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한 인질범과 두려움 없는 인질
지난 시간, 병사들이 북벽 너머를 휘젓는 동안.
매일 같이 몸 안에 있는 불을 키우기 위해 집중했다.
나머지 시간엔 루카르에게 검을 배웠다.
고된 훈련이 끝나면 노곤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 찬찬히 안을 관조했고.
심장 주변, 고리를 형성한 불이 느릿하지만 도도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몸 안을 휘도는 깨끗한 불.
다만 아무리 불을 휘돌려도 예전처럼 불이 거대해지지 않았다.
한계에 봉착한 것일까.
첫 번째 심장 적염의 끝에 도달한 듯싶었다.
아니면 내 한계거나.
“모자라다.”
전대 백작에게 검을 배우던 중 불쑥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너무 느렸다.
불은 커지지 않았고 검을 마스터하는 건 언젠간 이룰 일이나 당장 이룰 수 없는 일.
“무엇이 말입니까?”
루카르가 내 말을 듣고는 되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청력이 좋아 들렸던 모양.
“싸워야 할 적에 비해 나의 성장이 느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사실 이야기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보통 루카르와 같이 한 분야의 극에 달한 자들이 뱉을 말은 뻔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에 집중하라.
휘두르다 보면 분명 때가 올 것이고 적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전대 백작은 그리 꽉 막힌 노인이 아니었다.
“경지를 다투는 자는 아니겠지요.”
“아무래도. 굳이 따지면 목숨을 다투어야지.”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야겠군요.”
“맞아.”
“전하께서 불을 다루신다 들었습니다. 아들에게 듣기로는 신비라고 하더군요. 건국제의 것과 같습니까?”
“얼추 비슷하지.”
“그렇다면-.”
곰곰이 말을 끌며 생각을 하던 루카르가 저 멀리.
불꽃을 피워내는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시면 빨리 강해지지 않을까요?”
“어떻게? 모닥불 주변엔 마법진과 장치들이 가득해서 살아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으음, 그건 생각 못 했네요. 죽지만 않는다면 할 만 한데요. 그래도 모닥불 관리소 맨 꼭대기에 아래로 떨어지는 구멍이 있습니다. 불을 뿜어내는 구멍이죠. 아주 깊긴 하지만요.”
“그걸 어찌 아는가?”
“혹시라도 들어가면 강해질까 싶어 살펴본 적 있지요. 당시에 수염이 모조리 타버리는 바람에 고생했지 뭡니까.”
“그거 참 인상적인 조언이로군.”
이 노인도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었다.
미친 거에서 질 순 없지.
늙고 미친 기사와 젊고 미친 황자가 나란히 서서 모닥불을 보며 고민하길 잠시.
“아무래도 방법이 없군요. 결국은 정도가 왕도입니다. 검을 드시죠.”
노인은 포기했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검을 들어라. 검?”
물끄러미 내 손에 든 거검 브레이커를 바라보았고.
“수염은 녹아도 이건 안 녹겠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강해지지 못한다면 손에 든 검을 강하게 만들리라.
그리고 불을 키우지 못 한다면 더 큰불을 끌어오리라.
왜인지.
“루카르 경 내가 이겼군.”
광기에서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뿌듯했다.
**
그렇게 며칠을 저 깊은 구멍 속 브레이커를 걸어놓고선 담금질했다.
손에 닿은 브레이커의 손잡이가 뜨거웠다.
내가 품은 불보다 더욱.
적염을 뛰어넘는 초적염의 뜨거운 온도.
이를 받아내며 속에 치미는 적염을 브레이커에 실었다.
콰르르르르!
그러자 거검이 이전과는 다른 울음을 토해냈다.
[충분히 달아오른 브레이커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태동합니다! 파괴와 분쇄가 요동칩니다!]
완전히 벌게신 검신이 열리더니 비죽비죽 튀어나온 칼날이 더욱 거세게 회전했다.
안에 휘도는 불이 덩달아 주변을 갈라 먹었다.
이것만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데 부족할까 하여 모닥불의 불까지 끌어왔다.
시뻘건 적염보다 더 밝은 주황색의 불이 몸을 감쌌고.
몸에 뚫은 불길을 역으로 타고 들어와.
