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봄이었다
오랜 옛날 대륙이 생긴 이래, 북부의 산맥엔 귀신들이 살았다.
그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불명.
보통은 끝자락 산맥 너머 추위만이 존재하는 땅에서 왔다고들 했다.
그들은 하얀 밤과 눈보라를 등에 멘 채 사이한 울음으로 대륙을 좀먹었다.
몇몇 학자는 주장했다.
추위는 본래 악마의 속성.
산맥 너머 인간들의 살과 정신을 탐했던 악마들이 신을 질투해 인간을 대신할 것을 만들었고.
그들이 바로 에스키모라고.
실제로 에스키모는 사람의 생살을 씹으며 북부의 공포로 군림했다.
인간 외에도 북부의 모든 존재가 에스키모를 피해 떨었다 전해진다.
본래 북부의 주인이었던 은빛 늑대들은 동굴 속에 숨어 낑낑거리며 하얀 밤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본디 산맥에 거주했다던 신비로운 존재, 거인들은 거대한 몸을 버리고 땅속으로 숨었다던가.
남은 건 연약한 인간들뿐.
그들 또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백야 속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죽거나 에스키모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더는 사람의 피와 살을 취하게 두지 않겠다.”
그때 북부에 발을 디딘 게 강철염제 카이론.
그가 백야 속으로 들어선 지 수백 일.
에스키모들은 간신히 형체만을 유지한 채 북부에서 부랴부랴 도망쳤다.
북부에 가득했던 백야가 끝났고 비로소 진짜 밤이 찾아왔다.
그 중심엔 주황빛 거대한 불기둥이 있었다.
“백 일 밤낮을 싸웠노라. 죽지 않는 에스키모들과 그들을 창조한 악마들을 깊은 땅에 몰아넣었지.”
시야를 가득 채운 불, 그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장엄한 목소리.
뒤섞이는 백야와 초적염의 불빛 사이.
치열한 싸움이 그려졌다.
방벽 위에서 벌어졌던 싸움과는 비교도 안 될 신화적인 싸움.
그때의 에스키모는 지금의 에스키모보다 강대했고 많은 신비를 품었다.
그들 뒤에는 지난 열차에서 상대했던 소악마들과는 비교도 안 될 고위 악마들과 군단장들, 그들을 이끄는 대악마가 존재했다.
그들을 앞에 둔 인간.
풍전등화 같은 모습.
그러나 그 촛불이 너무나도 뜨거웠고 너무나도 거대했다.
두 번째 심장 초적염의 고동이 귓가에 울렸다.
뜨거운 불을 뿜어내는 이의 등이 참으로 넓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백금발.
초적염에 물들어 타오르는 색이 되었다.
한 손에는 이가 비죽비죽한 거검. 브레이커가 들려 있으니.
그가 곧 뒤를 힐끔 돌아보자.
사자와 같이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하! 나의 후손치고는 여리여리하구나!”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머리통이 울릴 정도.
마치 폭발 소리를 단어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다만 그의 형상과 느껴지는 기운에서 무언가를 짐작했다.
“강철염제? 건국제입니까?”
그를 마주한 나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과거 제국을 세운 초인을 만났으니 얼마나 가슴이 떨리겠는가.
선조, 강철염제 카이론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곤.
“그래! 후손이여! 내 심장을 이은 자를 만나 반갑구나. 오랜 시간 기다렸다!”
그의 호쾌한 웃음이 펑펑펑펑 터지는 동안.
만나면 반드시 묻고자 했던 질문을 던졌다.
“왜 에스키모를 죽이지 않은 겁니까? 저 새끼들을 모조리 죽였다면 이리 고생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마구 웃던 카이론이 우뚝 웃음을 멈추었다.
차마 후손의 첫 질문이 이따위일 걸 예상치 못한 모양.
그러나 내게 공손을 바랐다면, 감격을 바랐다면 그야말로 오판이다.
“대답해 보십시오. 건국제! 솔직히 귀찮아서 안 죽였죠? 후손들에게 맡기고 다른 곳 간 거죠?”
“아니다! 무엄하구나, 후손이여.”
뜨끔, 분명 몸이 떨렸다.
슬며시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우리 선조께서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말은 아니라는데 왜 몸은 솔직한 겁니까.”
“그게 중하냐?”
“중하죠. 제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요.”
