 목을 자르고 깃발은 갈기갈기 찢을 거다.”

“이봐 그랬다간 제국 전체가 동부를 휩쓸 거라고.”

“미친 새끼들. 너희 설마 제국을 두려워하는 거냐? 놈들과 싸우는 게 무서워 원수를 살려두겠다는 마음이라면 당장 꺼져라.”

그의 삼엄한 경고에 다른 자들이 시선을 피했다.

“좆만 한 요새 몇 개로 국가를 세울 참이었나? 자치령? 지랄하는군. 결국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빼앗기겠지. 놈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는 네놈들의 뇌는 슬라임이나 다름없어.”

그의 신랄한 비난에 몇몇이 발끈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난!”

쾅! 그가 도끼로 땅을 내려치며 외치자 입을 닫았다.

“요새에 황자의 목을 잘라 내 걸 것이다! 깃발을 찢어 놈의 시체를 감쌀 것이다! 그리하여 숲속, 평야 구석구석 숨어 평생을 싸워왔고 자식들에게도 싸움을 굴레를 내려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의 눈에 열망과 광기가 차올랐다.

“보아라! 절대적인 제국의 황족도 인간이다! 깃발이 찢어지듯 그들의 영광 또한 언젠간 진창에 처박히겠지! 그러니 모여라! 무기를 들어라! 우리가 함께하면 제국을 질타할 수 있다!”

커다란 흉통 속 숨겨온 진심.

그는 다른 이들과 포부부터가 달랐다.

“그러니 혹여라도 허튼 말을 하려면 입을 다물어라. 저 깊은 무덤에 계신 선조들이 듣고 있으니.”

“······.”

“제국과 우린 공존할 수 없다.”

그들을 이끄는 리더의 선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소식을 들은 망국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틈틈이 들려오는 소식을 미루어 보아 시간이 별로 없다.

어찌 된 일인지 패잔병들이 속속 무명 요새로 모여들었고, 평소 거북이와 같이 숨어만 있던 동북부 공작까지 움직였다.

몰려들기 전에 죽이자.

그리하여 시작된 전쟁.

“성벽에 올라! 모두 요새 성벽에만 오르면 이길 수 있다!”

“방패 머리 위로! 버텨라! 화살이 얼마 없을 거다!”

축적된 경험으로 무명 요새의 전력이 얼마인지 예측.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건만.

“막아! 죽어서라도 막아!”

“버텨! 다들 버텨라!”

황자와 황가 깃발 때문인지 요새 병력들도 악착같이 버텼다.

징그러울 정도.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으나 요새의 병력이 예상보다 많았다.

분명 길목들을 훑으며 왔건만.

황자가 데려온 이들인가?

“뭐야 어느새 이렇게 모인 거야?”

그때부터였을 거다.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몰려온 게.

덫에 들어온 사냥감이 되어버린 기분.

그러나 이미 물러나긴 늦었다.

피와 고함, 살기가 난무하는 성벽 위.

유독 빛나는 은빛 경갑을 입은 자가 기형적인 거검을 든 채 등장했다.

어떤 행동도 말도 안 했건만, 성벽을 오르는 이부터 지휘를 하는 이까지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절한 전장터 한가운데 날카롭게 빛나는 은갑과 더불어 황자의 백금발이 깨끗하게 휘날렸다.

무어라 말할까.

병사들은 황자의 전투 명령을 적들은 황자의 격노를 보고자 했으나.

쿠웅.

“······.”

황자는 그저 검을 옆에 세워둔 채로 성벽 가장 높은 자리에 고고히 섰다.

마치 전쟁터가 아닌 듯, 그저 성벽 아래를 바라보는 장수와 같이 섰다.

그리곤 진홍색 눈동자를 내리깔아 몰려드는 이들을 벌레 쳐다보듯 무심히, 권태롭게 바라보았다.

입가에 맺힌 건 설마.

“미소?”

웃는단 말인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죽여! 황자가 나타났다! 당장 죽여!”

“활! 궁병! 당장 활을 쏴라!”

“창을 던지고 갈고리를 걸어 황자를 죽여라!”

웃음을 본 망국의 병사들이 발작하듯 그의 목숨을 취하려 했고.

“지켜! 황자 전하를 지켜라!”

“뭐해! 당장 방패를 가져와!”

제국 병사들은 황자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방패는 필요 없다. 가서 적들을 죽여라.”

황자는 보호를 요구하지 않았다.

자리에 서서 약간의 비웃음을 띄운 채 적을 오연히 바라볼 뿐.

그가 당당히 선 이유가 뭘까.

황자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이거늘,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적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아군의 사기는 올랐다.

황자 아르한이 성벽 위에 서자 모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했다.

레지스탕스들이 억지로 불안감을 떨쳐내려 할 때.

“뿌우우우!”

“지원군이다!”

“뒤쪽, 적군이 몰려옵니다!”