잠깐이지만 적염 고리 위에 새로운 고리를 만들어냈다.
두 번째 심장의 일시적 사용.
에스키모를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되었다.
“타올-!”
막 고함치며 브레이커를 휘두르려는 찰나.
쿵, 쿵, 쿵, 쿵.
심장을 조여오는 고동에 멈칫했다.
입을 열어 타오르라 명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몸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첫 번째 심장 적염과 두 번째 심장 초적염이 서로 반대로 움직이며 서로의 고리를 부딪쳤고.
그때마다 서로 다른 패턴의 고동이 머리와 몸을 울렸다.
붉은 불과 주황색 불이 충돌할 때마다.
“크윽!”
몸 안에서 폭죽이 터지듯 폭발이 번졌다.
몸이 떨려왔고 정신은 아득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고통.
첫 번째 심장을 취할 때도 힘겨웠으나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다만.
타올라라.
목소리를 내는지, 아니면 성대가 타버린 건지 모를 정도의 아득한 고통 속에서 분명히 명했다.
타오르라고.
고통을 뛰어넘는 의지와 오만 그리고 광기.
이거면 충분했다.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적을 맞이하기에.
- 사아아아-.
북벽 너머에서부터 눈 폭풍을 이끌며 날아온 놈의 생김새가 기괴했다.
뻥 뚫린 두 눈이 영혼을 관찰하듯 깊었다.
“에스키모 너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흰 전설이 아니야!”
몰려오는 눈보라에 비로소 목소리가 뚫렸다.
오크에게 신비를 건네준, 자신의 목숨 일부를 준 녀석이 바로 저놈인가 보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고선, 조롱당했다는 걸 알고선 이리 달려왔겠지.
날 죽이지 않는다면 입은 화상이 낫지 않을 테니.
놈의 뚫린 입이 거세게 깨진 피리 소리를 내었고.
어느새 모닥불 바로 앞까지 온 놈을 향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발과 불과 고통을 내뿜어 휘둘렀다.
손목과 어깨가 찢어질 듯 무거웠다.
소리는 없었다.
아니 너무 커서 못 들었나 보다.
폭발과 눈보라가 부딪혔다.
놈이 깊은 절망을 흩뿌려대며 손과 얼음을 휘두를 때.
브레이커를 휘둘러 불을 부딪쳤다.
냉기와 화염이 충돌하며 커다란 폭발과 증기를 일으켰다.
몸 곳곳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여 피부가 아려왔다.
두 신비가 충돌하여 상쇄된 사이.
- 오만한 인간아 네놈이 가진 불로는 어떠한 것도 녹이지 못한다. 절망해라. 절망해라.
놈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자신의 신비를 뽐냈다.
몸 밖으로 수십, 수백의 손과 발이 솟아나며 끝에 검은 기운이 몽글몽글 맺혔다.
놈의 손끝이 나를 향했다.
신비가 없는 상태에선 놈에게 한참 못 미친다.
놈들의 저주와 신체 능력은 신비 없는 인간이 대항할 수준이 아니다.
이미 신체는 한계
그러나 내가 아니라도 놈을 상대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놈의 새까만 눈을 마주 보며 때가 왔음을 알렸고.
거친 눈보라와 뜨거운 불꽃 사이, 증기를 뚫으며.
“신 루카르, 에스키모를 잡으러 왔나이다.”
신비에 근접할 정도로 기예를 수련한 기사가 불쑥 나타났다.
늙었으나 강건한 육신이 얼음과 불을 밀어냈고.
그의 검에서 피어난 백색의 마나가 시리게 빛났다.
- 이미 알았다. 늙은 기사여.
하지만 에스키모는 이미 기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놈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뒤로 뒤집었고.
전직 제국 오대 기사와 북방의 귀신이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의 싸움.
이를 눈앞에 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절로 흉부가 떨려왔다.
아닌가? 어쩌면 미친 듯 뛰어다니는 적염과 초적염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곧 가슴에 차오른 감격이 너무나도 거대해 기다리지 못하고는.
“루카르 경! 시간이 없어!”
고함을 내치며 웅장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차오른 불을 다시 뿜어냈다.
와중에도 첫 번째 심장과 두 번째 심장은.
타타타타타.
