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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47화 (47/200)

참으로 듣기 좋구나

최근 정보부를 비롯한 각 세력의 첩보 요원들을 근래 북부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사건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북부라 하면 동북부, 동남부를 나누고 있는 양 공작을 제외하곤 가장 커다란 군사세력.

거기다 백작 자체가 소드마스터로 일신의 위력이 뛰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전대 오대 기사.

지금은 은퇴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만일 돌아온다면 현재 무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려울진대.

황자의 명령이 떨어진 후 모여든 북부의 병력을 보며 더욱 놀랐다.

북부의 전력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

물론 많은 군사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계산했다.

북방의 전력은 눈에 드러난 것 이상일 거라고.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그들의 전투력은 단순 수치를 뛰어넘었다.

북부 남자 전부가 숙련된 병사들이라니.

- 북부 인구수 중 절반 이상이 전투 가능한 인원. 특히 노병이라 불리는 숙련자들의 존재를 파악.

- 전대 백작 소드마스터 루카르와 노병들이 지금껏 교류했다는 사실 파악. 외에도 숨어있던 은둔자들의 전력은 파악 불가할 정도.

- 그들 사이 어떤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는지 파악 중. 북부 병력들의 전투력 상향 조정 필요.

- 기존 북부 전투력에 대한 정보 전량 폐기. 단순 가문 이상의 충성도와 전투력 보유. 고위험 집단.

이어진 첩보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제국이 속았다.

보통 사람은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면 의심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들 의심했다.

북부가 사실 처음부터 반역을 도모했던 것 아닐까.

추위 속에 꽁꽁 숨어 기회만을 노렸던 것 아닐까.

제국에 부는 바람이 스산한 시기 제국 정보부.

“첩보! 첩보 도착! 긴급 첩보 도착했습니다!”

한 요원이 막 들어온 첩보를 확인하곤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밤을 새우느라 벌게진 눈으로 정신없이 일하던 때.

“북부, 아르한 황자 옆에 대기하던 요원들의 첩보입니다!”

우뚝.

정말 시간이 멈춘 듯 자리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그들의 눈이 천천히 돌아가더니 일제히 손에 들린 첩보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곤에 찌든 눈가가 마치 귀신들 같아 첩보 도착을 알린 요원이 까끌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치를 보곤 얼른 상석 회의실로 향했다.

등에 달라붙는 눈빛들이 따가웠다.

그가 회의실 문을 두드리기도 전.

“들어와! 어서!”

벌컥 문이 열리더니 높으신 분들이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여기서 주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

상념을 지우고는 도착한 첩보를 내밀자.

“나가. 당장.”

차갑게 명령한 부장이 침을 꿀떡 삼키곤 첩보를 확인했다.

잠시 멍하니 눈을 끔뻑이곤.

“이 뭔 미친 소리야?”

다시 읽었다, 또다시, 여러 번 반복해서.

그가 종이를 옆으로 넘겼고 이어받은 자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첩보를 읽은 자들은 모두 같은 반응.

가장 끝, 한참을 기다리다 못한 간부 하나가.

“아 거 좀! 빨리들 보고 넘기시죠? 답답해 미치겠네!”

성을 못 참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근래 제국 정보부 분위기는 살얼음판.

신경이 날카로워질 만했다.

마침내 첩보를 받아든 그가 내용을 확인한 순간.

“허, 허허, 허허허.”

헛웃음을 웃고는 마찬가지로 여러 번 첩보를 읽었다.

내용에 따르면.

“황자와 북부가 결탁했는데 반란은 아니다? 에스키모와 몬스터들의 대규모 남하가 예상된다? 에스키모? 설마 그 에스키모?”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내용.

아래에 자세한 정보들이 쓰여 있었고 마지막 첨언에는.

“황자와 백작이 북부를 살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둘은 합의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책임자 이 새끼 잘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황당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인질극이라니 그것도 합의된 인질극이라니.

