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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34화 (34/200)

황자가 북부에 도착했다

제국 북부, 흔히 만년 동토라 불리는 곳.

일 년 중 반 이상 눈보라가 몰아치고 드센 추위에 시체마저 얼어 썩지 못하는 곳.

몰아치는 눈, 하얀 풍광 속에 갇혀있다 보면 시간과 감각마저 묻히는 느낌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철학자들 중 북부인들이 많았다.

누구는 생각할 시간이 넘쳐서라고도 했고 누구는 쉽게 미치는 환경이라서라고도 했다.

하지만 직접 북부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말할 테다.

그들이 미치지 않을 만큼 강건하기에 철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누구라도 미쳐버릴 듯한 풍경을 깊은 고찰로 이겨내어 자신만의 불꽃을 틔우는 것이라고.

추위와 눈, 죽음을 이겨낸 자들은 때로 육체적으로 때로 정신적으로 자신만의 불꽃을 틔워내었다.

북부인들은 굳건한 정신과 신체에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스스로가 제국의 방벽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끔찍한 땅에서 살아남은 북부인이기에, 강하디강한 북부인이기에 제국을 지켰노라고.

그래서인지.

“황자 전하가 이 동토를 견딜 수 있을까요?”

“글쎄. 봐야 알겠지.”

“볼 것도 없습니다. 황자궁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한 자가 어찌 북부의 추움을 견디겠습니까.”

“어허, 말이 과하다. 굳이 분쟁을 만들 이유가 있겠느냐.”

“심지어 아르한 황자입니다. 아르한 황자. 그 악명높은 황자요. 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해라. 그 이상은 모욕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버지-.”

“그만하라고 했다. 듣는 나도 마음이 어지러워지는구나.”

북부인들은 때로 다른 이들의 유약함에 민감하게 굴었다.

아비의 엄중한 경고에 그제야 아들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인 불만이 가득하였다.

북부를 지키는 드보르작 백작가.

한낮의 북부 플랫폼, 변경백인 아비와 이후 백작가를 이끌 아들 둘이 모여 곧 나타날 황자를 기다렸다.

북부 열차 정거장 위로 내리는 눈이 차가웠다.

아비가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악마들의 습격이 있었다더군.”

“심상치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북벽 너머가 소란스러운데 갑자기 악마들이 등장하다니요.”

“모닥불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구요. 관리자들도 다들 그 모양이니.”

“그래서 하다못해 마법 다루는 7 황자라도 왔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제국의 북부를 지키는 일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이어지는 아들들의 불만에 아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왕성했다.

“바이올렛은? 그래도 아르한 황자가 오는데 나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아가씨께서는 기사단 임무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떠나셨습니다.”

“아니, 임무를 떠났다고? 인사나 보고도 없이?”

아들들도 그렇고 하나 있는 딸래미도 그렇고 성격들이 이렇게 대차서야 어떻게들 정계에 적응할지.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노집사가 작게 미소지었다.

지금 백작이 젊을 적 중앙 정계에 진출한 첫날, 북부를 무시하는 귀족의 머리통을 와인병으로 내리친 사건을 잊어버리셨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제분들은 오히려 얌전한 편이거늘.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저 주름진 얼굴로 웃을 뿐.

“그래서 맏이는 어디쯤 왔다던가?”

“방금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나이다.”

딱 보고를 들은 순간.

뿌우우우-!

저 멀리 희뿌연 눈보라 사이 증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열차가 보였다.

일정한 바퀴 소리와 함께 점차 뚜렷해지는 형체.

황자가 도착했다.

“모두 예를 갖추라.”

변경백이 먼저 허리를 굽히며 황자를 맞이하려다.

“뭣들 해? 지금.”

아들들의 꼿꼿한 허리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무엄함을 용납하지만 직접 표하는 건 시기가 좋지 않다.

장성한 아들들을 향해 오랜만에 싫은 소리를 하려 하기 전.

“어, 아버지 저걸 좀 보십시오. 그러니까 저기 황자 전하가 타 있다는 거죠?”

“어어, 어어어? 멈춥니다. 저거 멈추는데요?”

둘의 기함에 그들의 아비인 발자크 백작이 고개를 들었고.

“잠깐. 분명 맏이가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 또한 의문을 표했다.

눈보라를 뚫고 막 플랫폼으로 들어선 열차의 상태는 엉망.

객실들은 어디다 떨궜는지 단 하나만 남은 객실.

그마저도 갈기갈기 찢어져 엉망이었다.

심지어 열차는 생명을 다했는지 그들이 선 플랫폼의 중앙까지도 오지 못하고 초입에 간신히 멈춰 섰다.

잠시 서로를 둘러보던 북부인들이 슬며시 무기를 쥐었다.

악마들이 타고 있나?

특히 백작의 표정이 복잡했다.

