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49화 (49/200)

깊은 겨울

과거 북부의 한 유명한 철학자가 인간이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서술했다.

첫 번째로 부정.

“북부를 버리다니요. 방금 북부를 버리자는 신하들에게 그리 호통을 치셨잖습니까. 지금 장난칠 상황이 아닙니다. 전하.”

“아르한, 방금 신하들에게 한 욕설과 네가 한 말이 같지 않느냐 버리다니. 파괴하고 다시 만들겠다니.”

두 번째로는 분노.

“전하! 답을 해주십시오. 이런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같이 검을 들고 싸운 전우입니다. 마나를 걸고 한 맹세에 북부를 파괴하겠다는 맹세는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황자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해보라. 대체 어찌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냐? 파괴하다니? 파괴라니? 버리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단어다.”

세 번째로는 협상.

“뭔가 다른 뜻으로 말한 것이겠지요. 이 늙은 기사가 설레발을 쳤나 봅니다. 전하께서 다른 뜻을 품고 계심을 이제 알아챘습니다. 그러니 슬슬 설명해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루카르 경의 말이 맞아. 무언가 뜻이 있겠지. 너무 황당한 비유라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뜻을 이야기해 보라.”

둘의 격한 변화에 서기관이 이를 어찌 적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황자가 북부를 파괴하고 재창조하겠다 하니 황제와 소드마스터 루카르가 부정하다 화를 내다 이젠 답을 구했다, 이리 적어야 할까.

얼핏 황족 모욕죄로 머리가 잘리는 그림이 그려져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서기관 일을 하면서 다양한 군상과 장면을 마주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그림은 상상에서나마 생각해본 적 없다.

황자의 충격적인 말에 경악하는 황제와 제국 최강일지 모르는 기사의 모습.

이어진 분노와 추궁.

그 속에서도.

“말 그대로입니다. 북부를 파괴하고 다시 세우려 합니다.”

황자의 태도엔 한점 흔들림 없었다.

자리에 신하들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갈지, 혼란스럽게 떠들어댈지 예상이 되었다.

물론.

“아아, 대체 그게, 그게 무슨 소리란 말입니까. 전하. 전하를 믿은 제가 바보였나 봅니다. 제가 멍청이였어요. 아아 북부의 운명이 이대로 끝나는구나.”

“아아 내 황자의 편을 들어준 게 실수였다. 실수였어.”

이젠 폐하와 기사가 울적한 얼굴로 4단계 우울을 표현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 수용만이 남은 상황.

잠시 둘을 바라보던 황자가 그들의 반응을 충분히 즐긴 다음 입을 열었다.

“북부는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도 파격 그 자체.

다시 분노, 부정, 협상, 우울의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황자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뜻은 간단했다.

이미 너무 많은 오물이 눈 아래에 쌓여있다.

빙하 아래 켜켜이 쌓인 굳은 감정과 세월이 너무 많았다.

황자가 자신이 본 북부의 모습과 처한 상황을 나열했다.

모닥불을 덮은 불필요한 장치들과 마법들, 불안정한 보관소, 북부인들 속에 쌓인 불만, 강하게 이어진 비리 커넥션.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제와 소드마스터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그들이라고 왜 모를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어찌 손댈 수 없어 놔두었던 세월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북부는 버려진다.

그게 황자의 결론이었다.

서기관이 퍼뜩 드는 생각에 재빨리 펜을 움직였다.

냉정한 사실만을 적는 실록이 아닌 서기관들끼리 남기는 야사에 적을 말들을 써 내려갔다.

[텅 빈 어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문 밖, 먹구름 가득한 하늘.

햇볕 하나 들지 않아 어둑함이 감돌았다.

마치 북부가 처한 명운과도 같아 서글펐다.

황자의 말에 황제도 기사도 아무 말 못 하였다.

그들도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황자의 말이 썼다, 사실은 쓴 법.

누구도 구하지 못할 혹한의 땅.

그의 말은 예언처럼 두려웠고 눈송이처럼 차가웠다.

