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불꽃이 나를 감싸네
내 물음에 모두가 침묵했다.
안드레는 아예 이해를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고.
소피아는 먼 산을 바라보며 못 들은 척 슬며시 귀를 막았다.
침착한 표정 속, 넋이 나간 동공을 보니 제대로 들었다.
아직도 현실 부정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모양.
솔은.
“네, 네네? 지금 뭘 부숴요? 잠시만요. 제가,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제가 제대로 들은 거 맞죠? 설마 지금 이 탑을 부순다는 뜻은 아니시죠?”
“그래, 그리 호들갑 떨 일인가?”
“알프레드 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요! 황자 전하가 또 뭔가를 꾸미시려나 봐요!”
알프레드의 소맷자락에 매달려 간절히 말려달라 빌었다.
아니, 당장 무너뜨린다는 것도 아닌데 뭘 저리 놀라.
“동부에서도 그랬어요. 쳐들어가서는 적들 도발하고, 막 갑자기 황궁 깃발 걸고, 사람들 그러모으고. 그걸로도 모자라 나중엔 직접 적 대장이랑 싸웠다니까요-.”
솔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껏 쌓인 게 꽤 많았나 보다.
하긴 꽤 고생하긴 했다.
“그거 완전 미친놈이로군.”
“전하 이야기잖아요!”
“그래, 내 이야기다. 그래서 재미없었어? 마침 3 전투 마법사들도 있겠다. 다시 청소부 생활 시켜주리?”
“···아뇨. 완전 재미있었죠. 하지만 탑을 부수는 건 재미 없는 일이라구요. 전하.”
“가로등, 꼭 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구나. 재미있을지 없을지는 해보면 되지 않겠냐.”
은근히 솔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때. 재미 좀 더 봐야지 않겠어? 북부라고 다를 거 있겠느냐. 일단 부수고 생각하자. 방법은 내가 떠올리마.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넌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어, 어어. 그러니까. 그런가요? 그렇게 되나요?”
“그래, 그러니까 폭발시키면 어떻게 될지나 이야기해봐. 명색이 마법사인데 그 정도야 계산할 수 있겠지.”
솔의 눈이 핑그르르 돌아가나 싶더니 진지하게 탑을 바라보며 분석을 시작했다.
“으음 생각 외로 부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여파죠. 지금까지 축적된 마나 술식들 끼리 충돌을 일으킬 거예요. 장치들은 물론이구요.”
“그렇다면 어떻게 되지?”
“폭발하겠죠. 단순히 무너지는 수준이 아니라 재앙급의 폭발이 일어날 거예요. 재앙급이라구요. 재앙급.”
“3 마법사단이 폭발을 억제할 가능성은.”
“계산할 것도 없이 불가능이에요. 황실 마법사 전체, 마탑 마법사 전체가 와도 장담할 수 없어요. 어딘가 숨어계신다는 대마법사님들이 오시면 글쎄요. 그때부터 해볼 만 하지 않을까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솔이 겁을 주듯 스산한 표정을 지었으나.
“오히려 그런 말이 황자 전하를 더욱 자극함을 모르시는군요. 솔 마법사님.”
알프레드가 말리고 나서야 나에게 속았음을 알고는 화들짝 놀랐다.
“정보 고맙다. 계산기. 이거 별명이 너무 많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그럼 솔이라 불러주시면-.”
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돌아 나섰다.
입가에 맺힌 짓궂은 미소를 보아서였을까.
“정말 부수실 생각이십니까?”
알프레드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글쎄 그건 두고 보아야겠지.”
간단한 대답에 뒤에선 모두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우리끼리 먹기로 하지. 백작은 바쁠 테니. 잡혀간 관리자들 말고 남은 자들도 있나?”
“따로 빼낸 하급 관리자가 몇 있습니다.”
“그들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나? 그리 어렵진 않았을 텐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통에 승진하지 못하고 하급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같이 먹지. 확인해 볼 게 있으니. 마법사단장과 기사단장도 불러. 어쨌든 북부에 있는 동안 같이해야 할 자들이니.”
“네 알겠습니다.”
잠시 마련된 저택으로 가며 이들에게 무엇을 명령할지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보았다.
첫째로는 역시나 신비를 얻을 방법.
탑을 부수는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 선택지, 혹시 불을 가지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최고다.
마법사단과 솔, 관리자들을 굴려 알아봐야겠지.
다음으로는 안드레와 기사단.
북부에 왔으니 성장할 좋은 기회.
나와 함께 많은 전투를 치러야 할 거다.
북부에 몰아쳐 올 거친 야만인들과 그사이 숨어있을 악마, 예티들과.
“백작가의 장남은 어떠셨습니까. 북부에선 백작을 이어 북부의 든든한 방패가 될 자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 맞아 그 친구도 있었군.”
