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거 온다
오크의 대군락을 무너뜨리고 북벽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앞에서 길을 뚫는 백작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어도.
옆에서 큼, 크흠, 크흐흐흠 기침을 하는 건지 고함을 지르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전대 백작의 소리에도.
그저 시선을 찍혀있는 발자국에 고정한 채 걸었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루카르 드보르작의 운명 극한, 도전, 탈피, 고집, 검의 대가를 확인했습니다. 모든 운명이 상위 운명 죽음과 실패 앞에 덧없이 흩어질 예정입니다]
[발자크 드보르작의 운명 무력감, 회의감이 점차 크기를 키워갑니다. 그의 가슴 속 자리 잡은 운명 심마가 뿌리를 더욱 깊이 뻗칩니다. 반역과 패배가 도드라집니다]
[장소의 운명 불통, 고지식, 오래 묵은 관습이 너무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운명들과 전생에 있었던 일들을 겹쳐보았다.
위기에 처한 북부, 홀로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전대 백작, 오랜 관습과 북벽 속에만 숨어있던 백작가, 다가오는 에스키모, 겁에 질린 북부인들.
그런 북부를 외면한 중앙과 제국.
한 가지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백작의 운명엔 왜 반역이 끼어있는가.
중앙은 왜 북부를 외면했는가.
북부가 무너지고 동토가 들어서자 가장 곤란해진 건 다름 아닌 중부와 황성.
건국제의 신비와 추위를 막아줄 북벽을 잃어버린 결과 제국의 몰락에 한층 속도가 붙었다.
당시엔 그저 북부가 유약하고 중앙이 멍청하여 그런 줄 알았건만.
‘무언가 비어있다. 알고 있는 사건과 지금 보는 현실의 간극이 멀어.’
지금껏 본 북부는 어딘가 달랐다.
전대 백작은 아직 말이 통했으며 현 백작은 나름 북부를 위해 헌신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결정이 미련했을까.
황제가 그리 멍청한 자였던가?
지난날 만났던 폭군의 아버지, 아니 이제는 나의 아버지인 황제는.
‘유약할지라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전권을 일임했겠지.
그런 사람이 왜 북부를 그냥 망하게 두었을까? 심지어 첫째 황자가 갔음에도.
스멀스멀 등줄기를 간지럽히는 감각.
휘도는 정보들이 이어지지 못한 채 떠돌았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백작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멈추자 모두가 멈추었다.
홀로 눈을 부수고 나아가는 백작과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전대 백작의 깊은 눈을 번갈아 보길 잠깐.
“자네들 혹여 반역을 도모했나?”
뜬금없는 물음에 스산한 공기가 팽팽하게 차올랐다.
전대 백작도 현 백작도 움직임을 멈추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수상쩍었다.
어째서 황자가 있음에도 북벽의 병사들은 나타나지 않는가.
정규군 없이 노병들만이 모여 백작들과 나를 호위하듯 데려가는 걸까.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솔과 안드레, 알프레드와 소수의 청익 기사들이 몸을 긴장시켰다.
소드마스터 둘에 모여든 노병들의 기세 또한 심상치 않았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들을 상대로?
“여기서 자네들이 날 죽인다면 그저 사고로 남겠군. 그렇지 않은가.”
“······.”
모두가 답이 없었다.
겉은 춥지만 속은 타는 듯 입 밖으로 흩어지는 입김이 후텁지근했다.
나를 따르는 자들이 내 주위로 백작가를 따르는 이들이 백작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움직이는 이들 속 나와 백작, 전대 백작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팽팽히 서로를 쳐다볼 뿐.
숲은 시체를 감추고 눈은 시체를 덮는다.
컹, 컹!
동물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뿌려질 피 냄새를 미리 맡기라도 한 걸까.
“어째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루카르 전대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제국 오대 검수 중 일인이었던 전대 백작, 소드마스터인 현 백작, 북벽의 병력들과 북방에 자리 잡은 신비. 정예군과 기사들이 넘쳐나며 심지어 늙어 은퇴했다 했으나 실제로는 그 어떤 젊은이보다 강인한 노병들까지.”
찬찬히 그들의 힘을 가늠해 보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들의 전력은.
“강철성을 향해 반기를 들고도 남을 정도군. 숨겨진 전력이 과해. 나름 명분도 있고. 오랜 시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나.”
강철성의 예상을 한참이나 웃돌 거다.
북벽에서 근무한 남자들은 모두 이미 정예병.
“북부 전체가 이미 하나의 군대였군. 북벽이라는 최고의 훈련장에서 훈련받은 정예병들이었어.”
