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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37화 (37/200)

백작은 힘들다, 조금 아니 많이

예티, 높이만 3m 팔 길이는 4m짜리 괴물.

온몸엔 흰색 털이 빽빽했고 눈과 이빨은 거멓게 대비됐다.

멀리 서 보면 검은 구멍이 떠다니는 것 같았고 가까이 마주하면 크기에 압도된다.

북부에 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아이스 트롤, 화이트 오거와 비견 되는 강력한 놈.

특히 야성에 휘둘리기만 하는 게 아닌 보호색을 이용하여 적을 습격하고 몰이 사냥을 하는 등 뛰어난 지성 덕에 더욱 까다로운 녀석들.

“크오오옹!”

“크옹! 크오옹!”

놈들이 나를 향해 기다란 팔을 휘적거리며 울었다.

뜨거운 불을 보았기 때문일까.

양팔을 뻗은 채 우루룽 우는 모습이 불을 섬기는 신도들 같아 우스웠다.

놈들이 아슬아슬한 높이의 성벽을 잠시 바라보고는.

퍼엉! 땅을 밀어내며 뛰어올랐다.

거센 힘에 눈이 하얀 증기처럼 부스스 솟아올랐다.

“크로로롱!”

휘적거리는 팔이 아쉽게도 성벽에 닿지 못했고 처음 뛰어오른 녀석이 떨어졌다.

처음에 이어 다른 놈들도 성벽을 향해 뛰었으나.

성벽을 붙잡는 데 성공한 놈은 없었다.

가장 낮은 곳이라도 완력으로 뛰어오를 높이는 아니었다.

얼마간 뜀박질과 고함이 이어지길 잠시.

브레이커의 울음과 불에 자극받은 예티들이 광폭하게 울어댔고.

“전하. 일단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신을 백설 기사단 단장이라 소개한 가론이 얼굴 가득 놀람과 불안함을 담은 채 피신을 권유했다.

“몬스터를 두고 도망가라는 건가 지금?”

“위험합니다. 예티들의 공격성이 높습니다.”

“예티를 어찌 상대할지 모르는 무지렁이로 보이나 보군.”

“그것이 아니오라.”

“지금 내가 물러나면 예티들이 흩어질 텐데 말이야. 아닌가?”

“···맞습니다.”

황자의 말에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가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블리자드 속, 하얀 털로 위장한 예티들이 어디로 뛰어오를지 모른다.

지금이야 이성을 잃고 마구 뛰어오르지만 황자가 사라지면 어떤 꾀를 낼지 모르는 놈들.

그럼 자연스레 방벽 전체를 방어해야 하고 병력 피해를 피할 수 없다.

아르한이 굳이 올라와 밥을 먹고 불까지 피운 이유.

첫째로는.

“다들 잘 봐두도록. 이게 북부에서 흔히 일어나는 추위와 전투다.”

지금껏 안온한 중부에서 편한 밥을 먹으며 뇌물이나 받아먹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하위 운명 이기심과 오만을 포식합니다. 그들의 마음속 감사와 겸손이 작게 싹틉니다!]

[하위 운명 기사도와 마법 연구를 자극합니다!]

둘째로는.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북벽 일부에 내려앉았던 죽음과 파괴를 포식했습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대상의 운명이 죽음과 파괴에서 전투로 바뀝니다]

[대상의 운명이 다른 자의 간섭으로 인해 뒤틀립니다! 당신과 운명을 견주려는 자가 있습니다!]

북벽에 일어날 피해와 북벽 너머 모닥불 속 신비를 노리는 자를 막기 위해.

그래서 놈들의 눈길을 끌었고 도저히 지나치지 못할 신비를 내뿜었다.

본디 정체를 숨길 작정이었겠으나 놈은 불을 본 순간.

-불이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느낌이 심상치 않습니다.”

머리를 울리는 불길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가론이 몰아치는 설풍 너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다시 피신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네도 들었지? 머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말이야.”

내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묻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네, 들었습니다.”

“북부인들은 이처럼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를 무어라 부르나.”

“부름이라 부릅니다.”

“무엇의 부름.”

그가 불안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는.

“동토의 부름-. 그리들 말합니다.”

마치 목소리를 높이면 동토가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부의 케케묵은, 기사단장이라는 자도 두려워하는 전설.

북부인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둑한 밤마다 촛불 아래에서 어머니에게 북부의 오랜 전설을 동화처럼 듣는다 했던가.

대를 이어 되풀이된 전설 속 가장 두려움의 대상은동토.