알프레드의 질문을 듣고서야 한 가지를 더 떠올렸다.
백작가 장남과 그 뒤에 딸려 보낸 정보부 요원들.
그들이 정보를 물어다 주면 그때부터 북부가 요동치리라.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전초전에 불과했군.”
오늘 내가 일으킨 소란은 그야말로 아이들 장난과 같아지겠지.
작은 혼잣말에 잠시 모두가 멈칫할 때.
땡, 땡, 땡, 땡.
저 멀리 북부 끝, 끝없이 늘어선 성벽 위에서 아스라이 종소리가 들려왔고.
태양이 저물어가는 오후, 석양에 섞여 부서지는 종소리 뒤로.
웨에에에엥!
눈보라와 함께 다급한 사이렌이 울어 닥쳤다.
사방에서 들리는 고함과 급히 집안으로 숨는 사람들의 모습.
- 블리자드 5단계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블라자드 5단계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제국민들은 어서 집, 상점 등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1-5단계로 구분되는 블리자드 중 가장 낮은 5단계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비록 가장 낮다고 해도 일반 사람들에겐 견디기 어려운 추위.
하늘과 땅을 덮으며 몰아치는 하얀 설풍에 사람들이 급히 건물 안으로 피신했고.
거센 추위에 창문에 성에가 번지며 얼어붙기 시작.
“전하!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블리자드가 왔습니다!”
막 몰려오는 눈보라를 바라보는 사이.
안드레를 비롯하여 주변 있던 자들이 일단 어느 건물이든 들어가자 했다.
하필 모닥불과 저택의 중간 지점, 주변에는 작은 민가와 상가들밖에 없다.
창문 밖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황자가 자신의 집을 빼앗을까 걱정이라도 하는가.
피식 웃고는 마저 발걸음을 옮기려 하기 전.
“전하. 이 늙은이의 집에 머무심이 어떠한지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나와 잠시 머물러 가길 청했다.
거친 손과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눈에 맺힌 기운이 맑았다.
북부엔 때로 은자들이 살아간다더니 노인도 그러한 자들 중 하나인가.
일행들의 얼굴에 노인의 친절에 감사한 표정과 혹시라도 내가 그를 함부로 대할까 걱정하는 표정이 뒤섞였다.
물론 어느 쪽도 아니었다.
늙은 얼굴을 바라보다 그 위를 덮는 운명들이 소란스러웠다.
“이보게 노인장. 자네가 나에게 베풀 처지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자리가 누추하나 잠시 쉬어가시기에 괜찮으실 겁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요.”
“자리가 누추한 것은 상관없네. 내가 고귀하면 그만이니까.”
너무 오만한 말에 요동 없을 것 같던 노인의 얼굴에도 황망함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베풀려면 제대로 된 것을 베풀어야지. 자네가 가진 것 중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 거 같군.”
“다른 것이라 하시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안온한 피난처엔 관심 없어. 난 같이 혹한을 걸어갈 전사들이 필요하네.”
드물게 진지하게 말했건만, 노인은 내 말이 황당하다는 듯 크게 웃어젖혔다.
굽은 등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몰려오는 블리자드의 소리를 누를 정도.
“잠시, 전하! 블리자드가. 으윽.”
“전하를 보호해라! 솔! 바람을 막아!”
“너무 거칠어요!”
“소피아! 손을 잡으십시오.”
주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개의치 않고선 나와 노인은 거친 눈보라 속에서 고요히 눈을 맞추었다.
꼿꼿이 선 고목과 같은 자태.
백금발이 휘날려 자꾸 눈 앞을 가렸다.
“저 같은 노인이 어찌 전하의 옆을 걷는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치곤 차가운 바람을 너무 잘 견뎌.”
“북부에 산 지 오래되었으니 눈보라 견디는 것 정도야 익숙하지요.”
“노인장. 날 집에 초대해 그릇을 재보려 했음을 알아. 관리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나? 아니면 관리자 중 자네와 인연이 닿은 자가 있나.”
“······.”
“그 정도의 무례는 용서하지. 허나 자네들이 늙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많은 젊은이가 희생될 걸세.”
“무엇에 말입니까.”
“내 불에, 북부의 한풍에, 고향을 지키려는 의지에.”
“전하께서는 지키러 오신 게 맞습니까?”
“글쎄, 다만 늙은이들의 결심이 굼떠서야 더 큰 피해를 각오하고 더 많은 피를 각오할 수밖에 없다네. 내 성정이 그렇고 상황이 그래.”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겠습니다.”
“말로 알아내려 하지 말고 내 행동과 결과를 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야. 내가 해줄 조언은 이 정도로군.”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 늙은이가 젊은 황자에게 해줄 조언은 없는가?”
내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노인장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푸근히 미소지었다.
“조만간 늙은이들의 지혜를 모아 가지요. 황자 전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군요.”