어두운 어전, 황자의 눈엔 불씨가 가득했다.

황자는 살리고자 하니.

북부를 죽이고 다시 살리려 하니.

황제와 북벽의 기사는 결국-]

서기관이 슬쩍 황제와 전대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과연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

황자의 말과 뜻을 부정하고 사실을 외면한 채 그럴 리 없다며 눈을 감을 것인가.

아니면 파괴하고 재창조하자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꿀떡,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제국의 명운이 달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이리 심장이 떨리건만 황제와 기사의 망설임이 이해되었다.

자신이었더라도 황자의 계획에 찬동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그런 그들을 보며.

“결국 무너질 생을 유지하는 것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폐하, 루카르 경.”

황자가 읊조리듯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어전의 드넓은 창문 속, 흘러가는 먹구름과 대비되어 어딘가 사람을 현혹하는 마력을 풍겼다.

“결국은 무너질 탑을 보며 비탄과 괴로움을 토하느니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게 옳습니다. 제국의 손으로 북부의 손으로.”

그런 황자를 바라보던 황제가 되물었다.

“만일 그것마저도 잘못된다면 어쩔 거냐. 부수고 다시 세운다는 말은 이상일 뿐. 결국 현실은 낡고 부서지는 법이다. 아르한 황자. 만일 북부의 운명이 다시 네가 말한 그 파멸로 치달으면 어쩔 거냐.”

아비의 물음에 황자가 어둑한 어전에서 새하얗게 웃으며.

“그땐 제가 죽었을 때니 알 바 아니지요.”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곤 전대 백작이자 늙은 소드마스터에게 시선을 향했다.

“기회를 새로 받은 자가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기회를 무기 삼아 주어진 운명과 맞서야지요. 기회를 준 자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 서기관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던 감탄을 꾹 참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오랜 역사를 살피고 적어가는 과정에서 한때 선인들의 답답함에 탄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치 못하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잘못된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한 번만 더 생각했다면 최소한 후대에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면 이런 파국은 없었을 텐데.

역사 속에서 내려진 많은 그른 결정들을 보며 가슴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당사자들의 처절한 고뇌와 결심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정의 축적과 이후의 표출까지.

모든 과정 속 각자가 최선을 다했으나 비틀린 길은 때로 마지막 세대에게 잔혹한 현실을 들이밀 때가 있다.

하지만 누굴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직접 실록을 적어 내려가는 서기관이 본 역사는 그랬다.

“그러니 새로운 북부를 세울 때.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황가와 백작가는. 폐하와 백작은. 이후엔 맡기십시오. 후대에게. 다만 의지를 이어두십시오. 그게 우리가 할 일 아닙니까. 저 북부에 신비를 심어둔 건국제와 같이요.”

그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마치 서광이 내리듯 먹구름에 가로막혔던 햇볕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드문드문 들이친 백광 중 하나가 황자의 머리를 타고 흐르니.

의지를 이야기하는 그의 후광이 장엄했다.

그리고 결국.

“그래, 뜻대로 해보아라.”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황제와 기사가 황자의 고집에 따르기로 했다.

서기관이 잠시 생각하다.

- 건국제력 1195년, 황자 아르한이 북부의 파괴와 재건에 대해 제안. 현 황제 아우구스와 소드마스터 루카르 드보르작이 황자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차가운 사실은 실록에.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헤집는 영감은 야사에 기록했다.

[황자의 뜻이 지엄했고 확고했다.

그는 역사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지녔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되 이후의 결정은 후대의 몫.

의지와 환경만을 물려줄 생각이라고.

참으로 신비하게도 그 순간 어전에 서광이 들이쳤다.

어전을 온전히 밝히진 못했으나 슬며시 번지는 빛이-]

제국의 바뀌는 명운을 나타내는 것 같아 본 서기관의 가슴이 뛰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그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가 자기 일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이런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옆에서 생생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

황자가 자신의 아비이자 지엄한 황제에게 찬찬히 고개를 숙였고.