바로 북벽 너머 동토 안에 사는 자들, 동토인을 이르는 은어.

지금은 미지의 적이자 가장 위험한 전설이 되어버린 자들.

과거 건국제 카이론과도 자웅을 겨루었다는 귀신들.

문제는.

“가론. 크게 말하라.”

“네?”

“놈들의 정체를 크게 말하라.”

“그것이 본디 놈들의 정체를 크게 말하면 힘이 강해진다고 하여 크게 부르는 것은 금기로 취급-.”

“당당히 불러라. 지금 당장.”

“저, 전하.”

“백설 기사단장 가론! 고작 적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여 쩔쩔매는가! 설마 두려운 것이냐?”

내 분노 어린 고함에 예티들을 경계하던 이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가론이 침을 꿀떡 삼키며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기사로서 거기다 북부를 이끄는 기사단장으로서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모욕.

주변 북부 병사들과 뒤에선 백설 기사단은 이해한다는 눈빛이었으나.

“동토? 동토면 여기도 동토이거늘?”

“뭘 그리 망설이는가. 전하의 명령일세.”

중부 출신인 청익 기사단과 3 전투 마법사단은 북부인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대로 침묵했다간 중부 깍쟁이 놈들에게 무시당하게 생겼다.

결국 기사로서 자존심이 어린 시절부터 심어진 막연한 두려움을 밀어냈고.

“동토의 부름이라 부릅니다!”

억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나름 용기를 내보겠다고 외쳤겠으나.

“땅이 우리를 부른단 말이지? 그거 재밌는 소리로군! 앞에 있는 저 거대한 예티보다 땅의 부름을 두려워 한다라?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나는 단박에 그의 용기를 비웃었다.

용기를 조롱했으니 모욕이며 분노할 일이다.

실제로 가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예티들이 문제 아닌가 가론 경.”

“하하하! 땅이 부른다면 즐거워해야 할 일이지요. 정령의 부름 아니겠습니까.”

사정을 모르는 중부인들이 덩달아 그를 비웃었다.

북부 병사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험악한 기운이 어렸다.

북부 전체가 모욕받은 기분일 거다.

모두 같은 미신을 믿을 테니까.

문제는 이런 미신이.

[북부인들의 두려움을 먹은 동토인의 운명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북부를 노리는 동토인들의 운명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돌변한 북부인들의 표정과 동시에 적의 운명이 강해지는 글자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문득, 놈들이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북부를 탐내기 시작한 이유를 깨달았다.

놈들은 기다렸던 거다.

과거 자신들을 패배시키고 저 멀리, 추위만이 감도는 산맥으로 쫓아냈던.

건국제 카이론의 불이 식어가기를,

또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북부인들의 공포와 자신들로부터 비롯된 전설이 또 다른 신비가 되기까지.

그래서.

“그냥 솔직히 말하게. 동토인, 아니 저 북방 너머에 있는-.”

북부인들의 두려움을 직접 건들기로 하였다.

“불 한 점 없이 춥게 지내는 에스키모들이 두렵다 말이야!”

휘우우웅!

동토인의 진명, 에스키모를 뱉자 날카로운 바람이 북벽 위를 헤집었다.

마법사들이 일으킨 온기가 가파르게 흩어졌고 북벽 병사들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제야 동토가 에스키모를 말하는 것인 줄 깨달은 중부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날카롭게 몰아치는 한파 속, 수백 사람 속에서 나 홀로 웃고 있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들이 우스워 더욱 소리를 높였다.

“그래봤자 날고기나 먹는 야만인들이 아닌가? 뭘 그리들 긴장했는가.”

태연한 물음에 모두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우루루룽!”

지금껏 야성만으로 날뛰던 예티들이 무언가를 듣기라도 했는지 서로 모여들었고.

서로의 등을 밟고선 팔을 쭉 뻗기 시작.

힘을 합쳐 성벽과 땅을 연결했다.

이윽고.

-불을 품은 자여 그대 속에는 진정 두려움이 없는가.

머릿속에 말소리가 울렸다.

이번만큼은 선명해서 모두가 느꼈다.

에스키모가 등장했다.

****

백작은 최근 들어 가장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1황자가 북부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큰 생각 없었다.

허튼 사고를 칠까 걱정은 있었으나 금방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모닥불 암살 건도 그냥 저들끼리 벌어진 알력 다툼이라 답을 쥐여 주려 했다.

그 정도만 해도 오만하며 무능력한 황자는 좋아하며 돌아갈 거라고.