“아니 누가 들으면 황자 전하가 시켜서 인질극이라도 벌일 것처럼 보고를 올렸네. 인질극이라니 이게 뭔 개소-.”

그가 막 화를 터뜨리려 할 때.

“첩보입니다! 첩보! 북부 관문에서 백작가 마차 확인!”

긴급 첩보가 막 도착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함과 동시에.

“현재, 마르세 관문부터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질범은 전대 백작 소드마스터 루카르 드보르작! 인질은 아르한 황자!”

들려온 소식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추가로 이어진 말.

“그런데 인질극의 양상이 좀 수상하다 합니다!”

“설마, 합의된 인질극 같아 보이기라도 하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니까 황자 전하는 인질답지 않고 루카르 경은 인질범답지 않다고 합니다.”

요원의 인정에 모두의 눈이 막 방금 읽었던 첩보로 향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은 정보를 생각하던 부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선 상황을 주시하도록. 감사실에 요청하여 만일 아르한 황자가 진실로 북부를 구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와 그의 계승 서열이 어찌 변할지. 얼마나 많은 권력을 얻을지 확인해라. 그다음 노선을 정한다. 정보부는.”

정보부 간부들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어쩌면 삶의 가장 중요한 선택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제국을 뒤흔들 선택이.

****

마르세 관문을 지나 마르세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로 중앙에선 살면서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는 중.

“모두 물러나 어서! 다들 비켜! 마차 치워! 당장!”

홍익 기사단이 저들이 입은 붉은 갑옷처럼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시에 도시의 교통이 마비됐고 소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사들의 험한 기세에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으나.

눈이 있기에 보았다.

대로 중앙, 드넓은 어깨를 자랑하는 기사를.

금세 누군지 알아차리는 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소드마스터란다, 심지어 그냥 소드마스터도 아닌 전직 제국 오대 기사 중 하나.

나이가 좀 있는 남자들이라면 다들 아는 그 이름 루카르 드보르작.

더군다나 마르세 도시는 북부와 밀접했기에 검맥 루카르에 대한 전설이 많았다.

홀로 오거 수십을 상대했다더라, 트롤 쯤은 스테이크 써는 칼로 썰어버린다더라.

강철성에서 열린 무투 대회에 참가해 기사단 하나를 홀로 상대했다더라.

약간은 허무맹랑하지만 그의 강함을 나타내는 소문들.

그런 위대한 기사가 지금.

“어, 그런데 저거 검 아니야?”

“그러게 누굴 겨누고 있는데? 흉악범이라도 잡은 건가?”

“하긴 루카르 경이라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겠지.”

“그런데 수배자 중 저런 사람은 없는데.”

“강철성에서 특별 수배를 내린 거 아닐까?”

“특별 수배? 특별 수배자를 잡았는데 이리 공개적으로 데려간다고?”

“그리고 잡혔다기엔 좀 이상하지 않아?”

이어서 사람들의 눈이 루카르 옆에 선 자에게로 향했다.

목 바로 옆, 시린 검날이 겨누고 있으나 걷는 걸음엔 한 점 두려움과 망설임 없다.

흔히 볼 수 없는 찬란한 백금발과 멀리서도 선명한 이목구비가 고귀한 인상을 풍겼다.

주변을 둘러보는 게 산책을 나온 것 같기도 했다.

그 평범한 걸음걸이에도 묘한 흡입력이 있어 어느새 주변에 선 모두가 그만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옆에 선 소드마스터 루카르마저 잊을 정도.

저런 사람이 수배자라고? 수배자가 저런 태도와 기품을 보일 수 있다고?

촌구석 무지렁이라도 알아챌 정도의 고귀함.

옆에 놓인 검날만 없다면 시찰을 나온 황족이라 해도 믿겠-.

“황자 전하이시다!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

“황자 전하 행차요!”

거기까지 상념을 이어가던 자들이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곤 급히 엎드렸다.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루카르 경이 황자 전하의 존귀한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걸까?