내 단언에 노병들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
무기질적인 표정들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알겠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흩어졌던 정보들이 촤라라락 소리를 내며 하나의 그림을 짜 올렸다.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들을 훑었다.
“오랜 방치, 모닥불의 비리, 부당한 대우. 자네들 또한 먼 옛날엔 동토인, 에스키모들의 후손이었지. 아니 그런가.”
“···새로운 피를 수혈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앙에서도 그리 생각할까? 모닥불 관리소의 암살을 조사하라. 누구든 조사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네들의 숨겨진 무력을 파악했겠지. 지금처럼.”
전생의 1황자는 북부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닌 북부의 반역을 조사하러 온 거구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숨겨진 전력을 발견했고 중앙에 알렸다.
중앙에선 북부에 대한 성토가 이루어졌겠지.
반역이 아님을 해명하느냐 아님 진짜 뒤집어엎느냐 갈림길에 섰을 터.
중앙은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북부를 버렸고.
전대 백작은 에스키모들과 협상하러 찾아갔다 죽었다면.
아비를 잃은 백작은 눈물을 머금고 북부를 지키려 했으나.
반역도 충성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채 북부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리된 일이었군.
“중앙은 그리 생각하겠지. 아닌가. 에스키모들이 몰려온다면 북부를 버린다. 반역의 씨앗이 심긴 땅이니까. 에스키모 자체가 자네들의 계략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자네들은 현재 어찌할지 고민 중이겠군. 나와 함께 걷는 이 순간 내내 말이야.”
“······.”
“날 죽이고 진짜 반역을 도모할지 아니면 이 미친 황자를 살려둘지.”
잠시 말이 없던 중, 백작이 후우 작게 숨을 내쉬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전하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북부가 반역할 거라고요.”
“부정하지 않는군.”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으니까요.”
“그래서, 자네들의 대답은?”
내 물음에 백작의 얼굴이 울적하게 변했다.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전하를 따랐고 걷는 길을 지켰지요. 이상의 답이 필요합니까. 어찌 목숨으로라도 보여야 하는 답입니까.”
그답지 않게 약간의 섭섭함과 투정을 담아 답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본디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은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뒤에서 배반을 꾀하는 게 보통이지.”
“북부인들은 그리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가?”
“네,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전대 백작을 힐끔 살피는 시선.
이번엔 루카르가 입을 열었다.
“전하. 어느 정도는 맞는 추론입니다.”
그의 말에 잔잔한 충격이 퍼져나갔다.
전대 백작이 고요한 내 신색에 눈에 이채를 담으며 말을 이었다.
“수많은 백작 중 그런 뜻을 품은 이가 있었기에 이러한 안배들을 준비했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북부는 어떤가. 자네에 이어 아들이 이끄는 북부는.”
“전하께선 북부를 벌하러 오셨습니까. 살리러 오셨습니까?”
“어느 쪽도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그런데 그 방향이 북부를 살리는 방향 같습니다. 이 늙은이가 볼 때는요. 누구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북부의 얼음을 녹여주고 계시지요. 저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고민은 있었으나 결국 우린 제국의 변경백입니다.”
늙은 기사의 눈에 약간의 붉은 기와 물기가 어렸다.
속에 어린 감정이 복잡했다.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보신 눈보라 속 외로이 서 있는 북부의 모습은 사람을 해칠 괴물입니까. 아니면 보듬어야 할 외로운 늑대입니까.”
북부의 오랜 상처들.
눈과 얼음을 걷어내자 붉게 갈라진 흉터들이 선명히 보였다.
마음속 오랫동안 쌓였던 불만들과 고통들이 그들을 힘들게 죄였겠지.
문득 서글퍼졌다.
이들의 처지가 서글픈 게 아니라 내 처지가.
어째 쉬운 게 하나 없었다.
그래서 심통을 좀 부렸다.
“늑대는 무슨, 곰이다. 미련 곰탱이들.”
“···곰이요.”
“그래, 그 커다란 덩치로 쭈구리고 앉아 홀로 질질 짜고 있는 한심한 곰. 덩칫값이 아깝구나. 제기랄.”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그 곰을 앞에 두고요.”
“어쩌긴 엉덩이를 걷어차서 일으켜야지. 안 일어나면 등을 걷어찰 생각이다. 두터운 가죽 때문에 내 발이 아프더라도 그럴 생각이야.”
“그리하고 나서요?”
