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 정돈 찾아봐도 되잖아?
북부의 폭설은 모든 죽음과 모든 비극 위를 하얗게 덮었다.
아무리 끔찍한 광경도 쌓이는 눈과 추위 속에선 무의미했고 북부인들 또한 덮이는 눈을 놔두었다.
속이야 어떻든 위를 덮은 눈은 하얗고 맑으니까.
안을 뒤집기 시작하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수도, 동부를 거쳐 올라왔다는 황자는 그야말로 미친 불꽃과 같이 북부의 고요함을 살라 먹었다.
“자, 잠깐 황자 전하! 증거도 없이 이리 죽일 순 없는 법입니다!”
“전하를 위한 선물을 준비한 것이지 불을 팔아먹었다는 정황이 어디 있습니까!”
“전하 신비를 관리하는 자들을 이리 대하시다니요! 온갖 암살과 몬스터들의 위협 속에서도 신비를 지키는 책무를 다하였습니다!”
방금까지는 황자의 폭력에 놀랐던 자들이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가져온 선물이 증거이다. 백작! 검을 뽑아라! 황족으로서 즉결 심판을 명하겠다. 만일 거짓이라면 내 체면을 깎아서라도 사죄하지! 내 체면과 계승권을 걸겠다!”
황자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가 찔끔 숨을 삼켰다.
황자의 계승권.
이는 흔히 귀족들이 말하는 명예와 직위 그 이상.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백작! 죽이라 명했다! 뭐 하는가!”
황자가 붉은 눈을 빛내며 패악스럽게 명했다.
차마 검을 뽑아 모두를 참할 수 없음에 백작이 망설이자.
“그대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뜻이로군. 오냐 내가 죽이겠다. 설! 거검을 내놓아라!”
황자가 결심한 듯 불같은 분노와 광기를 터뜨리며 술병을 집어던지고는 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사가 힘겹게 들고 있는 거검을 건넸다.
저걸 휘두르면 진짜 피바람이 불리라.
번쩍번쩍 광폭한 빛을 내뿜는 황자의 눈이 앞에 있는 관리자 수십쯤은 쉬이 죽일 거란 사실을 보여주었다.
광폭하며 오만했다.
어떠한 반론도 허용치 않겠다는 분노.
폭군이 될 재목이라더니 실로 그러하지 않은가.
모두가 타오르는 듯 뜨거운 황자를 보며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차가운 삶이 익숙한 북부인들에게 이러한 비이성적이며 괴랄한 뜨거움은 처음.
“오늘 피를 좀 많이 봐야겠다.”
황자가 스산하게 목소리를 깔며 거검을 휘두르려 하기 전.
“전하! 전하! 잠시만요! 잠시만요!”
“전하! 아직입니다!”
막 모습을 드러낸 한 젊은 여인과 중년인이 급히 황자를 향해 달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연노란 머리가 흐트러졌다.
옆에 중년인은 꽤 오래 달렸음에도 숨 하나 차지 않는 모양.
백작이 그들의 걸어온 길을 바라보다 미간을 찡그렸다.
중년인의 발자국이 요상했다.
황자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지 휘두르려던 검을 멈추었다.
폭주하던 황자를 멈출 정도라니.
그제야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깨달았다.
황자가 진정 아끼는 이들은 마법사나 기사들이 아닌 저 둘이라는 것을.
백작도 관리자들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이들.
그저 시녀와 시종이라기에 마음대로 다니게 두었다.
저 둘이 지금껏 무엇을 하고 다녔더라?
자리에 있던 모두의 등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차가운 바람에도 몸에서 후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잠시 관리자들을 혐오 어린 눈으로 바라본 중년 집사 알프레드가 황자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알프레드가 전하를 뵙습니다.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소피아가 전하를 뵈어요.”
둘의 인사에 황자가 솟아오르는 광기를 억누르며 되물었다.
“말린 이유가 있을 터. 말하라. 인사는 추후에 하도록 하지. 지금 좀 죽일 녀석들이 있어서 말이야.”
당당한 발언에 모두가 침을 삼키는 사이.
“전하, 잠깐만 참아주소서.”
“이유가 있나?”
“이유 없이 죽이기 이릅니다.”
황자의 물음과 알프레드의 대답에 관리자들의 마음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일었다.
그런 그들의 기대를 알아챈 알프레드가 말없이 조소를 보내며 손에든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그들의 비리를 기록한 증거입니다. 증거를 쥐고 죽이소서. 그래야 뒤탈이 없을 것입니다.”