연이은 타격음을 내며 교차했고.
몸 안에 가득 피어난 폭발을 뿜어내자.
비로소 웅대한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신비는 내가, 기예는 루카르 전대 백작이.
에스키모 하나를 상대로 분투했다.
루카르의 마나가 놈의 팔을 자르고 몸을 갈랐으나 금새 다시 자라났다.
놈이 여기까지 당당히 눈보라를 이끌고 나타난 이유.
- 나는 백일 밤낮을 싸울 수 있다. 인간들아 너희는 며칠을 싸울 수 있느냐.
북방의 귀신은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들의 생명은 바로 신비에서 기원하고, 드높은 산맥과 그 너머 불모지에서 기원하니.
놈들을 죽이겠다는 건 산맥을 죽이고 대지를 죽이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에스키모가 만년설과 같이 오래된 빙하라면.
“오래 살고도 그리 추한 것은 자랑이 아니다! 에스키모!”
“몸에 걸친 뼈가 그 오랜 세월의 전부냐? 한심하구나!”
인간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생을 태워 빛과 열을 내뿜고 사그라드는 불꽃.
오래전 놈들과 건국제의 싸움이 그랬고, 추위와 북부의 싸움이 그랬고.
지금 나와 놈의 싸움이 그랬다.
타오르는 몸으로 놈의 신비를 분쇄하면 백작이 검을 찔러넣었다.
허나 결국은 인간.
건국제가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듯.
가슴 속 요동치던 심장이 천천히 멈추어 갔고.
“쿨럭. 이건 제기랄.”
“전하! 정신 차리십쇼!”
무리한 나머지 입과 귀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피어났다.
속이 모두 타버린 듯 건조했다.
비로소 에스키모가 즐거운 듯 기다란 소리를 냈다.
저 멀리, 북벽에서 몰려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놈은 북부를 멸하기 전 우리가 방법을 틀었듯 계획을 틀었다.
정확히 지금 북부를 변화시키는 자,
나를 무력화해야 함을 파악한 것.
- 불꽃의 후손아. 너희가 섬기는 선조 또한 우리를 이기지 못했다. 그저 밀어냈을 뿐이지.
“개소리 마. 그렇게 처맞고 쫓겨났으면 그게 진 거지. 오래 살아 놓고선 끝까지 지지 않았다 우기는 게 그 반짝거리는 민머리만큼이나 추하구나.”
- 결국 그는 죽었다. 세월 앞에서 패배했다. 짧게는 이겼을지 모르지. 그런데 지금 여기 서서 후손의 죽음을 막아줄 자는 어디 있나. 카이론이 널 살려준다던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죽긴 누가 죽어 이 죽지도 못해서 이글루에 똥칠이나 할 늙은 귀신아. 난 끝까지 살아 너희의 패망을 구경할 테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핫초코라도 마시면서 말이지. 위스키를 좀 타면 더욱 좋겠군.”
- ······.
끝까지 밀리지 않는 입담에 놈이 침묵하길 잠시.
더는 말을 섞지 않기로 했는지 백작의 공격을 도외시하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신비가 다했기에 몸을 움직일 기력도 없다.
뒤에서 백작이 에스키모를 잡으려 했으나 미세하게 늦었다.
놈의 무저갱과 같은 눈에 기쁨이 담기려는 순간.
“건국제 카이론이 오셨다.”
내가 꺼낸 이름에 놈이 움찔 떨었다.
북부가 에스키모란 이름을 동토라 부르며 두려워했듯.
놈들은 카이론이란 이름을 두려움으로 삼았다.
그게 날 불꽃의 후손이라 부른 이유겠지.
예상은 정확했다.
미세한 시간.
그사이 도달한 백작이 혼신의 일격으로 놈을 쳐냈고.
나는 브레이커를 던지듯 휘둘러 놈을 빗겨냈다.
와르르릉! 서럽게 우는 브레이커와 공중에 떠오른 에스키모.
- 죽인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놈이 분노하며 다시금 날 향해 달려들려 할 때.
“속고만 살았냐.”
내가 가운뎃손가락을 정중히 들어 올리며 놈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네놈 아래. 무덤에서 깨어나는 건국제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데.”