그리 태평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하아, 머리통을 깨버릴 줄이야.”

황자는 오자마자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변경백인 자신도 못 하는 짓을.

아니 변경백이니 못하는 일이었고 황자였기에 가능했던 일.

백작을 견제하기 위해 둔 세력을 직접 친다면 중부에선 반역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북부인들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들이니 지난 시간 동안 결심 보다 망설임이 컸다.

그런데 황자는 백작의 오랜 고민과 고통을 비웃듯 단번에 무너뜨렸다.

술 한 병들 들고선.

덕분에 북부 사정이 나아진다면 다행이겠으나.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나아지기까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쌓여 외면했던 쓰레기를 치우는 기분.

관리자들이 혹여라도 중앙 정계에 도움을 요청하여 감사라도 나오는 날엔 더 피곤해질 터.

“···그냥 다 죽여버리고 모른다 할까?”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보았으나.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황자의 패악이 꽤나 감명 깊었나 보다.

자리에 앉아 거산 같은 어깨를 구부리며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할 때.

“주군! 주군!”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노크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변경백, 발자크는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엉거주춤 일어나며 상황을 살폈다.

마치 맹수가 싸우기 직전 자세를 잡는 모양새.

“무슨 일인가? 설마 블라자드에 예티들이 숨어있었나?”

너무나도 정확한 예측에 막 뛰어왔던 부관이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티 스무 마리 정도가 북벽에 나타났다 합니다!”

“이런, 피해는? 놈들이 뛰어올랐는가? 아니면-.”

문제 될 일이긴 하나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상황을 파악하려던 발자크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전하는! 황자 전하께서 북벽 위에서 저녁을 드신다 하지 않았는가!”

이런 제기랄! 왜 거기서 저녁을! 그것도 하필 오늘! 지랄도 이런 지랄이!

뒤에 터져 나오려는 욕설과 불만을 삼킨 채 대답을 기다리려니.

“맞습니다! 전하께서 북벽에서 식사하시는 동안 예티들이 몰려들었다 합니다.”

“이런 어지간히도 이목을 끌었겠군. 설마 전투가 있었나?”

“다행히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이끌고 가신 덕에 안전하다고 합니다. 또한 백설 기사단이 출동하여 호위하기로 하였으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벽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는 소식입니다.”

“불꽃?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알았다. 당장 가자. 내가 직접 가서 끌어내리든지 해야겠다. 설마 내 머리통을 깨지는 못하겠지.”

그가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쳐 나가려다 혹시 몰라 집무실에서 투구를 챙겨서는 황자가 있다는 북벽으로 향하던 도중.

“백작님! 백작님!”

방금 전령에 이어 또 다른 부관이 급하게 백작을 찾았다.

방금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

불길함에 백작의 뒷목이 간지러웠다.

무언가 느낌이 불안했다.

막 복도를 꺾어 백작과 마주치자마자 전령이.

“북벽에 동토가. 동토가! 동토인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거기까지 입에 담는 순간.

콰앙!

발자크의 몸이 폭발하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북벽에 나타난 에스키모라니!

그것만으로도 최고 경계령이다.

하필 그 자리에 전하가 있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이런 제기랄! 썅! 빌어먹을! 이런 지랄이 어딨단 말야!”

발자크가 변경백이 된 후 실로 오랜만에 소싯적 사용했던 욕설을 신나게 뇌까렸다.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달렸다.

그의 무위는 제국 소드마스터들 중에서도 순위에 꼽힐 정도.

하급 블리자드 따위야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짙은 보랏빛 직선과 곡선이 되어 북벽으로 뛰어가길 한참.

“북벽! 전투 준비!”

북벽이 보이자마자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주군의 다급한 목소리에 드넓은 북벽이 일제히 깨어났다.

어둑한 밤임에도 번지는 횃불이 선명했다.

훈련을 거듭해 온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백작이 내심 흡족해하면서도 다급히 발을 놀렸다.

아무리 훈련이 잘되었다 하더라도 정작 황자가 죽거나 다쳤다면 모두 소용없다.

불명예는 물론이오 모든 걸 잃을 거다.

그리고 솔직히 궁금했다.

아르한 황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그가 대체 어떻게 저리 바뀌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그가 일으킬 변화가.

오자마자 자신이 못한 일을 해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전하를 보호하라!”

힘을 다해 명령했다.

잠깐이라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어다오!

마침내.

유독 사람이 모인 곳, 옅은 혈향을 확인한 발자크가 크게 도약하여.

쿠웅!

“전하는 어디 계신가!”