실제로 그들의 뒤쪽, 솔과 안드레가 규합한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안감과 기대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

[좌측 성벽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혼잡한 난전이 아슬아슬한 수성으로 바뀝니다]

[우측 성벽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수성이 안전한 수성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위 운명 행운에 개변 점수를 투자합니다! 구사일생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당신을 노리는 화살 중 어느 것도 당신을 해하지 못합니다]

성벽에 선 순간.

치우쳐져 있던 병력의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주변에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진득한 피 냄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당히 적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쏘아내는 화살은 내 운명을 침범치 못했다.

놈들은 그것만으로도 불안해했고, 병사들은 사기가 올랐다.

황자로서의 고귀함과 오만함으로 굳이 무언갈 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압도했다.

물론 그들의 불안감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면 더욱 효과적이겠지.

뒤쪽 안드레와 솔이 이끄는 병사들이 나타난 순간.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장소의 운명 수성이 대승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위 운명 참패, 죽음, 치욕, 함락을 동시에 포식하였습니다. 많은 운명을 포식하여 운명 개변 점수 및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하위 운명 책략의 크기가 커집니다. 새로운 속성 허장성세를 획득했습니다!]

준비했던 운명의 조각들이 드디어 들어맞았다.

앞에는 굳건한 성벽, 뒤에는 몰려든 병사들 사이에 낀 레지스탕스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혼란이 가득했다.

매복의 선봉에는.

“솔이 왔어요!”

“전하! 도착하였습니다!”

솔과 안드레가 섰다.

며칠간 고생을 했는지 꼬질꼬질한 몰골이었으나 적을 공격하는 기세만큼은 꽤 살벌했다.

안드레야 본디 평민 출신으로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만큼 출중한 인물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솔은 전생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빠르게 전투에 적응해 나갔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핫! 솔! 솔이 왔어요!”

아니 적응 넘어 전투에 넋이 나가버렸다.

아군도 적군도 둘을 보며 도망가는 상황.

[솔의 중요 운명 전투 감각이 개화를 앞두고 꿈틀거립니다]

“솔? 솔! 정신 차려!”

“안드레! 다 죽여버려!”

저 둘은 걱정 없을 것 같고.

찬찬히 마무리되어가는 전쟁터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크아악! 다 죽어! 죽어라! 이 제국의 개들아!”

거한 하나가 도끼를 휘두르며 거칠게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사기가 꺾인 망국의 망령들 사이, 홀로 의지를 불태우는 자.

“뭣들 하는 거냐! 다들 무기를 놓지 마! 싸워라! 싸워! 황자의 목만 벤다면 충분하다! 뜻을 이루는 거야!”

어떻게든 병사들을 이끌려 했으나 이미 기세는 완전히 꺾인 상태.

놈을 안다.

본래라면 동부 전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을 인물.

수장이 암살당한 요새를 점거, 어디선가 신비를 얻어 망국의 병사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운다.

이후로는 끝없는 전쟁.

자신이 꼭두각시인 줄도 모르고 생명을 불살랐던.

불쌍한 인생.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다른 국가의 병사들인 줄도 모르고.

자신이 국가를 세웠다 자랑스러워했던 머저리.

발악과도 같은 싸움에 문득 불쾌감이 올라왔다.

비천한 주제에 고귀한 자가 되려 하는 놈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군의 오만함과 패악이 꿈틀거렸다.

놈을 지켜보길 잠시.

곧 놈 홀로 남아 발작하듯 도끼를 휘둘렀고.

“너희는 침략자들이다! 우리의 땅을 빼앗고 우리의 문화를 빼앗고 우리의 후손을 빼앗았어! 어떻게 그렇게 당당히 날 보는 거냐! 제국의 개새끼들아! 너희의 땅도 그리 빼앗길 거다!”

버럭버럭 외쳐대는 통에 병사들이 주춤했다.

침략자라는 단어가 마음을 찌른 모양.

이를 바라보던 내가.

“쯧.”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그리곤.

“오도록 두어라. 나를 저리 뵙고 싶어 하는데 뵈어야지.”

놈을 성벽 아래로 불렀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자가 그를 짓밟은 황자 앞에 섰다.

내가 선 성벽과 놈이 선 땅의 고저가 마치 놈과 나의 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놈은 피를 흘리면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반면 나는 오만한 자세로 아래를 깔아보는 시선.

이러면 내가 악역이 되는 건가.

기분이 썩 괜찮았다.

“올라와라. 병사들이 널 죽이게 두어선 안 되겠군.”

나의 말에 놈이 입술을 쭉 벌리며 웃고는.

“이 개 같은 침략자 새끼! 네놈들의 추악한 악행을 떠들까 두려우냐? 차라리 주변 가득한 개들을 시켜 날 죽여라! 시체를 모욕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란 말이다!”

“올라와라.”

“그래! 올라가 목을 날려주마! 울며불며 살려달라 애원할 네놈의 꼴을 보여주면 되겠군! 그리하면 죽어도 여한 없이 죽겠다!”

놈이 성큼성큼 성벽을 올랐고.

“전하! 위험합니다. 굳이 이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하?”

“전하! 신 안드레가 싸우겠습니다!”

곳곳에서 나의 선택을 만류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시끄럽다. 모든 선택은 내가 한다. 두어라.”

