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산불과 같이
전속력으로 달려온 백작과 정예 기사들보다 한발 늦게.
“전하! 전하!”
나머지 기사들과 함께 안드레가 도착했다.
솔과 소피아도 따라오겠다 했으나 체력이 부족하여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거친 숨을 다듬기도 전에 안드레가 황자 전하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저 언덕 위 전대 백작의 모습을 보고 굳었다.
석상인가?
아니, 사람이다.
사람이 석상이 된 것이다.
안드레가 시선을 찬찬히 움직여 화관을 쓴 머리와 주름졌으나 의지가 풍겨 나오는 얼굴, 넓은 어깨와 웅대한 가슴팍, 당당히 검을 겨눈 팔, 아름드리 통나무 같은 다리 옆.
“전하?”
기대어 앉은 꽃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안에 비치는 고귀하며 초췌한 얼굴.
자신의 주군.
들풀과 들꽃에 휩싸인 전하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전하!”
혹여라도 큰일이 난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안드레가 언덕을 뛰어오르려 할 때.
“가지 말게.”
알프레드가 슬며시 안드레의 어깨를 잡았다.
“자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지금은.”
알프레드의 얼굴에 어린 슬픔을 보고 안드레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백작의 울음이 언덕을 채웠다.
어린아이가 울듯 서글프며 처절한 울음이 주변을 메웠다.
주군의 떨리는 등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코와 턱 끝을 타고 눈물, 콧물이 아롱졌다.
참으로 얄궂게도 하필 지금, 부끄러움을 감추어 줄 추위가 없다.
알프레드가 그제야 안드레와 함께 언덕을 올랐다.
발자크 백작은 그들이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와 황자를 보며 목놓아 울었다.
안드레의 눈가에도 붉은 기운이 번졌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자리를 옮길까요.”
조심스레 다가간 알프레드가 무릎을 꿇으며 소중히 황자의 얼굴을 가린 들꽃 한 송이를 치워 냈고.
황자가 반가움과 슬픔을 담아 자신을 따르는 기사와 집사를 바라보았다.
“잠시 있겠다. 지금은 움직이기가 싫구나.”
하염없이 울어 대는 기사들과,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는 황자 옆.
알프레드와 안드레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봄이 왔건만.
그리 기다리던 봄이 왔건만.
“병사들이 모일 때까지 충분히 울게 두어라. 그래야 옳다.”
일찍 도래한 봄은 서글프고 안타까운 색으로 가득했다.
지난 며칠간 힘들었던 탓일까.
얼마 가지 않아 황자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고.
알프레드와 안드레가 조심조심 꽃 무더기를 치워 내어 황자를 안아 들었다.
그리곤 조용히 급하게 마련된 천막에 데려갔다.
황자가 잠든 나흘 동안 북부 꽃이 핀 언덕에선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자들이 감정을 추스르면 뒤이어 도착한 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눈물이 언덕을 하염없이 적셨다.
“하아…….”
“히잉-.”
따로 마련된 막사 안엔 파리한 얼굴로 누운 황자와 그를 간호하는 소피아와 솔의 모습.
밖에서 들리는 흐느낌에 그녀들의 눈가도 붉게 부어올랐다.
소피아는 황자의 이마에 어린 땀을 닦으며 계속 입술을 떨었고.
솔은 터질 듯 말 듯한 울음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
가로등, 시끄럽다.
이 한마디라도 들려 왔으면 싶었다.
벌써 나흘째 황자는 일어나지 못했다.
치유 마법과 회복약을 쏟아부었으나 황자는 죽은 듯 잠만 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점차 숨이 깊어지며 안정세로 접어들었다는 것 정도.
허나 그마저도 불안했다.
둘이 도착한 순간 보았던 건 꽃 무더기 안에 고요히 파묻혀 있던 황자 전하.
마치 모든 생명을 다한 것 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웠기에.
그녀들이 잠시 그때를 떠올리곤 훌쩍거리려니.
“…가로등, 시끄럽다. 소피아, 너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으아아앙!”
“흐흑, 전하. 으흐흑.”
그녀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황자가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환청까지 들었겠는가.
솔과 소피아가 지난 시간 동안 친해졌는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릴 때.
“가로등, 소피아. 정신 차려라… 추태다.”
“히이익!”
“어머멋!”
진짜 황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녀들이 놀라며 돌아본 자리에는.
“뭐 하는 짓들이냐. 누구 죽은 줄 알겠다.”
뚱한 표정으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황자 전하의 얼굴.
깨어나셨구나!
전하의 저 뚱한 표정과 못된 말을 담는 입술이 이 순간만큼은 왜 이리 반가운 걸까!
그녀들이 막 황자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오지 마라. 콧물 묻는다. 손으로 건드리지도 마라. 방금 콧물 닦는 거 확인했다. 콧물 가로등.”