“모른다 그딴 건. 다만 혼자 쪼잔하게 꽁해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라도 두드려 깨워야겠다. 다음엔 지가 꿀을 찾든, 뒤를 쫓아오든 하겠지.”
“그게 전부입니까?”
“흥, 난 곰탱이들의 진로상담까지 해줄 정도로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야. 등을 쓰다듬어줄 만큼 친절한 자도 아니고. 일으켜 세웠으면 움직이는 건 너희들이 해야지. 나는 방해되는 것을 치우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섭섭하군요.”
“것 봐라. 기껏 도왔더니 섭섭이라니. 속은 좁아서 그 커다란 덩치가 아깝다니까. 아비나 아들이나 어째 어깨는 성벽처럼 넓은 자들이 하나같이 섭섭함을 표하는지.”
내가 뚱한 표정으로 노인의 섭섭함을 튕겨내었고.
**
비로소 루카르와 발자크, 주변 둘러선 노병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며칠간 지켜본 오만하고 패악스러운 황자다웠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밉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해서 믿음이 갔다.
그의 행동을 보았기에 그리고 결과로 증명하였기에.
“하긴 전하께서 우리의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했으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무엄하다. 무엄한 곰탱이야.”
“전하를 믿습니다.”
“믿지 않으면 어쩔 거냐. 믿을 게 나밖에 없을 텐데.”
“그 말도 맞군요.”
루카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허나 아직도 속이 좁은 발자크 곰탱이는 한 가지 꽁한 게 남았다.
“저희는 전하를 믿고 전하께서는 저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만 중앙이 이를 믿어 줄까요?”
“자네 아들은 눈치가 좀 없어. 기껏 좋게좋게 마무리 지었건만 굳이 말 되풀이하는 거 봐. 지난번에도 자꾸 당연한 걸 묻더라니까.”
“으음, 아들이 종종 부족한 짓을 하긴 합니다만 좀 너그럽게 이끌어주십시오.”
“아니, 전하. 아버지 너무 하십니다. 이래 봬도 저 백작이에요 백작.”
둘의 한숨과 이어진 타박에 발자크가 또 한 번 섭섭함을 드러냈다.
“나는 황자다.”
“나는 네 애비다.”
“길이나 뚫어라.”
“그래 아들아 일단 길이라도 뚫어라. 입은 닫고.”
그러나 섭섭함이 통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백작이 서글픈 표정으로 다시 길을 뚫자.
뒤에선 노병들과 안드레와 솔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나마 위로가 되어 그냥 두었다.
그렇게 다시 걷기를 한참.
슬슬 북벽의 끝자락이 보이는 북쪽 숲 초입.
다시 발걸음을 멈춘 황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쁘지 않아.”
무엇이 나쁘지 않다는 걸까?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고.
쏠린 시선 속, 황자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진홍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대 백작과 노병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반면.
“안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제해주소서.”
“전하. 설마 뭐가 나쁘지 않다는 것인지요?”
“알프레드 아저씨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제발.”
“으음, 난 그저 집사장일 뿐일세. 전하의 뜻을 막을 권한은 없어.”
황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 셋, 발자크와 기사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황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분명 뭔가 온다.
큰 거 온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안감에 모두가 황자의 말을 애써 외면하려 했으나.
“반역, 그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겠어.”
이어진 말에 모두가 파드득 놀랐다.
까악, 까악!
심지어 북녘 숲의 새들도 놀랐는지 시끄럽게 울어대며 날아올랐다.
모두가 잘못 들었겠지 생각했다.
솔은 아예 눈을 꽉 감고선 두 귀를 막았으나.
“차라리 반역 준비를 해보자고. 당당하게.”
부옇게 번지는 해와 부스스 떨어지는 눈송이들 음산하게 울어대는 까마귀들 사이.
황자의 미소가 붉게 번졌다.
이어지는 말에 모두가 눈을 꽈악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루카르가 황당한 듯 웃었으나 곧 황자의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계획한 반란은 괴상하면서도 꽤 유쾌했다.
****
황자와 백작이 나가 있는 며칠간.
북벽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장이 밖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녘 숲 어딘가에서 굉음과 함께 붉은 빛이 끝없이 번져 나왔다.
누군가는 황자의 불이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에스키모가 다가오는 중이라고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대 출력을 뿜어내는 모닥불 덕에 수장이 없는 동안에도 북부가 온기를 머금었다는 것 정도.
아마 추위 속 집안에 갇혀 있기만 했다면 많은 이들이 불안감을 못 이기고 정신이 어떻게 되었을 거다.
하얀 설원은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을 키우는 도화지와 같았기에.