단박에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놈은 모를 거다.

본래 자신의 운명을, 비록 전투만이 가득한 삶이었으나 그리 원하던 국가를 일궜고 모든 게 가짜였음을 알게 된 후 느꼈던 절망을.

어찌 보면 나의 전생과도 닮았다.

놈의 운명을 뒤틀고 빼앗았으니.

마지막 예의로 생명을 거두는 것도 내가 해야겠지.

[신비 점수를 거검 브레이커에 투자합니다! 개변 점수 일부를 추가 투자합니다!]

[검을 감싼 녹을 벗겨냅니다! 브레이커의 운명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스스스, 신비 점수와 개변 점수를 함빡 머금은 브레이커의 표면 가득했던 녹이 바스러지듯 휘날렸고.

묵색의 강인해 보이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성벽위에 올라선 놈이.

“침략자, 너희의 역사를 알고 있나? 너희의 잔혹함을! 수많은 학살들을 알고 있느냔 말이다! 이 땅에 융성했던 수많은 문화와 사람들이 어찌 죽었는지-!”

무어라 떠들어댔으나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모습을 드러낸 브레이커와 심장에 감도는 적염을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심장 주변을 휘도는 불의 고리에서 넘쳐 흐르는 불을 끌어내고 압축하여 한줄기 선으로 만들었다.

선을 미리 정화한 신체 내부의 길로 이끌어 손을 통하여 검으로 전달.

불을 매개로 몸과 연결된 브레이커가 달아올랐다.

그때까지도.

“그래! 왕성을 파괴하고 피를 강처럼 흘렸지! 그게 너희의 역사다! 제국의 역사는 약한 이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 역사란 말이다!”

놈은 떠들어댔다.

싸움은 언제 하려는지.

그래서 놈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본디 강자와 약자의 역사는 다른 법. 네놈이 떠드는 말은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다.”

“···뭐?”

단 한 마디에 놈의 말이 뚝 멈추었다.

눈 가득히 올라오는 핏발, 바득바득 부서질 듯 갈아대는 이.

온몸이 붉어질 정도의 굴욕과 분노.

굳이 나의 얄미운 입은 이미 터질듯한 분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약해서 패했고 패했기에 수모를 당했다.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켜켜이 쌓인 역사에선 흔한 일이다. 역사 속 모든 패자의 복수라도 해줄 셈이냐?”

“죽여버린다!”

이성을 잃은 놈이 도끼를 들고선 달려들었다.

방어 따윈 생각지 않는 거친 움직임.

놈을 상대하기 위해 달궈진 브레이커를.

우르르릉!

깨웠다.

불꽃을 머금은 거검이 사방으로 불티를 뿜어대며 사납게 울었고.

비죽비죽 솟은 기형적인 날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양손에 치켜든 불꽃과 검의 울음이 거칠었다.

문득 문득 기침하듯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메케한 냄새를 풍겼다.

이윽고.

“으아아악!”

놈은 우렁차게 기합을 넣으며 나는 고요히 힘을 다해 부딪혔다.

거대한 도끼와 거검이 몸을 맞댄 순간.

콰르르륵, 브레이커의 검신이 놈의 도끼를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철 부서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어떻게든 버티려 했으나 도끼는 불꽃을 피처럼 흩날리며 갈라졌고.

도끼 한 자루로는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 깨어난 브레이커의 허기를 달래기에 모자랐는지.

“끄아아악!”

철을 잡아먹고도 더욱 내달려 그대로 왕이 되었을 거한의 몸까지 갈라버렸다.

불꽃과 피를 뿌려대는 도끼와 주인의 죽음이 얼핏 닮았다.

얼굴에 피가 가득 튀었다.

일격에 끝난 싸움.

철퍽, 떨어진 놈의 몸.

잠시 입이 움직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으나.

“······.”

청명한 하늘만을 눈동자에 가득 담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원망을 토하고자 했는가, 아니면 자신이 바라던 이상을 부르짖고자 했는가.

죽었기에 알 수 없다.

브레이커에서 불을 거둔 후 놈의 눈동자를 감겨주었다.

그게 녀석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구구절절한 변명도 어설픈 위로도 필요 없다.

그저 놈과 난 생명을 걸고 싸웠고 결과만이 남았다.

어찌 되었든.

[상대의 핵심 운명 망국의 왕을 포식합니다! 거대한 운명입니다! 신비 점수와 개변 점수를 획득합니다! 흘러넘친 운명이 당신의 주변에 흐릅니다]

[신비 운명 포식자의 크기가 한층 거대해집니다! 더욱 많은 운명을 포식할 수 있습니다!]

[운명 포식자의 기능이 강화되어 더욱 거대한 사물에 신비와 개변 점수를 투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새로운 하위 운명 승리를 얻었습니다!]

끝없이 떠오르는 글자들을 보며 실감했다.

놈은 죽음과 패배라는 결과를 받았고 나는 승리와 생명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그거면 되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전쟁터를 타고 흐르는 원한 어린 바람이 끈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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