설마 황자가 죽었나? 장남은? 저런 열차에 황자가 있을 리 없다. 악마들의 함정인가? 황자와 장남은 다른 루트를 통해 오고 있는가?

가문을 맡은 뒤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이 다가선 그때.

철컹, 철컹, 콰앙!

열리지 않던 문을 누군가 거칠게 흔들더니 그대로 부수었고.

길게 뻗은 다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북부 플랫폼을 즈려밟으며 드러난 건.

“전하?”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

전투를 치렀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깨끗한 백금발과 차려입은 백색 코트가 몰아치는 눈과 어울렸다.

가득한 백색 사이 진홍색 눈동자만이 뚜렷한 존재감을 뽐냈다.

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발자크 백작을 마주하곤.

“오랜만이오. 장인어른.”

아, 아직은 아니지?

고약한 농담을 건네곤 씩 피우는 오만한 표정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발자크 백작의 얼굴에 맺힌 약간의 분노와 혐오감을 마주하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곧.

“와하하하! 전하께서는 여전히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이 백작이 매번 감탄합니다! 와하하하하!”

표정을 감추며 크게 웃어젖혔다.

주변에도 웃음을 강요하는 행동이 우스웠다.

잠시 모두의 반응을 지켜보려니.

늙은 집사와 몇몇 가신들은 따라 웃었으나 아들 둘은 웃지 않았다.

아니 사실 대부분이 웃지 않았다.

그중 웃는 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아두었다.

북부인들을 흔히 미련한 곰이라 조롱하는 경우가 많지만, 곰은 미련한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와 세상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곰만큼 위험한 동물이 없지.

그런 의미에서 백작이 영민한 곰이라 다행.

아들들은 좀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겠다.

“백작의 반응이 좋아 자꾸 농을 치게 되는군. 퍽 재미있겠어. 북부 생활도.”

내 담담한 말에 백작을 비롯하여 주변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오만하며 패악스럽다던 황자가 남을 칭찬하다니.

백작마저도 놀란 눈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그저 웃으며 그들 사이를 걸었다.

내 뒤를 따르는 건 안드레와 솔을 비롯한 정보부 요원 몇 명뿐.

백작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어왔다.

“혹여 장남이 마중을 나가지는 않았습니까? 악마에게 습격을 받았다 들었는데요.”

“만났다. 악마도 백작가의 장남도.”

“그럼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뒤따라 오는 중입니까?”

“같이 오지 못했네. 보다시피 객실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야.”

모두가 웅성거렸다.

백작이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침묵했다.

그의 고갯짓에 수하 몇이 플랫폼을 떠났고 백작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식에 관해서는 차마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모양.

“혹여 악마들이 쓰러진 곳에 눈이 되어 덮였습니까? 장남이?”

“그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를 지키려다 죽었다면.”

내 담담한 물음에 백작이 이를 물기를 잠시.

“황손을 지키기 위해 죽은 아들의 명예를 드높여야겠지요. 그뿐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지금!”

나머지 두 아들이 기함을 토했으나 백작은 눈을 좁혀 날 노려볼 뿐.

치열한 계산이 머릿속에 오가는 듯했다.

발자크 드보르작 백작.

전생에도 지금도 북방을 지키는 방패이자 변경백.

전생엔 북방과 자식들마저 모두 잃고선 눈 위에서 쓸쓸히 죽어갔던 북부의 기사.

문득 한숨이 나왔다.

이런 괴물같은 자가 그리 허무하게 죽을 정도라면 대체 북부에 몰려오는 한풍은 얼마나 거대하단 뜻인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나와 다르게 변경백은 당장 아들의 안위가 걱정인 모양.

스산하게 빛나는 눈, 점점 커다랗게 변하는 덩치.

순식간에 커지는 존재감에 안드레와 솔이 긴장했다.

명백한 위협.

심지어 그가 진심을 내보이자.

뒤에 있는 북부인들도 딱히 백작을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부추기고 싶어 하는 표정들.

그런 그들을 훑어보다가.

“그랬다면 내가 그 시체를 가져왔겠지. 괜한 걱정들 하는군. 내가 다른 일을 명했어. 정보부 요원들을 몇 떼어 그들과 함께 악마들이 나타난 지역을 수색하라 했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며 본인도 원했네.”

툭 사실을 던져주었다.

그리곤 그를 향해 씨익 미소지었다.

“백작의 본심은 잘 확인했네. 퍽 살벌하군. 허나 좀 더 수양이 필요하겠어. 그리 쉽게 깨져서야 제국의 방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자신의 심계를 파악 당했다는 사실에 백작이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고.

“자제들은 확인할 깊이도 없더군. 백작. 실망이야. 아주 실망이란 말이지.”

자식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본디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만이 가득했던 플랫폼에 후끈한 열기가 피어났다.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 사이를 걸었다.