상황이 도저히 이어지지 않다가.

번뜩.

“설마?”

“진짜로?”

무서운 소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으나 그들이 마주한 건 어딘가 이상한 풍경.

“뭐하나 루카르 경, 이래서야 의심을 사지 않겠나.”

“······.”

“그리 검을 띄워서야 누가 위협을 느끼겠냔 말이야.”

황자가 성큼성큼 검날로 다가가면.

“오지 마십시오. 전하 진짜 거기 멈추십시오. 당장. 검 집어넣습니다. 진짜로요.”

어떤 적을 맞이하여도 물러남 없다던 기사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심지어 검을 넣겠다 협박하는 인질범이라니.

거기다 스스로 검날에 다가가는 인질이라니.

너무나도 괴이했다.

시민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고.

“구경하는 자들이 많군. 이 짓도 꽤 재미있어 그렇지 않나. 전대 백작.”

“전 재미 없습니다. 전혀요.”

“재미있게 해줄까? 원하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아뇨 제발. 재미있다 하면 무엄하다 하면서 또 뭔가를 하실 거 아닙니까.”

“역시 백전노장의 지혜는 무섭군. 날 잘도 파악했어.”

“전 전하가 제일 무섭습니다.”

“음 옳은 자세다.”

둘의 태평스러운 대화를 듣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곧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일을 멈추고는 평생 다시는 못 볼 괴상한 풍경을 따라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황자가 문득.

“이봐 진짜 마차가 없어도 되겠어? 수도로 가는 내내 이 꼴을 보고 싶지는 않을 텐데.”

홍익 기사단장을 보며 나지막이 물었고.

“마차를 가져와라! 당장! 백작가의 마차를 가져와!”

그가 발작하듯 간절히 백작가의 마차를 찾았다.

이러한 소문은 상인들의 입을 타고 주변 도시와 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소문엔 살이 붙는 법.

“아니 글쎄 루카르 경이 전하의 목에 검을 겨눴다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상해. 오히려 황자 전하가 막 검에 목을 가져다 대고 그 대단한 소드마스터가 피하더라고.”

처음엔 꽤 정확했던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을 거쳐 갈수록.

황자가 용기와 제 목숨으로 루카르 경을 오히려 협박했다는 이야기.

사실 둘이 협력 관계인데 연기를 하는 중이라더라.

북부가 황자의 목숨을 담보로 독립을 요구한다는 둥.

여러 소문이 퍼지다가 어느 순간.

황자와 백작이 짜고 연기를 하여 기사들과 사람들을 이끌고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지배적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북부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던데? 살려고 그 지랄들을 한 거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성에서 안 들어주니까!”

북부의 멸망 위기.

소문의 진상을 알려준 상단의 상인이 물품을 실은 무리를 끌고 마을을 떠났다.

그들의 목적지는 로이스 자작가 휘하 팩토리.

제국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

황자와 소드마스터의 기묘한 인질극에 대한 소문은 물론 강철성에도 전해졌다.

아침부터 급히 소집된 어전 회의에서는.

“지금 전하께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데 자리에 있던 기사들은 대체 무엇들을 했단 말입니까!”

“말조심하시오! 지금 기사단이 일부러 방치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를 어찌 구할지 생각해야지요.”

“전하와 루카르 경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둘이 짜고 인질극을 벌이는 중이라더군요.”

“어허 감히, 그럼 지금 황자 전하께서 반역 도당들과 함께 모의하여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는 뜻인가!”

“반역이란 말을 꺼낸 건 당신이고. 실상 조사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북방이 어찌 움직이는지도 봐야지요. 눈을 돌리려는 계책일 수도 있습니다.”

“눈을 돌리려는 계책이라니? 계책이라니! 위기에 빠진 전하를 구할 생각은 안 하고. 전하 목숨을 그리 가볍게 여겨서야! 저 북방 도당들과 다를 게 무엇이오. 그쪽이!”