단번에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구원자가 등장했다.

사실 백작은 젊을 적 이런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북방의 거친 기사, 위기에 처한 황족을 구하려 등장.

물론 상상 속 황족은 당연히 황자가 아닌 황녀였으나.

어쨌든 비슷하니 되었다.

“감히 황손을 노리는 망측한 동토가 누구냐!”

그가 버럭 성을 내는 사이.

“황자 전하는 내려가셨습니다.”

가론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꿈뻑거리며 답했고.

주변에 황자는 커녕 마법사단과 기사단도 사라졌음을 확인한 발자크 백작이.

“어, 어어? 가셨다고? 어디로? 설마 하늘로? 하늘나라로?”

저도 모르게 망측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니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데 갔으면 어딜 갔겠는가.

“내 당장 복수를-!”

“잠깐, 아닙니다. 주군, 그런 거 아니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전하는 살아 계십니다. 그것도 무사히요.”

가론이 다급히 제 주군을 역모죄에서 구해내려 발버둥 쳤다.

“뭐? 그럼 어디로 가셨나? 분명 에스- 아니 동토가 나타났다 했잖나.”

“그건 맞습니다만 식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지금은 모닥불로 향하셨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네, 설명드리겠습니다.”

곧 갈론의 설명이 이어졌다.

식사 중에 나타난 예티들과 황자의 불, 블리자드 속에서 들린 목소리.

황자의 오만한 발언과 비웃음, 가론이 당한 모욕을 듣는 발자크의 얼굴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마지막 예티들이 성벽에 손을 걸쳤고 에스키모가 황자를 만나기 위해 올라오려 했다는 말에.

북부의 정점, 발자크마저 숨을 죽였다.

대체 건국제의 오랜 자손인 황자와 건국제에게 패퇴한 북부의 오랜 귀신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마치 어릴 적 깊이 잠들기 전 어머니가 촛불 옆에서 해주던 전설의 한 자락과 닮지 않았는가.

세상을 두고 다투었을까? 모두를 지키겠다고 했을까?

아니 황자는 전설 속 영웅과는 다르다.

그라면 제국은 나의 것이라며 패악을 부리지 않았을까?

퍽 어울렸다.

전설과도 같은 장면을 떠올리느라 부풀어 오른 백작의 생각을.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검으로 예티의 팔을 끊어버리셨습니다.”

“···뭐?”

갈론의 말이, 황자의 검이 단번에 잘라버렸다.

눈에 파묻힌 것 마냥 의식이 하얗게 번졌다.

“지금 뭐라고?”

주군의 멍청한 물음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갈론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랬기에.

“들으신 대로입니다. 올라오려는 순간, 전하께서 예티의 팔을 자르셨습니다. 저기 아직 걸려있습니다만.”

“···그게 끝이야?”

“잘라낸 후 이런저런 말을 하시긴 했습니다.”

“뭐라 하셨는가.”

이젠 생각하기도 지쳤는지 멍하니 물었고.

가론이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오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도 사용할 줄 모르는 야만인이 어디서 고귀한 나와 눈높이를 같이하려 하느냐. 땅에서 기어라. 그래야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를 주겠노라.”

“···아. 아아.”

“오랜 추위에 뇌가 얼어버린 에스키모야. 들으라. 불을 탐내지도 말고 북벽 너머도 탐내지 마라. 과거 내 오랜 선조에게 당했던 창피를 되풀이하기 싫다면.”

“···오우.”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이다 꺼져라. 너희 더럽고 추운 움막으로.”

“···놈이 가만히 있던가?”

“반응이 없자 전하께서 그저 웃으셨습니다. 한참을.”

휘이이잉.

아까와는 좀 다른 바람이 북벽 위를 휩쓸었다.

발자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으나.

“그게 말이 되냐?”

도저히 힘들어 가론에게 되물었으나.

“말이 안 되는데 사실입니다.”

그 또한 벌게진 코를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일 뿐.

북벽 너머를 보는 둘의 시선이 어딘가 애처롭게 흩어졌다.

그리고.

콰앙, 퍼엉! 퍼퍼펑!

커다란 폭음과 함께.

“모닥불! 모닥불에서 불이 피어납니다!”

병사들이 뒤쪽, 모닥불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하아-. 좀 힘드네···.”

백작이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선 붉어진 눈시울을 쓰다듬었고.

가론이 천천히 손을 뻗어 드넓은 주군의 등을 토닥였다.

때론 이 거대하고 단단한 북벽 같은 남자도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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