“흡족하군.”
“정말 쉬어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이번엔 그릇을 재보려는 의도가 아닌 진심 어린 충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걱정 어린 눈빛에 미소지었다.
“딱히 이 정도로는 춥지 않아. 노인장도 알고 있지 않나. 진짜 블리자드는 이따위 차가운 바람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설픈 보호 따윈 치워. 말했듯 나는 옆에서 걸을 전사들이 필요하니 말이야.”
노인장의 맑은 눈이 물끄러미 몇 없는 내 주변을 향했고.
그때까지 추위에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억지로 신색을 바로 잡았다.
지금껏 유일하게 큰 소란 없이 대화를 바라보던 알프레드가 정중히 물어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저택으로 향할까요. 길을 뚫겠습니다.”
“아니, 저녁은 북벽 위에서 먹는다. 마법사들과 기사들, 남은 관리자 전부를 불러라. 길은 내가 뚫지.”
말과 동시에 심장 가득한 열기를 몸 밖으로 펼쳐내었다.
차가운 기류를 몰아내며 피어오르는 불이 선명히 느껴졌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화려한 적염이 나를 감쌌고 몰아치던 블리자드를 녹여냈다.
덜덜 떨던 안드레, 솔, 소피아가 적염의 온기에 평온을 되찾았으나.
“노인장 추워 보이는군. 몸을 떨지 않나.”
“전하···. 그 불은 대체···!”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적염을 마주한 노인장은 오히려 몸을 떨었다.
지금껏 그의 몸을 침범치 못했던 추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전율하는 노인장을 비롯하여 주변 집 곳곳에서 경악하는 얼굴들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몰아치는 눈이 몸에 떨어지기도 전에 녹아 사라졌다.
굳이 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말보다 내가 걸어간 길, 불이 눈을 완전히 사그라뜨린 자국이 더 많은 뜻을 보여줄 거다.
[대상의 운명 쾌검의 달인, 오랜 전투, 노병, 길잡이가 당신의 운명에 탄복하며 이끌립니다]
[대상의 운명 지루한 고민, 깊은 고찰, 장고 끝에 악수를 포식했습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신비 불이 대상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오랜 열정을 달굽니다. 북부 노병들의 운명이 뒤틀립니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진득한 시선에도 뒤돌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운명이 알려주었다.
북부에는 은자들이 많았다.
수많은 전투와 홀로 눈 내리는 긴 밤 동안 훈련을 거듭해 온 백전노장들을 비롯하여 자신만의 법칙을 세운 마법사 등.
노인을 보자 떠오르는 운명을 보며 직감했다.
저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만한 성정은 저들에게 끌려가기보다 저들을 끌어들이길 원했다.
그리하여 늙어 굳어버린 완고한 생각을 넘어 본능의 영역, 오래전 사그라든 열정에 불을 지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신비 모닥불을 보며 자란 그들은 신비에 취약했다.
다행히도.
[하위 운명 현혹, 불이 북부에 스며듭니다]
[동토 아래 숨어있던 은자들의 운명이 꿈틀거립니다. 노병이 이들을 선동합니다]
내 외모와 속에 품은 불은 북부인들의 취향에 딱 맞았다.
평생 보아온 설원과 같은 금백색 머리와 모닥불과 같은 불꽃.
북부를 똑 닮은 황자를 보고 어찌 넘어오지 않겠는가.
나 같아도 넘어가겠다.
“잘생기고 멋진 게 최고야.”
걸음걸음 불에 닿아 녹아내리는 눈이 기꺼웠다.
****
북부는 두 개의 방벽에 보호받는다.
첫째로는 눈보라가 없는, 맑은 날씨에 보이는 거대한 산맥.
북부인들은 추위를 막아 준다하여 외투라 불렀으나 정식 명칭은 대륙의 끝 산맥.
그 너머에는 사람은 살 수 없는 불모지만이 존재할 뿐.
드높은 산맥은 몰아치는 한풍과 눈보라를 막아주었으나.
그만큼 많은 몬스터들이 북부를 향해 몰려왔다.
그래서 존재하는 게 2번째 성벽인 북벽.
몰려드는 몬스터들과 예티, 때로는 모닥불을 빼앗고자 하는 동토인들의 궐기를 막아내는 방어막.
그 귀중하고 위대한 방벽 위에서.
“와인을 더 가져와라. 고기가 금방 식는군. 추위가 매서워. 식기를 덥혀라.”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세워둔 채 미친 황자의 식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거대하며 단단한 북벽 위, 이질적인 구수한 빵 냄새와 자극적인 고기 스튜 냄새가 퍼져나갔다.
그의 주위에는 마법단장과 기사단장, 남은 관리자 중 최고 책임자가 함께했고.
주변에선.
“이봐 마나 끌어 올려 이대로는 우리가 얼어버린다고.”