플랫폼 밖으로 나서자.

하얀 증기와 덮인 눈이 가득한 북부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모닥불로 가야겠다. 안내하도록. 백작도 같이 갈 텐가?”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모닥불 관리자들이 싫어할 텐데요.”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주지. 따라오도록.”

유독 높다란 탑,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유독 시뻘겋게 빛나는 곳을 보며 마차에 올라탔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불만, 역경, 분노, 인내, 부당한 대우, 명예, 책임감, 강요된 희생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상대의 운명이 중요한 갈림길에 놓여있습니다. 중요 운명 반역과 충성, 패배와 승리가 엿보입니다]

[대상의 운명과 장소의 운명이 긴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장소의 운명 중 일부 더러운 오물, 사그라드는 불꽃을 확인하였습니다!]

새로운 운명들이 소란스럽게 존재를 알렸다.

**

북부의 권력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역시나 북부 전체를 책임지는 드보르작 백작가.

하나는 바로 북부의 신비이자 변경백의 존재 이유라는 제국의 신비 모닥불.

동토에서 여태 북부인들이 살 수 있었던 이유.

북부 중심 거대한 탑에 과거 건국제가 일으켰다던 거대한 불을 보관해 놓았으며.

이곳에서 퍼져나간 열기가 북부인들의 생활을 보장했다.

각 영지, 요새, 집, 건물에 온기를 전해주기에.

허나 두 집단 간의 사이는 오랜 앙숙이었다.

모닥불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북부를 먹여 살리기에 당연히 백작가가 모닥불을 섬겨야 한다 했고.

백작가 입장에선 보호받는 이들이 북부의 주인행세를 하려 하니 답답한 노릇.

백작이 황자의 비위를 맞추려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황자가 자신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관리자들의 편을 들면 피곤해지니까.

“모두 준비해. 황자 전하께서 오시면 선물을 드리고 극진히 맞이하도록.”

“다들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한다. 여기 계시는 동안 최대한 잘 보여야 해.”

“그래야 백작가 놈들이 함부로 못 굴지.”

모닥불도 마찬가지 생각.

신비를 관리하는 관리자들 또한 황자의 가호를 얻기 위하여 여러 선물을 준비했다.

또한 황자가 미리 보낸 모닥불 관리자 암살 건 조사 및 보호를 맡긴 마법사와 기사들에게도 극진히 예를 다했다.

“다들 황자 전하께서 오시면 말씀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것저것 찔러 준 것도 많았다.

그렇기에 청익 기사단과 3 전투 마법사단 또한 그들에게 호의를 갖고 대했다.

“걱정 마십시오.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자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어느새 친해진 그들이 서로 담소를 나눌 때.

“황자 전하 납시오!”

후끈한 모닥불 보관소 앞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가장 앞, 백작의 얼굴이 보이자 관리자들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작게 들리는 욕설들.

이윽고 무리의 중앙, 북부 백작가에서 가장 호화로운 마차가 멈추어 섰고.

달칵.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한의 고귀한 자태가 드러나자 관리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온통 눈이 가득한 북부이나 모닥불 주변만은 흙이 드러난 땅.

그가 내리자.

“어찌 이런 누추한 마차로 고귀한 전하를 모셨단 말이오. 백작. 부끄러움을 아시오.”

“쯧, 몸을 단련할 줄만 알지 진정한 고귀함은 모르니.”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고귀한 자태를 지니셨습니다. 평생 신비를 보아온 눈에 더한 신비이옵니다!”

관리자들이 허리를 굽힌 채 백작을 깎아내리며 황자에게 아첨했다.

이에 아르한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니, 따라온 북부인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런 꼴을 보여주러 우릴 불렀단 말인가.

이에 분위기를 탄 몇몇이 마치 보란 듯이 준비한 예물을 크게 떠벌리며 진상했다.

“전하, 북부 깊은 곳. 가장 깨끗한 백설수정을 장인의 손으로 깎아 만든 술잔이옵니다. 하나로는 전하의 고귀함을 감당할 수 없어 세트로 준비하였나이다.”

“전하 이에 어울리는 술 또한 준비하였습니다. 100년 된 설산의 얼음과 혹한의 땅에서 자란 각종 약초를 모아 담은 최고급 약주입니다. 잔에 어울리게 병 또한 백설수정을 깎아 만들었나이다.”

“전하, 지내시는 동안 몸이 상하지 않도록 백색 늑대의 털로 만든 코트를 준비하였습니다. 안에는 특별히 모닥불이 남긴 재를 발라 보온 효과를 더하였습니다. 단추는 예티의 이빨을 깎아 만들어 전하의 용맹을 더해줄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황자의 얼굴엔 점점 더 만족스러운 표정이 북부인들의 표정엔 경악이 번져나갔다.

