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夜)와 노화(老火)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처음 나의 계획을 들었을 때 당연히 백작은 극렬히 반대했다.
“안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됩니다!”
노발대발하는 것이 황자인 나와 아비인 전대 백작의 눈치조차 보지 않는 모습.
그만큼 발자크 백작의 분노는 거셌다.
“반역까지는 이해했습니다. 반역이란 명분이 아니라면 도와줄 이도 도와줄 리도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반역의 냄새를 풍겼고 심지어 전하의 목에 아버지가 검을 겨누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인내했습니다!”
그가 거의 정신이 나갈듯한 표정으로 나와 전대 백작을 보며 소리 질렀다.
“자칫하면 전하뿐만 아니라 백작가 전체 아니 친인척 모두가 몰살당할 일임에도 두 분을 믿고 맡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와서 하신다는 말씀이 뭐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의 분노에도 나와 루카르는 담담했고 주변에 선 기사들과 솔, 안드레, 알프레드, 소피아 또한 조용했다.
심지어 소피아는 그렁그렁 눈물까지 뽑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백작의 분노를 응원하는 분위기.
“저 또한 옆에 서게 해주셔야지요! 어떻게 두 분만 그리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단 말입니까!”
발자크가 가슴을 쾅쾅 두들기며 토해내는 동안.
“아들아.”
루카르가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의 아들을 나지막이 불렀으나.
“예 아버지!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두고만 봐야 하는 불효자식이 여기 있습니다!”
발자크가 평소 정중했던 태도와 다르게 눈을 희번득거리며 답했다.
루카르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표정.
물론 나는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저 백작입니다. 백작! 이 가문의 주인! 북방의 변경백! 전하도 다른 곳 보지 말고 절 보세요! 왜 눈을 돌리십니까! 우리 같이 검도 휘두르고 밥도 먹고! 야영도 하고, 반역 도모도 하고! 할 거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때려요?”
“어허 사람들 들으면 오해하겠다. 발자크 백작.”
“그래 아들아 분노가 과하다.”
“분노요? 분노오오오?”
발자크에게 내 광기가 옮겨붙은 듯 그가 마구 웃다가 이젠 애원하듯 목소리를 떨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반역 핑계로 지원 병력도 모았고 가서 폐하도 설득하여 반역 누명도 벗었다면서요. 그럼 그 병력들로 든든히 뒤 받쳐서 북부로 몰려드는 저 애스키모 새끼들과 몬스터 놈들 싹 쳐 죽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아버지와 황자 전하가 죽음을 무릅써야 합니까!
그가 이젠 거의 울 듯이 웃으며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허공을 떠도는 커다란 손이 애처로웠다.
“북부를 파괴해요? 그래요. 정말로 북부는 언젠가 버려질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입니까. 그리고 왜 백작인 제가 남는 게 아니라 아버지와 전하가 남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돼요. 어서 철회해 주십시오. 저도 옆에서 함께 하게 해달란 말입니다.”
마지막엔 거의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절망에 이번엔 첫째 아들 카르디스도 목소리를 내었다.
“맞습니다. 할아버지 저희도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같이 영광스러운 전쟁터에서 죽겠습니다.”
“카르디스 넌 빠져라.”
“아버지. 저희도 백작가의 일원입니다.”
“빠지라면 빠져.”
둘의 실랑이를 보던 루카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보았지? 너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다. 너라면 아들을 옆에 세울 수 있겠느냐.”
“······.”
“아비 된 자가 어찌 자식보고 사지에 서라 할 수 있겠느냐. 차라리 내가 서고 말지. 난 말년에 이런 자리를 찾아 헤매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루카르의 마음이 이해되어 발자크가 답하지 못했고 카르디스가 분한 얼굴로 둘을 살폈다.
똑 닮은 백작가 3대가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을 품은 채 침묵했다.
이대로는 이야기가 좁혀질 것 같지 않아 내가 나섰다.
“이봐 루카르, 발자크, 카르디스 북부를 책임질 변경백 가문의 남자들아.”
잔잔한 목소리에 그들의 고개가 나를 향했고.
“훑어보니 전대 백작, 백작, 미래의 백작이로군. 대충 빽작, 백작, 배작이라 부르면 되겠어.”
내 어설픈 농담에 모두가 답하지 않았으나.
이에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북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책임질 자들이 한곳에 모였으니. 묻겠다. 왜 미래와 현재가 과거의 유산을 책임져야 하는가.”
“···저희 또한 과거의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와 전대 백작이 하려는 일은 과거를 끊고 언젠가 맞이할 파멸을 앞당겨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함이다. 그 자리에 현재와 미래는 필요 없어. 불필요한 희생이다.”