황자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녀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특히 솔의 코끝, 길게 늘어진 투명한 콧물을 보고는 진심으로 정색했다.
“너, 너무하세요! 걱정해서 그런 건데!”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나 콧물은 갸륵하지 못하다.”
“그리고 소피아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왜 저는 가로등인가요!”
“따지는 거냐? 지금 아파서 기절했다가 일어난 사람 앞에서 따지는 거야?”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하여튼 콧물부터 닦아.”
“눼-.”
“대답 똑바로.”
“네, 전하. 솔은 콧물부터 닦겠습니다.”
솔이 울망거리는 얼굴로 급히 얼굴을 정비하는 동안.
“너도 엉망이다. 우는 버릇은 못 고치는 거냐? 눈물이 너무 흔해.”
“어찌 안 우나요. 전하께서 이리 쓰러져 계시는데 너무 가혹한 지시인걸요.”
소피아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 내는 동안.
“가혹하긴 무엇을, 평민 놈이라면 분명-.”
울지 않고는 잘만 퍼질러 잤을 거다.
황자가 말을 맺기도 전.
“저은하!”
막사의 천막이 걷히며 안드레가 막사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저은하!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아아!”
* * *
막 막사 안으로 들이닥친 안드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하려던 말을 철회했다.
울지 않기는 개뿔.
기사라는 자가 솔보다 더 처참한 얼굴로 울고 있는 꼴이라니.
눈물과 콧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건장한 기사를 보곤.
“멈춰라. 혹시라도 껴안으면 때린다.”
다급히 주변에 손에 집을 만한 무기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옆에 놓인 물 담은 철제 대야를 손에 쥐었다.
그럼에도.
“전하!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왔습니다!”
놈이 멈추지 않아.
철썩.
이마에 붙어 있던 물 젖은 수건을 녀석의 얼굴에 던졌다.
그제야 안드레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얼굴이 그리 엉망인데 어찌 알아보겠나. 얼른 얼굴부터 재정비해라. 어디서 오크들 습격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험하게도 생겼구나.”
안드레가 훌쩍이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도.
“이래 봬도 고아원에선 먹히는 얼굴이었는데요.”
“나중에 가서 확인한다?”
내 추궁에 안드레가 고요히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들 눈물을 찍어 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작게 한숨이 흘렀다.
이것들을 믿고 계속 황자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때.
“일어나셨나이까. 몸은 어떠신지요.”
알프레드가 홀로 무릎을 꿇으며 안위를 물어 왔다.
은은하게 퍼지는 미소 속, 걱정과 위로가 읽혀 조금은 숨이 트였다.
얼핏, 전대 백작에게 기대어 있던 순간에도 고요히 날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안에 담긴 감정이 꽤 복잡했지.
“뭐 좋지는 않군. 못 보일 모습을 보였어. 기다려 주어서 고마웠다.”
알프레드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과찬이옵니다.”
“그래, 그것도 맞군.”
그저 간지러운 게 싫어 고개를 끄덕이려니.
“드, 들었어요? 지금 전하께서 고맙다 하셨어요! 아직 아프신 게 분명하시다니까요?”
“솔, 그리 말하면 못써요. 들으시면 어쩌시려고요.”
“소피아도 생각해 봐요.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건…….”
“훗, 전투 가로등. 봐라. 나 또한 전하께 고맙단 치하를 들을 테니.”
“평민 안드레는 무슨 자신감인데요?”
“나 또한 알프레드 집사장과 함께 옆을 지켰으니까.”
안드레가 당당하고도 자랑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가슴을 폈고.
솔이 옆에서 부럽다는 눈으로 나와 안드레를 번갈아 보았다.
소피아는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콤비 사이에 꼈다간 무언가 좋지 않을 것을 느낀 모양.
역시, 사업가답게 손익 계산이 빨랐다.
안드레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 참지 못하곤.
“큼, 크흠, 커허험. 뭐 고맙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그래 하지 않으마. 됐지?”
“아-. 아?”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곤 안드레가 멍하니 굳었고 솔이 쿡쿡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런 안드레를 외면하고는.
“북부의 병사들은 아직 눈물을 흘리는가?”
“대부분 울음은 그쳤습니다만 때때로 눈물짓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렇군. 나가지. 그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
“몸이 성치 않으십니다.”
“옆에서 부축해. 한 손엔 거검, 반대쪽 옆구리에는 믿음직스러운 집사, 그 사이 초췌한 황자라. 퍽 괜찮은 그림이 아닌가.”
피어나는 미소에 알프레드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왼쪽 겨드랑이를 부축해 주었다.
“평민, 브레이커를 다오. 땅을 짚어야겠다.”
“제가 나머지 한쪽을 받치겠습니다.”