그제야 아래를 바라본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리소 아래 뻥 뚫린 구멍, 마치 자신의 눈과 같이 깊은 어둠을 담은 곳에서.
콰르르르르.
보았던 어떤 불보다 거대하고 뜨거운 불이 치미는 모습.
- 네놈-.
에스키모가 무어라 하기 전.
역류한 모닥불이 놈을 집어삼켰고.
그 사이, 백작이 쏘아낸 단단한 검격 속 실린 마나가 빠져나오려는 놈을 멈춰 세웠다.
이어 브레이커를 던져.
놈의 몸과 목 사이를 파고들었다.
휘도는 검날이 재생되는 살을 끝없이 잘랐고.
잘린 살 속으로 화염이 스며들었다.
점차 갈라지던 목이 몸에서 분리된 순간.
“하압!”
루카르가 검에 마나와 기합을 그러모아 던졌고.
놈의 머리를 꿰뚫어 함께 굴뚝 벽면에 꽂았다.
머리를 잃은 에스키모의 몸이 부글부글 끓어대는 굴뚝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백일 밤낮을 싸운다 했지? 어때, 불 속에선 얼마나 오래 탈지 궁금하군. 천일? 만일? 어느 고귀한 오크의 복수이기도 하니 오랫동안 타오르도록.”
기분이 좋아 절로 웃음이 났다.
몸에 가득한 상처, 곳곳이 타버린 옷, 무리한 심장에선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입과 코로 까만 증기가 뿜어졌다.
목과 속이 매웠으나 허리를 꼿꼿이 폈다.
놈이 불 속에서 겪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홀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놈들은 모르지. 너희에게 시간이 있다면 우리에겐 유산이 있다. 우리에겐 의지가 있고 번짐이 있다.”
에스키모들이 산맥과 같이 오랜 시간을 살아간다면 불처럼 짧게 사는 인간들은 극복을 위해 함께했고 남겼다.
유산을 의지를 신비를 북벽을 기술을.
이를 이어받을 자만 있다면 지지 않는다.
검에 꿰인 머리통이 들을진 모르겠으나.
“지금 너처럼 다른 에스키모들도 모두 패하리라. 건국제가 남긴 불과 북벽을 지켜온 이들의 의지 앞에서.”
승리를 선언을 끝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무 밝은 불을 보아서였을까.
잠시 찾아온 어둠을 반기기로 했다.
[에스키모의 운명 불사, 혹한, 죽음, 오래된 세월을 포식합니다!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브레이커의 운명이 강제 각성합니다! 2차 진화를 시작합니다]
[모닥불 관리소의 운명이 뒤틀립니다. 안에 담긴 신비가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옵니다]
[루카르의 운명 중 깨달음을 자극합니다. 새로운 운명 신비가 싹틉니다. 기존 운명 극한, 실패, 좌절을 포식-]
[장소에 새로운 운명 제 3의 길이 싹틉니다-]
어둠 속 연쇄적으로 변하는 운명에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주변 들리는 소란이 시끄러워 잠시 귀를 닫았다.
**
황자가 북부 전 병력을 모은 순간부터.
동부와 중부 서부의 병력들이 소란스레 움직였다.
모두가 북부의 반란을 기대라도 하는 듯 일제히 북부의 경계 바깥으로 스멀스멀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북부에서 중부, 수도 페르마로 향하는 길목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도시 마르세.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는 어째서인지 마르세 관문이라 불리는 요새 겸 성이 존재했다.
겉으론 북부가 무너졌을 때, 몬스터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물론 말하지 않은 위협엔 북부의 반란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두 제국 신분증을 미리 꺼내놓으쇼! 그래야 들어갈 수 있으니!”
최근 북부의 흉흉한 분위기 때문인지 마르세 관문으로 들어가는 정문에선 엄격한 신분 검사가 이루어졌다.
“아니, 이전에는 그냥 들여보내 주어서 안 가져 왔다니까.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좀 들어갑시다!”
그때 보따리를 짊어진 상인 하나가 버럭 성을 내었고.
“기사님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봅시다.”
병사들이 그를 끌고 가며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기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끌려가던 봇짐장수도 불만을 품은 채 술렁이던 사람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진짜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소식이 빠른 이들이 불안감에 입을 놀려댈 때.