“어째서입니까.”
“막을 수 없는 운명이니까. 그 운명을 막겠답시고 많은 이들이 북벽에 시체로 쓰러진다? 그야말로 낭비다.”
백작의 서글픈 눈이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혹여라도 계속 고집을 부릴까 봐 설명을 추가했다.
“자네도 말했지. 북부는 언젠가 버려질 땅이라고. 맞다. 켜켜이 쌓인 운명 중엔 분명 파멸과 패퇴가 담겨있다. 피할 수 없어. 뒤틀고 막아내고 외면해도 부정할 수 없는, 몰려오는 겨울과 같이 확고한 사실이다. 그대들도 이번에 보았지 않은가.”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반역 도모를 하지 않았음에도, 제국의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 병력을 모았음에도 온갖 누명과 공격이 등을 노렸음을.
언젠간 터질 도화선.
“결국은 이를 터뜨려야 북부가 깨끗해진다. 케케묵은 감정이니 감당은 과거의 인물이 해야지. 현재는 괜히 힘을 뺄 게 아니라 북부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미래는 의지를 이어받아 앞으로를 꾸려나가야지. 아니 그런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모두 떠나라 말했다. 백작과 그의 가솔들, 백작가 전체, 북부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병력들 까지. 모두 북부를 비워라. 텅 빈 북부 홀로 저 몰려오는 적들을 껴안고 패망과 파괴의 운명을 감당할 것이니. 너희는 그제야 다시 돌아와 북부를 다시 일으키도록.”
내 뜻은 간단했다.
북부를 텅 비운다.
이후 에스키모와 적을 맞이한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운명을 감당하는데 북벽에서 희생될 수많은 현재와 미래의 목숨이 아깝다. 그뿐이다.”
이후 북부가 처한 파괴라는 운명 속으로 에스키모들을 몰아넣을 생각.
잠깐의 시간을 벌기 위해 북부에 남을 자들은 과거뿐.
“그래서 전대 백작과 노병들, 내가 남는 거다. 너흰 내려가 다음을 준비해라. 황자로서 명령이다.”
“그럼 전하는요. 파괴가 운명이고 에스키모들을 휘말리게 할 예정이라면 전하께서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당당히 선언했다.
“난 파괴란 운명도 에스키모도 두렵지 않다. 나는 황자이며 가장 존귀한 자다. 도망치지도 물러나지도 않아. 그게 가장 고귀한 피를 이은 자들의 책무이며 의지다.”
오만과 광기, 고귀함은 단순히 말에서만 피어나는 게 아니다.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 고결한 행동과 불꽃과 같이 물러나지 않는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백작, 얼어버린 오크를 기억하는가?”
“네, 기억합니다.”
“지금이 나에겐 그 순간과 같다.”
백작의 얼굴에 점차 체념이 어렸다.
이해했다.
그날 보았던 오크의 마지막.
그리고 오두막에서 들었던 신비에 관한 설명.
그날의 기억은 백작에게도 깊이 남았으니까.
“신비를 감당하기 위함입니까.”
“난 고귀한 불꽃이다. 파괴와 재생을 위해 존재하는 신비. 이를 감당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그저 이들의 산화를 두고 본다면 나 또한 그런 결말을 맞이하겠지.”
신비란 그저 축복이 아니다.
과거 제국의 멸망 속 감당하지 못할 신비를 얻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 자들에 대한 기록을, 죽음을 많이도 보았다.
나 또한 신비를 짊어지기로 한 이상, 고귀한 피를 지닌 이로 환생한 이상 감당해야 했다.
운명을 잡아먹는 포식자는 어떤 운명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또.
“여기 건국제께서 남긴 의지가 있으니. 이를 받아낼 자가 나밖에 없음이야. 그러니 내가 남아야지. 여기 늙어버린 불꽃들과 함께.”
말이 끝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송이와 더불어 사람들의 고뇌와 걱정과 아픔이 쌓였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곳은 웅대한 북벽도, 고풍스러운 백작성도 아닌 모닥불 관리소 주변.
피어나는 열기와 간간히 들리는 폭발이 위태로운 자리.
“그러니 다들 떠나라. 나와 북부의 과거들이 함께 몰려올 적들을 맞이할 테니.”
결국 설득에 실패한 발자크 백작과 백작성의 가신들이 떠날 채비를 했다.
그들의 뒤, 마지막까지 남아 피난을 준비하던 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들이 평생을 보아온 모닥불을 새삼스레 한 번씩 쳐다보곤.