“외에도 그들에게 협조한 사업체 목록들이어요. 그들 또한 오랫동안 북부의 고혈을 빨아먹었으니 한꺼번에 벌하여야 함이 마땅해요.”
“그래, 알고 죽여야 잘 죽이지. 맞는 말이야. 알프레드.”
이어 소피아가 황자의 패악을 응원했다.
서류를 살피던 아르한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알프레드와 소피아를 북부에 먼저 보내면서 내렸던 명령.
관리자들의 비리와 이들을 도와 북부를 좀먹는 자들을 찾아라.
둘은 실로 훌륭히 일을 수행했다.
황자의 웃음이 점점 커지자.
덩달아 손에 든 거검도 같이 웃었다.
피를 함빡 머금을 생각에 신나는 모양.
저자는 미쳤다.
“배, 백작. 나를 잡아주게. 부탁이야.”
“나도 잡아주시오. 부탁이오.”
“모든 죄를 고백할 테니 차라리 잡아가 주시오!”
곧 죽어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이들이 일제히 발자크 백작에게 다가가 체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저 미친 황자는 분명 여기서 모두를 죽일 거다.
방금 보았지 않은가.
저자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남의 머리통을 깨어 죽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아르한이 입꼬리를 깊게 끌어올렸다.
“어찌 백작은 나의 행사를 막을 생각인가?”
“······.”
백작의 표정이 복잡했다.
사실 백작가는 모닥불 관리자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랜 세월 희생한 것은 본인들이건만 영달을 누리는 건 저들이었기에.
북부의 추위를 막은 건 자신들이건만 저들이 불을 쥐고 권력을 휘둘렀기에.
과거 변경백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황실의 정책.
본디 북방에 살던 동토인 중 하나였던 그들을 믿지 못해 내린 굴레.
잠시 황자를 살피던 백작이.
“우선은 제국법을 따르겠습니다. 모두 잡아 가두고 조사를 하지요.”
“으음, 생각과는 다른데. 당장 이들 모두를 죽이려 할 줄 알았다. 원한이 깊지 않은가?”
“북부인은 야만인이 아닙니다. 원한보다는 제국의 법이 지엄합니다.”
“나는 야만인이란 뜻인가?”
“계속 죽음만을 강요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백작의 직언에 황자가 피가 번져 붉어진 얼굴로 씨익 웃었다.
마치 지금은 백작이 수도에서 온 샌님 같았고 황자가 북부의 거친 산악을 닮은 맹장 같으니.
“재미있는 꼴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어찌 마음에 들었나 모르겠군.”
황자가 방글방글 웃으며 백작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 광기가 날카로워 백작이 억지로 기세를 피웠다.
안 그러면 휩쓸릴 것 같아서.
그런 백작을 보며 황자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던져주었다.
알프레드와 소피아가 조사한 비리 문서들.
“백작이 갖고 가 나흘 안에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나흘 말씀입니까.”
“너무 긴가?”
“짧습니다.”
“닷새부턴 검을 들고 내가 직접 그들을 찾아갈 거야. 뒤에 말은 안 해도 알겠지. 자네는 잡고 나는 죽인다. 죽이기 싫으면 한시 빨리 잡아들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
“백작.”
둘의 시선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말씀하소서.”
백작이 한발 물러섰다.
지금 주도권을 가진 자는 황자였기에.
“하얗게 덮였다 해서 깨끗한 게 아님을 알겠지. 아파도 단호히 잘라내도록. 안 그러면 모두 죽어. 내가 죽이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테니 알아서 잘해. 직접 나설 일 없이.”
황자가 묘한 웃음으로 백작을 바라보았고.
백작이 흔들리는 동공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다들 가보도록.”
황자의 축객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모두가 모닥불 주위를 떠났다.
백작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덮인 눈을 걷어내고 더러운 오물과 시체를 치워야 하리라.
그중 자신의 가신은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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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백작의 하위 운명 불만, 분노, 부당한 대우를 포식합니다! 중요 운명 반역과 패배의 크기가 줄어듭니다! 포식 점수를 대량 획득했습니다!]
[장소의 운명 더러운 오물 일부를 치워냈습니다. 다른 하위 운명들이 변화합니다! 이후 변화에 따라 개변 점수를 추가 획득합니다!]
백작과 북부의 운명 외에도 주변에 있던 자들의 운명 변화가 시끄러웠다.