“감사 인사 받고 싶어서 그러지?”
“윽…….”
“속내가 뻔히 보인다 보여. 네놈은 그들의 눈을 감당치 못해. 네가 내 옆에 서는 건 좀 더 실력과 그릇이 여문 다음이다. 아쉽겠으나 다음을 기약하도록. 대신 뒤를 맡기마. 가로등, 소피아에게도.”
결국 허락한 뒷자리에 비로소 밝은 미소를 지었고.
찬찬히 조심조심 발걸음을 디뎌 걸었다.
발바닥에 닿는 땅의 단단한 느낌이 생소했다.
다리가 이리저리 튈 듯 흔들렸고 검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의식을 다잡아 자세를 어떻게든 유지했다.
막사 입구를 걷으며 밖으로 나서자.
“전하…….”
“발자크.”
앞에서 서성이던 발자크와 마주쳤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전하, 깨셨나이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곤.
“알프레드, 내가 부축하겠네.”
직접 내 옆으로 다가왔다.
“더 좋은 그림이겠군요.”
알프레드가 내게 속삭이곤 빙긋 웃으며 물러났다.
발자크 백작의 두터운 손이 굳건히 나를 받쳤고.
북부의 변경백과 함께 걸었다.
지나가는 길.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막사 안에 머물던 병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곧 나와 백작이 함께 걷는 길 뒤로 몰려든 북부의 사내들이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언덕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빠 오는 숨과 떨리는 근육을 진정시키느라 가끔 멈추어서 신색을 가다듬었다.
분명 몸에 휘도는 두 개의 고리가 선명했으나 전투의 여파로 신체가 성치 않았다.
그나마 꽤 잠을 잤기 때문에 버텼다.
간신히 언덕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을 빨아들이는 코와 폐가 아렸으나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전대 백작의 옆에 섰다.
가쁜 호흡을 고르고 뒤를 돌아본 순간.
“…….”
숨을 멈추었다.
앞에 수만, 수십만의 북부 병사가 오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벅찬 경험이었다.
방금까지 그리 아프고 힘겨웠건만.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빛을 마주하자 몸에 생기가 돌았다.
고귀한 피, 광기, 오만 등 폭군의 운명들이 꿈틀거리며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외에도 퇴폐와 현혹의 운명이 그들 사이로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래, 나는.
“너희들의 시선이 기쁘다.”
천성적으로 남들 앞에서 광기를 부리길 좋아하는.
“약간의 후회, 조금 더 많은 괴로움, 나를 향한 대부분의 선망과 티끌같이 섞여 있는 원망. 그보다 더 큰 기쁨과 표현하기 어려운 막막함.”
미친 황자.
“그래, 보기에 어떠한가. 너희의 텅 빈 북부는. 기다리던 봄을 맞이한 땅은. 생각처럼 아름다운가? 아니면 그저 쓸쓸해 보이는가.”
폭군의 운명을 짊어진 자.
그래서인지 따뜻한 말은 못 하겠다.
차라리 그들을 몰아치려 했다.
아직은 피를 흘려야 할 시간.
차마 죽은 아비들처럼 너희들도 죽으란 모진 말이 나오지 않아 침을 삼켰다.
폭군 되는 게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때.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라! 우리의 북부를 되살린 전하의 용안이다!”
발자크가 먼저 나서 모두에게 예를 강요했다.
그리곤.
“홀로 서십시오.”
차근히 나를 부축한 손을 놓고선 그 또한 바짝 엎드려 예를 표했다.
잠시 비틀거렸으나 양손으로 브레이커를 꾹 잡아 버텼다.
동산이 파고드는 거검을 살며시 잡아 주어 쓰러지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다.
죽어서도 도와주는가.
잠잠히 감상을 가라앉히다가 쏟아지는 시선이 무거워 입을 열었다.
결국.
“그대들의 아비, 루카르 드보르작과 노병들의 싸움은 위대했다. 내가 보았다.”
그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리 온정이 많아서야.
* * *
전하의 위태로운 걸음과 억지로 부풀려 펼친 가슴을 보는 발자크의 가슴도 미어졌다.
그의 첫마디는 모진 말이었다.
그리하여 가슴이 더욱 아팠다.
발자크는 보았다.
꽃이 몸을 휘감을 때까지 아버지의 다리에 기대어 울었는지 짙게 남아 있던 황자의 눈물 자국을.
떨어져 내리던 한마디의 사과와 아픔을 고백하던 순간을.
아르한 황자는 천성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또한 아직 평화를 말하기엔 이르다는 것도.
전쟁을 앞둔 장수가 곧 사지로 나아가야 할 병사들을 두고 철없는 따뜻함을 베풀 수도 있는 법이건만.