대체 어찌 저렇게 많은 돈을 벌었단 말인가.

백작가에도 백설수정으로 만든 잔은 가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것 하나뿐, 애지중지하며 사용하고 있건만.

그걸 세트로 그것도 모자라 병으로 만들다니.

심지어 매번 추운 겨울, 북부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도움을 부탁해도 돈 한 푼 내놓은 적 없는 자들이다.

북부인들의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분노가 솟았다.

지금껏 이 정도로 호의호식을 하여놓고 매번 백작가를 탓했는가!

“헌데 이리 많은 선물을 준다면 너희는 이제 남은 게 없지 않겠는가? 북부에서 어찌 살아가려고?”

“전하를 위한 선물이라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또한 아직 드릴 것이 남았사오니. 심려 놓으소서.”

황자와 관리자들의 웃음이 울렸고.

웃음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검병에 북부인들의 손이 올라갔다.

우리가 차가운 북풍을 막아내는 동안 저들은 저런 부를 축적했단 말인가!

우리의 피로! 우리의 고통으로!

분노한 이들의 얼굴에 핏기가 몰렸고 몇몇이 더운 숨을 내쉬며 떨었으나.

황자는 그저 선물에 취한 듯 웃기만 했다.

가증스러웠다.

저자가 제국을 통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두려웠다.

물론 그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황자가 직접 값비싼 코트를 입고선 술병을 받아들었다.

제국에서도 내로라할 정도로 부유한 로이스 가문에도 없는 백설수정으로 만든 술병이라.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 이거 깨질 염려는 없는 것이냐? 값비싼 병이, 값비싼 술이 망가질까 걱정인데.”

“백설수정은 차가움으로도 유명하나 진정한 가치는 그 단단함에 있습니다. 그걸로 땅을 내리치셔도 끄떡없을 테니 걱정 마소서.”

“그것참 다행이구나. 사람 머리를 쳐도 멀쩡하겠어.”

하하하, 하하하하하!

황자의 농담에 백작가 사람들을 빼놓고 선 모두가 웃을 때.

뻐억!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황자가 술병을 휘둘러 앞에 있던 관리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어, 어어?”

맞은 놈이 풀썩 쓰러졌고.

황자가 다시 놈을 내리쳤다.

손을 휘적거리며 막아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무감정한 표정으로 손을 계속 내리쳤다.

연속해서, 계속, 피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순식간에 주변이 침묵에 빠졌다.

둔탁한 타격음과 신음, 술이 찰랑대는 소리만이 울렸다.

튀어 오른 피가 황자의 얼굴과 방금 선물 받았던 하얀 털코트에 튀었다.

하얀색과 대비되는 피가 유독 붉었다.

놈의 숨이 끊어지고 나서야.

술병의 뚜껑을 따 시체에 붓고는.

“운이 없었구나. 맨 앞에 서지 않았다면 이리 죽지는 않았을 텐데.”

황자가 태연히 놈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곤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독한 술과 술병에 진득하니 묻은 피가 한데 섞여 황자의 입에 쏟아졌다.

벌컥, 벌컥, 벌컥.

마치 피를 마시는 듯한 모습에 모두가 움직이지 못했다.

심지어 백작마저도.

황자의 붉은 눈동자가 광폭한 광기를 머금었다.

그가 술병 뚜껑을 닫고선 시체 바로 옆에 있던 놈에게 다가갔고.

“어어, 어어어. 저, 전하!”

놈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선 뒷걸음질 치자.

“감히, 감히 제국의 신비를 팔아 돈을 벌어들였나. 답해라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지? 개새끼들. 고귀한 내가 비천한 너희들이 주는 선물에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았나?”

황자가 성큼성큼 다가가며 도망치는 놈들의 머리통, 어깨 할 것 없이 사방을 후려쳤다.

“답해! 이 벌레 새끼들아! 신비를 팔아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혈을 짜고 황가의 재산을 빼돌렸어! 건국제의 신비로 얼마나 네놈들의 배를 불렸어!”

그렇게 놈들을 후려 패던 황자가 문득 백작을 쏘아보더니.

“뭐하나 백작. 이대로는 나 혼자 다 죽여버리겠는데. 제국의 살을 파먹는 벌레들을 잡을 생각이 없나? 아니면 지금 즐기는 건가?”

으름장을 놓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작이 화들짝 놀라며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백작과 뒤에 선 북부인들을 보며 명령했다.

“황자가 명한다. 모조리 죽여라. 아니면 내 앞에 데려와라. 직접 죽일 테니.”

황자의 포악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피와 죽음, 충격만이 남은 자리.

피범벅이 된 채 만족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웃는 황자만이 태연했으며 오롯했다.

그제야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온몸에 돋는 소름과 공포 속에서 미친 황자가 북부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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