“흥, 내가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편안한 환경 생각도 못 했다- 이 말이야. 북벽 세워 줘, 모닥불 남겨 줘, 마지막엔 나와서 도와줘.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싸우는 건지 알고는 말하냐?”
“…….”
“그리고 솔직히 이 빌어먹을 후손 놈들은 그냥 둬도 될 모닥불 위에 이것저것 치장을 못 해서 지랄들이냐? 네놈 아니었으면 이대로 사그라들었을 거다. 미련한 놈들 같으니. 그뿐만이 아냐. 모자란 점이 한가득이다, 한가득. 너 여기 좀 앉아 봐라.”
“음, 선조시여.”
“왜? 아직 보여 줄 훈계의 참맛이 한참 남았는데? 벌써 지쳤어? 이래서 요즘 것들은-.”
“꼰대시네요.”
윽, 건국제가 악마를 상대로도 낸 적 없었던 신음을 내길 잠시.
나의 입이 검이라면 그의 양심은 강철.
“그래, 꼰대다. 뭐, 왜, 어쩌라고.”
그래서 강철염제였나 보다.
그의 뻔뻔한 표정을 보며 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에스키모를 모조리 죽이려 합니다. 몰아내려 합니다. 불가한 일입니까.”
진지한 표정에 건국제도 웃음기를 거두며 담담히 답했다.
“나는 불가했다. 그래서 남겨 두었지. 당시 놈들의 신비는 완전하여 죽지 않았고 뒤에 선 악마들은 강대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지. 제국에 남긴 내 의지가 약해졌듯.”
건국제가 확신을 담아 나를 보았다.
“놈들의 신비도, 삶도, 생명도, 그들을 창조했던 힘도 약해졌느니라. 불사에 가까우나 불사는 아니지. 그러니 죽일 수 있다. 너 또한 죽을 정도로 고생한다면.”
“공짜는 없는 법이죠.”
“그래. 공짜는 없는 법이지.”
이후에도 문답이 이어졌다.
글쎄 시간이 흐르는 건지 아니면 멈춘 것인지 모르겠다.
눈앞엔 그저 밝게 타오르는 초적염뿐.
건국제에게 물었다.
이대로 초적염을 가져가면 북부는 괜찮은지, 북벽을 넘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제국의 신비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심장은 몇 개인지.
하지만 건국제는 얄밉게도 대답할 만한 대답들은 성실히 알려 주면서도.
진짜 중요한 질문에는.
“나머지 심장들과 무기들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그건 아직 알려 줄 수 없다. 이 녀석아 앉아서 아주 편히도 받아먹을 생각만 하는구나? 꼰대는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아.”
답을 회피했다.
점차 주변을 가득 채웠던 초적염이 한곳으로 모여들며 고리를 형성했다.
문득, 이곳이 내 의식 속임을 깨달았다.
옆에서 인도해 준 거다.
문답하는 동안 터져 오르는 불이 몸을 덩달아 폭발시키지 않도록.
선조는 화통하면서도 세심한 꼰대였다.
어쩌면 내 꼬인 성격은 건국제에게서 물려받은 거 아닐까.
그러다가 밖에 있는 자들이 생각나 물었다.
“전대 백작과 노병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
처음으로 건국제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문득, 환상처럼 펼쳐진 건국제와 야만인들의 전투가 환상이 아님을 알았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졌다.
밖에 싸우는 백작과 노병들의 처절한 전투가 선조의 것과 닮았음을 알았다.
건국제의 표정에서 그 또한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음을 알았다.
아직도 백작과 노병들은 싸우고 있다.
언제고 깨어날 나를 지키며.
“나가 돕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너는 너의 일을 해야 한다. 진정 북부를 살리고 싶다면.”
건국제가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변명처럼 말을 뱉었다.
“난 그들에게 벌을 내리고자 북부에 둔 것이 아니었다. 백작가의 첫 가주는 나를 도와 에스키모를 벤 첫 번째 인간. 그들의 대적자였기에, 또한 자신들의 땅을 지키고 싶어 했기에 두었지.”
“그들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불 속에서 보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구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응당 받아야 했을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 맡기마. 그렇기에 지금 너를 도와주는 것이다.”
점차 모여든 초적염이 지난번 억지로 흡수했을 때보다 수월히 고리를 완성했다.
그때처럼 연이은 폭발은 없었다.
이어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초적염의 사용법들.