관리자들의 운명엔 죽음, 파산 등이 북부인들의 운명엔 작은 기대, 공포 등이.
생각 외로 두 세력의 음영이 극명히 갈렸다.
본래라면 눈에 덮인 비리를 어쩌지 못하고 북부인들 전체가 스러졌겠으나.
이번엔 다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위 운명 광기, 패악, 오만이 더욱 크기를 불립니다! 커진 광기에 휩쓸린 자들의 운명이 이리저리 방향을 잃습니다]
[광기에 새로운 속성 혼돈을 추가합니다. 어떤 운명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혼돈의 속성이 변화합니다]
[다가오던 운명 암살과 계략, 속임수를 무마하였습니다. 운명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나의 운명도 여러모로 변했다.
관리자 놈들이 무언가를 획책했던 모양.
허나 이젠 관계없는 일이 되었다.
모두 죽거나 패망할 테니까.
북부인들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며 물러나는 동안.
“잘들 지냈나?”
내가 선연히 웃으며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향해 안부를 물었고.
“오셨나이까. 청익 기사단이 아르한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기다렸습니다. 3 전투 마법사단이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이 어색하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본래 품고 있던 불만은 모두 꽁꽁 숨겨두려는 모양.
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들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압박했다.
점차 번져가는 동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툭 질문 하나를 던졌다.
“얼마나 받아먹었나?”
“!”
“······.”
대놓고 찔러올 줄은 몰랐는지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눈을 굴렸다.
“귀한 인력들을 허무하게 죽이기 싫어서 묻는 것이니 대답해. 아니면 직접 조사해서 창피를 주어야 말을 하겠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에 곧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더듬더듬 입을 열려 할 때.
“듣기 싫다.”
그들의 말을 끊었다.
“뻔해. 돈과 술, 비싼 것들을 받아먹었겠지.”
“전하. 그것이 저희가 일부러 받은 것이 아니오라.”
“일부러가 아닌 당연하게 받아왔겠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제국 어느 곳에서든. 기사들, 마법사들 잘 들어라. 그대들은 제국의 신비를 팔아 번 돈을 착복했다. 그것이 본디 너희의 것인가?”
“······.”
“받아먹을 수 있는 자격은 어디에서 왔으며 너희는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제국입니다.”
“아이로니아 제국입니다.”
“그래, 그 점을 잊지 마라. 미친 황자의 말이라도 너희와 관계없는 북부인들의 고통이라도 그게 제국을 위한 일이라면 응당 고려해 볼 일이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 황자가, 오만하며 패악스러운 자가 제국의 안녕을 입에 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
그게 내가 추구하는 길이다.
미쳤으나 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
“그래야 앞으로도 떵떵거리며 받아먹을 수 있으니. 다만 주체를 바로 알아라. 뇌물을 준 것은 제국의 신비와 안녕을 위협한 관리자 놈들이 아니라. 바로 나, 아르한 황자이며 제국임을. 그리 생각하면 북부에서의 일이 좀 더 쉬어질 테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나이다.”
“잊지 않고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그들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꺼지라는 뜻.
[대상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위 운명 비리를 조금 포식했습니다. 하위 운명 책임감, 기사도가 커졌습니다]
[대상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위 운명 이기주의, 비리를 조금 포식했습니다. 하위 운명 공동체 의식이 성장했습니다]
그들의 운명도 조금은 변했다.
단번에 변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북부에 있는 동안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면 될 뿐.
“알프레드, 소피아. 일을 훌륭히 처리했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리 강녕하진 못했어. 뭐 대충은 들었겠지.”
“네 들었어요. 악마들을 만나셨다지요.”
“그래, 이곳에서 조사는 관리자들을 조지는 것 말고도 진전이 있었나?”
이후 알프레드와 소피아의 보고가 이어졌다.
관리자들이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신경 쓰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알아낸 정보들.
관리자들 간의 암살이 오래전부터 종종 있었으며 주로 신비를 팔아 돈을 버는 걸 반대하는 이들을 죽여왔다는 사실.
또한 그 중엔.
“고의로 모닥불의 출력을 낮춰왔다?”
“네, 관리를 소홀히 한 사실도 있겠으나 일부러 모닥불의 출력을 낮추어 북부에 공급을 제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백작가를 휘두르기 위해서였겠군.”
“최근엔 점차 출력을 낮추어 위기감을 조성했더군요.”
“심지어 자신들에게 협력한 자들에게만 불을 나누어 주었지 무언가요.”