“모두 비켜! 모두 길에서 나와라. 당장!”
갑작스레 은색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정문으로 우르르 뛰쳐나왔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그들 뒤로, 붉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걸어 나왔다.
“홍익 기사단이다.”
“강철성에서 파견 나온 건가?”
황실 12 기사단 중 하나인 홍익 기사단의 등장에 진짜 무언가 벌어지는구나 직감할 때.
저 멀리.
달그락, 달그락.
커다란 마차 하나가 느긋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문에 그려진 문양은 북방 변경백의 것.
최근 역모 혐의를 받는 백작가의 마차.
관문을 지나가게 둘 수 없다.
홍익 기사단이 붉은 갑옷과 더불어 스산한 살기를 내뿜으며 마차를 노려보는 사이.
“백작가의 마차는 멈추어라!”
호통을 들은 마차가 멈추어 섰다.
인원은 단출했다.
고작 마부석에 로브를 눌러쓴 마부 하나가 전부.
그럼에도 홍익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마부의 드넓은 어깨너비가 심상치 않다.
“당장 마차에 탄 자들은 내려 신원을 밝히고 홍익 기사단의 지시에 따르라!”
단장의 고함에 마부가 입을 열었다.
“어떤 지시를 말하는가.”
“무기와 마차를 모두 버리고 홍익 기사단의 인도를 따라 수도로 압송될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마부가 마차에 무언가를 물었고.
“정체를 밝힐 순 있지만 무기와 마차는 버릴 수 없다시는군. 그리고 마차는 그대들을 위해서라도 버리지 않는 걸 추천하네.”
“홍익 기사단과 관문 기사들은 검을 뽑아라!”
스르르릉!
시린 검날이 볕을 반사하며 날카롭게 빛났다.
결국 마부가 결심한 듯 천천히 로브를 벗었고 자리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드러난 얼굴은 은거했다던 전대 제국 오대 기사 루카르 드보르작.
그가 늙은 얼굴 위 서글픈 빛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안에 계신 분이 나오면 자네들이 곤란해질 거야. 진심으로. 내 선배로서 간절히 부탁하네. 이대로 물러나게.”
그의 울적한 목소리에 망설이던 홍익 기사단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희는 임무를 다하려 합니다.”
“결국, 택하고야 말았는가.”
천하의 루카르가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꾹 감길 잠시.
“전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답니다.”
“흥, 난 상관없건만 자네가 싫어 난리를 치는군.”
안에서 오만한 목소리가 울리길 잠시.
루카르가 문을 열자 안에서 훤칠한 다리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서는 모습에 고귀함이 깃들었다.
황자 아르한, 그가 관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백금발이 뿜어내는 빛에 기사들의 검이 예기를 잃었다.
진홍색 눈동자를 들어 찬찬히 홍익 기사단과 주변 관문을 둘러보던 황자가 입을 열었다.
“황자 아르한이다 길을 열어라.”
“···송구합니다만 불가합니다.”
“어째서?”
“···전하께서 북부와 결탁했을 시 함께 압송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홍익 기사단 단장이 억눌린 목소리로 답하자.
아르한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이미 반역도라 낙인을 찍었구나.
재밌어졌다.
“계획대로 간다.”
그의 말에 루카르가 와락 인상을 구기길 잠시.
침중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황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황자 아르한을 인질로 잡았다. 기사단은 길을 뚫어라.”
“!”
갑작스런 상황에 기사단이 엉거주춤하는 사이.
“아아, 너무나 두렵구나. 이대로 내가 검에 찔려 죽는다면 이를 지켜본 자들 또한 모두 반역도가 될 터. 죽기 싫다 어서 길을 뚫어라.”
아아, 황자가 인질치고는 너무나 태평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두려움을 표했다.
그리곤, 직접 목을 검에 바짝 가져다 붙였다.
흐르는 한 줄기 피가 선명했다.
“어어, 전하 가까이 가져대지 마십시오. 제발 좀.”
“죽기 싫으니 길을 비켜라. 아니면 여기서 모두 멸문지화를 당해볼 테냐?”
정중한 인질범과 두려움 없는 인질의 기묘한 수도행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휘말린 홍익 기사단의 표정이 장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