해가 중천에 떴건만 자리에 늘어선 신하들은 어떠한 생산적인 해결책은 내놓지 못한 채 서로 싸우느라 바빴다.

“우선 전하의 안전을 확보하되 북방의 진상을 들을 기회이기도 합니다.”

누구 하나 조금 괜찮은 의견을 내놓는다면.

“지금 감히! 진상을 듣다니 누구에게 듣는다는 거요! 말을 바로 하시오! 반역도의 말을 듣는다니! 제정신이오!”

“당신도 한패로구나! 과거 북부에 시찰 겸 여행을 갔다 하더니 그때부터 결탁한 거요?”

우르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서로 혼란스러운 대화가 오갔으나 결국은 한 가지 뜻으로 수렴했다.

황자가 인질로 잡혔든 사실 협력 관계든 북부는 역모를 꾀했다!

그러니.

“에스키모와 몬스터가 내려온다면 잘 되었습니다. 차라리 그들끼리 상잔을 하도록 두면 될 일입니다.”

“맞소이다!”

“북방이 수도로 내려올 수 없도록 모든 지원을 끊어야 합니다!”

북부를 버리자.

신하들의 목소리가 그제야 하나로 통일되었다.

황당한 일이다.

아직 반역이란 확실한 증거도 없건만, 관문부터 수도까지 기사단과 병사들을 가득 세워두었고.

심지어 지원마저 끊은 뒤 땅을 버리란다.

제국의 국토를.

자신이 명하기도 전에 저들끼리 확답을 내린 뒤 일제히.

“북부를 끊어내소서!”

답을 강요했다.

수백 신하의 목소리가 합창처럼 밀려들었다.

어전 가장 상석, 고귀한 보좌 위.

제국의 황제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간의 침묵.

“북부를 끊어내소서!”

다시 어전 가득 잔혹한 말이 울렸다.

황제가 속에서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경들의 걱정은 안다. 하지만 정말 에스키모와 몬스터들이 넘어오는 상황이라면 그리 쉬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자와 백작이 오고 있다지. 그들이 인질극을 벌인 이유라도 들어야겠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자의 목숨을 버리고 북부도 버리고 다 버리란 말인가? 북부에 남은 제국민들은? 황자의 목숨은? 모두를 버리란 말인가? 자네들은 어떤 해결책도 없이 그저 버리라고만 하는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놈의 통촉, 통촉, 통촉!

황제가 속에서 치미는 분노에 권좌의 손잡이를 으스러질 듯 쥐었다.

앞에 있는 자들은 말이 통하질 않았다.

마치 인간으로 이루어진 벽과 같았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답답했지만 황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 자신의 검술 스승이었던 루카르 경의 충정이 기억나서이기도 했고.

제국을 태워 정화하겠다던 아들의 결심이 귓가에 울려서이기도 했다.

미운 아들임에 분명하나 최근엔 달라졌기에 아비로써 믿어주려 했다.

전생엔 이런 자비와 믿음 때문에 아들에게 죽었다.

지금은 일어나지 않을 일.

“북부에 있는 제국민이 몇인가. 병사들이 몇인가. 몬스터에 북부가 무너진다면 대체 누가 그걸 감당한단 말인가. 북부의 병력들이 당장 내려오는 것도 아니건만 반역이라 확정 지을 이유가 무어란 말이냐.”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폐하! 반역은 일어나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반역도와 몬스터를 부딪혀 상쇄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결단을 내려주소서!”

“통촉하여 주소서!”

결국 대화는 통촉으로 회귀, 결정을 내리면 이 모든 건 자신의 책임이 된다.

도대체 왜 누구도 바른길을 제시하지 않는단 말인가.

황제의 가슴팍에 아리다 못해 쿡쿡 찌르는 듯 통증이 치밀었다.

화가 났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과 이런 상황을 만든 북부와 황자에게도.