“그럼 열한 번째 아들 아르한. 폐하의 뜻을 따라 북부를 파괴하겠습니다. 창조하는 일은 폐하에게 맡기겠습니다. 첨언 한 가지를 하자면 한 학자가 과거 이러한 발언을 했으니 그를 찾아 일을 맡기면 한결 쉬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성큼성큼 어전을 빠져나갔다.

황자가 떠난 후 이젠 진짜 비어버린 어전.

“어? 저놈이 나한테 은근슬쩍 일을 떠맡기고 도망갔구나? 그렇지? 말에 홀려 이용당한 거지? 지금.”

황제의 고요한 물음이 울렸고.

서기관은 못 들은 척하며 적지 않았다.

멋이 떨어지니까.

****

로이스 자작은 근래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번 새롭게 마탑과 협의를 거쳐 만들기로 한 아티팩트 대량 생산 공장 개최식에 참여했다 돌아오는 길.

얼마나 고집들을 부리는지 늙고 완고한 마법사 원로들을 설득하느라 돈과 진땀을 무진장 흘려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각 제조 길드들과 노동조합을 상대로 지금 자신이 벌이는 사업들이 그들의 생계를 빼앗지 않을 것을 한참이나 설득해야 했고.

또 이번에 새로 도입한 거대 이동 차량, 소위 트럭이라 이름 붙인 차들을 각 공장에 도입하여 선보일 계획까지.

문득.

“소피아에게 소식은 없나.”

북부에 따라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여전히 연락 없는 딸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부인의 죽음과 딸의 탄생.

가장 축복받아야 할 날에 가장 커다란 슬픔을 겪었다.

한을 풀 곳이 없어서 딸에게 풀었던 지난날들.

아이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핑계를 무기 삼아 자기 생각대로만 휘두르려 했다.

몰랐다.

그리 답답했는지.

몰랐다.

자신이 어느새 딸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단 사실을.

몰랐다.

남들에게 사랑하는 척 아끼는 척했지만 속으론 원망했다는 사실을.

아니, 알았다.

그저 외면했을 뿐.

“얼마 전 소피아가 보낸 북부 사업 계획서를 보았나.”

“네. 가주께서도 보셨는지요.”

“보았지 꼼꼼히 보았어.”

소피아의 단정한 필체로 작성된 북부의 가치와 벌일만한 사업을 적어둔 보고서.

“그 정도의 재능이 있는 줄 몰랐는데 말이지.”

“아가씨의 뛰어남이야 가주께서 항상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백미러를 통해 살짝 비친 운전수의 얼굴에 선망과 존경이 담겼다.

부끄러웠다.

입으로는 소피아의 뛰어남을 떠들어댔으나 속으론 그리 생각해본 적 없다.

왜 그랬던 걸까.

소피아의 분노 어린 눈과 마구 제 할 말을 뱉어내는 입술을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제 뜻이 있음을.

아인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의 사업 수완은 진실로 뛰어났다.

왜 그 빛나는 재능을 보지 못했는가.

삶이 바빠서? 아니면 그저 딸을 관리해야 하는 도구 정도로 여겨서?

나름 합리적이고 진취적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쩌면 황자 전하는 이 모든 걸 알고 그날 그런 짓을 저지른 것 아닐까.

아르한, 그를 생각하자 갑자기 골이 울렸다.

그가 저택에 머물며 벌인 사고들이 떠올랐다.

다행이다, 그나마 황자가 옆에 없어서.

그때.

“어, 어어! 어어어! 자작님! 자작님!”

“왜 이리 소란인가?”

“차, 차를 누가 붙잡았습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자작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려 할 때.

콰드드득!

차 안으로 파고는 거검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톱과 같은 형상, 본 적 있다.

아니 질릴 정도로 보았다!

값비싼 집안 집기들을 아주 박살 내놓았던 그 검!

끼기기기긱!