나와 전대 백작, 노병들을 항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쌓인 눈에 찍히는 발자국들이 서글펐다.
**
그때.
“아버지!”
모닥불을 지키기로 한 노병들의 자식 중 하나일까.
한 중년 남자가 제 아비를 불렀으나.
“난 여기 남을 테니 어여 가라.”
아비인 듯한 노병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보았던 루카르, 발자크 부자의 모습과 닮았다.
계층은 다르지만 아비와 자식의 마음은 같다는 것일까.
그러나 자식은 같이 가자 조르러 온 것도 함께하겠다 떼쓰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끌고 온 수레를 가리켰고.
“아니요! 여기! 이거 가져왔습니다!”
수레에 가득 실린 건 집에 남아있던 가구들.
그가 수레를 엎어 이를 한꺼번에 쌓아두곤 당당히 외쳤다.
“같이 싸우진 못해도 최소한 할 일은 할 겁니다!”
그의 말에 주변을 걷던 이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집사! 당장 백작성에 있는 가구들을 가져와! 당장!”
“모두 집에 있는 커다란 가구들 좀 가져와 봐!”
사람들이 피난 가다 말고 일제히 집으로 뛰어 들어가 추억이 서린 낡은 가구들을 끌고 나와 우리 앞에 쌓았다.
추운 날씨건만 더운 입김과 땀방울이 떨어지며 온기가 피어올랐다.
함께 싸우진 못하더라도 이들을 지킬 방벽을 세워두리라.
평생 북벽을 바라보며 자란 이들의 얄팍한 지혜.
무언가 앞을 막아주는 것 하나라도 있어야 안전하리라는 오랜 믿음.
“아니, 다들 그냥 떠나라니-.”
한 노병이 말리려 했으나.
“두어라.”
루카르가 그를 말리곤 천천히 눈 떨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늙은 기사의 눈시울이 붉었다.
눈동자에 떨어진 눈송이가 열기에 녹아 축축이 모여들었다.
곧 노병들도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워 주름진 얼굴을 돌렸다.
가구를 옮기며 땀을 흘리던 아들과 손자, 손녀들도 눈가에 땀이 고였는지 자꾸 눈가를 닦았다.
모닥불의 열기가 아니어도 따뜻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부인들이 가진 가구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서 망설이며 무언가 하나라도 더 쌓으려 했다.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어차피 모두 사라질 것들이라면 이들을 위해 사용하리라.
허나 마음과 달리 줄 것도 많지 않은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저기, 황자 전하.”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겹겹이 껴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우물거리며 앞에 나섰다.
빼꼼 드러난 뽀얀 얼굴과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푸른 눈이 맑았다.
아이가 손에 무언가를 소중히 쥔 채 황자와 자신 사이에 쌓인 방벽 위를 오르더니 천천히 작은 손을 펼치자.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는 봄맞이꽃이어요. 가장 아끼는 걸 가져왔어요.”
작다란 손에 놓인 꽃송이가 수줍게 드러났다.
북부엔 겨우내 닫혀 있다 짧은 봄이 오면 봉우리를 틔우는 꽃이 있다.
북부의 여인들은 유독 이 꽃을 좋아했는데 아이에겐 보물과 같았던 모양.
아마 어른들이 소중한 걸 쌓는다 생각한 모양.
저도 자신이 아끼는 걸 보태겠다는 순진한 마음의 발로.
지난봄에 핀 꽃을 말려두었는지 색을 잃은 꽃송이들이 외로이 방벽 위에 놓였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선물.
이를 고요히 바라보던 오만하며 귀한 황자가.
“마음이 흡족하구나. 작은 즐거움이 되겠어.”
잔잔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불안한 듯 눈치를 보던 아이가 활짝 미소지었다.
만개한 웃음이 봄바람을 맞은 봄맞이꽃 같이 살랑였다.
이후 떠나는 이들이 소녀를 따라 자신들의 땀과 재산으로 쌓은 방벽 위에 각종 마른 꽃들을 올려두고 떠났다.
그때마다.
“고맙네.”
“무사히 가고.”
“모두 잘 갔다 와.”
“우리가 지킬 테니.”
노병들과 떠나는 이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아까 눈물은 다 털었기에 울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담아 서로를 축복했고.
쌓이는 인사처럼 점차 꽃들이 방벽 위를 덮었다.
그 너머 노병들의 얼굴이 이슬처럼 아른거렸다.
황자는 담담히 지나가는 이들을 축복하며 지켜보았다.
모두가 떠난 자리.
끝까지 모두를 지켜본 발자크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떠나려는 때.