“그나저나 대체 백작님께서는 어디 계신단 말인가.”
“아직 찾지 못했다는 보고뿐입니다.”
“우리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기사단 정예들이 나간 상태라. 우리까지 나가면 전력이 너무 비어버립니다.”
“카르디스 도련님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북벽 안에서도 기사들끼리 뜻이 이리저리 갈렸다.
몇몇은 백작을 꾀어낸 황자의 탓을 하기도 했고 몇몇은 불안감에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는 듯 발을 굴렀다.
장남 카르디스가 그들을 보며 찬찬히 눈을 감았다.
의견을 모두 달랐지만 근원은 모두 같다.
충심.
그래서 다행이었다.
다시 눈을 떠 시린 북녘 숲과 이를 굽어보는 산맥을 바라보던 카르디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내일까지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전 병력을 북벽으로 모아라. 수색을 시작하겠다. 그리고.”
정말 황자의 수작이 있었다면 남하한다, 황자의 목을 들고.
막 뒷말을 뱉어내려던 순간.
“저기! 저기 백작님이 보입니다!”
“전대 백작님도 함께 계십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황자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북벽에 몰려든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두 분 얼굴이 왜 저리 어두우시지?”
“황자님은 즐거워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운데 선 황자의 얼굴은 밝디밝건만 양옆에 선 백작과 전대 백작의 얼굴은 거무죽죽한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껏 어떤 적들 앞에서도 저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기에 북방 병사들의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지난 며칠간 황자가 벌인 일들이 입을 타고 퍼졌고 다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했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어.”
“카, 카르디스 도련님? 괜찮을까요?”
“···나도 두 분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밖으로 나갔던 이들이 안으로 들어왔고.
북벽 병사들이 느꼈던 불안감의 실체가 서서히 현실로 다가왔다.
처음 시작은.
웨에에에엥!
커다란 사이렌 소리로부터.
북방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럽게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고.
“여기는 북방의 변경백 발자크 백작이다. 북방 영주들과 북부인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 이리 목소리를 냄을 이해해다오.”
흔히 듣기 어려운 백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 큰일이 아닌 이상은 백작이 직접 목소리를 싣는 법이 없건만.
철없는 아이들이 존경하는 백작님의 목소리라며 방방 뛰는 동안.
어머니들이 불안한 얼굴로 아이를 감싸며 창밖 마법 음성 확대기를 쳐다보았다.
일하던 자들도 일제히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침묵이 점차 길어졌고 다들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쯧, 답답하기는 내놔라. 내가 이야기하지.”
중저음의 보드라운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북방의 지배자인 백작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자가 누가 있을까? 목소리가 참 좋다.
촌부들의 머릿속엔 마땅한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제국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 아이로니아가 말하니 북부의 제국민들은 들으라.”
“히익-!”
“화, 황자님!”
“어, 엎드려, 어서들 엎드려!”
황자라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저 멀리 북방 촌구석 오두막에서 벽난로를 쬐던 노파까지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에게 황가와 황자란 이름은 전설 속 드래곤과 맞먹는 위치.
물론 가끔 욕이야 했어도 이리 목소리를 마주하고 당당할 자는 없었다.
권태와 귀찮음이 눅진하게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북방의 전 병력들아 모여라. 영주들과 기사들,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 과거 북벽에서 치열한 전투를 견뎌낸 자들 모두 북벽으로 모이도록.”
충격적인 발언에 사람들의 등이 흠칫 떨렸다.
황자가 말한 대로라면 북부의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북벽으로 향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람들의 불안감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불친절한 황자는.
“북방의 후손들이여. 너희들의 손으로 직접 북방을 지켜라.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전쟁이다. 동토가 몰려온다.”
모호한 명령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를 들은 북방에 머물던 정보부를 비롯하여 평이한 옷을 입었으나 눈빛은 남다른 자들의 표정이 찬찬히 굳었다.
곧 소식이 퍼졌고 중부와 동부, 특히 강철성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들이 보낸 첩보는 동일했다.
- 황자 아르한, 북부와 결탁하여 반란 모의 가능성 확인. 경계 요망.
황자의 불꽃과 에스키모의 설풍이 만나 만들어진 광풍에 제국의 운명이 서서히 휩쓸리기 시작했다.
왜인지 황자의 광기 어린 웃음이 들렸다면 과장일까.
아니, 그를 만났던 자들은 확신했다.
지금쯤 흐드러진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고.
찬란한 백금발을 쓸어넘기며 누구보다 고귀하고 광기 어린 웃음을 뱉어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