“이봐 교대하지. 그래도 빵이랑 수프 맛이 괜찮더군.”
“아직 한창 식사 중이신가?”
“그래, 아직도 즐기고 계셔.”
“빌어먹을 이러다가 얼어 죽겠어.”
“어쩌겠어 아르한 황자 술병 휘두르는 거 못 봤어? 죽기 싫으면 조용히 밥이나 먹어.”
청익 기사단, 마법 전투단을 비롯한 북벽 병사들이 추위를 막아가며 황자의 곁을 지켰다.
불만이 불쑥불쑥 치솟았으나 낮의 일을 본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감히 불만을 토해내지 못했고.
북벽의 병사들은 얼떨결에 마법사들의 방어막 덕에 추위를 면했으니 다행.
물론 여기서 식사하는 꼴이 얄미웠으나 황자에게 감히 무어라 할 이는 없었다.
“그래, 북부의 추위는 견딜 만하던가. 단장들.”
“네 전하.”
“그렇습니다.”
“이제부턴 아닐 거다. 보아라.”
황자가 단장들과 관리자들의 시선을 북벽으로 돌렸다.
몰아치는 눈보라와 그 사이 추위를 견디며 북벽 너머를 경계하는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
“이봐! 원래 몇 단계가 되어야 모두 들어가는 건가.”
“보통은 3단계부터 병사들 또한 벽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 나 때문에 이리 나와 있는 것은 아니로군.”
“···네, 아니긴 합니다.”
“보호받으며 먹는 맛 아주 특별해 계속 경계를 서도록.”
손을 휘적휘적 저어 병사들의 시선을 돌려보낸 황자가 다시 큼지막한 고기를 씹으며 자리에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이리 편하게 사는 것 또한 이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지.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지 않느냔 말이야.”
그건 알겠는데 굳이 여기서 먹을 필요까진 있을까요?
의문이 목까지 치밀었으나 머리통을 깨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만일 북벽이 없어지면 어떨 거 같아?”
툭 던진 질문에 모두가 눈가를 좁혔다.
황자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놓고선 태연히 와인을 마시고 빵을 찢어 입에 넣었다.
관리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모닥불이 망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법사 단장이 입을 열었다.
“신비를 잃고 북부 사람들도 터전을 잃겠지요.”
“그리고?”
기사단장이 말을 받았다.
“북부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북부뿐만이 아니라 중부까지 영향이 미칠 수 있습니다.”
“아니 틀렸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니야.”
세간의 중론이었으나 황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북풍에 휘말린 백금발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의 붉은 눈이 진득하게 빛나며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제국 전역이 혼란에 빠질 거다. 북부에서 끝날 일이 아니야. 동부 전선은 물론 수도, 남부와 서부까지 모든 곳이 피해를 입겠지.”
너무나도 단호한 소리에 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북부에서 문제가 생겨도 이를 막을 기사단과 병력들이 많았다.
그때.
“맞습니다.”
한 사내가 북벽에 올라와 황자에게 다가왔다.
낮에 보았던 백작 옆에 있던 자.
“백설 기사단 단장이라 했던가?”
“전하를 뵙습니다. 백설 기사단 단장 가론이라 합니다.”
“그래, 내 말이 왜 맞았는지 설명할 시간이 있겠나?”
황자의 물음에 남자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음 식사 시간으로 미루어야 할 듯합니다.”
“예티가 오고 있나?”
“···예. 어찌 아셨습니까?”
“이렇게 구린내가 풍기는데 어찌 모르겠나.”
몰아치는 블리자드 속에서 예티들의 냄새를 맡았다고?
가론이 놀란 표정을 짓길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문득 황자의 식사 자리가 이상하다 싶었다.
북벽 중 땅과 가장 가까운 곳, 예민한 예티들의 후각을 자극할 고기와 와인을 대놓고 깔았다.
심지어 주변에는 기사단과 마법사단까지.
자연스레 주변에 병력이 몰려있어 예티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가장 좋은 상황.
그러나 이를 물어볼 틈도 없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섞여 괴음이 들렸고.
북풍 사이사이 희끄무레한 형체가 아른거렸다.
곧 숫자가 불어나더니.
눈보라를 뚫고 하얀 털이 수북한 괴수들이 등장했다.
그때 황자가 몸에 불을 피워올렸다.
드넓은 북벽, 선명히 빛나는 불꽃.
마치 홀린 듯 불응 향해 달려드는 예티들.
그리고 그 위.
-불이다!
신경에 직접 와닿는 불쾌한 울림이 모두의 머리를 울렸고.
“그래! 불이다! 너희가 그렇게 원하는!”
황자가 그들을 향해 벌겋게 미소지으며 거검을 뽑아 들었다.
와르르르릉!
크르르릉!
브레이커와 예티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