“그럼 저도 여기 남아 보필하겠습니다.”
언제나 발자크를 보필했던 노집사가 백작의 옆을 떠나 방벽을 넘어 전대 백작의 옆에 섰다.
늙은 기사와 집사가 퍽 어울렸다.
“저 또한 과거. 옆에 남아야 맞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는지 발자크 백작의 울적한 얼굴과 집사장의 아들이 터뜨리는 울음이 서러웠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북부의 모두가 떠났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전대 백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일입니다.”
“무엇이 말인가.”
“제가 선 마지막 방어선이 이리 꽃밭일 줄은 몰랐습니다.”
전대 백작의 농담에 노병들과 황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북방 최후의 방어선은 저 드넓은 북벽도 마르세 관문도 아니었다.
북부인들의 낡은 가구와 긴 겨울 동안 봄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보았을 마른 꽃들이 쌓인 자리.
모닥불을 둘러싼 화관과 같았다.
그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라니.
전대 백작의 투정에.
“그렇기에 가장 북부답지 않은가.”
황자의 치하가 이어졌다.
이에 노병들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웃었다.
“맞습니다. 우리가 돈은 없지만 낭만은 있거든요.”
“아이구, 우리 손녀가 저 인형을 두고 갔구나 제일 아끼던 거였는데.”
“북벽도 좋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무덤으로 삼기 딱 이에요.”
“예끼 이 늙은이야 황자 전하 계신 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재수 없게.”
“아이쿠 이거 늙었더니 노망난 소리를 가끔 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가끔이 아니라 항상이겠지.”
나이든 이들이 특유의 너스레로 서로를 위로하려니.
황자가 찬찬히 마른 꽃이 가득한 방벽 위에 올랐다.
그리곤 북부의 노병들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모습이 아래에 깔린 그 어떤 꽃보다 흐드러졌다.
“강요된 죽음에 미안하단 말은 않겠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겠다.”
황자의 뻔뻔하며 오만한 말.
그러나 이해했다.
그가 가장 큰 희생을 치를지도 모르기에.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힘든 자리에 남았기에.
노병들이 침묵으로 황자의 말에 긍정했고.
“대신 이건 약속하지. 너희들이 겪었던 슬픔과 보상 없는 척박한 희생을 이 순간 모두 끊어내겠다. 그대들의 춥기만 했던 북부를 끝내겠다. 그리고 옛 북부의 터 위에 새 북부를 세우마. 노병들의 뜨거운 피로 데워진 새로운 삶의 터전을.”
황자가 잔잔하지만 뜨거운 열기를 담아 자신의 포부를 밝혔고.
곧 허리를 숙여 처음 여자아이가 남기고 간 봄맞이꽃을 들어.
손으로 감싸 온기를 넣으니.
생생한 색이 되살아났다.
해사한 모양이 아까 보았던 아이의 웃음과 같아 노인들의 마음에도 생명이 깃들었다.
“새 북부에서 자랄 아이들은 이리 마른 꽃을 들고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닌, 직접 살아있는 꽃을 키우며 자랄 거다. 다시 찬 바람이 불어도 긴 봄을 살아가리라.”
북부의 과거들이 벅찬 가슴으로 활짝 웃었다.
피어나는 주름이 마른 꽃같이 아름답다.
그거면 되었다.
잠시 물러난 현재와 미래가 나아진다면.
그들의 삶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 자리에서 뜨거운 불꽃이 되어 산화하리라.
북부의 과거들이 결심을 굳힐 때.
- 덧없는 꿈을 꾸는구나. 불꽃을 지닌 이여.
- 미약하게 사그라들 꿈이다. 늙은 생명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피어났던 열기를 식혔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눈보라가 북벽을 넘어 모닥불을 감싼 마지막 방벽에 닿았고.
얼기설기 얽힌 가구들이 흔들리며 얹힌 꽃들이 덧없이 떨어져 나갔다.
마치 북부인들의 의지를 비웃는 듯했다.
이어 눈보라 사이 괴물들의 울음이 들려오며 어둑했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휘우우웅-!
대재해로 기록되는 블리자드 0단계 백야(白夜)가 몰아닥쳤다.
에스키모가 왔다.
북부를 파괴하러.
“모두 무기를 들어라! 마지막이 왔다!”
최후의 보루 안, 북부의 과거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하얀 밤과 오랜 귀신들을 맞이했고.
“파도처럼 밀려오라 야만인들아. 모두 불살라 줄 테니.”
새하얗게 탈색된 세상 속, 황자가 유일하게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열기와 색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도드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