황자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 또한 척박한 땅과 많은 생명을 이끄는 자였기에 황자를 이해했다.
때로 이끄는 자는 모진 악역을 맡아야만 한다.
병사들을 현혹하여 사지로 내몰기보단 현실을 알려 주려는 거겠지.
오히려 진정으로 그들을 위했기에.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위험할 정도로 뜨겁지만 모두를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팍팍한 모습 아래에 어그러진 배려를 깔아 둔 사람.
북부의 남자들과 닮지 않았는가.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그 마지막 순간 어떤 검을 펼쳤는지.
노병들이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단단히 뭉쳐 싸웠는지.
아들들을 위한 아버지들의 희생을 담담히 갈라진 목소리로 풀어내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다.
지난 시간 충분히 울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건.
적에 대한 분노.
황자의 마음도 같았는지.
싸움을 이야기하는 황자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 또한 같은 분노를 느끼는 모양.
“북벽은 사라졌다! 다시 북벽을 세우려는가! 우리는 또다시 북벽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려는가!”
회복되지 않은 황자의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들풀과 같이 흔들렸으나 끝내 쓰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흔들릴 때마다 안에 담아 둔 광기와 분노, 처절함이 새로운 북부에 가득한 풀 내음과 같이 피어났다.
우리의 삶 같아서 처절했다.
곧 황자가 손을 뻗었다.
그 방향이 굳어 버린 전대 백작이 겨눈 곳과 같아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지켜주던 북벽이 있던 자리.
지금은 폭발의 여파로 텅 비어 있으니.
문득, 시원하단 생각이 들었다.
과거엔 그리 안온했던 북벽의 모습이 지금은 답답함으로 남았다.
뻥 뚫린 시야로 드넓은 북부의 숲과 저 높은 산맥이 들어왔다.
드넓은 가능성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들의 뒤통수에서 황자의 고함이 울렸다.
“저 산맥이 우리의 새로운 북벽이 될 것이다! 과거 건국제와 북부의 선조들이 그랬듯 우리는 다시 숲을 질타할 것이고! 북부의 과거들이 현재를 위해 산화했듯 우리 현재는 북부의 미래를 위해 적들을 밀어낼 거다!”
그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듯 힘이 넘쳤다.
둥, 둥, 둥, 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렸다.
아니, 그들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코를 파고드는 꽃 냄새와 풀 냄새가 머릿속까지 치밀어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니 북부의 현재들아! 아비를 여읜 또 다른 아비들아! 무기를 들어라! 오랜 시간 북부를 괴롭혔던 적이 아직 저기 숨어 떨고 있다! 아비의 아비를 죽인 귀신이 남아 있다! 우린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겪었던 공포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아비.
제 자식들에게, 북부의 미래에게 굴레와 두려움을 남길 순 없다.
황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꽃 냄새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들을 향해! 산맥을 향해 나아가자! 과거 에스키모들이 북부에 두려움을 선사했다면!”
잠시 끊어진 목소리.
들끓는 침묵.
모두의 뜨거운 눈이 숲과 산맥을 태울 듯 빛났고.
“이젠 우리가 그들의 두려움으로 군림할 때다.”
툭 작은 불씨처럼 던져진 황자의 마지막 말이 그들의 마음속, 울렁이는 열망에 들러붙어 거센 불을 일으켰다.
이어서.
“전군, 전투 준비. 진군한다. 목적지는 산맥. 취할 것은 그 안에 숨어 떠는 비루한 귀신들의 목이다.”
발자크 백작의 냉엄한 목소리가 병사들의 등을 떠밀었다.
“명심해라. 미래에 남길 두려움은 없다. 아비를 잃은 아들들의 복수이자. 아들을 위한 아비의 헌신이다. 뒤돌아보지 마라. 모두 북쪽으로. 북부의 미래를 위해.”
북부의 미래를 위해!
한목소리로 답한 병사들이 일제히 진군 준비를 시작.
북부의 현재들이 과거를 기리고 미래를 지키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황자 앞에선 발자크도 마찬가지.
“먼저 출발하겠나이다. 몸을 추스르고 뒤따라오소서.”
인사를 남긴 그가 앞으로 발을 옮기고 나서야.
할 말을 끝마친 황자가 뒤로 쓰러졌다.
그의 추태를 보지 않고자 모두가 나아갈 방향만을 쳐다보았다.
휘청이는 황자의 몸을 알프레드가 받쳤고.
“후우, 이래서야 제 명에 못 살겠다. 누구 나 대신 황자 할 사람? 혜택이 꽤 많은데. 욕도 마음껏 할 수 있다.”
황자의 물음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황자의 말을 마음 깊이 실은 북부 사내들이 산불과 같이 북녘 숲과 산맥을 향해 번져 나갔다.
제2차 북방 정벌이 시작되었다.