“네 신체가 약해 전력을 사용하진 못하겠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건국제의 말을 마지막으로 주변 가득했던 북부 전투의 환상도, 주황색 불꽃도, 강철염제의 형상도 서서히 옅어졌다.
점차 부상하듯 떠오르는 의식.
아무 감각이 없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몸은 멀쩡한지 파악이 어려웠다.
입술이 어디에 붙었는지 눈이 어디에 붙었는지 찾지 못해 방황하길 잠깐.
의식 끝에 미세한 통증이 걸려들었고 이를 따라가자.
뻑뻑한 눈꺼풀이 잡혔다.
마치 풀을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제외한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우선 눈부터 뜨기로 결심.
천천히 공을 들여 딱 붙은 눈꺼풀을 떼어 내자.
찌지직, 찢어지듯 고통이 밀려들어 오며 시야가 열렸다.
갑작스레 흘러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고통 때문인지 눈물이 고여 앞이 뿌옇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
입을 뻐끔거리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입이 어디 있더라.
잠시 흩어지는 정신을 다잡아 입술을 움직거리자 쩌억, 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입술을 적신 피를 받아먹자 조금은 목의 감각이 돌아왔고.
“…백… 작…….”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자.
성대에서부터 시작한 울림이 찌르르 전기가 퍼지듯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한번 감각을 회복하자 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밀려드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시야를 또렷이 회복하고 나서야.
떨려 오는 턱을 천천히 돌려 루카르를 찾았다.
“…어디. 어디 있나… 답을… 해 봐…….”
그 또한 나처럼 고통에 사무쳐 쓰려져 있는가.
늙은 육신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육체 자체는 나보다 강건하니 괜찮으려나.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피를 흩뿌리던 노병들도 떠올랐다.
걱정되었다.
살면서 누굴 걱정해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때.
“루카르…….”
저 멀리, 거대한 폭발이 지나간 자리임에도 꿋꿋이 선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등판이 마치 북벽을 사람으로 빚었다 해도 믿을 정도.
그런데.
“왜… 답이 없나…….”
분명 한 손엔 검을 쥔 채 당당히 섰건만.
늙은 기사는 답이 없었다.
바라보길 한참, 그러나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숨결도 심장 소리도 없었다.
무엄했다.
황자의 부름에도 기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굽힐 줄 모르는 의지만이 그의 텅 비어 버린 몸을 받치고 있다.
어떤 싸움이 있었는가.
누가 보았는가.
그가 결국 기예를 깨뜨리고 신비에 이르렀음을 누구의 눈으로 확인했는가.
“내가 보았다. 내가 보았느니라. 그대의 위대함을-.”
루카르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던 눈가에서 한 줄기 맑은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누운 채 그의 등을 바라보며 쓸쓸히, 쓸쓸히 숨죽여 울었다.
북부와 산화한 노병, 홀로 선 늙은 기사를 기리는 부족한 황자의 추모였다.
* * *
북부를 떠난 병력들은 정작 요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요새 병사들이 불편해하기도 했거니와.
“모두 교대해 가며 휴식을 취해라!”
“군장은 언제나 다시 쌀 수 있도록 준비해!”
“무기의 날을 갈아라!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발을 풀어 두고 두꺼운 양말을 잘 말려 놔!”
언제든 때가 오면, 부름이 당도하면 다시 북부로 향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닷새째.
이 먼 요새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백야를 보고는 절망했다.
거대한 재해 속에서 외로이 버티고 있을 전대 백작과 우리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 고귀한 전하를 걱정하여 많은 이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허나 울지 않았다.
아직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날붙이와 더불어 정신을 하얀 밤처럼 새하얗게 갈았다.
분명 때는 오리라.
북부로 돌아갈 때는 오리라.
그렇게 이틀을 더해 일주일 째.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밝은 불이 북부를 뒤덮었다.
귀가 들을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폭발음과 몰아치는 후폭풍.
커다란, 오랜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기록을 찾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하루 동안이나 이어졌다.
분노가 가득했던 북부 병사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들어찼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닐까.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거대한 불이 가라앉은 뒤.
“모두 진군 준비를 하라!”
발자크 드보르작, 북부의 변경백이자 병력들의 수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땅을 잃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던 걸까.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널브러져 앉은 병사들이 고개를 떨구려 할 때.
“황자 전하의 불이다! 모닥불의 불이다! 북부를 데웠던 불이 우리를 부른다! 가자! 북부의 아들들이여!”