화가 났는지 소피아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요. 민가에 들어갈 불은 은근히 빼돌려서 자기들 돈 버는 데 썼지 뭐예요? 참 진짜로! 아주 골통을 잘 빠개셨어요. 야무지게 잘하셨어요.”
“알프레드?”
“아, 북부의 추운 날씨 때문인지 소피아가 꽤 거칠어졌습니다.”
“앗, 아앗. 전하 그게 아니라요. 무엄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그녀가 성난 뱁새와 같이 파닥거리다 나와 알프레드의 대화를 듣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부당한 경우를 보곤 저도 모르게 화를 낸 모양.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었다.
꽉 닫혀있던 성격이 조금은 열린 모양이었다.
“좋다. 아주 좋아. 그래도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나 보군.”
소피아의 얼굴과 귓바퀴가 새빨갛게 변하는 모습에 다 같이 웃고선.
“그럼 대체 어떤 미친놈이 관리자 놈들이 이렇게 썩어버릴 때까지 방치해둔 거지?”
진짜 핵심을 꺼냈다.
전생에도 모닥불 관리자들의 태만과 그로 인한 북부 패망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모닥불 관리자들을 두둔한, 진짜 원흉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놈을 잡아 태워야 한다.
그러나 알프레드가 처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철저히 흐려놓은 탓에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찾지 못하였다?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막아선 벽이 있는 것인가.”
“둘 다로 사료되옵니다.”
암철단 수장이 될 알프레드가 파악하지 못할 만큼 교묘하고 철저하게 숨겼다라.
거기다 단순히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권력자의 얼굴들, 그중 하나일까.
문득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느껴졌다.
“이거 큰놈이 걸려들지도 모르겠군.”
두려움 따위는 없다.
그 누구도 광기 가득하고 오만한 폭군을 막을 수 없다.
막으면 부수고 가르고 죽일 뿐.
내가 이번 생에 정한 폭군의 삶은 그랬다.
그리하여 운명을 포식하고 마지막을 바꾸리라.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도착한 곳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닥불 관리소. 흔히 모닥불이라 일컫는 신비를 담은 곳.”
관리자 대부분이 잡혀가 허전한 모닥불 앞.
화아아악.
거대한 탑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탑 전체에 걸쳐 새겨진 마법진과 곳곳에 솟아있는 파이프에서 거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리저리 움직이는 톱니바퀴들과 마나를 조절하는 유압 펌프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과거 초대 황제가 벌인 북방정벌 때, 상위 악마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던 악마 군단 수십을 쓸어 넣고 불을 붙였다던가.
“처음엔 용암에 가득했다지? 전 지역이.”
“네, 이후 신비를 관리할 탑을 세우고 북부의 추위를 덥힐 모닥불이라 명명하셨다 합니다.”
“이것저것 많이도 붙여놓았군. 처음부터 이리 장치나 마법이 덕지덕지 붙어있지는 않았겠지.”
“네, 시간이 지나며 마법진과 공학 기계들을 붙여 안정성과 효율을 높였다 합니다.”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여 아쉽군.”
“동감입니다.”
잠시 주위를 따라 돌며 모습을 감상했다.
탑 전체가 꿈틀거리듯 이리저리 돌아가며 열기를 뿜어대는 게 마치 거대한 생명체 같기도 했다.
전생엔 이미 북부를 빼앗긴 뒤라 보지 못했던 신비.
이리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모닥불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신비를 마주합니다!]
눈앞에 새로운 운명과 신비가 다가왔다.
[당신이 품은 신비 염제심결 두 번째 심장 – 초적염(超赤炎)을 마주했습니다. 하위 운명 불이 크게 꿈틀거립니다!]
[하위 운명 고귀한 혈통, 신비를 잡아먹는 피가 용솟음칩니다!]
[불을 얻기 위해선 운명을 가린 껍질을 부수어야 합니다!]
“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지금 모닥불 보관소를 부수라는 건가?
제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던 신비를?
북부인들의 유일한 등불이자 따뜻함을 제공하는 모닥불인 이곳을?
불을 얻기 위해서?
보통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
북부 전체의 안전이 걸려있는 문제, 아니 더 나아가 제국의 미래가 걸려있는 문제.
그러나.
“이거 부수면 어떻게 될까?”
“전하?”
황자도 잡혀가나?
폭군은 일단 궁금했다.
무너뜨리는 방법 정돈 찾아봐도 되잖아?
[모닥불에 새로운 운명이 태동합니다. 광기 어린 파괴가 주위에 아른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