모두가 징그러웠고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때처럼.

자신을 살렸던 그때처럼.

황제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밖에 일어난 소란을 감지했고.

“들어오라.”

신하들 너머 거대한 어전의 문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비록 앞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을지언정, 강철성만은 황제인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

황제는 강철성 모든 공간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권한과 신비를 얻으니.

황제의 허락에 회의가 열리던 어전을 중심으로.

강철성 전체가 꿈틀대며 이동했다.

앞을 가로막았던 건물들이 사라졌고 대로가 짜 맞춰 이어졌다.

황제가 머무는 어전과 강철성의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인 순간.

철컹, 철컹, 철컹, 끼이익!

어전의 문, 황제궁의 문, 내원 성벽의 문, 저 바깥 강철성의 정문까지 한꺼번에 열리니.

겹치는 사각형 틀 사이로.

따각, 따각, 따각, 따각.

황제의 부름에도 급하지 않고 급하지 않으나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대로를 통해 들어오는 백작가의 마차와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기사들.

마치 그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형상 같아 기세가 당당했다.

마부석, 마차 옆에서 달리던 홍익 기사단 단장의 눈가에 비통함이 어렸다.

“폐하···!”

권좌에 앉은 주군을 보자 지난 시간 고생이 떠올라 눈가가 축축했다.

곧 마차가 어전에 당도했고 문이 열리며.

황자가 내려섰다.

갈기처럼 휘날리는 백금발과 살기와 광기를 머금은 진홍색 눈동자.

등에 빗겨 맨 흉측한 거검.

권태로우며 오만하며 흉포한 모습의 황자가 당당히 황제를 향했다.

실제로 목 바로 옆, 루카르 경의 검이 닿아 있었으나 그의 위엄에 손상하나 가하지 못했다.

“허억.”

“바, 반역이다!”

“폐하! 피하소서!”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황자의 등장에 숨을 들이켜며 우왕좌왕했으나.

다가오는 황자와 이를 보는 황제는 흔들림 없었다.

황제의 배려로 황자가 어느새 어전에 도달했고.

주변에 몰려든 기사들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황자와 루카르를 둘러쌌다.

꾸웅.

아르한이 아랑곳하지 않고 거검 브레이커를 땅에 꽂으며 당당히 외쳤다.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 폐하를 뵙고자 실례를 무릅썼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

“북벽의 병사를 모은 것! 루카르 경을 시켜 목에 검을 겨눈 것 모두 저의 명이오니! 사정을 헤아려 들어주소서! 전쟁 중 장수는 폐하 앞에서 검을 들 수 있다기에 이리 섰나이다!”

“······.”

“증거 또한 가져왔으니 문제없을 것입니다. 다만 폐하! 이 부족한 아들이 청하옵건대. 마음에 맺힌 분을 풀도록 잠깐의 실례를 허락하소서!”

황자의 구구절절하나 당당한 외침에 아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설명하겠지.

“말하라.”

그제야 황자가 천천히 신하들을 둘러보고는 크게 가슴을 부풀렸다.

그리고 어전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 개 씨발 병신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 북부를 버리라 한 새끼들은 당장 여기서 대가리를 땅에 처박고 뒈져라! 너희가 제국의 적이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뒈져라, 뒈져라, 뒈져라.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황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어전에 상스런 욕이 메아리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굳어있는 사이.

“크흠.”

황제의 헛기침만이 작게 울렸다.

기대한 변명은 아니었으나, 심히 아주 달랐으나.

황자의 폭언이 울리는 순간, 가슴에 맺힌 쿡쿡 찌르듯 아프던 멍울이 쑤욱 내려가며 속이 시원해졌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황자의 상스럽지만 찰진 욕이 참으로 듣기 좋았다.

어떤 악기보다 듣기 좋았다.

그래서일까.

“더하도록.”

황제가 저도 모르게 욕을 추가 주문했다.

존귀한 황제가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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