원수같이 얄미운 거검이 곧 괴상한 울음을 내며 자작이 탄 차량의 문을 뜯어버렸고.

“오랜만이야. 자작.”

부서진 차 문밖, 꿈에서도 만나기 싫었던 황자가 특유의 백금발을 살랑이며 시린 미소를 지었다.

꿀떡, 침이 넘어가고 식은땀이 고였다.

그런데 로이스 자작을 찾아온 것은 황자뿐만이 아니었다.

우지직!

운전석 옆, 조수석의 문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우그러지더니.

덩달아 뜯기듯 열렸고.

거대한 산맥 하나가 조수석에 들어앉았다.

차가 신음을 흘리며 기울 정도의 거구.

“말없이도 굴러가는 마차라, 그런데 이거 이렇게 여는 게 맞습니까?”

찢어낸 문을 억지로 다시 끼워 맞춘 루카르가 황자에게 물었고.

“대충 타는 거지. 내 차 아니잖아.”

와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둘이 신나게 웃어젖혔다.

황자가 곧 루카르를 아인델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루카르 경. 전대 북부 드보르작 백작가의 가주이자 제국 오대 기사 중 일인이었지. 지금은 나와 뜻을 함께하는 전우일세.”

“반갑네 루카르 드보르작이라 하네.”

“어찌 모르겠습니까. 검은 모르지만 항상 존경해 왔습니다. 아인델 로이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인델과 루카르가 인사를 하는 사이.

“뭐해? 길 막히잖아. 출발해.”

황자가 운전사를 시켜 차를 출발시켰다.

곧 로이스 가주 전용 최고급 차량이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고.

“오오! 오오오! 이런 게 다 있었나?”

루카르가 신세계를 맛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거구인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차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자작이 황자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 어인 일로 찾으셨는지요. 명하신 대로 소문은 충분히 냈습니다만. 혹여 추가로 시킬 일이 있으십니까.”

황자가 철그럭, 아인델의 무릎 위에 거검을 올려놓으며 씨익 미소짓고는.

“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려 하는데. 소피아가 작성한 보고서는 보았지?”

“네 확인했습니다. 수익성이 높아 보이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잘 되었군.”

은근한 말투로 물어왔다.

“어때, 우리 북부에서 사업하나 하지 않겠나.”

“북부에서 말입니까? 소피아의 제안이라면 충분히 수용할 생각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만일 텅 빈 북부를 처음부터 재건할 수 있다면? 자네는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재건···이요?”

“그래,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거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감이 도통 오지 않습니다만.”

아인델 자작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황자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찬찬히 계획을 설명했고.

점점 입을 벌리던 아인델이 종국엔.

“그거 정말 거절할 수 없는 협박, 아니 제안이로군요.”

목소리를 떨며 황자의 말이 맞았음을 시인했다.

비록 지금 하는 짓은 협박에 가까웠으나 황자의 제안은 사업가로서 결코 거절할 수 없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

황자와 루카르가 부서진 차 문을 열고 내린 후.

그가 다급히 전 공장에 연락을 취해 물자를 마구 찍어내기 시작.

곧 창고에 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제국 전역에서 식량 등을 사들여 트럭에 실었다.

외에도 열차를 섭외하여 남은 트럭들과 함께 북부로 올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피난민들이 열차에 가득 실려 떠내려왔다.

트럭엔 미처 간소화하지 못한 귀중품이 한가득.

마르세 관문을 비롯하여 동부, 서부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서 북부가 위험하다는 소문과 함께 피난민을 수용하고 요새의 문을 단단히 잠그라는 명령서가 내려왔다.

물자와 사람이 달아난 북부가 텅 비어갔다.

마침내 북벽의 군사들이 나머지 피난민들과 함께 일제히 남하를 시작.

북부의 운명이 파괴를 향해 치달아갔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이들의 눈가에 어린 눈물이 차가운 바람에 얼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소복이 쌓이는 눈이 무거웠고 밟히는 땅의 비명이 비통한 마음과 같았다.

때는 깊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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