백작의 결의 어린 목소리가 폭발음 속에서도 뚜렷이 의지를 전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번지는 불은 승리의 신호! 하얀 밤을 몰아내는 태양! 가자, 북부의 자식들아! 우리의 아비가 마른 꽃과 같이 쓸쓸히 우리를 기다린다! 북부가 우리를 기다린다!”
그의 절절한 외침에 북부 병사들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눈에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황자 전하가 그리 말했다면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를 이끄는 변경백의 말이 사실이라면.
“승리의 신호가 피어올랐다! 북부가 우리를 기다린다!”
북부의 기사들이 먼저 잘 닦아 놓은 갑옷을 챙겨 입으며 소리쳤다.
움직이는 다리와 갑옷을 챙기는 손이 분주했다.
이를 바라보던 병사들이.
“불은 승리의 신호! 북부가 우리를 기다린다!”
일제히 막사를 걷고 군장을 쌌다.
몇몇은 감격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렸다.
“가자! 우리를 대신해 긴 밤을 버틴 아버지들을 위하여!”
백작의 검이 북부를 향했고.
북부의 현재들이 다시 고향을 향해 진격했다.
북부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진군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텅 빈 북부의 모습에 모두의 마음에 한풍이 몰아쳤다.
그래서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체력을 남겨야 했기에 뛰진 못했지만 마음이 급해 어느새 모두가 속보로 걸었다.
사흘 동안 이어진 행군.
그렇게 걷기만 하던 선두 진열 병사들이 문득.
사박, 사박, 사박.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부의 발걸음이란 보통 뽀드득, 눈 밟는 소리나 얼은 땅 밟는 딱딱한 소리가 나기 마련.
그런데 사박, 사박이라니?
그들이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서야.
“풀이다.”
“풀이야!”
“이봐, 풀이 자랐어!”
지금껏 자신들이 밟던 땅에 푸릇푸릇한 풀이 자랐음을 알아챘다.
그들의 얼굴에 어린 희망이 짙어졌다.
행군 행렬을 한참 앞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발자크 백작을 비롯한 북부의 정예 기사들.
혹시라도 전대 가주와 황자가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고 있을지 몰라 말을 재촉했다.
모닥불을 얼마 안 남기고 말이 지쳐 쓰러졌고 그때부턴 말에서 내려 직접 달렸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
모닥불 관리소가 있어야 할 자리엔.
“언덕?”
“관리소는?”
드높은 모닥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건 야트막한 언덕 하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언덕의 정체를 깨달았다.
“방벽이다!”
“방벽 위에 사람이 있다! 달려!”
바로 그들이 북부를 떠나기 전에 세운 방벽.
어쩐지 그때보다 높아진 언덕 위, 아른아른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잡아끄는.
“꽃?”
“풀이다.”
“봄맞이꽃인가?”
언덕 가득한 꽃과 풀.
기사들이 막 언덕을 짓밟고 올라가려다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왜인지 뛰면 안 될 것 같은 거룩함이 느껴졌다.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주군인 발자크를 향했다.
발자크의 떨리는 눈동자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향한 곳엔.
“아, 아버지-.”
전대 백작, 북부 최강의 변경백, 루카르 드보르작이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채로 형형색색의 꽃에 둘러싸여.
검을 치켜든 손과 넓은 어깨는 굳건하건만 마치 석고상이 되어 버린 듯 미동 없었다.
“아버지…….”
발자크가 엉금엉금 언덕을 기어올랐다.
소드마스터라는 경지가 무색했다.
홀로 굳건히 북부를 지킨 위대한 기사는 살아생전의 그 위대함을 간직한 채 멈추었다.
그의 검 끝, 떠나던 아이가 남긴 봄맞이꽃이 피어 있었다.
새하얀 그의 몸에 북부인들이 남긴 각종 꽃이 피어 색을 더했다.
백작이 찬찬히 아버지를 살피다가.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오른 다리 옆, 기대어 있는 꽃 무더기를 헤치자.
완연히 마른 황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인기척을 느낀 그의 눈이 뜨였고 흐린 눈으로 백작을 발견하곤.
“왔나.”
마른 웃음을 지었다.
황자가 잔뜩 갈라져 피딱지가 앉은 입술로 담담히 사실을 고했다.
“구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눈동자를 들며 공허하게 토로했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프구나.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은 백작이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우짖는 아들에게 사과하듯 아비의 몸을 덮은 꽃들이 고개를 떨궜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